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포말하우트 점프게이트 안, 솔리드베타의 격납고에서 빈우는 방패조를 따라 전진했다. 저쪽에서 샤다이들이 공격을 퍼붓고, 그에 맞서 내열방패를 몇 겹이나 둘러싼 어벤져들이 전진해보지만 너무나 거센 플라스마의 포격에 휩싸여 터져나간다. 지금 솔리드 베타를 공격한 샤다이들은 지금까지의 스팸과는 차원이 달랐다. 장갑복의 성능도 성능이지만, 싸우는 실력 자체가 아득하게 차이 난다. 지금 싸우는 울토르 중대원들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지금까지 연방은 샤다이와의 압도적인 기술력 격차를 압도적인 전투기술 우위로 간신히 이겨왔다. 그러나 전투기술이 동등한 상황이 되자 지금처럼 전황은 일방적으로 되었다.
전방의 방패열이 무너지고 빈우 또한 포격에 휩쓸려 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격납고 바닥에 쓰러진 채로도 코일건을 겨눴지만, 신형 샤다이들의 움직임이 더 빨라서 코일건은 채 쏴보지도 못하고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이어서 좌우의 샤다이들이 재빨리 달라붙어 그의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웠다. 스팸과는 비교도 안 되는 출력에 빈우의 어벤져는 저항할 수 없었다. 하지만 죽이지 않고 끌고 가는 모습을 보아 놈들은 빈우를 생포할 속셈인 듯했다. 어떻게 대응할까 머리를 굴리며 주위를 살피던 빈우가 본 것은 소극적으로 변한 샤다이의 공세였다. 놈들의 공격은 방금 전까지와는 달리 기세가 한풀 꺾여 있었다.
‘놈들은 압도적인 화력에도 불구하고 굳이 솔리드 베타 안으로 들어와 근접 전투를 했다.’
이 샤다이들의 목표는 나포 또는 생포임이 분명했다.
-전투 중지. 전투 중지. 후퇴해. 뒤로 물러나서 상황을 살펴.
빈우가 두뇌 통신으로 급히 명령을 내렸다. 폭탄을 들고 돌진하던 대원들이 즉시 뒤로 물러서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흉흉한 기세로 중대원들을 도륙 내던 샤다이들 역시 전투를 멈추고 더 이상 싸우려 들지 않았다. 역시나 놈들의 목적은 빈우의 생포인 듯싶었다. 그렇다면 장단을 맞춰주다가 방법을 찾으면 될 일이다.
“흐흠, 눈치가 빠르군요. 우리 수고가 줄겠어요.”
그때 샤다이중에서 한 놈이 걸어 나왔다. 물러서는 주변 샤다이의 반응으로 보아 놈이 지휘관인 것 같았다. 그는 붙잡힌 빈우의 앞에 서서 헬멧을 벗었다. 제법 잘생긴 샤다이 남성의 얼굴에서는 오만과 자만이 마치 개기름마냥 질질 흘러내리고 있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집정관을 맡고 있는 체메트디오프라고 합니다.”
놈은 이쪽의 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집정관이란 단어로 보아 놈의 직책은 상당히 높아 보였다.
“그래서 그 집정관께서 이곳엔 무슨 일인가?”
이놈들의 목적은 단순한 공격이 아니었다. 뭔가 노리는 것이 있었고, 그것을 위해 빈우를 생포, 대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최대한 말을 걸어야 한다. 이런 싸움도 빈우에겐 나름 장기였다. 빈우는 주위를 둘러보며 다시 말을 걸었다.
“어떻게 이런 점프 공간 안에까지 들어올 수 있었던 거지?”
빈우의 말에 체메트디오프는 의아한 표정으로 빈우를 바라보았다.
“점프 공간? 점프라? 설마 이렇게 뛰는 것 말입니까?”
그리고 방정맞게 폴짝폴짝 뛰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빈우가 서서히 고개를 끄덕이자 놈은 해맑게 웃기 시작했다.
