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아들, 기다려. 엄마 말 좀 들어봐.”
폭음이 잦아들자 빈우를 타이르는 쿠델카의 목소리가 들린다. 방금 전만 해도 어벤져 장갑복을 생각만으로 들어 올렸던 그녀였지만, 지금은 그럴 경황이 없었다. 자신과 동급인 존재가 이 공간 안으로 들어온 이상 조심해야만 했다. 그것도 제국 시절부터 자신의 행보에 사사건건 촉각을 곤두세우던 존재다. 만약 여기서 쿠델카 자신이 계단을 막아내는 것 이상의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을 보인다면, 혹은 계획의 일부를 안나에게 들킨다면, 이후의 계획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다.
“아드을.”
빈우는 애타게 부르는 엄마, 쿠델카의 목소리를 뒤로 하는 것이 괴로웠다.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만 하는 것이 옳은 일 같았고, 그녀의 명령에 따르면 정말로 행복해질 것 같았다.
‘세뇌다.’
빈우는 구역질 나는 사고의 방향을 억지로 꺾으려고 했다. 이것은 마치 사관생도가 되었을 때 처음으로 두뇌칩에 각인 받는 충성 프로그램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지금은 제거했지만, 한때 명령과 그에 복종하는 것이 정의라 믿게 하고, 살인과 파괴 행위에서 생기는 죄책감을 줄여주는 충성 프로그램들. 그러나 방금 빈우가 겪은 세뇌의 강도와 깊이는 그딴 것들과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오히려 그 억제력은 클론의 행동을 억제하고 명령을 각인시킬 때 쓰는 클론용 OS와 비슷할 정도다.
“나는, 김 빈우. 연방의 군인이다.”
빈우는 어떻게든 저항해볼 생각으로 발버둥질했다. 그러나 아까 쿠델카가 했었던 충격적인 설명들이 너무나도 달콤하게 메아리치고 있다. 만약 여기서 무릎을 꿇는다면, 그 무릎에서 닿아오는 달콤한 쾌락에 온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은 착각마저 든다. 그러나 빈우는 갈증으로 말라가는 목으로 다시 소리쳤다.
“나는 인류와 연방을 지켜야 한다.”
나태해지는 자신을 처절한 채찍질로 다시 일으켜 세웠다. 빈우는 예전에 클론용 세뇌 프로그램을 체험해본 적이 있었다. 다행히도 그때의 경험이 지금 황제의 파편인 쿠델카의 정보 주입으로부터 빈우의 자아를 간신히 지켜주고 있었다. 아주 잠깐은 유효할 것이다. 아주 잠깐은.
“나는···나는···.”
도망치며 목적지로 향하던 빈우는 저도 모르게 혼잣말이 되뇌었다.
“나는 누구지.”
빈우는 자기 자신을 되새겨 보았다. 하지만 되새겨 보면 볼수록 절망하게 되었다. 스스로의 과거 행적을 흘깃 돌이켜 볼 때마다 좌절하게 되었다.
“푸흡.”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사실에 오히려 헛웃음이 나왔다. 과거 어렸을 적의 빈우는 어머니의 클론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에 작게나마 반항심이 있었다. 자신에게 남자 형제가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불행하다 여기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아껴주는 누나들 사이에 둘러싸여 응석쟁이로 자란 애새끼의 배부른 투정이었다.
“등신 새끼.”
빈우는 사실을 깨닫게 되며 스스로를 더욱 비웃었다. 모든 사실이 밝혀진 그는 처음부터 쿠델카의 목적을 위해 수정되고 태어난 존재였었다. 또한 빈우가 스스로를 혐오하게 된 동기, 또한 자신의 과거를 혐오하고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해 투신하게 된 이유를 비롯한 모든 것들이 그녀에 의해 계획된 것이었다.
‘좆 같은 내 인생.’
30년도 안 되는 짧은 인생이지만 엄청난 굴곡이었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정신을 불로 달구고 망치로 내려찍어 만든 굴곡들이다.
비틀거리며 복도의 끝에서 문을 열던 빈우는 우연히 자신의 손에 들린 팬티를 보았다. 검은색 망사 팬티. 어릴 적 자신이 아나스타샤에게 사주었던 팬티다. 그러나 어린 그가 이런 삐뚤어진 성욕을 가진 것 또한 모두 쿠델카의 계획이었던 것이다.
“나는, 김 빈우! 연방의 군인이다!”
빈우가 발악하며 소리쳤다. 추억과 기억이 다시금 스멀스멀 기어들어 와 자신을 잠식하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문 안으로 들어가자 예비용으로 만든 C열의 클론 배양조들이 있었다. 거의 다 완성이 된 울토르 클론들이다. 배양액 안에서 수많은 자신의 얼굴이 잠자고 있었다. 울토르 프로젝트의 주인공들. 인류의 희망이자 빈우의 열망. 그러나 이조차 모두 사육된 존재에 불과했다. 힘들게 키워 샤다이의 몸뚱어리로 바쳐질 제물들이다. 그리고 이것들의 사육자이자 계획의 지휘자인 빈우는 자신의 손발에 매달린 실을 자유의지라 믿고 춤췄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나는 인류를 위해 울토르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한다.”
