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역시 동족의 죽음이 괴로운 모양이군. 하지만 그 머리카락을 쓰는 방법으로 시간에 맞출 수 있나? 변이가 더 진행되기 전에 치료를 서둘러야 하는 거 아닌가? 내 육체가 플라스마에 타는 게 문제라면 걱정하지 마. 손상된 신체는 수리할 수 있어. 치료가 끝난 다음 재생하거나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면 돼.”
빈우의 말대로 군용 강화육체는 재생력이 뛰어나고, 재생이 안 되는 부분은 클론 배양한 부위로 교체하면 된다. 이는 플라스마와 직접 닿는 신경계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치료를 강행하면서 플라스마로 타버린 신체를 바로 신품으로 교체하자는 계획이다. 변이한 워프 비스트가 아닌 인간의 육체로.
블랙 랜스에는 강화군인용 신체 예비는 물론이거니와 373팀원의 유전정보로 만들어진 대체 신체, 장기들이 상비되어있다. 이는 치료나 재생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경우 교체하기 위한 목적이며 요즘 세상에는 기본적인 치료 방법이다.
“단, 정확하게 말해. 내 몸이 타는 게 걱정이 되는 건가, 아니면 선조들이 죽는 것을 보기 싫다는 것인가. 만약 정 겁나서 못하겠다면 네 말대로 머리카락을 써도 어쩔 수 없긴 하다만.”
하지만 빈우가 몸을 바꾸며 나아간다 해도 치료해야 할 사람이 따라오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 알탄훼아나는 빈우에게 내려온 샤다이 선조들을 빈우의 감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변환해주고 있다. 그 때문에 빈우가 선조들을 고문해서 죽이는 광경을 바로 앞에서 봐야만 했었던 것이다.
‘힘들어 보이는군.’
빈우의 생각대로 알탄훼아나는 대단히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비록 그녀가 선조 귀환 반대파이긴 했어도 선조들에 대한 적개심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리고 개개인에 대한 원한은 없었기 때문에 방금과 같은 사냥 광경에는 이중 삼중으로 고통을 겪는 것이다.
‘아직 애새끼 하나가 남았지.’
닉스 레벨 3의 요원이 가진 유년기의 트라우마. 그것들이 모인 곳에 샤다이 아이가 남아있다. 알탄훼아나가 도와주기만 한다면 즉시 도륙 낼 것이다.
“나, 나는….”
마침내 알탄훼아나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대의 몸이 걱정되기도 하지만, 내가 그 광경을 다시 보는 것도 힘들다. 아니, 무섭다.”
솔직하게 말한 그녀는 가까스로 자신을 다잡고 있었다. 이미 빈우의 몸에 내려온 샤다이들은 어떻게 할 수 없다. 게다가 이들은 내려온 다음 오랫동안 빈우의 안에서 조용히 머물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빈우는 얼마 전 이 선조 가족을 다시 깨웠고, 빈우가 자기 육체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선 그들을 없애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방법을 위해선 알탄훼아나가 도와줘야 한다.
“그래도 치료를, 계속하자.”
크게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고르는 그녀의 눈에서 다시 금색 빛이 뿜어져 나온다. 하지만 이번엔 빈우가 태클을 걸었다.
“고맙긴 한데 조금 쉬는 게 좋겠어. 내 치료도 해야지.”
“으음, 미안하다.”
의욕만 앞섰던 알탄훼아나가 사과했다. 환자의 몸에 부담이 된다고 치료법을 바꾸자고 한 게 방금 전이다. 그런데 평정심을 잃고 말을 바꾸며 오락가락하는 것을 보니 그녀의 정신상태도 딱히 좋아 보이진 않았다.
“둘 다 쉬었다가 치료를 다시 시작하지.”
빈우는 크산티페를 불렀다. 아나스타샤로부터 정신 치료에 대한 정보를 전달받은 안드로이드는 알타훼아나를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다독여주었다. 그리고 그사이 빈우도 치료를 했다. 흉하게 변한 워프 비스트의 육체 곳곳에 타버린 부분이 있는데, 거기에 새로운 육체를 이어붙이는 것이다.
“하! 이거 참.”
로봇팔들이 하는 수술을 보던 빈우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 광경이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현재 빈우의 뇌에는 샤다이들의 정보가 들어와 있으며 정신에도 샤다이들이 들어와 있다-정확히는 지금까지 억눌렸던 놈들이 다시 일어난 것이지만-. 그래서 지금은 결국 육체마저 워프 비스트로 변이해 있는 상태다.
