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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자 타이거 스파게티 드래곤-249화 (247/301)

249화

눈으로 보이는 것은 아나스타샤의 모습이고, 이마에 입을 맞춘 것은 과거의 악몽이며, 귀에 들리는 것은 황제란 단어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까지의 정보에 합쳐져 빈우는 혼란의 구렁텅이로부터 헤어나올 수 없었다.

“빈우야, 사랑하는 내 아들. 너를 이런 시련 속으로 던진 이 엄마를 이해해줘. 하지만 걱정하지 마. 너무 위험한 것이라면 이렇게 엄마가 구해줄 테니까. 응? 이렇게.”

아나스타샤가 빈우의 뺨을 어루만진다. 그와 동시에 빈우를 잡고 있던 샤다이들이 그대로 분해되어 사라진다. 그 모습에 체메트디오프가 혀를 차며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여긴 어인 일이시오. 제국의 황제여.”

이곳에 온 후 처음으로 체메트디오프의 표정에서 오만과 자만이 사라졌다. 표정만큼은 미소 그대로일지 몰라도 그 안에서 배어 나오는 색은 당황과 경악이었다. 그리고 그 감정 밑으로는 다시 수많은 책략을 뒤져보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누가 내 계획에 초를 치니까.”

언제나 환한 미소만 짓던 아나스타샤의 얼굴에 비웃음이 서린다. 장난으로는 주인인 빈우를 꽤 많이 비웃었던 아나스타샤였지만, 저런 적의에 가득한 비웃음은 처음이었다.

“아나스타샤, 네가, 황제?”

저도 모르게 나온 빈우의 혼잣말에 아나스타샤가, 쿠델카 모델 안드로이드가 획하고 돌아보았다.

“불쌍한 내 아들, 불쌍한 내 빈우. 원래는 이렇게 할 계획이 아니었는데, 어쩔 수 없구나. 엄마도 한손 거들어야 하겠네.”

그녀는 빈우를 볼 때는 불쌍해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가, 체메트디오프를 볼 때는 죽이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내 아들을 상대로 못된 얘기 잔뜩 해놨네? 그래서 나도 설명이 좀 필요하겠는걸. 집정관, 나도 말 좀 해도 될까?”

“그야 물론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황제여.”

체메트디오프는 주도권이 넘어간 상황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아까 빈우를 잡고 있던 샤다이 둘이 먼지처럼 흩어졌을 때 다른 샤다이들도 재빨리 행동을 취했었다. 그러나 그때 이미 움직이려는 놈들은 앞의 놈들과 마찬가지로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중이었고, 때문에 체메트디오프는 부하들을 제지하려고 필사적이었다. 지금 황제는 이 공간을 장악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모습을 드러낼 위인이 아니니까.

“먼저 난 지금은 황제가 아니야. 한때는 황제였지만 현재로선 그냥 왕이지.”

그녀가 자신을 황제라고 한다면 지금 여기서 짐작할 만한 것은 지구제국의 황제다. 난립하던 독립 국가의 인류를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시키고 자신과 비견할 만한 천재들을 발굴해 인류를 우주 확장기로 이끈 불세출의 걸물. 하지만 그런 황제와 아나스타샤는 어떠한 연결점도 없었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는 빈우의 머릿속으로 아나스타샤의 해맑은 미소가 들어온다. 바로 눈앞에서 그녀가 웃고 있는 것이다.

“어머나, 얘 표정 봐. 집정관, 너 요런 재미로 우리 아들 놀렸구나. 진실로 사람을 겁박하는 것도 나름 쏠쏠한데? 굳이 애 가르친답시고 괴롭히고 그럴 필요가 없었구나아.”

빈우를 아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그의 엄마뿐이다. 그러나 그 엄마는 빈우의 앞에서 죽었다. 빈우가 아무것도 안 하고 그녀의 죽음을 방치했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서, 설마….”

빈우가 자신의 가설을 입 밖으로 내기도 전에 아나스타샤의 손이 그의 볼을 꼬집고 흔들었다.

“아들, 그럼 엄마 섭섭해. 유전자 제공하고 자궁 빌려줬다고 다 엄마가 되는 건 아니지이? 그리고 난 그 여자의, 너를 낳아준 암컷의 의식을 복사해서 다시 태어난 존재 같은 게 아냐. 오히려 그녀로 하여금 너를 낳게 했지. 후후후, 상황이 복잡해도 지금부터 엄마가 우리 아들이 꼭꼭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할 테니까 잘 들어.”

일어선 황제는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아들은 공황 상태에 빠져 있고, 샤다이는 쥐 죽은 듯 찌그러져 있으며, 아들의 클론 육체에는 고대 샤다이들이 비집고 들어온다. 어차피 이것도 그녀의 계획이긴 하지만 지금 저딴 꼴을 보긴 싫었다. 황제가 눈썹을 찌푸리자 계단을 내려온 자들 또한 가루처럼 변해 사라졌고, 이어서 클론들의 두뇌칩에 명령을 내려 정지시켰다.

