ㅂ261화
체메트디오프는 초조했다. 최근 들어 자신의 계획이 너무 자주 틀어진 탓이다. 물론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여러 가지 대응책을 미리 만들어 놓은 덕에 진행에는 큰 차질이 없었다. 하지만 틀어짐이 이렇게나 자주 발생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42전단이라고 했던가?”
체메트디오프는 계획이 틀어지게 된 원흉이자, 가장 골칫거리인 존재에 대해 혼잣말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충실한 부하는 즉시 대답했다.
“네, 유에네스의 정예부대입니다. 주시자들로부터 무기를 받아 아군에게 꽤나 위협적인 존재입니다. 계단을 닫아도 자체적으로 이동이 가능하더군요. 여기서 구조신호를 보낸 것 같으니 조금 있으면 올지도 모릅니다.”
부하의 말대로 42전단은 현재 자신들 샤다이들에게 상당한 위험 요소가 되었다. 그들의 무기인 신형 입자포는 아군의 방어막을 그대로 관통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밀어붙여 왔던 기술력의 우세가 상당히 빛바래버렸다.
“그러면 그 위험이 오기 전에 빨리 떠나야지.”
집정관의 말에 전투함에서 포격이 쏟아져 내려 유에네스의 행성 지표를 태우고 녹이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악착같이 분전했던 연방의 방어함대는 지금은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최후까지 저항하던 지상의 방어부대는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 플라스마의 불길에 속절없이 유린당하고 있었다.
“저기군.”
체메트디오프가 가리킨 곳은 플라스마가 휘몰아치지 못하는 곳이었다. 연방의 방어기술은 아니다.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단 하나, 샤다이의 타고난 플라스마 운용 능력이다.
“지상부대 강하시킬까요?”
“말해 뭣하나.”
곧이어 일단의 지상부대가 해당 지점으로 내려갔다. 무엇이든 불태우고 녹이는 플라스마지만, 샤다이들에겐 통하지 않는다. 즉 지상에서 플라스마를 막고 있던 샤다이는 다른 유에네스들을 지키기 위해 능력을 썼다는 의미다. 계단을 내려온 자들은 모두 죽여야 한다. 거기다가 유에네스와 붙어먹은 변절자들이라면 더더욱.
지상부대가 내려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플라스마가 휩쓸지 못한 점들은 사라졌다. 이제 지상의 유에네스들은 녹아내리는 땅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갈 것이다.
“변절자라… 그러고 보니 우리에게 이빨을 드러낸 그 변절자의 이름이 뭐였지? 유에네스식 이름 말이야.”
“그런 변절자가 어디 한둘입니까.”
“유에네스가 제국 시절일 때부터 내려왔었고, 지금은 아주 큰 무기상인이 된 자 말이야.”
“그녀라면… 아만다 타이라고 했습니다.”
부하의 설명에 체메트디오프는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앞이 가문명이었지?”
“뒤입니다.”
“복잡하군. 난 그런 거 하나하나 못 외우겠어.”
“그러니까 저희가 보좌를 하는 것이죠.”
실제로 체메트디오프가 계획을 세우면 세부적인 진행은 주변의 부하들이 한다.
“좋았어. 다음엔 아만다 타이다. 잡으러 가자.”
체메트디오프는 호기롭게 다음 계획을 밝혔지만, 부하는 고개를 좌우로 저을 뿐이다.
“왜 그래?”
“죄송합니다만, 그녀는 이미 죽었습니다.”
“뭐어? 왜에? 아니, 누가 죽였어?”
부하는 서둘러 책을 넘기더니 해당 정보를 찾아 그 페이지를 들어 보였다.
“협조자들의 정보에 의하면, 이 자라는군요.”
“아하아.”
샤다이의 푸른색이 아닌 노란색 피부, 머리에 붙을 듯 짧은 귀, 그리고 탁한 검은 색 눈. 범인의 얼굴을 본 체메트디오프는 한탄하며 이마를 탁 쳤다.
“김 빈우. 역시나. 앞이 가문명이었지. 응응.”
김 빈우라면 체메트디오프와 이래저래 엮인 악연이다.
바로 저번에 만났을 때는 행성 자체를 별심장의 불길로 만드는 실험을 하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툭 튀어나와 훼방을 놓았었다. 그래서 조금 손을 봐주려고 했더니 갑자기 자기 몸 안에 계단을 완성시켜서 기겁했었다. 아니, 완성해서 동포를 받아들이는 것은 놀랍지 않다. 아주 당연한 일이고, 그의 정신은 그만큼 위험천만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으니까. 허나 그런 와중에 자신의 자아를 지켰다는 게 놀라웠다. 자신의 정보를 적신 고대의 존재를 스스로의 힘으로 이겨냈다는 의미니까. 이건 좀 위험하다.
‘그래서 죽었지.’
그날 체메트디오프는 플라스마에 면역이 된 빈우에게 잡혀 죽었었다. 그때 동료의 위기를 보고 격분해서 그런 선택을 한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단순히 동료를 위해서만은 아닌 것 같았다. 적어도 육친이나 자신의 반려에게나 그런 반응을 보일 것이다.
