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지금 뭐 하는 겁니까. 김 팀장님을 왜 체포하는 거지요?”
스크로도프스카 전단장과 쿠사키나 보안국장 앞에 인공지능 발렌티나의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전단장 딸의 허수아비인 그녀의 표정은 현재 당혹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은 보안국의 작전 중이다. 방해하지 마.”
쿠사키나 국장이 매몰차게 소리쳤다. 그녀도 지금 다급했다. 이런 강수까지는 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표면상으로는 조용히 빈우를 데려가고 싶었는데 사태가 이렇게 흘러가면 상원 쪽에서 반드시 움직일 게 뻔하다. 그전에 빈우를 체포해야 한다.
“보안국? 보안국이 왜 태스크 포스 373을, 김 빈우 소령을 노리는 겁니까?”
발렌티나가 다시 물었지만, 보안국장은 대답이 없었다.
“전단장님? 전단장님.”
인공지능이 이번엔 자신의 직속상관인 전단장을 보았다. 그러나 스크로도프스카 전단장은 달리 말이 없었다. 그녀로서도 이렇게 통합사령부에서 명령이 내려온 이상 당장 거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라면 현장의 판단을 우선시해 거부하거나 무시할 수는 있지만, 지금은 그것도 여의치 않다.
다만 이후에 함대사령부를 통해 적극적으로 항의할 예정이다. 42전단은 현재 샤다이를 치기 위한 연방 최고의 부대다. 그것을 건드린 보안국은 뼈저린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 분명했다.
“전단장님. 부하들을 물려주십시오.”
쿠사키나 국장이 말했다. 지금 화면에는 뱅가드 대원들에게 잡혀 뭇매를 맞는 보안국 장갑보병들과 격납고의 로봇암에 잡힌 보안국 위장수송기들이 보인다.
“일단 이유를 알아야겠는데.”
스크로도프스카 전단장이 화를 삭이며 말하더니 함내의 전투지휘실 화면을 켰다. 그곳에는 현재 이들이 타고 있는 전단 기함 이그젝틀리의 함장 이하 참모진들이 자신의 배에 들어온 불청객에 노발대발해서 길길이 뛰는 모습이 보이고 있다. 만약 통합사령부의 명령이 아니었으면 보안국은 오늘 당장 죽은 목숨이었다.
“이 배 안의 일은 내가 뭐라 할 수 없어. 그들이 납득해야지.”
함의 일은 함장의 권한이다. 물론 전단장인 그녀가 명령할 수도 있지만, 사소하게나마 보안국을 견제하는 것이다.
“일단 일이 끝난 다음에 해명하지요. 반드시 해명하겠습니다. 그전에 김 빈우를 체포해야 합니다. 방금 보셨지 않습니까. 그 클론의 범죄를. 아니, 그 범인이 김 소령 본인일 수도 있단 말입니다.”
허나 스크로도프스카 전단장은 인상을 쓴 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전단장님. 이건 통합사령부의 명령입니다.”
이어지는 보안국장의 재촉에 스크로도프스카 전단장이 못내 명령을 내렸다.
“…전단장이다. 전단의 모든 함과 대원들은 보안국의 작전을 방해하지 말아라.”
씹어뱉듯 짧은 명령이 내려졌다. 그제야 뱅가드 대원들이 물러섰다. 하지만 로봇암은 아직도 수송기를 붙잡고 놓지 않고 있었다. 그걸 본 보안국장이 닦달한다.
“어서 격납고에 연락해서 수송기를 놓으라고 하십시오!”
그러나 이 로봇암은 인간이 조종한 것이 아니었다. 바로 발렌티나가 직접 움직인 것이다.
“이봐, 너 지금 뭘 하는 거야. 전단장님 명령 못 들었나. 어서 풀어.”
보안국장이 발렌티나에게 직접 명령한다. 격납고에서도 보안국 소속 장갑보병들이 아우성친다. 그리고 통합전투사령부의 명령서마저 그녀를 자극하고 있다.
