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자 타이거 스파게티 드래곤-259화 (257/301)

259화

아스탄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난 새벽파도의 선장 따위가 아냐.”

그는 일어나서 세면대에 섰다. 그리고 눈앞의 거울을 보았다. 건장한 육체에 지친 눈을 한 남자가 보인다.

“난 아스탄이 아니다.”

자신을 부정하는 가장 큰 증거는 허리의 칼날이다. 그 정도의 나이가 될 때까지면 허리 칼날은 이가 나가기도 하고, 금이 갔다가도 다시 붙는다. 아스탄의 것처럼 흠 하나 없이 말끔한 칼날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누구지.”

그가 가진 지식과 기억은 또렷하다. 이름은 아스탄, 인류의 세대우주선 새벽파도의 함장, 그 외의 신상정보도 명확하다. 그러나 그 명확함은 마치 타인의 것 같았다. 타인의 기록과 정보가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머릿속에 쑤셔 박혀 있었다. 그리고 강박관념처럼 잊어버리려 해도 계속해서 되살아나오고 있다.

“여기 계셨군요.”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가 있었다. 아스탄이 돌아보자 거기엔 다리가 두 개밖에 없는 아담한 생명체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유에네스.”

아스탄의 입에서 멸칭이 나온다. 그러자 불린 유에네스가 히죽 웃었다.

“유에네스라, 정말 잘 지은 이름입니다. 운명적인 작명 센스에요. 덕분에 대부분의 외계 종족들이 우리를 그렇게 부르곤 하죠. 샤다이에게 배워서 말입니다.”

작은 유에네스는 폴짝 뛰어 탁자 위로 올라왔다. 아스탄은 저런 류의 전사 계급 유에네스를 잘 안다. 작은 신체에도 불구하고 아군 전사 계급에 필적하는 전투 능력을 가지고 있다.

“새벽파도의 선장, 아스탄 씨라고 부르면 됩니까?”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부름에 아스탄을 불쾌해졌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제 이름은 김 빈우라고 합니다. 연방 군사정보국 소속 소령입니다.”

김 빈우라 자신을 소개한 자는 정중했다. 그러나 둘 사이에 감도는 불안한 기류는 그 정중함 뒤에 무언가 석연찮은 것이 숨겨져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엿보게 되었습니다만, 본인을 아스탄이라고 알고 계시더군요.”

그러면서 빈우는 이쪽은 생각도 않고 자기 혼자 멋대로 홀로그램을 상영할 준비를 했다. 그리고 아스탄을 올려다보았다.

“저는 지금부터 이곳의 감춰진 진실을 당신에게 밝힐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밝히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지금처럼 이대로 쭉 살아가시면 됩니다.”

분명 선택권은 이쪽에 주고 있다. 그러나 누가 봐도 강요하는 분위기다. 세대우주선의 선장이라는 흐릿한 자아, 좁은 방에 억눌린 삶. 이런 것이 뒤죽박죽 섞인 상황에 진실을 밝힌다고 하면 누구라도 갈증에 못 이겨 진실의 소금물을 들이키겠지.

“….”

아스탄은 아무 말 없이 빈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암묵적으로 동의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부족한지 빈우는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아스탄의 확고한 동의가 있어야 이후의 과정을 진행하겠다는 의미다. 그리고 처음의 권고 이후 빈우는 어떠한 재촉도 권유도 없었다.

“무슨 진실이지?”

“지금 당신이 간절히 원하는 것.”

답은 이미 알고 있는 상황에서 쓸모없는 질문이 나왔다. 그만큼 아스탄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의미다.

“…진실을 밝혀다오.”

아스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홀로그램이 틀어졌다. 시작은 태양계로 들어오는 세대우주선 새벽파도다. 이것은 아스탄도 아는 사실이지만 촬영한 것은 유에네스 측인 듯했다.

-공격.

장난기 가득한 유에네스의 목소리와 함께 공격이 시작되었다. 함포 한 발이 발사되어 새벽파도에 명중한다. 잠시 후 다른 목소리가 들린다.

-무슨 일인가, 상황을 보고하라.

아스탄 본인의 목소리였다. 새벽파도에 타고 있던 아스탄의 목소리다.

-대피경보발령! 축제는 취소. 배의 수리가 먼저다.

아스탄의 명령을 비웃듯이 유에네스의 공격도 이어졌다. 최초의 공격은 새벽파도의 내구력을 가늠하기 위해서였는지, 다음의 공격들은 조심스레 세대우주선을 무력화시키기 시작했다.

-반격하라. 모든 함포 발사! 미사일 발사!

다급한 아스탄의 목소리에 새벽파도의 무기들이 유에네스의 전투함을 향해 발사되었다. 이 유에네스 전투함은 새벽파도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은 크기였지만, 전투력은 압도적이었다. 새벽파도의 필사적인 반격을 맞고도 아무런 피해가 없었으며, 봐준 것이 뻔한 놈들의 공격 몇 번에 새벽파도는 금방 무력화되었다.

