221화
파트리샤의 마커스에 대한 첫인상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팀장인 빈우의 친구이기도 했고, 지금까지 이런저런 도움을 많이 받았던 덕분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점수를 모조리 까먹고 있었다. 그래서 한마디 하려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팀장님의 도움이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팀장님이 당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당신도 팀장님을 돕지 않겠다는 말씀입니까?”
하지만 아룹이 선수쳤다. 그리고 마커스 역시 대답 대신 선수를 쳤다.
“피차 솔직해지죠. 빈우가 원래 상태로 돌아올 확률이 얼마나 되리라 보십니까?”
그 질문에 아무도 대답할 수 없었다. 아직까지도 연방에는 워프 비스트에 대한 정보가 너무나 없다. 이중 그것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오히려 이 앞의 마커스일 것이다.
“네, 알 수 없죠. 빈우가 그대로 변할지, 인간으로 돌아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 불확실한 것에 우리의 미래를 걸 순 없지요.”
“우리? 우리가 누굽니까?”
재차 아룹이 질문했다.
“당연히 저와 빈우입니다. 여러분은 들어가지 않으니 불쾌해할 필요 없습니다.”
본인 입으론 빈우와 친구라면서 미래를 건설하고 있는데, 하는 행동은 영 아니니 믿음이 가질 않는다.
“아나스타샤. 저 양반이 저렇게 말하시는데 넌 어떻게 할래?”
파트리샤는 아나스타샤를 불렀다. 방금 전 누벨 노르망디에서 자신의 주인을 구하기 위해 태스크 포스 373에게 표독스러운 모습을 보였던 그녀다. 지금 상황이라면 결코 가만히 있을 리는 없다. 빈우가 위험에 처하면 발작적인 모습을 보이는 게 이 안드로이드다.
“네? 네에. 타이 차장님께서 그렇게 마음먹으셨다면 그게 주인님께 가장 안전하고, 이득이 되는 길일 겁니다. 전 따르겠습니다.”
그런데 의외의 반응이 나왔다. 뒤를 봐주던 마커스가 빈우를 버리고 떠난다는데도 아나스타샤는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다.
“뭐? 안전해? 이게 가장 이득이 되는 길이라고?”
반문하는 파트리샤에게 아나스타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네, 타이 차장님께선 지금 당장의 일보단 차후의 관계도 염두에 두고 움직이실 겁니다. 만약 타이 차장님께서 국방부 차관이 되셔서 자리를 잡으시면 주인님께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문제는 마커스가 차관이 될 때까지 빈우가 살아남느냐는 거다. 육체가 워프 비스트가 된 상황이라면 보안국이 달려들어도 제대로 대처를 못 할 것이고, 군사정보국이 회수하려 한다면 이쪽이 딱히 거부할 방도가 없다. 뻐꾸기 작전이 진행중인 현재 상황하에선 더더욱 그렇다.
특수전 사령부에서 막아준다고 해도 한계가 있고, 정식적인 명령이 내려오면 방법이 없다.
“하지만-.”
“파트리샤, 그쯤 하자.”
아룹이 뭐라 하려는 파트리샤를 말렸다.
“타이 차장님께서 팀장님의 친구분이시고, 또 어떻게든 돕기 위해 움직이신다면···.”
아룹은 거기까지 말하면서 마커스와 시선을 맞췄다. 눈을 마주친 마커스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아룹의 말을 긍정했다.
“···우리는 믿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거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다른 팀원들에게도 그렇게 전달해 주십시오.”
마커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일어섰다.
“저는 이만 빈우에게 가봐야겠습니다. 둘이서 차분히 대화를 해보죠. 가자,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샤는 죄송스러운 눈빛으로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는 마커스를 따라 나갔다.
“으음, 고년 참….”
문이 닫히자 파트리샤가 입맛을 다시다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아니이, 아나스타샤요. 아까 팀장님 앞에 두고선 아예 눈빛으로 우릴 갈아 마실 기세였잖아요.”
그건 아룹도 기억한다. 장갑복의 모든 동력이 나간 상황에서 아룹은 자신의 몸속의 사이버 부품들마저 자동정지한 것을 알았다. 이는 다른 팀원들도 마찬가지, 모두 맨몸으로 덤빈다 한들 체메트디오프의 손에 죽을 운명이었다. 그러나 팀장인 빈우는 스스로 워프 비스트가 되어 샤다이 집정관을 도륙 냈고, 그가 죽자 상황이 다시 정상화되었다. 그리고….
-아무도 주인님을 해칠 수 없어. 아무도 내 아들을 해칠 수 없어!
다시 기동한 아나스타샤는 변이해가는 빈우에게 매달렸다. 그리고 그를 데려가려는 팀원들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었다. 그것은 숫제 집착이었다.
