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최 민영이 박 혁수를 만난 것은 불과 3개월 전의 일이었고, 그와 재혼하게 된 것은 3주 전의 일이었다. 민영은 전남편과는 그럭저럭 사랑을 했었지만,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이 더 컸기에 두 사람은 합의하고 헤어졌다. 하지만 그 합의에 딸인 수나가 들어가 있지 않았다는 것은 크나큰 실수였다. 연방 사회는 연방 시민인 어린 수나에게 물질적인 것이라면 무엇이든 줄 수 있었지만, 사소한 정신적인 것은 채워주지 못했다. 그리고 그 사소한 것들이 눈 공 구르듯 구르자, 딸의 눈사태에 어머니까지 휘말리게 되었다.
그때 민영은 혁수를 만났다. 젊은 나이의 그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사려 깊었고, 여러 방면에 걸쳐 현명했다. 그러나 민영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혁수가 민영의 딸 수나를 정말 자신의 딸처럼 잘 대해줬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어쩌다 보니 둘은 의기투합해서 결혼했고, 저쩌다 보니 셋은 새로운 개척지를 찾아서 떠나고 있었다.
연방 개척지의 한 구역을 할당받아 시작한 개척 생활은 직할령 시절에 비해 힘들었다. 허나 척박한 삶은 힘들었지만 그만큼 보람찼다. 물질적으로는 부족했지만 정신적으로는 풍족해졌다. 물에 불린 비상식량이 맛이 없어 수나가 풀이 죽자, 혁수는 그것을 꼭 짜서 윤활유에 튀겨주었다. 의붓 부녀 둘이 차가운 새벽공기를 헤치고 나가 방수포로 덮은 웅덩이에서 꺼낸 이슬로 장난치는 것을 보면 민영은 잃어버렸던 웃음의 색을 되찾아 가는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수나야.”
민영은 되찾은 미소로 웃으며 딸을 불렀다.
“네, 엄마.”
흙먼지 투성이인 작업복을 입은 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아빠 오라 그래라. 밥 다되었다고.”
“네.”
쪼르르 달려가던 수나가 멈칫하고 서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오늘 점심 뭐에요?”
호기심 가득한 딸의 시선에 민영은 트랙터의 엔진룸을 열었다. 거기엔 소스에 절인 돼지갈비가 랩에 싸여 라디에이터에 묶여 있었다.
“와!”
달콤한 소스가 듬뿍 묻은 돼지갈비를 뼈째 잡고 먹을 거란 생각에 수나는 기뻐서 웃으며 방방 뛰었다. 그리고 자신도 손가락을 들었다.
“엄마, 저기저기.”
딸이 가리킨 곳은 하늘이었다. 거기엔 수증기 채집용 무인기가 구름 사이를 헤매며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채집기가 왜?”
엄마의 물음에 딸이 방긋 웃었다.
“아빠가 아이스크림 만든대요.”
이번엔 엄마가 웃을 차례였다. 예전에 민영은 고공을 비행하는 무인기에 뭔가를 다는 혁수를 본 적이 있었다. 그게 뭐냐고 묻는 민영에게 혁수는 웃으며 얼버무렸고, 무인기가 착륙하고 나서야 얼버무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 통에 담겨진 우유와 설탕은 저온의 하늘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섞이고 차가워져 아이스크림이 되었다. 그 맛은 정말 재미있었다.
“우리 수나 좋겠네.”
엄마의 미소를 본 수나는 신나서 아빠를 데려오기 위해 달려갔다. 돼지갈비에 아이스크림. 오늘 점심으로 가장 좋아하는 메뉴 두 가지가 갖춰진 수나는 천하무적이었다. 예전이었으면 차를 타고 갔을 거리를 달리던 수나는 아빠를 부르러 가던 중에 뜻밖의 것을 보았다.
“아저씨 누구세요?”
수나는 처음 보는 아저씨를 보고 말했다. 그 아저씨는 수나의 부름에 걸어가다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아저씨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저씨 이름은 빈우라고 한단다. 김 빈우.”
수나가 빈우에게 친근함을 느낀 것은 외모와 말투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언어였다. 아직 어려서 두뇌칩이 없는 수나는 언어가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는 외부 번역기를 써야 했고, 거기선 어색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저 빈우란 아저씨는 혁수 아저씨처럼 번역기를 쓰기 않고도 수나와 말이 통했다.
“전 수나라고 해요. 최 수나.”
수나가 자기소개를 하자 빈우는 푸근하게 웃었다.
“만나서 반갑다. 수나야. 그런데 너 혹시 박 혁수란 사람을 아니?”
“네, 알아요. 우리 새아빠예요.”
수나의 대답에 빈우는 놀랍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아저씬 수나 새아빠를 만나고 싶은데, 안내해줄 수 있겠니?”
“네, 저 지금 아빠 부르러 가요. 저 따라오세요.”