그러나 빈우의 이 변이한 육체는 알탄훼아나의 치료가 진행됨에 따라 원상태로 서서히 복구되는 중이고, 치료가 궤도에 올라가자 빈우가 인간으로 돌아오는 증거인지 플라스마와 접촉한 부분이 불타 녹아버려 거기에 새로운 육체를 이식하는 중이다. 아직 워프 비스트의 흔적이 남은 몸에 싱싱한 인간의 육체가 끼워 맞춰진다. 그 모습이 얼기설기 기워 맞춘 누더기 같아 빈우로 하여금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이미 정신에 샤다이가 들어와 있다면 육체를 바꿔봐야 별 소용이 없다고 했었지.’
알탄훼아나가 말하기를 육체의 변이는 정신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정신에 샤다이의 정보와 의식들이 남아있다면 육체를 교체해도 변이는 멈추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내면의 샤다이를 죽이거나 계단을 마저 부숴야 한다고까지 말했고, 협조도 하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변이 이유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계단을 내려오는 자들의 육체가 변하는지는 알탄훼아나도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다. 단지 선조들이 제대로 내려온다면 정신은 인간성을 유지하고 육체 또한 변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뿐이다. 빈우는 ‘제대로 내려오지 않는다’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궁금했다. 샤다이들은 왜 인간성을 유지하지 못할까. 지금까지 빈우가 보았던 워프 비스트들은 말 그대로 야수였다. 샤다이의 지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말하지 않은 이유는 모르는 것일까, 숨기는 것일까.’
빈우는 마음속으로 생각해봤지만, 결국 마음속 의문으로만 남겨두었다. 지금은 이런 질문을 할 시기가 아니다. 어떻게든 알탄훼아나를 진정시켜 치료를 이어가야 한다. 질문은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하핫, 연방엔 샤다이의 맨정신에 인간의 육체를 가진 놈들이 숨어있다고 했지. 그리고 지금의 나는 인간의 정신에 워프 비스트의 육체를 가지고 있고. 과연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일까, 누가 인간이고 누가 샤다이일까.”
빈우의 비웃음 섞인 혼잣말에 크산티페가 움찔한다.
“김 팀장님은… 인간이십니다.”
그녀는 겁먹은 시선으로 빈우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요즘 들어 자주 보는 아나스타샤의 표정처럼 보였다.
“그래, 내가 인간이라고? 뭐, 너희들의 눈은 정확하겠지. 하지만 말이다.”
빈우는 새로 붙은 자신의 육체를 보았다. 변이된 육체에 붙은 자신의 복제배양 육체와 강화 신경계들이다.
“나는 과연 어디까지 김 빈우일까.”
이번에 크산티페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강화군인들은 자신의 신체의 변화에 맞춰 자아에 대한 정신교육과 상담을 받는다. 강화시술을 받은 군인들이 엄청난 재생력과 놀라운 신체능력에 처음보이는 반응은 놀라움이고, 그다음에 보이는 반응은 두려움이다. 마치 인간같지않은 능력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빈우 역시 그랬었다.
‘내가 과연 나일까.’
일반적인 민간용 강화시술과 궤를 달리하는 군용시술에 더해, 군용 두뇌칩에 들어간 군용 OS는 전투를 보조하는 AI와 각종 제약들이 들어있다. 덕분에 초기에는 같은 상황에 처해서도 예전과는 다른 판단을 내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 때문에 많은 수의 군인들은 이런 문제를 한 번씩은 거쳐 가며 이겨낸다. 이겨내지 못하면 민간으로 돌아갈 뿐이다.
하지만 빈우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그는 개조나 부상이 아니라 다른 종족의 정신에 감염된 경우다. 그것도 연방이 인식하고 있는 물리적이나 정신적인 학문과 기술의 범위를 벗어나 마치 마법 같아 보이는 샤다이의 기술이라 더더욱 그렇다.
‘그때는 아찔했었지.’
닉스 레벨 3에 군사정보국의 대 세뇌교육을 받았던 빈우조차 당시엔 하마터면 자아를 빼앗길 뻔했었다. 아나스타샤의 시신을-정확히는 정지된 모습을 보았던 빈우는 내면에서 무언가가 끊어져 버렸고, 복수를 위해 자신의 안에 들어와 있었던 샤다이 선조들에게 몸을 넘기는 도박수를 던졌다. 워프 비스트들은 샤다이의 플라스마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을 노린 건곤일척의 수였다. 다행히 빈우의 육체는 워프 비스트로 변했고, 정신은 간신히 자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잠깐 동안 빈우는 잠시 자아를 빼앗길 뻔했었다. 게다가 방금 전까지는 자신의 몸을 빼앗으려는 자와 동거를 했었고, 결국은 사냥을 했었다.