‘왜 그렇게 분노했을까, 혹시 가족이 있었나? 설마 알탄훼아나와? 그럴 리가.’
자신의 딸에 대해 생각이 닿자, 그보다 더 예전에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의 빈우는 딸이자 호민관인 알탄훼아나와 잠시나마 협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체메트디오프는 쓸데없이 밍기적대다가 주시자들에게 잡히고야 말았다.
‘그래서 또 죽었고.’
어찌 된 게 체메트디오프는 빈우와 엮이면 좋은 꼴을 못 보는 듯했다. 애시당초 포말하우트에서 이 빌어먹을 황제의 자식과 만났을 때부터가 문제였다.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부터 죽었구먼.’
그날은 나름 정말 꼼꼼히 준비해서 쳐들어갔다. 계단을 내려온 자들이 방주를 만들었다는 소식에 호시탐탐 기다리다가 냅다 뺏으려고 들어갔더니만, 갑자기 쳐들어온 주시자들에게 계획은 박살 나고 본인마저 잡혀 죽었었다. 죽는 것은 상관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날 자신이 주시자의 손에 죽으면서 그때까지 작성한 대본과 악보의 상당수를 빼앗겼다는 점이다.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계단 내부에서 죽었기 때문에 정보의 유출은 어쩔 수 없었다 해도, 중간의 정보가 송두리째 사라져버린 것은 상당히 뼈아픈 손해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주시자들이 오기 전에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어.’
당시 기억하는 것은 빈우와 그의 보모에 해당하는 기계 노예다. 그러나 그중 자세한 내용은 희미하고 뿌옇다. 이유는 체메트디오프가 죽을 때마다 대본에 손실이 생기기 때문인데, 큰 줄기는 그렇다 쳐도 세부적인 곳에는 이렇게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포말하우트 안에서 빈우를 만난 다음에도 체메트디오프는 몇 번이나 죽었다.
집정관의 기억 정리 정돈을 방해한 것은 충실한 부하의 보고였다.
“이런, 역시 42전단이군요. 저렇게 계단을 잘만 쓰다니 우리로선 고맙습니다.”
계단이 완성되며 유에네스의 정예 함대들이 도착했다.
“적당히 대응하다가 빠지지. 주도권은 우리에게 있으니까.”
체메트디오프의 말에 휘하의 함대가 정렬하며 대응했다. 아무리 저쪽에 신무기가 있다고 한들 아직도 화력만큼은 이쪽의 압도적인 우세다.
저쪽도 그것을 아는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서서히 견제하며 들어오고 있었다.
“밀리겠군.”
“아직까지는요.”
집정관의 솔직한 감상에 부하도 솔직하게 대답했다. 휘하의 전투병력들에게 유에네스쪽 협력자로부터 구한 전투기술을 입력한 것은 나름 효과가 좋았다. 그러나 그것이 개인의 전투기술에서는 제법 효과가 있었지만, 함대전이나 규모가 큰 전장에서는 아직 유에네스만큼의 전투력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다. 익숙해지면 된다. 그러면 유에네스의 이빨도 많이 무뎌질 것이다.
“정말 잘 싸운단 말이야.”
“당신 부하들이 정말 잘 죽고 있는데요.”
상관의 감탄에 부하가 핀잔을 준다.
“응?”
그때 체메트디오프는 뭔가 불길한 감각을 느꼈다. 집정관의 감각이 무언가를 감지한 것이다.
“누구지! 어디야?”
체메트디오프는 서둘러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다른 어느 곳에도 유에네스의 점프 기운은 없었다. 대신 동포의 이동이 보였다.
“저것은!”
부하의 놀란 목소리에 체메트디오프가 그쪽을 보았다. 샤다이 함대 뒤쪽에서 갑자기 유에네스 소형 전투함 한 척이 나타난 것이다. 놈들은 구축함이라고 부르는 배다.
“아니, 유에네스가 어떻게 우리들의….”
“그건 나중에 따지지. 일단 격침시켜.”
체메트디오프는 저 배를 알고 있다. 바로 그 ‘김 빈우’의 전투함이다. 저 배는 물론이고 타고 있는 부하들의 실력 또한 상상을 초월한다. 자칫 빈틈을 보이면 이쪽도 치명상을 입게 된다.
“너무 가깝습니다. 놈들의 공격이 이곳 기함만 노리고 있습니다!”
빈우의 배는 다른 전투함은 도외시하고 오직 이쪽, 체메트디오프가 탄 기함만을 노리고 고속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지금 샤다이의 함대는 42전단을 상대하느라 갑자기 뒤에서 툭 튀어나온 구축함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기함의 빈약한 후방 포탑들의 포격 또한 맞지 않았다. 반면 놈의 함수에 달린 포가 발사되어 명중한다.
“신무기로군!”