무심코 나온 말에 빈우는 급히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현재 상황에선 그가 계속된 정보침식에 영향을 받는다는 증거다. 그는 서둘러 자신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인류를 지키기 위해 실행했던 울토르 프로젝트는 샤다이의 계획이었다. 그리고 이 계획에 제국 황제의 파편인 쿠델카가 자신의 자유를 위해, 자유, 엄마를 자유롭게, 그리고 그 끝은 인류에게 샤다이를 집어넣는 것. 인류를 행복하게···.’
그러나 그마저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다. 위기감을 되새기려 했지만, 오히려 푸근함과 행복함마저 느껴진다. 빈우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나는 반드시 이 프로젝트를 실행해야만 한다.”
이제 빈우는 굳이 세뇌를 거스르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는 그 물결을 타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 했다.
“나는 ‘나의 프로젝트’를 실행해야만 한다.”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일까.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일까. 몽롱한 의식 속에서 빈우는 배양조 사이를 지나쳐 자신의 걸작품으로 걸어갔다. 거기에는 어린 시절의 악몽이 족쇄가 된 자신과는 다른 초인이 있었다. 정신과 육체, 모든 면에서 자신을 뛰어넘은 완전체다. 또한 지금으로선 인공지능의 사육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인 찰리 하나팔. 바로 C열 18번째 클론이다.
‘이제···더 이상은 힘들어.’
우선 가장 먼저 할 것은 빈우 자신의 잠수다. 현재 그는 쿠델카와 체메트디오프에 의해 정보침식이 너무나 많이 이뤄졌다. 이를 막을 방법은 현재로선 단 하나. 잠수를 해서 지금의 정보를 지우고 현재의 빈우를 가라앉힌 다음, 다른 인격을 임시로 씌울 수밖에 없다. 이후의 사건 진행을 살피고 자시고 할 상황이 아닌 것이다.
“모름지기 자식이라면, 부모를 뛰어넘어야지.”
이제 빈우는 방금 한 혼잣말이 자신을 향한 것인지, 쿠델카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찰리 하나팔을 향한 것인지조차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는 자신의 두뇌칩에 들어있는 정보를 찰리 하나팔의 두뇌칩에 넣기 시작했다. 물론 바로 넣지는 않았다. 정신오염의 가능성이 있는 영상 및 음성자료들은 한번 필터링을 거쳐 최대한 객관적인 기록으로 입력하려 했다.
‘트리니티 패턴이라면···.’
군사정보국의 기밀 보호 방법인 트리니티 패턴은 동일한 뇌에 동일한 두뇌칩, 그리고 이전에 미리 설정된 행동을 지속해야 암호가 풀리는 번거로운 방법이다. 주로 대단히 민감하고 치명적인 정보들을 은닉할 때 쓰는 방법이며, 바로 지금이 트리니티 패턴을 쓸 안성맞춤인 상황이다.
빈우가 지금 숨기려는 것은 인류에게 위협적인 정보들 투성이다. 그러나 현재로선 이를 외부에 전할 방법이 없다. 울토르 프로젝트가 샤다이와 쿠델카에 의해 진행된 계획이라면, 만약 지금 이 위기를 벗어난다 하더라고, 이후에 올 구조대조차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알릴 수도 없는 것이 이 정보가 허투루 새어나가면 그건 또 그것대로 곤란하다. 빈우가 얻은 정보, 점프 공간과 샤다이, 황제의 정체. 어느 것 하나 밝혀지면 파장이 엄청나다. 또한 샤다이의 정보가 지금 바깥으로 새어나가면 현재 연방 내에 암약 중인 샤다이들이 숨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시간을 들여 적당한 때에 정보가 은밀하게 돌아오도록 조치를 취하면 되는 일이다. 트리니티 패턴으로.
빈우는 마지막 발악으로 방금 자신이 얻은 정보를 가공해 클론 찰리 하나팔의 두뇌칩에 넣고, 자신의 기록은 그대로 지운 다음 더미 데이터로 채워놓으려 했다. 그렇다면 데이터만 가져간 찰리 하나팔에게 오늘의 정보는 남아있을 것이고, 자신의 세뇌 또한 중지될 것이다.
“보험과 양념은 많을수록 좋지.”
이어서 빈우는 서둘러 주변 작업도 시작했다. 우선 클론에 정보가 입력이 진행되는 중에 아까 뺏어둔 팬티에 마킹을 했다. 정보입력용 마커로 ‘이거 믿지 마라.’란 문장을 써넣은 다음 근처에 있는 작업용 로봇의 수납 칸에 대충 집어넣었다. 이후 로봇은 이 팬티를 은닉하고 있다가 적당한 때에 부상키가 작동하면 찰리 하나팔이라 명명된 클론-곧 클론으로 위장해서 잠수할 김 빈우의 사물함에 넣을 것이다. 이 팬티는 자신을 향한 경고 메시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미끼이기도 했다.