“…하긴 그때 아나스타샤는 대단했지. 팀장님이 아니었으면 일이 조금 불편해졌을 거야.”
그때 빈우는 주인의 권한으로 아나스타샤를 진정시켰다. 인공지능이 작동치 않는 단순한 로봇으로 바꾼 것이다.
“그랬던 아나스타샤가 지금은 아아주 순하게 말 잘 듣네요?”
하긴 태스크 포스 3373보다는 마커스를 훨씬 더 오래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태스크 포스 373의 팀원들은 전우긴 하지만, 마커스는 사관학교부터 거의 반평생을 지내온 친우다. 그러니 아나스타샤의 반응도 다를 것이다.
“그리고 마커스는 군사정보국 차장, 아나스타샤는 원래 군사정보국 소속 안드로이드. 거절할 수 없겠지. 우리도 가자. 다른 팀원들에게 사정 설명해야지.”
아룹의 말에 파트리샤가 툴툴대며 따라나섰다.
“옷은 갈아입고 가죠?”
* * *
아나스타샤는 불안한 마음으로 마커스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왜 그래?”
마커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이미 뒤따라오는 아나스타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챈 것이다.
“네? 아아, 그게….”
“불안하겠지.”
마커스는 걸음도 멈추지 않았고, 목소리도 변하지 않았다.
“또 이런 일이 있을 줄이야. 너도 고생이 심하구나.”
이런 일, 그 단어에 아나스타샤는 기억회로가 욱신거렸다. 그것은 포말하우트 게이트에서 솔리드 베타와 울토르 중대가 리퍼에게 습격당했을 때의 일, 빈우에게 큰 변고가 생겼던 때를 의미한다.
당시 아나스타샤는 빈우의 개인실에서 대기하던 중 빈우로부터 수동모드로 행동하란 명령을 받았었다. 그때 빈우는 리퍼들과 격전을 벌이고 있었고, 아나스타샤는 미리 입력된 명령에 따라 모든 자료를 제거하려던 중 리퍼의 전자전 공격을 받고 작동이 정지되었다.
“타이 차장님도 마찬가지시잖아요.”
아나스타샤의 말에 마커스는 돌아보지 않았지만, 귀 뒤쪽을 보니 왠지 쓴웃음을 짓는 것처럼 보였다.
솔리드 베타가 다시 통상공간으로 돌아온 다음, 아나스타샤는 군사정보국 코드로 재기동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주인인 빈우가 전사했다는 사실에 크나큰 충격을 받았었다. 하지만 슬픔에 빠져있을 틈조차 없었다. 군사정보국의 치밀하고도 지독한 조사가 아나스타샤에게 가해졌던 것이다. 안팎의 고통으로 아나스타샤가 망가져 갈 때 그녀를 붙잡아 준 것은 바로 마커스였다. 그는 빈우가 결코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를 보호하면서 그녀를 통해서 빈우가 취할지도 모를 가상의 행적을 철저히 조사했다. 만약 그가 살아서 도망쳤다면 어디로 도망쳤을까, 숨었다면 어디로 숨었을까.
“그러게, 네 주인은 주변 사람이 어떤 마음고생을 하는지 모를 거야.”
웃음기 서린 마커스의 목소리에 아나스타샤도 작게 웃었다.
‘타이 차장님은 주인님을 끝까지 믿어주셨다.’
그때의 마커스는 이용할 말이나 동업자를 잃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친구를, 자신의 반을 대신할 친구를 잃은 모습이었었다. 그래서 아나스타샤도 마커스를 믿었고, 자신을 솔리드 베타에서 계속 일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리고 결국 주인님은 돌아오셨다.’
마카로니에서 빈우는 클론으로 위장한 잠수에서 부상해 돌아왔다. 등잔 밑이 어두운 것도 정도가 있지, 자신이 탄 배에 클론으로 위장해 있을 줄은 몰랐다. 리퍼의 기습 후, 클론들에게도 철저한 조사가 이뤄졌지만, 거기에도 드러나지 않을 정도였으니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빈우가 부상 신호를 보냈을 때, 군사정보국은 발칵 뒤집혔다. 그리고 마커스로부터 연락을 받은 아나스타샤는 회로가 다 타버릴 정도로 과부화되었다.
‘클론으로 잠수에 이어 이번엔 워프 비스트라니 너무 심하시잖아요.’
아나스타샤는 애타는 마음속으로 빈우를 탓했다. 빈우는 클론으로 위장하고 있을 때는 철저하게 클론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전사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잠수를 했다. 계획에 어긋나면 영영 부상하지 못하고 인간으로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도 있지만, 그것 또한 염두에 두고 잠수를 했었다. 무엇이 그를 잠수하게 만들었을까.
