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아룹과 몇 가지 작당 모의를 한 빈우는 조금 늦게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가 방으로 들어가자 아나스타샤가 반겨주었다. 이 안드로이드 메이드는 빈우의 침대에 대자로 뻗어 누워서 천장을 보는, 심드렁한 모습으로 주인을 맞이했다.
빈우는 아나스타샤의 저 모습을 보고는 기억나는 게 있었다. 바로 여동생인 규리다. 규리는 어릴 적 밥반찬이 마음에 안 들면 숟가락을 집어 던지고 바닥에 대자로 눕는 버릇이 있었는데, 보모였던 아나스타샤가 주인들에게서 이런 것을 배운 모양이다.
“너 뭐하냐?”
빈우가 불러 봐도 아나스타샤는 대답 없이 누워있을 뿐이다. 눈은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손이 스윽 올라가더니 자신의 옆을 탁탁 쳤다. 주인보고 앉으란 뜻이다. 빈우가 좁은 자리를 비집고 앉자 침대를 치던 손이 더듬더듬 빈우의 가슴팍을 밀어서 눕혔다. 그런다고 넘어갈 강화군인의 육체가 아니지만, 빈우는 누웠다. 이어서 아나스타샤가 서서히 주인의 몸 위를 타고 올랐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자 풀어헤친 금발이 내려와 빈우의 얼굴을 간질이고, 푸른 눈이 빈우의 몸을 더듬는다.
“왜?”
빈우의 질문에 아나스타샤의 입이 열린다. 그러나 말이 나오는 대신 입술이 내려와 빈우의 목에 입을 맞췄다.
“차가워요.”
그녀의 입술이 강화군인의 경동맥을 훑었다.
“신형이라 내열이 잘 되는 모양이네. 일상생활용 육체가 아니니까 체온 유지할 필요는 없잖아.”
“그게 아니잖아요.”
아나스타샤가 빈우의 목에 얼굴을 묻은 채로 올려다 보았다. 그녀처럼 어릴 적부터 주인을 보필해온 안드로이드들은 주인의 감정과 정신 상태에 대단히 민감하다. 아나스타샤는 요근래 빈우의 행동에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눈치챘기에 이렇게 매달리는 것이다.
그녀는 주인의 목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웅얼거렸다.
“나 안 버릴 거죠?”
아주 약간의 침묵 다음에 빈우가 대답했다. 분명히 그때 버리지 않겠다고 했건만 아나스타샤는 귀신같이 눈치채고 달라붙은 것이다.
“노력할 거야.”
주인의 솔직한 대답에 아나스타샤의 손가락이 빈우의 옷자락을 거세게 쥐어짰다. 그리고 얼굴을 주인의 가슴에 파묻고 뭐라고 웅얼거린다.
“아샤? 뭐라고?”
빈우가 그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홱 들며 쏘아붙였다.
“버려도 소용없어요. 나 따라갈 거예요! 주인님, 따라간다고 했잖아요!”
아나스타샤가 눈물 맺힌 눈으로 빈우를 노려보는 게 절대 놓치지 않을 기세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빈우를 키워왔다. 물론 빈우의 다른 자매들도 아나스타샤가 돌보며 키웠지만, 그중에서도 특히나 빈우와는 각별한 사이였다.
그런 아나스타샤를 보며 빈우는 조용하게 말했다.
“나도 뒤뜰에 누워서 잘지도 몰라.”
빈우의 그 말에 아나스타샤의 표정이 무너졌다. 주인님들이 어릴 적에 했던 거짓말이 기억난 것이다. 아직 어린 빈우의 여동생들이 죽은 엄마를 찾을 때, 자신의 어린 주인들이 돌아가신 마님을 찾을 때 아나스타샤는 거짓말을 했었다.
‘마님은 저기 너머에 누워 주무시고 계세요.’
아나스타샤는 조심스레 입을 뗐다. 마치 돌아올 주인의 대답이 무서운 것처럼.
“…마님… 곁으로 가실 거예요?”
“글쎄. 나라고 가고 싶겠냐. 나도 되도록 여기 있고 싶어.”