“아하하하! 이거 걸작이군요. 점프라니. 하하하, 점프라면 물가를 뛰어넘어야 점프지요. 물속으로 들어가 첨벙첨벙 온몸을 적시면서 무엇을 점프라고 하십니까.”
뭔가 의미심장한 말이 나왔다. 체메트디오프는 웃음을 거두고 미소를 띠며 빈우를 훑어보았다.
“으흠. 우리가 하는 것은 점프가 아닙니다. 그래요. 당신들 언어로 번역하면 뭐랄까. 응… 그래.”
마침 답을 찾았다는 듯이 체메트디오프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빈우를 마주 보았다.
“존트! 맞아요, 우리가 하는 공간이동은 존트입니다. 아마도 당신들 단어 중에서 가장 가까운 것인데… 혹시 아시려나?”
“내 이름은 김 빈우.
내 나라는 인류연방.
내가 머무는 곳은 깊은 증오.
그리고 내 목적지는 인간 외 모든 것들의 죽음.”
즉시 나온 빈우의 대답에 체메트디오프가 놀랍다는 듯이 박수를 쳤다.
“좋아요. 생각 외로 양식 있는 분이셨다니 대화에 보람이 있겠어요. 얼굴에 문신을 새길 필요는 없었군요. 앗하하하.”
수확을 얻었다는 듯이 흡족한 미소를 짓는 체메트디오프, 그리고 빈우 역시 몇 가지 수확을 얻었다. 놈은 인류에 대해 잘 알면서도 그 범위는 기형적이고 파편적이었다. 그 예로 체메트디오프는 과거 인류의 문학에 대해서는 세밀히 알면서도 현재의 인류가 쓰는 점프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어쩌면 관심이 없는 것일 수도.
“음. 마침 당신이 주제를 정확하게 찔렀으니 그럼 본론으로 돌아가죠. 아까 우리 종족의 이동 방식이 존트라고 했죠? 하하하, 그래요. 우리에겐 좌표만 있으면 이동은 쉽습니다. 여러분은 숱하게 겪으셨을 겁니다.”
놈의 말마따나 연방은 샤다이들의 공간이동을 이용한 히트 앤드 런에 지독하게도 당했다.
“하지만 아무리 우리라 해도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은 꽤나 힘이 들지요. 그래서 별도의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체메트디오프는 격납고 바깥의 풍경을 가리켰다. 일렁이는 점프 공간이 보인다.
“이건 통로가 아닙니다. 씸이라고 합니다. 당신들 언어로는 계단? 같은 거겠죠. 아마도? 방금 제가 말한 대로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정확히는 도망치기 위한 도구죠. 설마 당신네 종족들조차 이것을 이렇게 쓸 줄을 몰랐는데 말입니다. 황제가 방치했으려나? 처음엔 분명히 막았었는데….”
마치 혼잣말을 하듯 점프 공간을 보며 기웃거리던 체메트디오프가 거기까지 말하더니 확 하고 다가와 빈우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금색 실타래가 일렁이는 그의 눈은 빈우에게서 육체나 물질 그 이상의 것을 보는 듯했다.
“으음, 좋아요. 감춰지지 않는 의문에 찬 표정. 하지만 그것조차 자신의 무기로 삼으려는 마음가짐. 아주 좋아요. 오늘 우리가 여기에 온 목적을 달성하려면 먼저 당신을 이해시켜야 하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경청해 주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총명함 역시 마음에 드는군요. 제 설명이 미흡해도 잘 알아들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자아, 설명이 좀 길 겁니다. 그만큼 이 계획 또한 길죠.”
한쪽으로는 경계하고 총을 겨누는 울토르 중대원들이 서 있다. 다른 한쪽으로는 정렬한 샤다이들이 서 있다. 그리고 그 두 무리의 가운데에서 체메트디오프는 빈우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우리 샤다이는 과거 우주의 멸망을 보았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보여선 안 되는 타키온이 보였던 거죠. 아시다시피 허수질량을 가진 이놈들은 같은 좌표에 있어도 시간축이 틀려 관측이 되지 않습니다. 그게 보인다는 것은 우주 끝의 공간이 붕괴되면서 거기에 튕겨 나온 타키온들의 시간 또한 뒤틀렸다는 의미죠. 이유는 모르지만, 우주의 가장자리가 붕괴했다면 멸망은 확정된 겁니다. 그래서 선조들은 도망쳤습니다.”
