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빈우는 딱히 여자 속옷에 집착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주변의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몰아붙이고 있었다.
이런 사건의 발단을 거슬러 올라가면, 처음은 검정 레이스 팬티였다. 빈우가 울토르 클론으로 위장하고 있을 때 마카로니로 강하하기 직전에 발견한 기괴한 증거품이었다. 거기엔 ‘이거 믿지 마라’란 메시지가 마커로 적혀있었고, 그 마커를 쓴 자의 ID는 바로 빈우 본인이었다. 그러나 빈우는 그것을 쓴 기억이나 기록이 없었다. 아마 포말하우트 게이트의 진실이 트리니티 패턴으로 잠겨있는 부분과 대단히 연관성이 높은 증거다.
‘하지만 이쪽에 대해선 아직 아무런 진전이 없다.’
빈우와 당시 군사정보국 차장이던 마커스가 이에 대해 다방면으로 조사해 보았지만, 딱히 밝혀진 것은 없었다. 이 팬티를 입었던 존재는 아나스타샤와 동형기인 쿠델카 모델이란 것 외엔 모르고, 아무리 살펴봐도 솔리드 베타 내부에선 이와 관련된 기록이 일체 없었다. 아마 인간의 육체를 장악한 샤다이들이 이 무언가 꿍꿍이를 부린 것이 분명했다.
두 번째는 빈우가 부상해서 인간으로 자각한 다음, 아나스타샤와 재회했을 때였다. 그때 빈우는 아나스타샤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빈우 주변에 그런 속옷을 입고 있을 만한 존재는 그녀밖에 없었으니까.
그래서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부득이하게 확인했다. 하지만 당시 그녀가 입고 있던 팬티는 언제나 입던 흰색이었다. 이후에도 몇 번 몰래 확인해 보았지만, 그때마다 본 것은 흰색이었다.
허나 얼마 전, 누벨 노르망디에서 위기에 처한 빈우를 구하기 위해 아나스타샤가 강하했을 때, 그녀는 검은색 팬티를 입고 있었다. 체메트디오프에 의해 373팀원의 동력이 모두 끊어져 손도 발도 못 쓰는 상황에서 도와주러 온 안드로이드 아나스타샤마저 전원이 꺼져버렸다. 마치 시체처럼, 죽은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모습을 본 빈우는 격노했지만, 나중에 되새겨 보면 그때 아나스타샤가 입은 팬티는 검은색이었다.
‘왜 그런 것을 입고 있었을까.’
팀원들은 농담 삼아 말하길 요즘 쌀쌀맞은 빈우의 행태 때문에 아나스타샤가 기분 전환하려고 입었을 것이라 하지만, 과연 그럴까.
빈우와 아나스타샤에게 있어서 검은색 레이스 팬티는 조금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렸던 빈우는 호기심에 아나스타샤와 동형의 쿠델카 모델이 나오는 포르노를 구입한 적이 있었고, 그걸 보고선 제법 큰 트라우마를 겪었다. 비록 다른 안드로이드란 것은 알지만 어머니이자 누나와 같은 그녀의 모습을 한 존재가 그런 행위를 한다는 것은 상당한 충격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포르노 사건으로부터 조금 시일이 지난 다음, 이 어린 악동은 아나스타샤에게 거기에서 봤던 검은색 레이스 팬티를 입으라고 준 적이 있었다. 이 선물을 받은 안드로이드 메이드는 자신이 기르는 주인의 장래와 미래를 위해 마음을 담은 보답으로 귀싸대기를 거하게 날려주었고, 그 이후로 아나스타샤가 그런 종류의 속옷을 입은 적은 없었다.
이런저런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빈우는 다 큰 후에도 아나스타샤나 쿠델카 모델들이 조금 야시시한 메이드복을 입은 모습을 보면 질색팔색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아까는 흰색.’
파트리샤와 훈련을 하면서 보았던 것은 흰색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뒤에서 아룹이 말을 걸면서 다가왔다. 훈련이 끝난 지금 373 팀원들은 뒷정리를 하고 있었는데, 이때 빈우가 조금 심각한 생각을 하며 손을 조금 놀리자 그것을 바로 눈치챈 것이다.
“생각을 정리할 게 있어서 말입니다. 잠깐 괜찮겠습니까?”
아룹이 고개를 끄덕이자 빈우는 둘 사이에 비밀 회선을 연결했다. 저쪽에서 파트리샤가 두 사람 논다고 구시렁대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부팀장. 혹시나 해서 하는 말입니다.
빈우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아룹의 질문이 들어왔다.