수나가 길을 앞장서서 걷자 빈우는 뒤를 따라 걸어왔다. 그러나 그의 걷는 폼은 조금 이상했다. 정확히는 시선 처리가 어색했다. 눈보다는 귀가 걷는 방향을 훑고 있었다. 수나는 사람이 그렇게 행동할 때는 무슨 이유가 있는지 혁수에게서 배웠다. 그래서 호기심에 질문했다.
“아저씨는 눈이 안 보여요?”
뜻밖의 질문에 빈우는 피식하고 웃어주었다.
“그래, 조금 불편하단다.”
그 말에 수나는 손을 내밀었다.
“제 손을 잡으세요.”
어리둥절해 하는 빈우의 손을 수나가 잡고 이끌었다.
“고맙구나. 수나는 정말 착하네.”
빈우라는 아저씨는 눈이 불편했지만 험한 길을 곧잘 걸었다.
“아저씨는 눈이 안 보여도 잘 걷네요.”
“수나가 도와준 덕분이지.”
맛있는 점심 식사에 처음 보는 아저씨의 칭찬. 수나는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아저씨 눈은 치료할 수 없나요?”
“으음, 치료하는 중인데 잘 안되네.”
수나는 빈우의 손을 끌고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혁수가 일하는 곳으로 걸어갔다. 지금 혁수는 한창 지반을 다지는 공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초음파 분쇄기로 땅을 갈아 부수고, 중력 압착기로 다진다. 그다음 골조를 심어 기초를 만드는 것이다. 건물을 짓고 있던 그에게 딸의 부름이 들려온다.
“아저-, 아빠.”
수나는 하마터면 아저씨라고 부를뻔한 실수에 어깨를 움찔했다.
“우리 수나, 무슨 일이니?”
혁수는 팔로 땀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딸이 무슨 이유로 왔는지 대강 파악한 그는 지금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정리할 준비를 하려 했다. 그런데 수나의 옆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근처에 있는 개척민은 아닌 걸 보니 아마 꽤 먼 곳에서 온 듯싶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공구를 챙기는 혁수의 귀로 차가운 비웃음이 들려왔다.
“하, 소꿉장난하나.”
의외의 대답에 멈칫한 혁수는 정리를 하다 말고 고개를 돌려 빈우를 보았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봤는지 깨닫고는 경악했으며, 딸은 탄성을 질렀다.
“와아.”
빈우 아저씨의 선글라스 안쪽에서 금빛 섬광이 새어 나오자, 수나는 그것을 넋을 잃고 바라봤다. 다쳤다는 아저씨의 눈에서 빛이 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빠는 그것을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겁먹은 것처럼 보였다.
“수나야.”
빈우가 다정하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수나를 불렀다.
“아저씨는 아빠랑 비밀 얘기를 할 게 있단다. 잠시 자리를 비켜주겠니?”
그러면서 손으로 수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어서 머리를 잡고 몸을 돌렸다. 마치 부드러운 이불에 싸여 엄청난 힘에 떠밀린 듯, 수나의 몸이 돌아섰다.
“어어, 점심은?”
수나가 다시 고개를 돌려 아빠를 보자 혁수는 조심스레 딸을 타일렀다.
“수나야. 아빠는, 이 아저씨와 할 이야기가 있단다. 그러니까 엄마한테 가 있어.”
수나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라, 빈우와 새아빠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눈이 금빛으로 빛나는 아저씨와 겁에 질린 아빠. 아이는 이 혐오스러운 기시감의 정체를 어렴풋이 눈치챘다. 예전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엄마와 예전의 아빠가 이런 분위기에서 이런 말로 수아를 방으로 돌려보내던 때가 기억났다. 사랑하는 가족들의 싸움은 정말 싫었다.
“…나 안 갈래.”
빈우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버티는 수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그 아이의 머리카락을 한 가닥 잡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딸은!”
그 모습을 본 혁수의 비명이 튀어나오다 잦아들었다. 빈우가 노려본 탓이다. 그의 금빛 눈은 혁수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알아, 지랄하지 마. 다 보여.”
수나는 빈우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도 모르고,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다만 아빠가, 혁수가 겁먹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 혁수가 다급한 목소리로 재촉해 온다,
“수나야. 어서 엄마한테 가 있어. 아빠는 저 아저씨하고 할 이야기가 있어. 어서.”
이어지는 재촉에 수나는 겁이 더럭 났다. 혹시 이 싸움 끝에 새아빠 혁수가 떠날까 무서워졌다. 하지만 자기가 뭐라고 말을 하든, 이 두 어른은 들을 기색이 없어 보였다. 아이가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하던 그때, 이 상황을 해결해 줄 사람이 수나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엄마다. 엄마는 무엇이든 알고 있고,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었다. 수나는 이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할 자를 향해 달렸다.
“엄마 불러올게요. 우리 엄마 엄청 무서워요.”