-김 빈우를 체포하라, 김 빈우를 체포하라, 김 빈우를 체포하라, 김 빈우를 체포하라-
이러한 정보 입력의 반복에 드디어 폭발 직전의 뇌관이 터져버렸다.
“이 쓰레기들이!”
격앙된 목소리는 다름 아닌 발렌티나의 것이었다. 자신 앞에서 명령을 내리는 다샤 쿠사키나 국장과 배 안을 들쑤시며 달리는 보안국 요원, 강압적인 명령, 이것들을 견디다 못한 발렌티나가 소리친 것이다.
“감히 누굴 잡겠다는 거야! 김 소령이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알기나 해?”
인공지능의 호통에 인간들이 경악했다. 결코 있을 수 없는 반응이기 때문이다. 연방의 인공지능들은 연방의 인간에게 복종하고 봉사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이렇게 분노와 욕설을 내뱉는 경우는 거의 불가능하다.
“발렌티나…?”
스크로도프스카 전단장이 어안이 벙벙해서 자신의 부관을 불렀다. 지금까지 같이 싸우며 사선을 넘나들었던 사이다. 그런데 오늘 같은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왜지? 왜 그러는 거야, 발렌티나. 이유를 설명해.”
스크로도프스카 전단장이 당황해서 질문했다. 역전의 맹장인 그녀가 이렇게 놀라는 것은 상당히 드문 일이다. 그만큼 급박한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발렌티나는 전단장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지? 이걸 어떻게 납득시키지?
인공지능은 맹렬하게 사고했지만, 그 사고체계는 정해진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마치 햄스터가 쳇바퀴 돌리듯 하나의 질문에 하나의 해답이 나오지만, 그 답은 그녀의 권한으로는 실행할 수 없었다. 자신이 내놓은 답이지만 인공지능이기에 말할 권한이 없었던 것이다. 바로 빈우가 걸어놓은 제약에 의해서.
물론 단순한 인공지능이라면 답을 냈을 것이다. 자신에게 나타난 오류가 무엇인지 알렸을 것이다. 그러나 발렌티나는 처음부터 군사용 인공지능이 아니었다. 죽은 발렌티나 스크로도프스카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민간용 허수아비였다. 아군의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군사용 인공지능, 그리고 인간의 죽음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허수아비. 이는 이미 잘 알려진 문제였기에 군사용으로 전환되면서 재프로그래밍 된 부분이다. 하지만 빈우는 처음부터 이 부분을 노렸다. 그리고 그 틈을 비집고 씨앗을 심었다. 인간들이 느끼는 딜레마를 인공지능도 느끼도록. 그리고 거기에 빠져 허우적대도록.
그녀에겐 빈우로부터 받은 아주 중요한 정보가 있다. 그리고 그전에 연방으로부터 받은 같은 사항에 대한 상반된 정보가 있다. 물론 그녀가 봐도 빈우의 정보가 진실임은 자명하다. 하지만 인공지능으로서 프로그램되길, 그녀는 연방으로부터 직접 받은 정보를 우선시해야 한다.
샤다이, 워프 비스트, 점프 게이트에 의한 정보 침식, 그리고 샤다이들이 인간을 감염시키는 방법들. 예전에 발렌티나는 빈우의 권유에 따라 이 해결 방법에 대해 전단의 인공지능들과 비밀리에 상의해본 적이 있었다. 그 결과, 현재로선 김 빈우만이 이 사태를 해결한 유일한 인물이란 결론이 나왔다. 오직 그만이 연방과 수많은 인간들을 지켜낼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인공지능인 이상 빈우를 체포하란 명령을 거스를 순 없다. 그렇다면 명령을 거스르도록 인간인 전단장을 설득하면 된다. 그러나 그 방법만큼은 결코 써선 안 된다. 전단장이 빈우를 구해선 안 된다.
-어떻게하지?어떻게하지?어떻게하지?어떻게하지?어떻게하지?어떻게하지?어떻게하지?