이어서 소형정들이 새벽파도 곳곳으로 침투해 들어온다. 그리고 화면은 새벽파도 안으로 들어온 유에네스 전사 계급들에게로 바뀌었다. 선원과 해병대원들이 놈들의 침입을 막아보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화면에 비친 동포들은 삽시간에 죽어가고, 유에네스들은 곧바로 목적지로 향했다.

-즉시 지구와 모든 이주행성에 대한 항법 정보를 지워라. 선장 명령이다.

다급한 홀로그램 속 아스탄의 목소리. 자신이 저런 말을 한 적은 없지만 아스탄은 당시의 자기 심정을 느낄 수 있었다.

-삭제를 기다리지 마. 아예 부숴버려라.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에네스 전사 계급들은 함교를 부수고 안으로 들어와 아스탄을 공격했다. 그리고 기절한 아스탄을 끌고 갔다.

그리고 화면은 전환되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유감이군요. 저는 인류연방 소속의 김 빈우 소령이라고 합니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상처 입은 아스탄을 유에네스가 올려다보고 있다. 홀로그램 속에서 같은 이름을 댄 저 김 빈우는 지금 아스탄의 눈앞에서 홀로그램을 틀고 있는 김 빈우와 전혀 달라 보였다. 간단히 차를 대접한 다음 화면 속의 빈우는 홀로그램으로 아스탄을 꾀었다.

-아아.

이 탄성은 홀로그램 속의 아스탄의 것이었을까, 아니면 지금 이것을 보고 있는 홀로그램 밖의 아스탄의 것이었을까. 유에네스에 의해 위은쓸납학이라 불리운 동포들이 무참하게 죽어 나간다. 고향이 불탄다. 아이들이 죽는다. 그리고 고향이 멸망하기 직전 자신의 종족 위은쓸납학은 유에네스의 자비에, 아니, 변덕에 의해 구원받았다.

-여기까지 하죠.

그다음부터 홀로그램속의 빈우는 서서히 아스탄을 감언이설로 꾀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린 아스탄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원하는 정보를 속속들이 빼어갔다. 이쪽의 풍속과 문화를 철저히 알고 온 놈에게 아스탄은 종내엔 이주 행성의 위치마저 털어놓고 말았다.

그리고 마지막엔 갑옷을 입은 유에네스 전사들이 들어와 홀로그램 속의 아스탄을 죽였다.

-굳이 직접 심문을 하셔야 했습니까?

-어흠, 타이 차장, 윗사람이 모범을 보여야 하지 않나.

이어서 들려오는 두 유에네스의 대화는 아스탄의 죽음 따윈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이 광경을 모두 지켜보고 넋이 나간 아스탄에게 빈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떻습니까, 실로 재미있지 않습니까?”

화면 속의 고토라는 유에네스는 화면 속의 아스탄을 속였다. 그러면 눈앞의 빈우란 자는 자신을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 그도 마지막엔 홀로그램처럼 아스탄을 죽일까.

“글쎄요, 저는 과연 김 빈우일까요? 하하하, 그건 중요하지 않죠.”

아스탄의 생각을 읽은 듯 빈우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아직 놀라기엔 이릅니다.”

그리고 빈우는 다음 영상을 재생했다. 그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아스탄은 진실을 보기로 한 자신의 결정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죽은 동포의 사체들, 부화실의 알과 유생들. 이것들은 전부 옮겨져 유에네스의 실험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실험체가 되었다.

“아아아.”

아스탄의 입에서 절로 힘없는 비명이 새어 나왔다. 실험체들에게 행해진 실험은 차마 아스탄이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잔인하고 참혹했으며, 유에네스란 종족의 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 실험체의 이름은 아스탄으로 하지.

아까 자신을 빈우라고 밝혔던, 이노우에 고토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지금 그가 보고 있는 것은 거대한 캡슐 안에 든 위은쓸납학이었다. 저 모습은 아스탄에게 몹시 낯이 익다. 매일마다 거울로 보는 모습이었다.

-그거 원본의 이름 아닙니까?

-그래, 원본에 해당하는 기록을 집어넣고 스스로를 아스탄으로 알도록 암시를 걸게.

-어디 쓰시게요.

-만들어 놓으면 쓸 데가 있겠지.

하나의 인격을 좌지우지하면서 놈들의 말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마치 식후에 마신 차의 향을 품평하듯 생명을 주물렀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흘러가는 잔인한 홀로그램 영상 속에서 빈우가 걸어 나왔다.

“당신은 아스탄이 아닙니다. 죽은 아스탄의 시체로 만들어진 복제체에 아스탄의 기록을 넣은 실험체지요.”

아스탄이 분노하지 못한 것은 좌절감과 허망함이 더욱 거세게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압니다, 그 마음 알아요. 자신의 인생 모든 것이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찾아오는 충격과 절망감. 어찌 보면 위에서 누르는 것처럼 무겁고, 또 어떻게 느끼면 밑이 빠진 구멍처럼 끝없이 추락하죠.”

설명하는 빈우의 옆으로 홀로그램들이 멈추지 않고 이어진다. 그 풍경은 마치 위은쓸납학에게 마련된 지옥과도 같았다. 그것을 보며 아스탄은 서서히 느꼈다. 공포감을, 혐오감을, 그리고 분노와 복수심을.

