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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자 타이거 스파게티 드래곤-256화 (254/301)

256화

“흐으음.”

대답이 궁해진 고토가 찻잔을 만지작거릴 때, 빈우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이 먼저 말했다.

“선한 이들의 방관은 악이 승리하는 데 유일한 조건이다.”

지금 대화와는 상관없지만, 크게 동떨어지진 않은 말이다. 아니, 오히려 둘이 처한 상황을 비꼬는 말일 수도 있었다. 고토는 그것이 누군가의 명언으로 생각되어 검색해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지금 두뇌칩의 외부 연결이 빈우에 의해 막혀있는 상황인 것이다.

“에드먼드 버크요. 군사정보국장쯤 되면 귀동냥했을 법도 한데.”

머쓱해진 고토가 어깨를 으쓱 움츠렸다. 빈우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아챈 것이다.

“지금은 놈들이 이기고 있소. 우리가 서로 협력 못 하고 싸우고 있을 때 자기네들끼리는 물고 빨고 협력하고 있는 중이지.”

그 말에 고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베일 너머의 조직은 느리지만 차근차근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반면 이쪽은 상황이 그리 좋지 못하다. 당장 빈우만 해도 그렇다. 그는 현재 샤다이를 물리치기 위해 최전선에서 매진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정작 빈우의 직속 상사랄 수 있는 이노우에 고토와 이케가미 소이치로는 과거의 빈우를 울토르 프로젝트에 매진한 사람으로 보고 반쯤은 저쪽으로 넘어간 위험분자로 취급했었다.

또한 군사정보국은 보안국을 견제하며 때를 보고 있었는데, 보안국이 갑자기 미친 짓을 하는 바람에 상원의 벼락을 옆에서 엄하게 같이 맞아버린 상황이다. 게다가 오다 의원 파벌은 또 그쪽대로 제대로 준비하기 전에 무대로 떠밀려 올라가는 바람에 몇몇 계획이 엇박자를 내며 어긋난 상황이다.

이렇게 이쪽이 서로를 믿지 못해 견제하며 제각각 떨어져 싸우는 동안, 놈들은 차근차근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게임에서 지고 있으면 당신은 어쩌겠소?”

빈우가 탁자 위에 바둑 홀로그램을 띄웠다. 그리고 예전에 고토와 두던 기보 중에서 하나를 골라 판 위에 올렸다. 빈우가 잡은 흑은 죄다 주변으로 갈려 귀곡사궁(귀곡사: 돌이 바둑판의 모서리를 따라 4점으로 구부러져서 이어진 모양). 살아날 방도는 오직 백에 달려있다. 바둑판의 모양새가 백은 야금야금 중앙을 차지하고 흑은 사분오열해서 가장자리로 몰려있는 것이 어찌 보면 지금 연방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 같다.

“흐음, 반격의 기회라.”

고토는 흑의 관점에서 한번 봤지만, 이건 답이 없다. 각각 돌을 놓기만 하면 귀곡사패가 완성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규칙을 바꾸나?”

귀곡사는 어떤 규칙에서 두느냐에 따라 승패가 바뀔 수 있다. 어떤 규칙에선 집안에 돌을 놔도 집이 줄지 않지만, 또 다른 규칙에선 집 크기가 줄어든다. 고토의 말에 빈우의 손이 움직였다. 고토는 그가 자기 집안에 두려는 줄 알았지만, 정작 손이 향한 곳은 바둑판이 아니라 탁자 옆이었다.

“밖에서 방법을 찾아야지.”

바둑판 홀로그램 위로 시계와 머리핀이 떨어졌다. 아내의 시계와 딸의 머리핀이 맑은 소리를 내며 바둑판 위로 떨어지자 천하의 이노우에 고토도 심장이 철렁했다.

“우리 왔어요.”

그리고 갑자기 문이 열리며 집안으로 사람들이 들어왔다. 이노우에 고토의 아내인 이노우에 누미와 딸 이노우에 쿄코다.

“아빠, 빈우 아저씨는요?”

쿄코가 어안이 벙벙한 고토 앞으로 달려왔다. 그러더니 바둑판을 보고 방긋 웃었다.

“우와, 엄마. 아저씨가 엄마 시계 다 고쳤어요.”

“정말이네. 빈우 씨는 정말 솜씨도 좋아.”

누미는 기쁜 얼굴로 자신의 시계를 들어 손목에 찼다. 마모된 태엽을 교체한 골동품 시계는 그녀의 손목에서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

“내 머리핀도 보세요. 색깔이 똑같아. 물질생성기보다 아저씨가 훨 낫다니까.”

쿄코도 벗겨진 도색이 다시 발린 머리핀을 보고 좋아라 머리에 대어 보고 있었다.

지금 그녀들에겐 고토 앞에 앉은 빈우가 안 보이는 모양이다. 아마 두 사람의 안구에 직접 작용해서 시각 정보를 차단한 것이겠지.

“여보, 표정이 왜 그래요?”