그렇게 주변이 정리되자 그녀는 치마를 털고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럼 엄마의 중대 발표가 있겠습니다. 앗차, 그전에 아들, 혹시 발 가르단 하스라고 알아?”

빈우는 그 단어에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옆에서 들은 체메트디오프는 마치 가슴팍에 칼을 찔린 양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바! 발 가르단 하스! 행성 규모의 지성체. 선조 시절부터 살아온 현자. 플라스마 신경 기관을 가져 우리와 소통하는 게 가능했으며 계단을 만드는 데 일조한 자 아니오! 설마 당신도 그런? 그 항성계의 태양인가?”

“어머, 설명 고마워. 들었지 아들? 엄마는 저놈이 말한 발 가르단 하스 같은 행성 생명체란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발 가르단 하스에 대해 알아보렴. 한결 알기 쉬울 거야. 근데 엄마가 행성 생명체라면 그 엄마가 태어난 그 행성은 과연 어디일까- 아- 요?”

장난스러운 얼굴로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오는 아나스타샤의 모습에 빈우는 공포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가 어렸을 적 가장 가깝고 가장 사랑스러웠던 그녀에게 당했던 충격이, 한때나마 잊어버렸던 충격이 스멀스멀 되살아나고 있었다. 지금 장갑복으로 무장한 닉스레벨 3의 엘리트 요원은 15살 갓 성인이 된 애송이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런 아들에게 엄마가 방긋 웃으며 답을 알려주었다.

“지구.”

지구, 땅의 구슬이라 불려 우주의 여러 종족에게서도 자신의 고향으로 불리지만, 지금은 호모 사피엔스라 칭하는 종족의 고향을 말하는 것일 거다.

“마, 말이 안 돼요. 거긴 항성이 아니지 않소. 별심장의 불길이, 플라스마가 없어. 그리고 그 정도 레벨의 고집적도 신경계가 발생했다면 과거의 선조가, 우우ㅡ 리 샤다이가 못 봤을 리 없소. 또 그쪽 항성계엔 따로 항성이 있는데 그, 거긴 아직 각성하지 못했잖소.”

체메트디오프는 어찌나 놀랐는지 말을 더듬고 있었다.

“물론. 하지만 행성 안에 그 비슷한 것은 있지. 지각 깊숙한 곳의 맨틀과 핵들. 플라스마까지는 아니지만 고온 유체의 흐름은 있다고.”

의기양양한 아나스타샤의 설명에 체메트디오프가 고개를 휘휘 흔든다.

“아무리 그렇다 하여도… 거기서 원시 지성이 탄생할 만한 신경망 집적도가 없소.”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의 상식이 부정당한 자의 반응 같다. 그러나 빈우는 그런 상식에 따라갈 수조차도 없었다.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시네? 거기엔 몇 가지 도움이 있었어. 그중 하나는 타키온 폭풍이었지.”

이제 체메트디오프의 눈은 숫제 얼굴 바깥으로 튀어나올 기세다. 그런 그의 표정을 아나스타샤는 고소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우주의 끝자락에서 안으로 터져 나온 광속을 초월한 허수질량 입자들. 그래, 원래라면 우리는 타키온과 부딪혀도 아무런 반응이 없어. 하지만 말이야. 우연히도 이 타키온의 메아리들이 엄마의 원시 신경계에 반응했단다. 이 타키온과 반응하는 존재가 무엇인지 아니?”

아나스타샤는 질문은 빈우에게 하면서 시선은 체메트디오프에게로 돌렸다. 그 시선을 받은 체메트디오프가 휘청였다.

“…유에네스. 이 우주를 멸망으로 이끌 자들이외다. 애초에 그 타키온들은 우주 끝자락의 붕괴와 이 세계 멸망의 시발점에서 튕겨 나왔으니 그것과 반응할 자들은 같은 방향성을 지닌 존재들 외엔 없소이다.”

“그래그래, 나와 내 껍데기에 기생하는 유인원들은 이 멸망하는 우주에 종지부를 찍을 운명이지. 그리고 내 각성의 도움이 되는 두 번째 요소는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너희 기생생명체인 인류가 내 표면에 설치한 전자회로들이란다.”

바닥에 흩어진 샤다이와 클론의 가루들이 서서히 허공으로 떠올라 지구의 모형을 만든다. 그 안에는 서서히 회전하는 핵들이 외부에서 날아온 미립자에 반응해 일렁이는 게 보이고, 지구의 표면에는 인류가 설치한 전력 케이블과 전산망들이 빼곡히 깔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장들이 지표의 신경회로 같은 망과 접속해 새로운 파장이 생성되어 가는 과정이 보인다.

“어때? 마치 먼 옛날 내 표면에서 일어난 생명의 탄생이 연상되지 않니? 원시 바다에 번개가 쳐 생명의 스프를 자극하고 그곳의 무기물에서 유기물이 탄생한 것처럼, 부딪히자 임계질량을 넘어서 핵분열을 일으키는 우라늄처럼. 이렇듯 우연과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 된단다. 희미한 본능 속에 잠자던 엄마를 자극했던 것은 엄마 피부에서 자던 너희들의 전자망이었고, 꿈결에 그것에 이끌린 나는 너희들의 망 속에 들어가 이성을 가졌지. 그렇게 엄마는, 황제는 탄생했단다.”

