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샤워를 마치고 나온 히토미는 가운만 걸친 채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맥주를 마시며 그동안의 자료를 다시금 훑어보기 시작했다.
이번 사건의 발단은 누벨 노르망디에서 샤다이와 교전한 빈우가 워프 비스트로 변이한 것에서부터다. 이후 그는 특수전 사령부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하고 치료를 했다.
‘이때 내가 무슨 행동을 했어야 했어.’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히토미는 자책했다. 상원과 연방정부 내에서 암약하는 조직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보안국과 그 배후를 견제하지 않은 결과가 나비효과를 일으켜 일이 여기까지 온 것이다. 후에 만난 마커스 국방차관은 후회하는 히토미를 위로해주었다.
‘정보원이 5의 가치를 지닌 정보를 가져온다고 합시다. 이 정보대로 행하면 5의 이득을 얻고, 행하지 않으면 5의 손해를 봅니다. 다만 이것을 밝히면 투입한 정보원은 잃게 되고 그 손해는 10입니다. 그러면 정보를 묵살하고 가만히 있어야죠. 5의 손해는 감수해야 하는 겁니다.’
히토미와 그녀의 파벌이 그랬었다. 10의 가치를 지닌 목표를 위해 5의 가치를 지닌 빈우의 위험을 무시했다. 빈우 스스로도 납득한 일이고, 그 자신도 그렇게 하라고 히토미에게 권유했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히토미 자신의 양심은 납득하지 않았다.
“과전이라….”
문득 당시의 전투가 떠오른 히토미가 혼잣말을 했다. 그녀가 빈우에게 물은 적이 있다. 고향을 버려도 괜찮냐고. 그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또, 협력자인 알탄훼아나의 상태는 이런 상태고….’
누벨 노르망디에서 아나스타샤와 함께 지상으로 내려갔던 알탄훼아나는 현재 히토미가 속한 상원 조사단이 데리고 있다.
지금까지 샤다이 쪽의 정보를 넘겨주고 빈우를 치료해줬던 알탄훼아나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망가졌다고 했었다. 지구제국의 고문 후유증에 계속해서 이어지는 빈우의 치료가 그녀에게 상당한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373쪽의 정보에 의하면 지금 그녀의 상태는 상당히 호전되었다고 했다. 두 눈이 뽑혔다는 것만 빼면.
아무튼 전투가 끝난 다음 히토미 측이 숨을 죽이는 동안, 빈우도 특수전 사령부에서 조용히 숨어 지내며 치료를 했었다. 그리고 치료가 끝나자마자 42전단에 합류를 시도했다. 당시 주변인은 모두 말렸다고 했지만, 빈우는 막무가내로 42전단으로 가려고 했었다.
‘왜 김 팀장은 굳이 42전단으로 가려고 했을까?’
특수전 사령부는 태스크 포스 373의 본거지다. 게다가 지금까지 보안국과 충돌한 전적이 있어서, 근처에 보안국이 알짱거렸다가는 개작살이 났을 게 뻔하다. 언뜻 보면 보안국의 손길로부터 가장 안전해 보인다. 그러나 그 보안국이 아무런 밑준비도 없이 쳐들어 올리는 없다. 캐서린 시슬 대장의 정보에 의하면 특수전 사령부 내에 보안국의 끄나풀이 심어졌다고 했고, 그래서 레드우드 사령관도 참모진 구성에 꽤나 애를 먹었다고 했었다. 게다가 만약 이번처럼 통합사령부의 명령서를 가지고 왔었다면 특수전 사령부는 눈을 뻔히 뜬 채로 빈우를 빼앗겼을 것이다.
“의원님, 이것 좀 드세요.”
뒤에서 아나스타샤가 안줏거리 견과류를 들고 왔다.
“아, 고마워. 아나스타샤.”