누미가 굳은 표정의 남편을 보고 의아해한다. 그리고 그 남편은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걸어가는 빈우를 보고 있었다. 빈우는 나가기 전에 멈춰서 이쪽을 돌아보았다.

“…아, 김 소령은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겨서 말이야. 먼저 갔어.”

“어머, 아쉬워라. 오랜만에 같이 식사를 하나 했더니. 어떻게 한번 오라고 할 순 없나요?”

“그래요, 나 아저씨 더 보고 싶어요.”

고토는 아내와 딸의 부탁을 들으며 빈우를 보았다. 그는 문가에 서서 조용히 고토를 보고 있을 뿐이다. 일상용 안구를 하고 있는 고토에게 빈우가 보인다는 것은 그가 지금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의미다. 즉 그는 뭔가 원하고 있는 것이다.

-밖에서 방법을 찾아야지.

외계인을 상대로 첩보전을 하는 군사정보국에게 밖이란 어딘지 뻔하다. 인류와 적대하고 있는 외계 종족들. 빈우는 연방 안을 잠식하고 있는 샤다이를 잡기 위해 바깥에서 ‘도구’를 구해올 심산인 것이다.

‘굳이?’

이게 고토의 감상이었다. 아무리 연방 내에 샤다이가 잠입해 있다 해도 이렇게까지 외계 종족의 손을 빌려야 할 것 같진 않다. 하지만 빈우가 그렇게 판단했다면 그런 것이다. 그는 아직 고토가 파악하지 못한 문제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빠아-.”

딸의 재촉에 아빠는 웃으며 결정을 내렸다.

“그래그래, 떠나기 전에 내 사무실에 들른다고 했으니까 내가 연락해 보마.”

군사정보국장은 자기 사무실의 업무 시스템에 접속했다. 그리고 잠시 잠겨있는 3차장의 권한을 다시 복구시켜 놓았다. 마커스는 국방부 차관으로 가면서 차장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고토는 그의 권한을 아예 지워버리진 않고 살려두었다. 전 국방부 차관이었던 군사정보국 국장이라면 든든한 라인이기에, 이번 일이 끝나면 자신의 후계자로 불러들일 셈이었다. 그리고 마커스라면 빈우에게 자신의 보안을 공유해 놨을 것이다.

“안 받는데, 벌써 떠난 모양이야.”

고토는 쓴웃음을 지으며 연락을 끊었다. 이제 빈우는 더 이상 일상용 안구를 한 고토에게 보이지 않았다. 보안 권한을 획득한 동시에 모습을 감춘 것이다. 방금의 그는 자신의 결백이나, 지금 처한 상황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알고 싶은 것을 알아내고 다시 모습을 감추었을 뿐이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토는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빈우는 아주 자기다운 행동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도 가지 않는 가시밭길을 홀로 달려가는 것.

* * *

“고마워, 아나스타샤.”

히토미가 눈꺼풀을 비비며 커피잔을 받았다. 따뜻한 카페오레에 든 고농도 카페인이 그녀의 몸으로 들어가 피곤해진 신경계를 자극한다.

“좀 쉬시는 게 어떠세요?”

아나스타샤의 걱정스러운 표정에 히토미는 그저 슬픈 표정으로 웃어 보일 뿐이다.

“나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그전에 할 일이 너무 많아.”

지금 히토미 앞에 쌓인 일은 그저 많다, 라고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양이 아니라 질의 문제다. 그녀가 속한 파벌의 수사 결과와 빈우의 추적, 그리고 뻐꾸기 작전에 관련된 여러 부서와의 조율. 하나같이 중요하며 그에 질세라 분량 또한 어마어마했다.

“음, 알탄훼아나의 상태는 요즘 괜찮나?”

히토미는 서류를 훑어보며 물었다. 마커스 차관이 보내준 정보는 위험하다 싶을 정도까지 아슬아슬하게 파고든 것들이어서 보는 히토미도 심장이 저릿해질 지경이었다.

“네, 많이 괜찮아지셨습니다.”

“그럼 이것만 마치고 잠깐 만날까.”

그렇게 말한 히토미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나스타샤와 함께 알탄훼아나를 만나러 갔다. 이 샤다이 여성은 지금 히토미 팀의 협력자로서 블랙 랜스의 거주 구역에 있었기에 금방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이전까지 붙었던 감시도 없는 상태다.

“몸은 좀 어떠신가요.”

방 안으로 들어가자 의자에 앉아 책을 만지고 있는 알탄훼아나가 보였다.

“아, 오다… 히토미?”

눈이 보이지 않는 알탄훼아나가 귀를 쫑긋 세워 이쪽으로 향했다. 편의상 귀라고는 해도, 실제론 청각기관보다는 그들답게 플라스마 조절에 관련된 기관이라고 했다. 샤다이들은 주로 신경 신호나 뇌파로 상대를 파악하기 때문에 청각이나 후각으로 구분하는 것은 힘들다고 했다.

“나를, 신경 써줘서 정말 고맙다.”

안대로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리고 종족이 다르지만, 그녀가 감사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샤다이가 우리 인류를 택하는 것도 이해가 가는군.’