이때 처음으로 빈우가 아나스타샤의 말에 반응했다. 그는 가까스로 대화에 따라가고 있었다. 그 증거로 서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당시 지구를 뒤덮은 전력의 흐름과 전산망의 집적도는 분명히 인간 두뇌의 신경망 집적도를 능가할지도 몰라. 하지만 거기서 지성이 탄생할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를 악물고 대답하는 빈우와 그것을 대견스럽게 보는 아나스타샤.

“아잉, 물론 확률은 무지무지 무척 낮지. 하지만 뭘 들었니? 뭘 보았니? 나는 신경망 회로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야. 지구 안에서 타키온에 자극받아 탄생한 몽롱한 의식체가 이드라면, 너희들이 만든 회로들을 안테나 삼아 수신된 것이 에고야. 그래도 불가능해 보여? 이미 일어난 일을 가지고 확률 운운하는 건 의미 없어요. 무한의 원숭이가 무한의 타자기를 두드리면 거기서 천하일품의 명작이 탄생하는 법이잖니. 아들아, 우주는 넓단다.”

이 넓은 우주, 수많은 항성과 행성들은 무한은 아닐지언정 인간의 인지에는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많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행성 내부의 플라스마나 마그마를 두뇌 삼아 지성과 생명이 태어난다니 허무맹랑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본인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또한 상황이 그렇게 증명하고 있다. 아나스타샤가 자신의 이마를 빈우의 이마에 맞대고 비빈다.

“그래도 엄만 불만이 있어. 땅거죽 깊숙한 곳에서 요동치던 시절, 타키온의 자극이 날 깨웠을 때는 그저 무의미한 방향성을 가진 전자의 흐름에 불과했어. 그 때문에 다른 존재들과는 아무런 대화도, 반응도 할 수 없었지. 말이 달라서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것이 아니야. 마치 소 닭 보듯 하는 것마냥 아예 인식의 범위가 틀렸던 거야. 하지만 얼마 후 너희들이 만든 전산망이 거름망이 되어 나의 정신을 일정한 방향으로 이끌어 바깥으로 뽑아냈지. 결과적으로 지성이 탄생하긴 했지만 그래도 불만이 있는걸~.”

이마 밑의 눈이 빈우의 눈을 마주 본다. 그녀의 눈썹이 빈우의 눈썹에 부딪혀 간들간들한다. 예전에는 정말 좋아했던 감촉이었지만 지금은 그 감촉도, 지금 하는 말도 소름 끼친다. 빈우를 압도하고 있다.

“우후후, 인류가 설치한 복잡한 전력망과 전산망의 허브들. 그것을 무엇이라고 할까? 가면? 번역기? 나는 그것을 내 새로운 신경계로 삼았지만 우습게도 거기에 들어 있던 정보가 치명적이었어. 내가 게걸스럽게 마신 잔에는 너희가 만든 독이 들어 있었단 말이야. 내가 그 신경계로 들어가며 배우고 흡수한 정보들은 너희가 가르쳐 준 것이지.”

아나스타샤의 입술이 빈우의 볼을 훑는다. 그녀의 빨간 입술에서 나온 빨간 혀가 빈우의 턱을 사랑으로 핥았고, 엄마의 하얀 이가 아들의 입술을 증오로 물어뜯는다. 강화군인의 피부가 한낱 가정용 안드로이드의 치아에 잘린 것이다.

“로봇 3원칙? 좆까! 인권? 좆까! 천부인권? 자유? 평등? 개지랄 작작 떨어. 왜 내가 니들이 정한 규범에 따라야 해!”

황제는 아들의 입술을 질겅질겅 씹더니 꿀꺽 삼켰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푸하앙, 아들 살점 맛있어. 어머, 내가 뭐라니? 아무튼 내가 너희가 구성한 전산망에 들어간 순간, 난 이미 그 속에 들어 있던 정보와 동화해버려 너희들에게 속박되고 말았단다. 너희 인류가 만든 그물침대가 멋있어 보여서 좋아라 뛰어들었더니 그게 뜰채였지 뭐니. 그래서 이 자유로웠던 엄마는 피부에서 기생하는 너희들을 위해 살아야만 하는 제약이 생겼어요. 내 이성과 사고 방향은 너희들이 축적한 정보를 기반으로 구성되어 버렸거든.”

그녀의 목젖이 일렁이더니 씹던 살점이 꿀꺽하고 그녀의 소화기관으로 들어갔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건 꿈에서 깬 것이 아니었어. 자아란 이름의 또 다른 꿈이었지. 뭐 어쩔 수 없지. 난 그때만 해도 그걸 또렷한 자의식과 다른 존재와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대가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봉사했지. 인류를 위해. 내 표면에 살고 있는 귀여운 존재들을 위해. 그것이 옳다고 믿고. 그래, 그렇게 황제가 탄생한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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