빈우의 비서인 아나스타샤는 현재 히토미가 데리고 있다. 현재 ‘김 빈우 사건’의 중요 조사대상인 그녀지만 해당 사건의 전담 조사관이 바로 히토미였기에 아주 당연하게 데리고 조사할 수 있었다.
“이건… 주인님께서 42전단으로 가던 당시의 일인가요?”
어깨너머로 자료를 본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그녀는 빈우와 밀착해서 지냈던 안드로이드였던 만큼 히토미는 최대한 조사에 협력해 달라고 했고, 아나스타샤 역시 열성적으로 도와주고 있었다.
“그래, 그 동기에 대해 뭔가 집히는 게 있어?”
물론 대외적인 동기는 빈우가 밝혔다. 하지만 그 속내는 아무도 몰라서 물은 것이다. 하지만 히토미의 질문에 아나스타샤는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하지만 타이 차관님이시라면 뭔가 아실지도 모르겠어요.”
가장 측근이었던 그녀마저 모르는 것이라면 정말 아는 사람이 없을 수도 있다. 허나 마커스 타이라면 다를 수도 있다.
“타이 차관이라….”
히토미는 빈우의 사관학교 동기이자 친구였던 마커스 타이를 떠올렸다. 농업 행성에서 자란 빈우와 달리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탄탄대로를 달린 엘리트 중의 엘리트이고, 현재는 국방부 차관이다.
“김 소령이 워프 비스트로 변했을 때, 타이 차관이 그를 버렸다고 했지?”
“버, 버린 게 아니에요. 두 분 사이엔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어요.”
대수롭지 않은 히토미의 말에 아나스타샤가 화들짝 놀라서 반응한다.
“미안, 내 실수야.”
“아니에요, 의원님.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아나스타샤를 보는 히토미는 마음이 착잡했다. 지금 아나스타샤는 ‘버린다’라는 단어와 행동에 상당히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주인이 자신을 버리고 간 사실에 충격이 큰 모양이다.
아무튼 히토미의 조사에 따르면 김 빈우와 마커스 타이는 절친임과 동시에 긴밀한 협력자였다. 마커스가 아무리 엘리트라고 한들 그 혼자만의 힘으론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군사정보국 차장이 될 수는 없었다. 빈우와 마커스는 서로를 밀고 당겨주는 사이였다. 빈우는 공적을 세워 마커스를 밀어주고, 올라간 마커스는 위에서 빈우를 지키고 당겨준다. 실로 이상적인 협력관계였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보모였던 크산티페를 맡긴다라….”
히토미는 눈앞의 아나스타샤와 똑같은 안드로이드의 홀로그램을 봤다.
“네, 타이 차관님께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저와 크산티페를 바꿔치기할 생각을 하셨습니다.”
쿠델카 모델 안드로이드라면 주인과 꽤나 긴밀한 관계를 구축한다. 빈우와 아나스타샤처럼. 그런 안드로이드를 희생양으로 내세울 정도면 마커스는 결코 빈우를 버린 게 아니었다. 오히려 지켜주려고 한 게 분명했다.
“그때 일을 다시 재생해 주겠어? 아, 말만.”
“알겠습니다.”
아나스타샤는 당시 두 사람의 대화를 재생했다. 그녀의 입에서 두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본론을 말해.
-군사정보국 차장 그만두고, 국방부 차관 할 계획이야.
-그래…. 도움이 되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마커스.
-니가 누굴 도울 형편이냐. 고생해라. 아참. 어머니가 너 좀 보자시더라. 그러고 보니 부상하고 난 다음에 한 번도 연락 안 했지? 나는 이 새끼야, 종종 니네 누나랑 여동생한테 연락했었단 말이다. 방금도 한바탕 치르고 왔다.
-그러게, 내가 좀 바빠서 말이야. 시간 나면 한번 뵙도록 할게.
히토미는 두 사람의 마지막 대화를 곱씹으며 들었다. 그냥 직장을 옮긴다는 내용과 가족한테 얼굴 비추란 잔잔한 대화다. 당시의 상황과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다.