그러면서 체메트디오프는 다시 점프 공간을 가리켰다.
“바로 이 씸을 통해서 말이죠. 아차차. 계단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 선조들은 이 우주의 멸망으로부터 벗어나 다른 차원으로 도망가려 했습니다. 어딜까요? 4차원? 하하하.”
체메트디오프는 웃고 있지만, 그 표정은 어딘가 공허했다.
“뭐가 어쨌든 간에 선조들은 이 우주를, 이 차원을 벗어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그때 선조들은 충격적인 사실을 알았습니다.”
공허한 표정에 이어져서 차오르는 감정은 분노였다.
“우린 그저 그림자였던 거예요. 위쪽 차원에는 이미 우리 샤다이들의 본체라 할 수 있는 종족이 존재하고 있었고, 우린 그들의 그림자에 불과했단 말입니다. 공간축에 시간축이 있어 시간 이동이 자유로운 그들에게 있어 우리는 그저 한순간의 단편적인 기록입니다. 말 그대로 그들이 3차원이라면 우린 땅에 비친 2차원의 그림자. 그래요, 당신들 종족이 쓰던 그림이나 사진 같은 수집품 정도일 겁니다. 그걸 안 선조들은 슬픔과 절망에 미쳐버렸죠. 으음, 당신들 말로는 뭐랄까. 지구를 구한 용사가 깨어나 보니 추레한 거지의 꿈이었다- 가 비슷할까요. 하하, 끝을 모르고 치솟던 자만심을 동아줄 삼아 도망치던 선조들에겐 동아줄이 가치를 잃어버린 사건이었습니다. 아니, 우리 종족의 존재 의의 자체가 부정당한 거란 말입니다.”
그리고 빈우는 그의 분노가 불합리한 억압과 질투에 의해 터져 나오는 것임을 경험을 통해 잘 알 수 있었다.
“아등바등 저 위쪽으로 올라갔더니 그림자 취급에 더해 장난감 취급까지 당하던 선조들은 위쪽 존재들에게 그들로부터 버려졌습니다. 재미가 없어진 거겠죠. 위쪽 존재들의 자비에 감사와 저주를. 버려진 선조들은 다시 계단을 굴러떨어져 내려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차원을 넘어 올라갈 때 육신을 벗어버렸어요. 돌아갈 몸은 없죠?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요? 뺏어야죠.”
체메트디오프가 뭔가를 조작하자 빈우의 눈앞에 여러 종족들의 모습이 보여진다. 시각과 청각만이 아니다. 저 외계 종족의 감정마저 생생하게 느껴진다. 일견 멀쩡해 보였던 한 종족의 몸에서 갑자기 뿔이 솟아난다. 송곳니가 솟구치고 몸이 뒤틀린다. 그렇게 괴물이 된 자가 한때 동족이었던 것을 무참히도 공격한다. 그리고 그들이 고통과 후회 속에서 발버둥 치는 게 빈우에게 느껴졌다. 종족이 달라도 알 수 있는, 빈우의 감정이었다.
체메트디오프는 빈우와 함께 그 광경을 감상하며 말했다.
“계단을 내려온 선조들은 간신히 이 우주로 돌아왔지만, 계단을 벗어날 수는 없었어요. 그저 계단 안을 떠돌 뿐이었죠. 하지만 후발종족들이 우연히 이 계단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당신네들처럼. 이 계단을 위로 가는 게 아니라 옆으로 가는 도구로 쓰기 시작한 거죠. 그래요. 점프입니다.”
집정관의 설명과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빈우는 뭔가 으슬으슬해지는 것을 느꼈다. 점프 게이트가 원래는 샤다이의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놈이 거짓말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저 짓누르면 터져버릴 상대를 이렇게 귀찮게 붙잡아서 공들일 가치가 과연 있을까 스스로에게 반문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빈우에게 체메트디오프의 설명이 들려온다.