-또 누벨 노르망디 같은 겁니까?
정곡을 찔린 빈우는 팀장으로서 딱히 할 말이 없어졌다. 그걸 본 아룹은 심란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고,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본 파트리샤는 잽싸게 도망쳤다.
누벨 노르망디에서 태스크 포스 373 지상팀이 지열발전 연구소에 쳐들어가기 직전, 빈우는 부팀장 아룹에게 여러 가지를 부탁했었다. 그중엔 자신이 잘못될 때를 대비한 것도 있었다. 아룹 정도 되는 베테랑이 부팀장으로 있으면 373 팀에 어지간한 사태가 벌어져도 자신이 팀장 대리가 되어 수습이 가능하다. 실제로 발 가르단 하스에서 빈우가 갑자기 실종되었을 때 아룹이 지휘를 맡아 태스크 포스 373을 이끌고 빈우를 회수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빈우가 이렇게 후일을 대비해 따로 세세히 지정해 줄 정도면 꽤 심각한 안건이란 의미다.
-비슷합니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 것이니 그저 염두에만 두십시오.
-염두에 못 둘 걸요. 팀장님이 가정은 꽤 잘 맞는다는 거 아십니까? 아마 바로 실행할 분위기인데요?
이번에도 빈우는 뭐라 변명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보안국이 저를 체포하러 올 때의 경우입니다.
-보안국이? 지금요? 놈들은 자신들이 직접 움직일 경우 상원에서 나설 것을 알고 있을 텐데, 혹시 그것을 감안하고서도 움직인단 말입니까?
-그럴 수도 있고,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뭔가 뒷공작을 해놨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태스크 포스 373은 특수전 사령부를 떠나 42전단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도중에 보안국에서 덤벼들면 상당히 골치 아프다.
-그럴 거면 차라리 특수전 사령부에 있는 게 낫지 않습니까?
태스크 포스 373이 특수전 사령부를 떠날 때 레드우드 사령관은 몇 차례나 가지 말라고 말했었다.
-그 양반 총칼로는 잘 싸우는데, 펜하고 종이로는 영 젬병이라서 말입니다.
-…그건 그렇지요.
그 점에 대해선 아룹도 동의했다. 특수전 사령관인 조지 레드우드는 연방에서 내로라할 용장이자 맹장이지만 이런 음모와 정치싸움엔 별 힘을 못 쓰고 있다.
-우리 중에 이런 싸움을 잘하는 사람은 팀장님 정도 아닙니까? 놈들이 어떻게 나올 것 같습니까?
아룹의 말에 빈우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특수전 사령부가 아무리 비밀작전을 하고 비정규전에 특화되어있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외계 종족을 상대로 싸운다. 지금처럼 아군끼리, 그것도 명분을 무기 삼아 문서로 서로 목을 죄는 싸움에는 익숙지 않다.
반면 빈우는 군사정보국 시절 보안국과 협력과 반목을 자주 했었기에 놈들을 상대로는 경험이 많다. 얼마 전에도 무려 보안국장에게 한방 크게 먹인 적이 있다.
-흐음, 그건 이번엔 보안국이 뒷배 삼을 세력이 어딘지가 관건입니다.
-뒷배요?
-네, 이번에 보안국은 절대 단독으로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연방군이 아무리 강력하고 엄청난 무력을 지니고 있다지만, 그 힘의 사용은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에 의해서 허락과 통제를 받는다.
연방군의 명령권은 각 부서별로 나뉘어져 있어 군 행정에 관한 명령은 합동참모본부와 국방부, 군사작전에 대한 명령은 통합전투사령부와 상원의 해당 작전 위원회, 가장 상위의 명령권인 군통수권은 대통령과 상원에 있다.
그 때문에 보안국이 이 상부 조직을 건드려 정식명령을 받아온다면 이쪽은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쪽도 나름 파이프 라인이 있지만, 국방부의 마커스 타이는 아직 자리를 잡지도 못했고, 합동참모본부의 캐서린 시슬은 뻐꾸기 작전 때문에 다른 곳으로 빠졌으며, 상원의 오다 히토미 파벌은 연방에 암약하는 샤다이를 일망타진하기 위해 대기하는 상황이다.
-어쨌든 늦든 빠르든 보안국은 행동할 겁니다. 누벨 노르망디의 여파가 너무 커요. 때문에 다소의 피해는 감안하고서도 움직일 겁니다. 그래서 말인데….
빈우가 잠시 말을 끊자 아룹은 불안해졌다. 이럴 경우 팀장이 내놓는 해결책은 기상천외하면서도 과격하기 때문이다.