‘놈들을 잡아먹은 나는 아마 이전의 나와는 다를 것이다.’
알탄훼아나가 말하길 인간의 몸에 내려온 샤다이들은 원래 육체 주인의 정보와 지식을 그대로 흡수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빈우는 반대의 경우엔 어떨까 물어보았지만, 전례가 없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아까 샤다이 가족 셋을 잡아먹었어도 빈우는 별다른 변화를 느끼지 못했었다. 단지 마지막까지 잡아먹으면 어떨까 막연히 예측할 뿐이다.
‘인간의 육체를 한 워프 비스트, 워프 비스트의 육체를 한 인간. 나는 어느 쪽에 서게 될까.’
빈우가 이리저리 생각하고 있을 때 시술이 끝났다.
“신경 접합은 다 되었습니다. 움직여보십시오.”
로봇의 말에 빈우는 팔다리를 움직여보았다. 위화감 없이 부드럽게 움직인다.
“빠르군. 신기술인가?”
빈우는 감탄하면서 새로 붙은 팔을 들어보았다. 보통 이런 시술을 한 다음엔 몇십 분은 재조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빈우의 새 팔은 바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것도 원래 달려 있는 팔처럼 아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이다.
“아니요. 기존의 신체와 다른 것은 없습니다.”
대답하던 크산티페의 말이 점차 가팔라졌다. 방금 봉합한 빈우의 새 복제팔에 워프 비스트 변형이 시작된 것이다. 아직 하얀 신품 팔에 거친 각질이 일어나며 비늘로 변한다. 곳곳에 가시와 침이 솟구친다. 크산티페가 데이터 패널로 급히 달려갔지만 빈우가 말렸다.
“흠, 어차피 치료를 위한 소모품이다. 완치되면 다시 새 몸을 달면 될 일이야.”
빈우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러나 방금의 재생속도와 침식속도는 대수로운 것이 아니었다. 마치 방금 빈우가 샤다이 가족을 잡아먹었을 때 그들이 빈우의 색에 물들었던 것처럼, 빈우의 새 육체는 워프 비스트의 색으로 물들었던 것이다. 이제 육체적으로 잡아먹히느냐, 정신적으로 잡아먹느냐의 싸움이다.
“알탄훼아나? 보다시피 치료를 서둘러야 할 것 같은데?”
빈우의 말에 알탄훼아나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 한, 사람만 남았다고 했었지?”
물어보는 알탄훼아나의 말엔 약간의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빈우에 의해 선조가 난도질당해 죽는 것을 보아야 하니 그럴 것이다. 더욱이 지금의 그녀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앞으로 죽게 될 선조의 운명이 과거에 죽었던 동료의 모습과 겹쳐지고 있었다.
“아마도. 그놈 잡은 다음에는 샅샅이 뒤져봐야지.”
감겼던 알탄훼아나의 눈이 다시 뜨이자 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결심한 그녀가 다가왔다.
“아, 잠깐만. 그전에 질문 하나.”
빈우의 허연 백태 낀 눈이 알탄훼아나의 금색 눈을 마주 보았다.
“방금 너도 보았겠지? 이 워프 비스트의 육체는 인간의 육체를 침식했어. 그렇다면 샤다이의 육체는 어떨까? 그것도 침식하나? 나에게 샤다이의 팔다리를 달면 어떻게 되지?”
“…모른다. 본 적도, 실험해본 적도 없어. 체메트디오프는 해봤겠지만.”
금색 눈은 공포가 깃들긴 했지만, 거짓의 기운은 없어 보였다.
“다만.”
알탄훼아나는 긴장한 듯 손을 잡고 꼬물거리며 비볐고, 그것을 본 크산티페가 다가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알탄훼아나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육체는 샤다이와 인간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아마 그대가 말한 것과 같은 현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 몸에 우리 동족의 육체를 붙인다면 역시 잡아먹겠지.”
“그런가. 대답 고마워.”
빈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치료를 기다리는 것이다. 잠시 후 고온의 플라스마가 신경계를 타고 오는 것이 두뇌칩의 경보를 통해 알려졌다. 고통은 없었다. 두뇌칩은 일정 이상의 고통이 느껴지면 그것을 끊어버리고 대신 맹렬하게 경보를 울리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빈우는 그 경보에 신경을 끄고 손에 들어온 새로운 패를 어떻게 사용할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