“후후후, 육신이 아무리 강대한들 뭘 할까요. 정신이 죽어버렸는데. 또 정신이 강해봤자 육신이 무력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노릇이지요.”

빈우는 아스탄의 속내를 꿰뚫어 본 듯 비웃으며 다가왔다.

“하지만 말입니다. 그런 상황에 처해서라도 움직이지 못하면 아무것도 못 합니다. 아무것도 안 됩니다. 그저 놈들의 계책대로 흘러갈 뿐이죠.”

“원하는 게 뭐야.”

아스탄이 덜덜 떨리는 허리 칼날을 억죄며 물었다. 마음 같아선 칼날을 휘둘러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모조리 썰어버리고 싶었다.

“예의범절.”

뜻밖의 대답에 아스탄의 떨림이 멎었다.

“뭐라고?”

“예의범절이란 말입니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서로 조심하면서 무례한 행동을 삼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상대방을 존중해야 할까요, 또 무엇을 조심해야 할까요?”

키득거리며 말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홀로그램 속에서 보였던 빈우, 이노우에 고토와도 닮아있었다.

“네에, 상대방이 무섭기 때문에 존중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 폭력 사태로 번지지 않게 주의해야 하죠. 하지만 말입니다.”

가까이 다가와 올려다보는 빈우는 차분해 보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분노한 아스탄을 압도하고 있었다. 작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기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생명체의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지옥에서 나온 악마가 길동무를 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거기엔 전제조건이 필요합니다. 상대방이 존중받을 가치가 있어야 하고, 폭력 사태로 번지는 것을 꺼릴 만큼 위협적이어야 합니다.”

아스탄은 빈우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냈다. 그래서 그의 일장 연설을 끊었다.

“공포.”

“맞습니다, 공포. 예의범절의 가장 밑바탕에는 공포가 있지요. 우리 인류와 당신들 초원동맹연합-.”

“서론이 길다. 헛소리 집어치우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아스탄이 으르렁거리며 다시 말을 끊자, 빈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네놈들 유에네스와 우리 위은쓸납학은 전쟁을 했다. 그 결과 우리는 멸종 직전에 몰려 이렇게 실험실에서만 살아가고 말이지. 그런 우리에게서 대체 뭘 원하느냐. 도대체 어떻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란 말이냐!”

아스탄은 빈우의 감언이설에 더 이상 휘둘리긴 싫었다. 놈의 계획에 이용당하긴 싫었다.

“솔직히 말하죠. 저는 총알받이가 필요합니다. 그것도 멍하니 방아쇠만 당기는 인형이 아니라 확고한 적의와 증오를 가지고 복수란 단어를 적의 두개골에 새겨줄 총알받이가 말입니다.”

그리고 빈우는 다음 홀로그램을 켰다. 그러자 수많은 캡슐들과 수많은 동포들이 보였다. 캡슐 속에 잠든 동포들, 밖으로 꺼내져 해부된 동포들, 그리고 아스탄 자신처럼 살며 세뇌당하고 있는 동포들. 이게 위은쓸납학의 현실이었다. 간신히 잠재웠던 칼날이 다시 들고 일어난다.

“멀지 않습니다. 바로 옆방의 광경입니다. 어떻습니까, 아스탄 선장.”

아스탄은 사육되고 있는 동포의 모습을 보며 절규했다. 그리고 이런 사육장을 만들어 놓은 존재들에게 분노했다. 자신들을 멋대로 만들고 멋대로 조작하는 존재들에게 끝없는 증오심이 샘솟기 시작했다.

“클론인 주제에 분노하는 겁니까? 만들어진 생명이? 그리고 그게 주입된 사고방식인데도 불구하고? 아아, 이해해요. 이해하고 말고요.”

아스탄은 진실을 보기로 한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 이젠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었다.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자면 놈의 말대로 동포들과 총알받이가 되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그러나 그의 본능과 감정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을 격렬하게 원하고 있었다. 아스탄은 유에네스의 피를 원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종족을 마음대로 주무른 유에네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었다.

“솔직히 말한다고 했죠? 앞으로 당신들이 뭘 하든 종족의 미래는 없습니다. 일어서든 앉아있든 그저 사육된 실험동물에 불과하죠. 그렇다면 어쩌실 겁니까?”

이번에도 빈우는 달리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아스탄의 결정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리고 아스탄은 결정을 내렸다.

“…네놈의 총알받이가 되겠다.”

그러자 빈우가 해맑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이로써 새로운 동지가 늘었군요. 가시죠.”

빈우는 앞장서서 문을 열고 나갔다. 하지만 아스탄은 열린 문 앞의 광경이 무서웠다. 입으론 총알받이가 되겠다고 했건만, 정작 발걸음을 내딛으려고 하자 더럭 겁이 난 것이다. 그런 아스탄을 돌아보며 빈우가 덧붙였다.

“자, 우리 계획에 동참한 다른 동지들을 만나러 가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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