“하지만 점프를 하면서 계단 안으로 들어온 종족에게는 우리 선조들의 정보가 겹쳐집니다. 여긴 우리 선조들의 정보가 들어있는 공간이거든요. 당연히 적셔지는 거죠. 뭐어 적셔지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당신들의 도서관에 몰래 책 몇 권이 꼽힌 셈이니까요. 하지만 그 적셔진 존재의 정신이 불안정해지고 무너지면 선조들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적셔진 자들의 상처를 후벼 파 운명을 빼앗고, 기억을 훔쳐 먹고, 정신을 장악하는 도둑질이죠. 그게 끝까지 달하면 마침내 적셔진 자들의 존재 자체가 계단의 마지막 부분이 되고, 그때 선조들이 그 계단을 타고 내려와 마침내 몸을 차지합니다.”
여기까지 말한 체메트디오프는 빈우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빈우는 원래 서로 대화를 하며 시간을 벌고 틈을 찾을 셈이었는데,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실에 미처 말할 겨를이 없었다.
“그렇다면… 고대 샤다이들이 돌아와 다른 종족들의 몸을 빼앗는다는 말인가?”
“맞습니다. 하지만 잘되지 않았어요. 보시다시피 선조들이 뒤따르는 자의 몸을 빼앗는 것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망가진 선조의 정신. 열등한 후발종족의 육체. 결과적으로 저런 괴물이 탄생하는 거죠.”
“그렇다면 왜 너희 종족들의, 그러니까 후손들의 몸에 들어오지 않는 거지?”
“그건 살인이잖아요. 우린 평화적인 종족입니다. 살생은 좋아하지 않아요.”
체메트디오프는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나 이놈들은 자신들 외에는 지적생명체 취급조차 하지 않는 놈들이었다.
“친절도 하군. 왜 내게 이런 것을 알려주지?”
지금 샤다이의 집정관이 알려주는 사실들은 모두 어마어마한 것들이었다. 자칫하면 연방 자체가 뒤집어질 사안들이다. 연방 구성의 근간이 되는 점프 게이트의 존재 자체가 고대 샤다이들의 본거지가 되어 위협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왜 지금 굳이 빈우에게 알려주는 것일까.
“잘 아시면서. 당신이 중요한 키이기 때문이죠.”
그러면서 체메트디오프가 손짓했다. 빈우를 붙잡고 있는 샤다이들이 빈우를 일으켜 세워 집정관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몸을 돌리게 만들었다. 그때 빈우가 본 것은 울토르 중대의 어벤져들이 부들거리며 떨고 있는 장면이었다. 빈우의 지휘관 회선으로 대원들의 상태가 급변하는 게 보여진다.
“하하하! 마침내.”
체메트디오프의 광소와 함께 어벤져 하나가 쓰러졌다. 클론 중대원이 헬멧을 벗자 거기엔 흉측하게 변하고 있는 빈우의 얼굴이 보였다. 흰자위가 뒤집혀 변하고, 이빨들이 비정상적으로 커져 입을 뚫고 나온다. 알파 라인의 그 대원은 솟구쳐 나온 손톱으로 미친 듯이 장갑복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그만이 아니었다. 다른 대원들 중에서도 그런 변이가 일어나 클론 중대원들은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당황하는 빈우의 귀로 체메트디오프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보셨습니까? 보이지요? 당신의 복제체들이 변하는 모습이? 당신들도 그렇게나 계단에 들락거렸으니 당연한 결과지요. 전투로 지친 클론들의 정신이 피폐해지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죠.”
빈우의 두뇌 통신으로 변이하는 대원들의 감정과 정신상태가 공유된다. 빈우뿐만이 아니었다. 클론들끼리의 두뇌 통신은 인간끼리의 두뇌 통신보다 훨씬 깊고 예민하다.
울토르 클론들이, 빈우의 클론들이 저마다 두뇌 통신으로 연결되며 괴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현상은 빈우에게도 들이닥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