빈우는 아나스타샤를 위해 죽음이란 단어를 최대한 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나스타샤는 눈물을 흘렸다.
“죽지 마세요. 주인님. 죽지 마세요.”
안드로이드가 주인의 멱살을 부여잡고 그의 가슴에서 울고 있었다.
“안 죽는다고. 야, 근데 난 군인이야. 또 지금은 전쟁 중이고. 언제 훅 갈지도 모른단 말이야.”
빈우는 어떻게든 달래보려 했지만, 아나스타샤의 울음은 쉽사리 그칠 기미가 없었다. 그녀는 너무나도 인간다워진 것이다.
“…주인님.”
간신히 울음을 그친 아나스타샤가 먹먹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인간분들은 사후세계가 있다고 했죠?”
사후세계는 아직까지도 명확하게 그 존재가 증명된 것은 아니지만, 인간들이 오랫동안 믿어온 곳이다. 인류가 우주로 진출하며 많은 종교들이 예전에 비해 힘을 잃었지만, 위험한 우주공간과 척박한 개척환경에 노출된 인류에게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렇지. 엄마 만나면 사과해야지. 스위치 빨리 못 눌러서 죄송하다고.”
빈우는 자신의 어릴 적 트라우마를 떠올리면서도 손을 내려 아나스타샤의 눈가와 코를 닦아주었다. 안드로이드는 인간과는 달리 콧물은 나오지 않지만, 아나스타샤는 주인의 소매를 잡고 거기에 자신의 코를 비볐다. 그리고는 조금 진정된 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질문했다.
“애완동물들도 죽으면 주인을 따라간다면서요?”
“…그렇지.”
“그럼 저도 주인님 따라갈 수 있나요?”
뜻밖의 질문에 빈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은 인간이고, 그녀는 안드로이드다. 인간이 죽은 곳에 과연 그녀가 갈 수 있을 것인가 싶었다.
“글쎄다. 지능이 낮은 동물들도 주인을 따라가는 판국에, 인간하고 같은 지능을 가진 너희가 못 갈 이유가 있을까.”
“하지만 동물들 생명이 있어요. 우린 생명이 없고요.”
그녀의 말에 빈우는 누벨 노르망디의 악몽이 떠올랐다. 아나스타샤의 죽음이 보인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과 아나스타샤의 죽음. 그것이 빈우로 하여금 적들과 위험한 거래를 하게 만든 원인이었다.
“생명이라, 넌 네가 죽었다고 생각하니? 이렇게 팔팔한데?”
빈우의 손이 뒤로 돌아가 아나스타샤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그러자 주인의 짓궂은 장난에 메이드는 발끈하며 주인의 뺨을 때렸다.
“아파아-.”
하지만 되려 때린 아나스타샤의 손이 더 아파한다. 그녀가 아무리 안드로이드라고 해도 기본은 민간용, 군용 강화육체에 비하면 전차와 자전거만큼의 격차가 있다.
“봐라. 내 몸을 보라고. 내 유전자를 베이스로 해 새로 만들어 붙인 강화 육체를. 이 정도면 강화 시술을 넘어서 숫제 사이보그잖아. 너랑 다를 게 뭐가 있어. 너도 생체 부품으로 도배했잖아. 사이보그 시술받은 사람보다는 더 사람답지 않아?”
아나스타샤는 쿠델카란 인물의 유전자를 베이스로 해 만든 안드로이드다. 내부는 기계지만 외부는 생체 부품이 상당히 많다. 빈우의 말대로 생체 비율을 따지자면 오히려 사이보그인 아룹보다 아나스타샤가 더 인간다울 정도다. 그러나 현행법상 아룹 라마누잔은 인간이고, 아나스타샤는 빈우의 개인용 안드로이드다.
“강화, 시술요.”