그리고 이번에는 스스로 워프 비스트를 받아들였다. 인간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확실치 않은 방법을 그는 왜 택했을까.
아나스타샤는 답을 내리지 못했다. 이미 빈우가 있는 구역으로 돌아온 것이다. 방으로 들어가자 마침 크산티페가 알탄훼아나를 침대에 눕히고 있었다.
“김 팀장님 안의 샤다이가 많답니다.”
알탄훼아나에게 이불을 덮어준 크산티페의 말이다.
“많아? 영혼 같은 것인가?”
마커스가 질문했다. 샤다이라면 인류와는 기술계통이 대단히 달라서 실제로 영혼에 대응하는 존재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요. 정보입니다. 그들이 남겼던 정보가 현실화하는 겁니다.”
이런 정보는 샤다이들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니, 지금 저기에 묶인 빈우에게 들려줘도 별 상관없을 것이다.
“현실화라···. 종이에 빵이라고 쓰면 빵이 생긴단 말이야? 아니면 물을 커피라고 억지 부리고 각인시키면 그게 커피로 변하나?”
그때 단어의 의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던 마커스에게 친구의 말이 들려온다.
“누구나 각자 차고 안의 불 뿜는 용 한 마리쯤은 키우지 않나?”
시선을 돌리니 빈우가 뒤틀린 얼굴로 웃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 아까보다 얼굴이 조금 나아진 것 같다.
-반격. 긍정.
크산티페가 빈우의 옆을 걸어가며 마커스와 아나스타샤가 볼수 있게 작게 수화를 했다. 아마도 알탄훼아나의 치료가 효과가 있다는 의미겠지.
“차고 안의 용이라···. 증거나 증명도 없이 믿으란 거냐?”
마커스가 빈우의 앞에 앉으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 네 눈앞에 실제로 존재하잖아.”
빈우의 말에 마커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차고 안에 용이 있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도 이 용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용은 실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허구의 존재일까.
마찬가지로 샤다이의 기술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워프 비스트에 대한 정보도 알탄훼아나로부터 얻은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 모든 정보들이 연방으로선 검증하지 못한, 알탄훼아나의 ‘주장’에 불과하단 거다.
“뭐어. 그녀가 그렇게 말했고, 우리 눈앞에서 워프 비스트가 나타나긴 하지. 또 그녀가 말한 대로 사건이 진행되었으니 일단 아귀는 맞아. 문제는 이 과정이 우리 인류의 기술로는 증명도, 조사도 불가능하단 거야. 우린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마커스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결국 이게 문제다. 적이 준 정보를 과연 어디까지 신뢰해야 할 것인가. 인류에겐 그 정보를 증명하거나 교차검증할 방법이 없다. 마치 자로 무게를 재는 격이다.
“게다가 유일한 목격자와 증인께선 이런 꼬라지고 말이지.”
마커스의 말에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본론을 말해.”
냅다 빈우가 말했다. 쓸데없이 이런 쪽으로만 눈치가 빠른 친구 때문에 마커스는 혀를 찼다.
“군사정보국 차장 그만두고, 국방부 차관할 계획이야.”
너무나 중요한 이야기를 너무나 대수롭지 않게 한다. 오히려 크산티페가 눈이 동그래진다.
“그래···.”
빈우는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을 했다.
“도움이 되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마커스.”
빈우가 잠수에서 돌아왔을 때, 둘은 혹시 있을지도 모를 감시를 피해 빵에 꿀과 버터를 암호로 발라가며 이야기했었다. 대신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오직 둘만이 이해할 수 있는 축약된 대화가 오갈 뿐이었다.
“니가 누굴 도울 형편이냐. 고생해라.”
마커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앞으로 빈우의 앞길에 놓인 것은 단순히 ‘고생’으로 치부할 것이 아닐 것임에도 그는 덤덤하게 일어섰고, 빈우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아참.”
갑자기 까먹은 게 생각났다는 듯이 마커스가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너 좀 보자시더라. 그러고 보니 부상하고 난 다음에 한 번도 연락 안 했지? 나는 이 새끼야, 종종 니네 누나랑 여동생한테 연락했었단 말이다. 방금도 한바탕 치르고 왔다.”
뭔가 싶었더니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친구에게 어머니한테 인사하란 이야기다.
“그러게, 내가 좀 바빠서 말이야. 시간 나면 한번 뵙도록 할게.”
빈우는 선선히 대답했고, 마커스는 방을 나섰다. 방금 둘의 대화에선 어떤 암호도, 어떤 숨긴 의미도 없었다. 그냥 자신의 어머니에게 죽었나 살았나 얼굴이라도 비추라는 말이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