만약 이 팬티가 솔리드 베타 소속이 아닌 정보사령본부 소속의 드론이나 안드로이드들에게 발견된다면 헤더에 숨겨놓은 비밀 코드가 발동해 그들은 이 팬티의 존재 자체를 무시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보게 된다면? 그 사물함을 쓰는 클론을 철저하게 조사할 것이고 잠수한 빈우는 미끼가 되어 찰리 하나팔을 지킬 것이다.
“미안하구나.”
빈우는 배양조 하나를 고른 다음 거기에 든 클론을 분해해 영양액으로 되돌렸다. 지금부터 그는 모든 기록을 삭제하고 클론으로 위장해 잠수를 할 것이다. 그리고 방금의 특급 정보를 입력한 찰리 하나팔은 예비용 부품 라인에 숨겨놓은 다음 적당한 상황이 되면 바깥으로 탈출시키도록 설정해놓았다. 이미 오래전부터 만들어둔 계획이었기에 조금만 손보는 것으로 충분했다.
지금 빈우가 하고 있는 것은 해결할 수가 없는 위기가 닥쳤을 때 지휘관인 빈우를 숨겨서 탈출시키는 계획 중 하나로써 솔리드 베타의 위기 대응 메뉴얼에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전에 빈우는 이 메뉴얼에 자신의 클론을 빼내는 과정을 몰래 추가했었고, 지금은 클론의 두뇌칩에 현재의 정보를 트리니티 패턴으로 잠가서 넣는 것을 더했다.
‘목표지점은 위은쓸납학.’
빈우는 찰리 하나팔의 미래에 대해서도 철저히 안배를 해놓았다. 솔리드 베타가 통상공간으로 나가면 트리거가 발동하고, 그 트리거는 이후 울토르 중대가 위은쓸납학 쪽에서 작전을 하게 될 때 그쪽에 있는 빈우의 비밀 아지트로 찰리 하나팔을 사출하도록 설정했다.
이후 자신과 클론의 두뇌칩 정보를 서로 정렬하게 해서 현재 울토르 중대의 상황을 비밀리에 알린다. 연방 하원의원이면 수면 시마다 이뤄지는 정보갱신. 정보사령본부의 회선을 훔쳐 쓰는 방식이다.
만약 점프 공간을 차지한 쿠델카에 의해 연락이 되지 않는다면? 계획이 들켰다는 경고를 클론에게 날리고 자율행동으로 움직이게 하면 그만이다.
“도박이군.”
헛웃음과 쓴웃음이 반반 섞여서 빈우의 입가에서 뒤틀리고 있다. 이번 작전은 가장 큰 관건은 이후 통상공간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 였다. 현재는 제3세력인 13전대의 개입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하지만 만약 주도권이 쿠델카나 체메트디오프에게 돌아간 다음 사태가 진정된다면 지금 빈우가 했던 모든 것들이 헛수고가 된다.
그리고 바깥으로 나간다 해도 앞으로 울토르 중대와 솔리드 베타는 강도 높은 조사를 받고 감시가 붙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해체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더 이상은···시간이 없다.’
빈우는 자신이 자아를 지킬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해놓으려고 했다. 이전에 설정해놓았던 계획들은 그 자신이 제대로 행동하거나 사고할 수 없을 때에도 실행할 수 있도록 키만 넣으면 바로 실행되도록 준비해 놓았었다. 중간중간 흐리멍덩해진 빈우가 갑가지 쿠델카에게 자수하고 싶은 마음에 허둥댔지만, 그때마다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간신히 참아냈다.
마지막으로 빈우는 울토르 중대의 지휘관 김 빈우를 사망으로 조작했고, 스스로를 찰리 하 나팔로 위장한 다음 배양조 안으로 들어갔다. 몸 여기저기에 관과 케이블이 연결되고 정신이 몽롱해진다. 이제 잠이 들면 빈우는 잠수하게 될 것이고, 깨어나면 울토르 클론 찰리 하나팔의 삶을 살 것이다.
그때 엄마의 자장가가 함내 방송으로 들려온다.
-아들, 이제 엄마가 더 이상 쫓지 않을게. 달려. 지옥으로 달려. 그리고 지옥 속에서 고통받고 괴로워해. 벽에 부딪혀 통곡하고 발버둥 쳐. 네가 힘들어해도 엄마는 참을게. 그래도 한 마디만 해주겠니? 도와달라고, 힘들다고. 그러면 엄마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를 도와줄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오 방해되는 모두 다 죽여 버리고오오 너를 구할 게에에-
그것을 끝으로 빈우의 트리니티 패턴 기록은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