문득 아나스타샤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의 주인인 빈우가 군용 강화시술을 받을 때의 일을. 아나스타샤는 빈우를 어릴 적부터 품에 안아왔다. 그래서 품에 꼭 안긴 주인의 냄새를 맡고 그가 무엇을 먹었는지, 무슨 장난을 쳤는지, 지금 기분이 어떤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강화시술을 받아 가는 주인의 몸은 무서웠다. 자신이 키워왔던 몸이, 씻어줬던 몸이, 입을 맞췄던 몸이 점차 바뀌는 과정이 무서웠던 것이다. 마치 빈우가 어디론가 떠나버릴 것만 같았었다. 하지만 바뀐 것은 몸에 불과하고 빈우는 그대로 빈우인 것을 알게 되자 그런 불안함은 사라졌다.
“하지만, 하지만 주인님은 자연적으로 태어났어요. 나는 만들어졌고요.”
“따지고 보면 나도 만들어졌어. 누나와 동생들의 씨내리를 하기 위해서.”
“주인님! 그런 말씀을.”
아나스타샤가 황급하게 몸을 일으켜 빈우를 쏘아본다. 잘못한 어린 도련님을 타이르는 눈빛이다.
“안 돼요. 그런 못된 말을. 주인님은 아들을 원하시던 마님이 낳은 것뿐이에요. 그뿐이라고요.”
“…그래, 미안해. 내가 말실수했어.”
빈우가 순순히 사과하자 아나스타샤는 그의 가슴에 앉아서 주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사각사각 쓸려가는 손톱의 감촉이 시원하다. 굳어있는 빈우의 몸이 나른해진다.
“또 무슨 차이가 있을까? 어디? 뇌? 여기도 경화수지 주사하고 두뇌칩 박은 곳이잖아. 칩도 재료만 따지면 네 CPU하고 큰 차이 없고.”
“그게 아니에요.”
아나스타샤는 힘들어하는 주인을 어떻게든 달래주고 싶었고, 보듬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어차피 아샤, 너나 나나 프로그램된 대로 사는 존재야. 인간이나 인공지능이나 욕망에 따라 행동한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큰 차이가 없어. 프로그램된 욕망에 이끌려 따라가는 거지. 인간은 유전자에 각인된 식욕, 수면욕, 성욕, 그리고-.”
“우리 안드로이드는 복종욕, 봉사욕, 헌신욕이랬죠?”
“뭐, 그렇지. 제품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개의 제품은 그렇게 각인시켜. 그리고 너희 같은 상위기종들은 인간의 욕구를 모방하기도 하고.”
이제 아나스타샤는 빈우의 가슴에 팔꿈치를 괴고 다른 팔로 주인의 볼을 쿡쿡 찌르고 있다.
“그것 때문에 인공지능은 주인님한테 걸렸다 하면 절단 난다면서요?”
“정확히는 허수아비들이지. 대화해보면 보여. 그 끝에 무슨 욕망이 있는지 나와. 행동하는 이유와 그 방향의 끝, 최종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파악하면 근원적인 욕구를 알아내는 건 금방이지. 뭐 연방제 인공지능, 그것도 인간을 모방하는 허수아비에 한정된 거긴 하지만.”
말은 쉽지만 실제로 이게 가능한 것은 빈우 정도뿐이다. 다른 베테랑 요원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파악하는 인공지능의 정체를 빈우는 놀라울 정도로 짧은 시간 내에 간파해내고, 그것을 넘어 상대를 조작하기까지 한다.
“흐응, 인공지능은 쥐락펴락하시는 분이 왜 인간을 상대로는 힘들어 하실까?”
“네가 인간을 상대로 뭘 힘들어해. 수틀리면 다 박살 내는데.”
“네에, 연애.”
“아, 직장에선 안 사귄다고.”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농담에 말린 빈우를 보며 키득대며 웃었다. 그리고 빈우는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 애써 외면하려 했던 소중한 것을 품 안에 꼭 껴안았다. 머지않아 놓아야 할지도 모르기에.
“좋아요. 이제야 좀 따뜻해지네. 옛날처럼. 음. 그래, 이 맛이야.”
“나보고 말버릇이니 뭐니 하더니 넌 뭐냐.”
주인이 타박을 하거나 말거나 아나스타샤는 누운 빈우의 위에 자신의 몸을 포갰다.