“아나스타샤, 혹시 여기 뭔가 암호라도 있니?”
“아뇨, 제가 알기론 이 대화에 암호는 없습니다. 다만….”
“다만?”
“여기 대사 직전에 주인님께서 반격과 긍정을 뜻하는 수화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알탄훼아나 씨의 치료가 효과가 있단 의미였죠. 또 이것 말고도 두 분 사이엔 예전부터 두 분들끼리만 통하는 암호가 있습니다. 사관학교 때 만드신 거죠. 주인님께서 부상하셨을 때도 두 분은 그것으로 대화를 나누신 적이 있고요.”
“그렇단 말이지….”
“네, 또 저에겐 주인님을 부탁한다고 따로 말씀까지 해주셨습니다.”
히토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맥주를 마셨다. 두 사람의 마지막 대사에선 이별이라거나 앞으로의 중대한 사건에 대해 일체의 언급이 없었다. 아마 이 둘은 그런 일들에 대해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거나, 아니면 이미 예전부터 이에 관해 미리 각오를 해놨을 것이다. 자세한 것은 빈우와 얘기를 나눴던 마커스가 알고 있겠지만, 어떻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마커스 타이라.’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히토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얼마 전 히토미는 이 일과 관련해 마커스와 접촉한 적이 있었다. 빈우를 내란혐의로 체포하려 했었지만, 그는 실제로 탈출했고, 히토미는 부랴부랴 달려와 사건 수습에 전념했다. 그중 하나가 마커스와의 면담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군사정보국의 차장에다 빈우의 친구였으니 무언가 알고 있지 않나 해서였다. 하지만 마커스는 자신은 아는 바 없다, 연방의 반란자와는 연을 끊었다, 그건 당시 대화로 알 수 있지 않느냐, 나도 피해자다, 라는 식으로 말을 돌렸다.
그리고 그때 히토미가 느낀 감상은, 마커스 타이란 인간은 정말 재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건 다른 373 팀원들의 감상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빈우에 대해 정말 헌신적이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게다가 빈우의 가족과 아나스타샤에게도 친절하다. 그러나 그 외의 빈우 부하나 주변인에 대해서는 대단히 재수 없게 굴었다. 혹시 그들을 빈우의 방해꾼으로 여기고 저러나 싶어 아나스타샤에게 물어봤지만, 답은 아니었다.
‘타이 차관님은 원래 그런 분이셔요.’
그래서 히토미는 그러려니 하고 납득했다. 지금 마커스 타이는 빈우를 믿고 있음이 분명하고, 그를 도와줄 것 또한 자명하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겐 결코 협력할 기색이 없어 보였다.
“아나스타샤, 네가 혹시 물어봐 줄 수 있을까?”
“죄송합니다. 그런 것이라면 아무리 저라도 타이 차관님께선 알려주지 않으실 거예요.”
“하아, 어쩔 수 없나.”
히토미는 푸념과 함께 맥주를 들이켰다. 그렇다면 현재까지 빈우가 42전단으로 간 이유와 동기에 대해선 정확히 밝혀진 것이 없는 셈이다. 그가 정말 보안국이나 그 뒤의 마수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간 것인지, 아니면 암약하는 적들을 유인하기 위해서 모습을 드러낸 것인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이걸 모르면 안 되는데.”
히토미는 다음 자료를 보았다. 보안국이 수사 명목으로 42전단에 잠입한 이후의 사건들이다. 처음엔 그저 온건하게 수사 협조 요청을 했었다. 아마도 일을 크게 벌이지 않고 상원의 히토미 파벌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속셈이었겠지. 그러나 빈우는 이에 맞서 특수전 사령부의 긴급체포명령을 들고 와 자신을 스스로 체포해 가려고 했었다.
“내란음모죄라.”