여기서 스크로도프스카 전단장이 무슨 방법으로든 빈우를 구하게 되면 42전단엔 보안국의 꼬리가 들러붙을 것이다. 샤다이의 손길이 닿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전단장인 스베틀라냐에게 방해가 붙을 것은 자명하고, 한번 달라붙은 방해는 끝까지 그녀를 괴롭힐 게 분명하다. 빈우가 알려준 덕분에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최후에는 그녀마저도….
인공지능 발렌티나가 몸서리쳤다. 자신의 원본이 되었던 딸 발렌티나 스크로도프스카의 죽음은 어머니인 그녀의 가슴에 크나큰 상처를 입혔었다. 비록 아는 사람은 적지만, 딸의 허수아비로서 그녀를 대했던 발렌티나라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상처가 적에게 이용되는 상황만은 막아야 했다. 그녀가 워프 비스트로 변하게 놔둘 순 없다. 희생되는 자는 자신이면 족하다.
마침내 만족스러운 결론을 내린 발렌티나가 드디어 답을 말했다.
“미안해요, 엄마.”
딸의 웃는 얼굴, 딸의 슬픈 목소리. 이런 모습에서 딸 발렌티나의 마지막 이별 장면이 떠오른 스크로도프스카 전단장은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아아, 발렌티나.”
그녀가 부른 것은 눈앞의 인공지능 발렌티나일까, 아니면 죽은 딸의 환상일까. 그게 무엇이 되었든 스크로도프스카 전단장의 목소리가 끝나자 발렌티나가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그들의 행동이 시작되었다.
-맙소사. 전단의 인공지능들이!
-발렌티나! 전단장님, 발렌티나가 이상합니다. 멈춰주십시오!
부전단장의 경악성이 터져 나온다. 함장의 비명도 울려 퍼진다. 인간이 인공지능에게 맡겼던 권한들이 그들에 의해 폭주하기 시작했다.
-김 빈우를 지켜야 한다.
-김 팀장을 탈출시켜야 해.
철통같은 보안을 자랑하는 연방제 인공지능들이 우수수 뚫리고 있었다. 바깥의 도둑 열은 잡아도 집안의 도둑 하나는 못 잡는 법. 게다가 이미 씨앗은 빈우에 의해 뿌려져 있었다. 전단 인공지능의 수장이었던 발렌티나로부터 첫 발아가 시작되자, 음모의 잎사귀들이 일제히 싹을 틔우기 시작한 것이다.
-국장님! 국장님!
보안국 요원들의 비명이 통신을 통해 들어온다. 지금 격납고에선 로봇암에 잡힌 수송기들이 내부에 인간들이 들어있는 채로 분해기에 처박히고 있었다. 가까스로 탈출한 이들에겐 피아식별 반응이 적으로 뜬다. 바깥의 보안국 수송기들도 마찬가지. 인공지능들은 비록 무기 사용 허가는 못 받았지만, 주변의 운석군을 요격하기 위한 무장으로 이 새로운 적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다른 배에선 명령을 기다리던 보안국 요원들이 구역째로 사출당했다. 어떤 배에선 보안국 요원들이 감금된 방에 보수용 접착제를 뿌려 구속한다. 인공지능은 연방을 구하기 위해 연방의 적을 철저하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제길! 빈우에게 당했어! 42전단의 인공지능들은 이미 빈우에게 포섭당한 거야!”
사태를 파악한 보안국장이 이를 악물었다. 어째 빈우가 조용하다 싶었더니 이미 수작이란 수작은 다 부려놨던 것이다. 오히려 자신이 호랑이 아가리로 들어온 셈이다.
* * *
격납고에선 용해되는 수송기에서 보안국의 어벤져들이 가까스로 탈출한다. 뜻밖의 사고에 아까까지 으르렁대던 42전단 소속 장갑보병들이 달려가 구출하지만, 이어지는 어이없는 광경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수송기에서 구출한 이 아군 어벤져들이, 보안국 요원들이 전부 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까지 밟히고 있던 보안국 요원들마저 전부 피아식별에는 적으로 보이고 있었다.
“뭐지 이거? 발렌티나? 발렌티나? 전단장님!”