“주인님은 저를 못 버려요. 제가 주인님을 끝까지 따라갈 거니까.”
“…그래.”
이것을 끝으로 무거운 대화를 마무리하려는 것인지, 아나스타샤가 대화 주제를 바꾸려 했다.
“참참, 아까 주인님이 연애에는 쩔쩔맨다고 했잖아요.”
“누가? 니가?”
“네, 주인님은 왜 여자분들하고 관계가 그따위에요?”
대화 주제를 바꾸는 것은 좋은데, 이것도 따지고 보면 나름 묵직한 주제다.
“글쎄올시다. 마커스는 내가 주변에 여자가 많아서 그렇다고 하던데?”
어머니에 누나와 여동생들, 거기에 아나스타샤까지,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자란 빈우는 그다지 여성스럽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초적인 성격도 아니었다. 마커스 말로는 그냥 ‘여자에게 본능적으로 잘 맞춰주는 십새끼’라고 했다.
“여자를 많이 겪어보신 분이 왜 그딴 식으로 행동해요?”
“내가 뭘. 난 주변의 여성 동료들과 원만해.”
사실 빈우는 주변의 여자들과 나름 원만한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 자신이 저지른 사고에 비하면.
“원마안? 자, 봅시다. 모니카 보르자 대위님하고 첫 만남 어쨌지요? 울었지요?”
“그거 내가 잘못한 거니? 걔 납치된 거 난 구해주려고 했어. 그리고 요즘 사이 좋아.”
“오케이, 넘어가고. 오다 히토미 상원의원님과의 첫 만남.”
빈우가 움찔했다. 히토미와의 첫 만남은 둘 사이에 뭔가 질펀한 게 흘러내렸기 때문이다.
“그건… 좀… 내 실수다. 하지만 히토미과는 요즘 사이 좋아.”
“흠, 하긴 히토미, 히토미 하고 이름을 부르죠.”
밑에 깔린 빈우가 뭐라뭐라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다 무시하고 자기 할 말만 했다.
“파트리샤 피아프 중위님은? 아까도 때렸죠?”
“훈련이잖아.”
“평상시엔?”
“…난 부하는 팬다. 거기에 남녀구분은 없다. 그리고 나는 파트리샤와 친하다.”
하긴 빈우는 남녀평등권(拳)을 사방팔방 날리는 놈이다.
“친해요? 피아프 중위님은 기회가 되면 주인님 바르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
빈우의 대답에 아나스타샤는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새겨보니 빈우는 주변 여성들과 사고를 쳐도 나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특수전 사령부의 캐서린 시슬 사령관도 빈우가 가족을 가지고 큰 실례를 했지만 그녀가 부드럽게 넘어가 줬고, 42전단의 스베틀라냐 스크로도프스카 전단장은 처음부터 빈우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흐흠, 따지고 보니 다샤 쿠사키나 국장님과는 사이가 대단히 안 좋았죠.”
요모조모 따져보던 아나스타샤가 굉장히 불편한 예시를 들었다. 울토르 프로젝트 시절 잠깐 알게 된 응우옌 티빈 중령도 빈우와는 나름 사이가 괜찮았지만, 이전부터 알아 온 다샤 국장만큼은 빈우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그건 좋으면 안 되는 거잖아.”
하긴 군사정보국 요원과 보안국 국장이 사이가 좋으면 졸지에 수상한 일이 된다.
“그럼 알탄훼아나?”
“…샤다이 암컷도 여성에 들어가는 거냐.”
“내 기준엔.”
“이게 기준이냐!”
놀림감이 되어 심통이 난 빈우는 아나스타샤의 가슴을 꼬집었고, 그녀는 식겁하고 팔꿈치로 주인의 얼굴을 내리찍었다.
“아악! 내 팔꿈치 관절.”
“너 왜 그러니. 니가 쳐 놓고.”
오래간만에 즐기는 두 사람의 장난은 그들의 얼굴에 그간 잃어버렸던 미소를 잠깐이나마 돌아오게 해주었다. 둘은 그렇게 한 침대에 누워 장난치며 놀고, 이야기하며 따뜻한 시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