-보안국이 행동하면 우리가, 부팀장이 먼저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면서 빈우가 명령서를 하나 꺼냈다. 피에르 라캉의 사건으로 보안국과 얽혔을 때 썼던 기밀작전 문서다. 이는 일종의 백지명령서로서 해당 명령은 이미 발동 중이지만 잠시 정지된 상태로, 빈 조항만 채워주면 다시 효력이 발생하도록 되어있다.
완성된 그 문서를 본 아룹은 저도 모르게 음성이 나와 버렸다.
“내란…!”
자기 목소리에 놀란 아룹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금 그의 말을 들은 팀원들은 호기심에 고개를 돌아봤지만 빈우의 살벌한 시선에 밀려 이리저리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한숨을 쉰 아룹은 다시 팀장을 돌아보았다.
-지금 내란음모죄로 팀장님을 체포하란 말씀입니까?
빈우가 내놓은 문서는 연방군 소령 김 빈우를 내란음모죄로 즉시 체포하라는 명령서이며, 이미 조지 레드우드가 승인을 한 상황이다.
-네, 보안국이 저를 잡으려 할 건수 중에 가장 가능성이 큰 게 이겁니다.
빈우는 자신과 두뇌칩 연동이 된 자의 정보를 본 적이 있다. 또 마카로니에서 프리마까지의 행적이 수면 도중 두뇌칩 연동을 통해 기록으로 공유돼 들어왔다. 그자가 클론인지, 아니면 자신이 클론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빈우가 직접 조사한 정보와 두뇌칩으로 연동되어 들어온 기록이 사실이라면 보안국이 움직여도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 안 움직이는 게 수상할 정도다.
-현재 연방군에서 내란음모 혐의로 긴급체포를 하는 보안국을 막을 부서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쪽이 선수를 치는 거죠.
아룹은 굳은 표정으로 명령서를 다시 살펴보았다. 이 문서가 작성되기 위한 정보제공자와 신고자가 수상하다. 바로 군사정보국장 이노우에 고토와 보안국장 다샤 쿠사키나가 수사협조자로 나와 있는 것이다.
-…설마 이분들이 협력한 건 아니겠지요?
-물론 가라친 거죠.
공문서 위조는 중대한 범죄다. 다른 경우라면 문서위조도 함께 묶여서 잡혀갈 사안이지만, 여기 이 문서에 한 발을 들인 게 보안국이니 저쪽도 달리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보안국이 이 문서의 존재를 알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아룹이 걱정하는 것은 저번에 이런 문서에 한 번 털린 보안국이 같은 방법에 또 당하겠냐는 것이다.
-글쎄요. 이건 예전에 우리 국장님이 갖고 있는 서류를 뺏어온 거라서요. 보안국도 이런 문서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설마 저한테 있다는 것까진 모를 겁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보안국에게 이 명령서를 보여주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이걸 빌미로 저를 정당하게 체포해 가는 거죠.
곰곰이 생각하던 아룹은 문득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깨달았다. 두 사람이 심각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눈치챈 팀원들이 바로 자리를 피해준 것이다. 그래서 직접 목소리를 내었다. 이런 이야기를 통신으로 하려니 목이 가려웠던 것이다.
“그러니까, 보안국이 올 경우에 먼저 선수치고 이 명령서를 들고 나와서 팀장님을 체포하란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아룹은 그 상황을 한번 상상해 보았다. 이리보고 저리봐도 만만치 않았다.
“그 상황에서 보안국이 팀장님을 순순히 넘길까요?”
“그럴 리가요. 악착같이 달려들겠죠.”
“그때는 어떻게 합니까?”
아룹의 질문에 빈우가 대답 대신 해괴한 것을 본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은 아룹이 머쓱해 하며 자기 질문에 자기가 대답했다.
“…우리가 패 조져야겠군요.”
“맞습니다. 아주 성대히. 오다 의원님 파벌에게 최대한 건수를 줄 수 있도록 크게 일을 벌여야 합니다.”
말인즉슨, 빈우를 체포하는 것처럼 시간을 끌고 판을 키워 상원의 히토미 파벌을 끌어들이는 작전이다.
태스크 포스 373의 부팀장인 아룹 라마누잔 원사는 군에서 잔뼈가 굵어 온 사람이지만, 고급장교가 아닌 탓에 이런 싸움은 영 낯설었다. 명분과 명분으로 눈을 가리고 아웅다웅하는 꼬락서니는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래도 앞으로 벌어질 가능성이 높은 일이니 어떻게든 귀 기울여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