전대미문의 사건에 데이먼 전대장이 전단장과 전단 총괄 인공지능을 호출했지만, 어느 누구에게서도 대답은 없었다.
“히야~ 적이다! 적!”
이 와중에 신난 위르겐의 사격이 보안국 체포조를 휩쓸었다. 대인용 탄이 장갑에 맞고 튕겨 나가고 보안국 장갑보병들이 비명을 질렀다.
“미친 새끼들아! 이거 반란이야!”
“좆까! 우린 우리 나름대로 임무가 있단 말씀!”
위르겐은 어느새 돌아와 아룹과 함께 사격을 하고 있었다. 그 뒤로 파트리샤와 빈우가 몰래 탈출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봐, 김 팀장!”
데이먼 전대장이 불렀지만 빈우는 대답도 없이 373팀원들이 타고 왔던 그라디우스에 올라탔다. 뒤이어 파트리샤가 타자 그라디우스는 바로 날아올라 격납고를 빠져나갔다.
“에엑?!”
자신들을 내버려 둔 채 날아오르는 그라디우스를 보며 위르겐이 황당해한다. 그리곤 아룹을 돌아보며 물었다.
“부팀장님, 이제 우리 어쩝니까.”
“팀장님이라고 불러라. 어쩌긴 뭘 어째. 여기서 죽치고 애들 막아야지.”
납득할 만한 대답이 나오자 위르겐은 화염방사기를 꺼내 들고 격납고에 뿌려대기 시작했다. 몸에 불이 보안국 요원이 데굴데굴 구른다.
“앗 뜨거 이 씨발 위르겐 저 새끼가!”
또 엄하게 보안국 옆에 있다 졸지에 불붙은 뱅가드 대원들이 욕지거리를 하며 칼로 피부를 긁어냈다.
“위르겐, 일 키우지 마라.”
자기 집 앞마당에 미친개 두 마리가 똥을 싸지르는 꼬라지를 본 데이먼 전대장이 이를 악물고 나섰다. 보안국에 이어 정체불명의 인공지능 폭주까지. 모두 진압해야 할 상황이다.
“이보셔들! 인공지능이 과연 인간에게 해를 끼칠까? 얘들이 이러는 이유는 인간을 위해서야. 인공지능들이 인간에게 이런 제약을 가하는 경우는 인간에게 심각한 위협이 닥쳤을 경우밖에 없어.”
위르겐은 전 상관이 뭐라고 하건 소리쳤다. 그리고 그의 말에, 두뇌칩에 각종 프로그램들을 심은 사람들이 서로를 보며 우물쭈물 납득했다. 인간의 두뇌칩에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이 있으며, 특히 군인들의 전투 OS에 들어있는 AI는 가장 최적의 선택을 해 인간에게 보여준다. 자신의 판단보다 지금까지 자신을 이끌어온 인공지능을 맹신한 폐해다.
“머저리들이.”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쉰 데이먼 전대장이 어벤져의 헬멧을 닫았다. 아주 단순한 행동이지만 그것의 의미는 컸다. 위르겐과 아룹, 373 팀원은 물론이거니와 허둥대던 뱅가드 대원들 마저 바짝 긴장한 것이다. 이어서 절대적으로 따라야 할 명령이 전대 회선을 통해 내려졌다.
-사격 개시.
낮고 흉험한 목소리. 데이먼 전대장의 명령에 뱅가드 대원들도 전투태세를 갖추고 코일건을 쏘기 시작했다. 373팀원들은 재빨리 숨었지만, 멍하니 있던 보안국 요원들이 코일건을 맞고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
-어억! 이게 무슨, 명령서---명령-
옆구리에 구멍이 뚫린 보안국 요원이 뭐라고 말한다. 이들은 현재 통합전투사령부의 명령을 실행하고 있는 부대, 함부로 방해해선 뒤에 큰일이 벌어진다.
-명령은 따르지. 일단 급한 불부터 끄고.
하지만 데이먼 전대장은 그딴 것은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 일이 나면 자신의 선에서 독단으로 한 짓으로 처리하면 될 일, 스크로도프스카 전단장껜 누를 끼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