반쯤은 엄포이고 협박이었던 외침에 누구에게서도 아무런 대답은 없었다. 그것이 수나의 걸음걸이를 더욱 빠르게 재촉했다. 그 덕에 돌아가는 길은 오던 때보다 시간이 훨씬 적게 걸렸지만, 수나가 느끼기엔 훨씬 오래 걸렸다.
“엄마! 엄마아!”
엄마를 외치며 달려오는 딸의 모습에 민영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수나야, 무슨 일이니.”
“아빠가, 눈이, 금색으로 반짝이는, 모르는 아저씨하고, 싸워요.”
숨이 차서 할딱이는 수나의 말은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러나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모르는 아저씨?”
이 땅은 세 가족이 일구는 새로운 개척지다. 모르는 사람이면 이 근처가 아니라 먼 곳에 있는 개척민일 것인데, 그들하곤 왜 싸운단 말인가. 그러나 울먹이는 딸의 모습에서 민영은 무언가 좋지 못한 느낌이 들었다.
“수나야, 여기 있어. 엄마 금방 갔다 올게.”
민영은 공구함을 뒤져 리벳건을 꺼냈다. 압축가스로 리벳을 발사한 다음 레이저로 용접하는 공구다. 예전에 혁수가 가르쳐준 대로 세팅해서 쏘자 돼지 한 마리가 금세 도륙이 났다. 위급할 때 여차하면 무기로 쓸 수 있다는 혁수의 말에 민영은 이를 잘 기억해두고 있었다. 되도록 이렇게 쓰지 않는 게 좋다는 혁수의 말과 그의 슬픈 얼굴 또한 떠오른다. 그런 그녀에게 딸의 슬픈 얼굴이 보인다.
“딸, 딸!”
민영은 울기 직전의 수나를 다그치며 눈을 마주쳤다.
“울지마. 엄마가 해결할게. 그러니까 울지 말고 기다려. 알았지?”
엄마의 말에 수나가 입을 꾹 일그러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흔들리는 눈동자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힌다.
“응, 금방, 와야. 해.”
숨이 차서가 아니라 울음에 먹혀 잘리는 대답. 그 말을 뒤로하고 민영은 트랙터를 몰아 달렸다.
혁수가 일하던 곳으로 달려가던 민영은 자신의 불길한 예감이 점차 사실로 되어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엉망이 된 작업 현장. 나뒹구는 공구. 그리고 건물 안으로 무언가가 끌려간 흔적,
“혁수야.”
민영은 트랙터에서 뛰어내리며 자신의 반려를 불렀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혁수야, 누나 왔다. 혁수야!”
그때 혁수가 짓고 있던 건물 안에서 누군가 나왔다. 남자였지만 혁수는 아니었다.
“당신 누구야!”
앙칼진 민영의 외침에 그 남자는 작지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혹시 수나 어머님이십니까?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김 빈우라고 합니다. 따님이 모시러 간 것 같은데, 엇갈린 듯합니다.”
민영은 리벳건을 들어 빈우를 겨눴다.
“혁수는? 혁수 어딨어?”
그러나 빈우는 슬픈 얼굴을 할 뿐 대답은 없었다.
“저리 비켜, 물러나. 거기 꼼짝 마.”
리벳건으로 빈우를 협박해 물러나게 한 민영은 안으로 달렸다.
“혁수야! 박 혁수!”
짓고 있는 건물의 복도를 달리며 민영은 소리쳐 불렀다. 그러나 그녀의 부름에 대답은 없었다. 대신 냄새가 먼저 났다. 피비린내, 고기 누린내, 똥 냄새와 오줌 냄새. 이어서 보인 광경에 민영이 보인 반응은 구역질이었다. 그녀는 예전에 혁수가 돼지를 도축하는 것을 어깨 너머로 얼핏 본 적이 있었는데, 지금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뒤늦게 찾아온 공포와 혐오에 민영은 뒤돌아서 도망쳤다. 거기에 슬픔과 애도가 들어올 틈은 없었다.
구르듯이 집 밖으로 달려 나온 민영의 뱃속에서 무언가 울컥 올라왔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욕지기에 눈물이 팽 돌며 그녀는 주저앉아 토했다.
“웨에에엑!”
한차례 토사물이 솟구쳐 나온 입에서 뒤늦게 울음이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떠오른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그런 그녀의 뒤로 빈우가 다가와 등을 두들겨 준다. 그 감촉에 민영은 소스라치게 놀라 리벳건을 잡아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토사물이 묻은 무기로 빈우를 겨눴다.
“너야?”
두들기던 손 그대로 멈춘 빈우는 민영을 올려다보았다.
“너냐고, 이 새끼야?”
빈우는 고개를 슬쩍 돌려 자신이 나오고, 민영이 도망쳐 나온 건물 안을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다시 민영을 마주 보았다.
“네, 그렇습니다.”
그 대답에 민영은 지체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금속제 리벳이 가스압에 발사되어 빈우에게 명중하고, 고온의 레이저가 그 끝을 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