체메트디오프가 혀를 찼다. 분명 저번까지만 해도 빈우의 배는 자기가속포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쪽 방어막을 무시하는 입자가속포를 쓰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기함 뒷부분은 시원하게 뚫려버렸다. 이어서 어뢰와 미사일들이 같은 부위에 명중해 피해를 넓히고, 입자가속포도 계속 명중한다.
“저런 미친!”
그다음 유에네스 구축함이 보인 행동에 부하가 기겁했다. 자기가 쏴서 부순 기함의 손상 부위로 구축함이 그대로 밀고 들어온 것이다. 상대적으로 작은 유에네스의 구축함은 거대한 체메트디오프의 기함 안으로 쏙 들어왔다.
“목표는 나군.”
샤다이의 집정관은 순식간에 놈의 목적을 파악했다. 단기로 후방으로 돌아 기함을 기습했다면, 그리고 그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왔다면 적장의 목 외에 달리 무엇을 노리겠는가.
“맞서 싸울 부대를 보내겠습니다.”
부하는 명령과 동시에 장갑기사들을 내보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체메트디오프는 곰곰이 생각했다.
‘빈우의 장갑기사는 넷에서 다섯. 분명히 강하다. 때문에 그 능력을 발휘할 틈도 없이 성능 차로 짓눌러야 한다.’
유에네스의 보병들은 강하지만 아직 입자포는 없다. 다만 빈우만이 그 실험형으로 보이는 것을 하나 쓸 뿐이다. 화력도, 방어력도 이쪽이 압도적이라면 저쪽이 실력을 보이기 전에 전투를 마무리 짓는 것이 최선이다.
“엇, 각하!”
부하의 놀란 소리에 체메트디오프가 고개를 들자, 책의 한 페이지가 그의 앞에 들려져 있었다.
“집정관 각하! 이것을 보십시오.”
체메트디오프의 눈앞에 보인 것은 아군 장갑기사들이 쏜 별심장의 불길들이 적에게 닿지 못한 채 사라지는 광경이었다. 더구나 놈들에겐 보병용 입자가속포가 있었다. 그것이 발사될 때마다 아군 기사들이 갈기갈기 조각나 사라지고 있다.
“어떻게 적들에게 이런 것이….”
부하의 목소리가 떨릴 만도 하다. 유에네스의 공격은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공격을 가했던 지금까지의 전투, 그것이 책 속에선 정반대의 상황으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호오오!”
체메트디오프는 즉시 책을 뺏어 들고 해당 페이지를 꼼꼼히 살폈다. 그리고 감탄했다. 이유를 알았기 때문이다.
“내 딸아. 드디어 일어났구나.”
유에네스의 장갑기사들 사이엔 그의 딸 알탄훼아나가 있었다. 그렇다면 별심장의 불길이 통하지 않을 수밖에. 반면 저쪽의 입자포 두 문은 아군 기사들을 꿰뚫고 있다. 아마도 전투기나 전투함에서 떼어낸 물건인 듯한데, 대형 장갑기사에 장착되어 발사된다.
“길을 아주 잘 아는군.”
저쪽에 알탄훼아나가 있다면 이 전투함의 내부도 속속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유에네스들은 마치 제 집안을 거닐듯 길을 찾아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막기 위한 증원부대가 나갔지만, 시간을 늦추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각하, 이럴 때가 아닙니다.”
믿음직스러운 부하의 말에 체메트디오프도 동의했다.
“그래, 이럴 때가 아니지.”
체메트디오프는 지휘실을 나서서 서둘러 움직였다. 공중으로 뜬 그의 몸이 고속으로 이동했다. 뒤이어 따라 나온 부하가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각하! 지금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딸에게로!”
그 말과 함께 체메트디오프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알탄훼아나를 마중 나갔다. 저번에 봤을 때는 완전히 망가졌었는데, 이렇게 다시 일어나다니 부모로서 대견한 것이다. 부녀간의 상봉이 이뤄질 때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딸아!”
체메트디오프의 외침에 대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의 주변에 명중한 입자가속포가 폭발하며 주변을 날려버렸다.
“이야기를 하자꾸나!”
집정관용 고급 방어막이 아니었으면 위험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저쪽의 사격은 멈추었다. 그리고 이쪽도 공격을 멈추었다. 간신히 만들어진 무인지대 사이로 체메트디오프가 걸어 나갔다.
“하하하, 역시 내 딸이야. 역시 호민관이야. 아무렴, 그런 역경쯤은 딛고 일어나야지.”
만면에 미소를 띤 체메트디오프 앞으로 나선 것은 역시나 그의 딸, 알탄훼아나였다. 그러나 그녀의 모양새가 조금 이상했다. 주저한 듯 떨리는 발걸음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눈이, 그녀의 눈에 무언가 막이 씌워져 있었다. 마치 반쪽짜리 가면 같은 것이 그녀의 눈을 빙 둘러 가리고 있었다.
“오, 오랜만이군. 체메트디오프.”
태연을 가장한 떨린 목소리. 그러나 알탄훼아나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당당히 맞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