알탄훼아나를 보면서 히토미는 샤다이가 왜 굳이 인류를 방주로 선택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비록 장기구조는 다르지만 일단 외형만큼은 서로 비슷했고, 가장 중요한 것인 사고방식 또한 유사했다. 아니, 희로애락을 기반으로 한 감정 체계는 인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지금까지 봐왔던 시체 샘플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고위직, 알탄훼아나 덕분에 연방의 샤다이에 대한 연구는 진일보를 이뤘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질문해.”

책을 놓은 알탄훼아나가 바로 앉았다.

“눈은 이식이 힘들다고 들었습니다.”

상원의원의 말에 호민관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빈우가 알탄훼아나의 눈을 뽑아간 다음, 반은 인도적으로, 반은 실험을 위해 그녀의 눈에 시각센서를 이식하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모두 실패했었다. 기술적인 문제도 문제거니와 수술을 받는 알탄훼아나 자신이 바라지 않는다는 점도 컸다.

“인간의 기계눈을 받지 않아도, 대략적인 주변 파악은 가능해.”

“그런가요, 언제든지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히토미가 자리에 앉자 그 앞에 알탄훼아나가 앉았고, 그 사이에 아나스타샤가 섰다.

“아나스타샤의 말로는 정신적인 상처를 상당수 극복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육체적, 정신적 고문과 고통을 받았던 알탄훼아나는 정신 붕괴 직전까지 갔었다. 고문의 후유증에 눈으로 들어오는 정보의 격류와 호민관의 의무가 그녀를 벼랑 끝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극복이라니 부끄럽군. 난 그저 도망쳐서 쉬고 있는 것에 불과해.”

빈우가 도주하던 날, 알탄훼아나는 자신의 미래를 보았다. 빈우가 자신의 눈을 뽑아가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마치 자신의 신체처럼 사용하는 것을. 그래서 자신의 앞에 닥친 중임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그것을 받아들였다.

“흐음.”

히토미는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알탄훼아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음? 내가 뭔가 말실수라도 했나?”

“아뇨, 이젠 그에 관련된 이야기를 해도 되겠다 싶어서 말이죠.”

히토미의 말대로 얼마 전까지의 알탄훼아나는 그날 일을 꺼내려고만 해도 경기를 일으켰다. 그래서 히토미는 그녀가 제대로 치료될 때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아나스타샤의 말로는 치료를 한다 해도 마음속에 흉터는 남는다고 했고, 중요한 것은 알탄훼아나가 흉터투성이인 채로 그 사건에 맞설 각오가 되어있냐는 것이라고 했었다.

이쪽으로 전문가인 안드로이드 메이드의 말로는, 사고로 엉망으로 망가진 얼굴을 하고서 대중 앞에 나서는 것과 비슷하다는 예를 들었다.

“아, 그래. 김 빈우가, 나의 눈을 받아 갔던 날, 말이지.”

중간중간 조금씩 말이 끊어지긴 해도 알탄훼아나는 제대로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빈우가 빼앗아 갔다가 아니라 자신이 줘서 받아 갔다는 식으로 말했다.

“네, 그날의 일은 시일이 제법 지난 지금도 아직까지 후폭풍이 몰아치고 있어요.”

빈우는 보안국의 수사로부터 도망치면서 성대하게 사고를 쳤다. 그 덕에 보안국장의 긴급 체포를 시작으로 관련된 인사들에 대한 강도 높은 수사, 몇몇 부서에 대한 동결 등이 급박하게 이뤄졌다.

“김 소령이 그날 당신의 눈을 받아 간 것은 역시나 우리 사회에 숨어든 샤다이 선조들을 찾아내기 위해서겠죠?”

히토미의 질문에 알탄훼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호민관인 그녀는 인류의 몸을 적셔서 내려온 선조들을 파악할 능력이 있었지만, PTSD 때문에 정작 필요할 때는 그 능력을 쓰지 못했다. 그러나 만약 빈우가 그것을 가져가서 쓴다면? 지금 도망 중인 그가 인류 속에 숨어들어온 샤다이를 알아본다면?

“그래, 그리고 아마 지금의 그라면 보는 즉시 죽이겠지.”

알탄훼아나의 대답에 히토미와 아나스타샤의 안색이 굳었다. 빈우는 샤다이를 죽이는 것이겠지만, 죽는 자들은 일단 겉으로는 연방시민이다. 그리고 그중에는 고위직도 상당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죽인다면 빈우는 중죄인이 돼서 체포된다. 물론 닉스 레벨 3인 그를 체포하려면 보통 방법으로는 턱도 없겠지만.

“이 사실을 빨리 알려야 하지 않나요?”

아나스타샤의 말에 히토미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빈우가 탈주한 사실은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알탄훼아나의 안구를 가져간 사실은 극비에 부치고 있었다. 만약 이 사실이 퍼진다면 빈우의 위험성을 아는 샤다이들은 즉시 대처할 것이고, 앞으로의 계획에도 차질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빈우가 그렇게 도망친 이상, 이쪽에서 도와주려고 해도 그가 먼저 도망치고 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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