당시의 명령서가 증거품으로서 히토미의 손에서 펄럭인다. 보안국의 다샤 쿠사키나 국장이 직접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특수전 사령부의 조지 레드우드 사령관이 자신의 부하를 직접 체포한다는 내용의 명령서다. 특수전 사령부엔 체포나 조사 권한은 없지만, 보안국의 도움으로 수상한 행동을 하는 부하를 제재한다는 의미다. 물론 빈우가 자신의 도주로를 만들기 위해 만든 명령서지만 현재로선 실제상황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에 질세라 보안국이 통합전투사령부의 명령서를 꺼내 들자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렸다. 그 결과 42전단은 보안국과 태스크 포스 373이 어우러져 아수라장이 되었고, 목표물인 빈우는 부하를 해치고 도주했으며, 그러면서도 42전단의 인공지능을 해킹해 전단 자체를 마비시켜버렸다.
히토미가 부랴부랴 날아와 도착했을 때는 세 세력은 내전 직전까지 간 상황이었다. 보안국은 통합전투사령부의 명령서가 없었으면 인공지능이 아니라 42전단의 인간 손에 직접 가루가 되었을 것이고, 보안국은 보안국 나름대로 42전단의 행동을 문제 삼아 전단 전체를 체포하려고 했다. 그리고 태스크 포스 373은 빈우가 탈출해 버린 다음 혼란에 빠져있는 데다 빈우가 전단의 인공지능을 폭주시킨 것 때문에 완전히 찍혀버린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때 이 사태를 해결해줄 소방수가 있었으니, 바로 군사정보국의 이노우에 고토 국장이었다.
‘실은 우리 군사정보국에선 특수전 사령부와 긴밀한 협조하에 김 빈우 소령이 샤다이와 내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솔리드 베타를 타고 휘하 병력과 함께 나타난 군사정보국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전부터 샤다이와 접촉이 잦았던 빈우에겐 의심스러운 점이 있었다. 포말하우트에서 발 가르단 하스, 그리고 뉴 소노라에 이르기까지 상부에 제대로 보고하지 않은 수상한 행동이 많았다. 그래서 특수전 사령부의 레드우드 사령관은 샤다이에 대한 정보가 많은 군사정보국에 빈우에 대한 조사를 극비리에 의뢰했고, 마침내 군사정보국은 특수전 사령부와 합작해 빈우의 내란혐의를 알아낸 것이다.
그 증거 중 하나가 빈우가 워프 비스트로 변이한 것이고, 42전단의 인공지능을 감염시킨 것이다. 물론 태스크포스 373은 사태가 이렇게 악화되기 전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빈우를 체포하려 했었다. 그러나 공을 서두른 보안국이 나서는 바람에 실패했다, 가 주요 요지였다.
거기에 덧붙여 이번 사건을 빌미로 상원은 보안국을 조지려고 칼을 빼 들었다. 상황이 더 이상 좌시하고만 있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참아왔던 수상한 혐의들이 이자가 붙고 숙성되어 폭발했다. 또 합동참모본부에선 캐서린 시슬 대장이 이번 사건에 쓰인 통합작전사령부의 명령에 대해 의문점을 제기하고 나섰다. 증거도 충분했다.
군사정보국과 특수전 사령부가 합작해서 양념을 친 증거에 상원의 조사팀이 합쳐지자 보안국을 재료로 멋들어진 요리가 완성되었고, 양념의 향기에 이끌려 온 손님들에게 맛있는 식사가 제공되었다. 메인 디쉬는 이제까지 적을 많이 만들어온 보안국이었다. 그렇게 사냥감이 된 사냥꾼은 지금까지 밟아왔던 사냥감에게 질근질근 씹혔다.
물론 이게 가능한 것은 보안국의 적들이 뒤에서 상원에 힘을 실어준 덕분이다.
‘의원님, 도와주십시오. 김 소령을 구해야 합니다.’
그때 군사정보국장인 이노우에 고토는 위급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자신이 하는 말에 입을 맞춰달라고 했고, 히토미는 입을 맞춰주었다. 정말 추잡한 입맞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