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이야기를 하자고 했었지?”
총구를 마주한 무리 사이에서 부녀가 마주 본다. 그리고 딸의 질문에 아버지가 질문으로 대답했다.
“…그 눈은 어떻게 된 것이냐?”
샤다이들 중에서도 동포를 이끌어 나갈 자들의 눈은 조금 특이하다. 더군다나 알탄훼아나는 발 가르단 하스로부터 새로운 능력을 배워 그 눈의 가치는 더더욱 남다르다. 헌데 지금 그 눈이 베일에 가려져 있는 것이다.
“그대가 알 바 아니다.”
이후의 질문을 막는 듯 딱 자르는 대답이다. 하지만 체메트디오프의 추리까지 막지는 못했다.
‘설마 부상의 후유증인가?’
체메트디오프는 알탄훼아나가 주시자들에게 사로잡혀 고문당했던 사실은 알고 있다. 그러나 저번에 봤을 때 그녀의 두 눈은 전부 멀쩡했었다. 비록 제대로 작동은 하지 않고 있을지언정 정상적으로 달려는 있었다.
‘그런데 없어.’
알탄훼아나의 눈가리개 안쪽에는 눈이 없었다.
‘그리고 없다. ’
거기다가 상대편 어디에도 빈우의 모습 또한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체메트디오프를 불안케 했다. 놈의 특기는 있어선 안 될 곳에서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는 것이다. 지금 빈우가 안 보인다는 것은 어딘가 숨어서 이쪽 뒤통수를 때릴 준비를 하고 있다는 의미다.
“좋아, 그럼 이야기를 하자꾸나, 딸아. 그전에, 빈우는 어디에 있지?”
“대화는 내가 그대와 한다. 집정관.”
잠깐만의 대화로도 체메트디오프는 딸이 걸어온 역경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녀 몸 안의 신경 파장이 미처 억눌리지 못한 채 바깥으로 새어 나온다. 심리상태가 정상이 아니란 증거다.
알탄훼아나는 아버지에 의해 계획이 무산되었으며, 또 주시자들에게 잡혀 동료들이 죽고 자신도 고문받았다.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녀는 쓰러지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이렇게 자신의 앞에 섰다. 호민관으로서, 그리고 자신의 딸로서.
‘그런데도 눈이 없다고? 잃어버린 건가, 포기한 건가, 빼앗긴 건가.’
체메트디오프의 머릿속에서 여기에 없는 빈우와 지금 딸에게 없는 눈이 서로 겹쳐졌다. 순간 이 두 가지가 마주치자 마치 부싯돌이 부딪친 것처럼 섬광이 일었다. 그리고 방금 들은 사실-자신이 다음 목표로 삼은 변절자 아만다 타이를 빈우가 죽였다는 사실-에 그 섬광이 옮겨붙자 불길이 일어났다.
‘설마하니! 그는 변절자를 눈으로 보고 죽인 것인가!’
체메트디오프는 빈우가 유에네스 속에 내려온 선조를, 변절자 아만다 타이를 어떻게 죽였는지 깨달았다. 그는 수사나 조사를 통해 아만다를 잡아낸 것이 아니다. 직접 보고서 알아챘을 것이 분명하다. 그 눈으로 아만다 타이의 정체를 파악했을 것이다. 바로 자신에게 달려 있는 호민관의 눈으로.
“흐하하하!”
갑자기 튀어나온 집정관의 광소에 호민관의 부하들이 움찔했다. 뒤쪽에 있던 샤다이들 또한 집정관의 웃음에 놀라고 있었다. 하지만 체메트디오프는 그딴 것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래, 그랬어. 마지막에 보았을 때 빈우는 이미 계단에 한발 걸쳤지. 네가 치료를 했겠거니 생각했었지만. 핫하하! 그래그래. 그렇다면 눈쯤이야 얼마든지 가져갈 수 있겠지. 그라면, 가능할 거야. 아암, 가능하고말고.”
맹인이 눈을 얻었을 때 가장 먼저 무엇을 할까. 세상을 볼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보고 싶어 했던 것을 보려 할 것이다. 한걸음에 달려가 자신이 그토록 보고 싶어 했으나 보지 못했던 것을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보려 할 것이다.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던 것을 마침내 눈으로 보았을 때, 그에겐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알탄훼아나. 미안하구나. 다시 일어선 네가 대견해서 이야기 좀 나눠보려 했더니, 크크크. 이제 너 따윈 궁금하지 않아. 빈우는? 그는 어떻게 되었지? 그가 네 눈을 빼앗아 갔니? 아니면 네가 주었니? 아냐아냐, 아마 네가 포기한 것을 주워간 거겠지.”
“닥쳐!”
알탄훼아나가 성난 소리를 뱉었지만 체메트디오프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아아, 부끄러워 말거라. 쓰러졌던 네가 일어난 것은 눈이 없는 덕분일 수도 있어. 눈 무게만큼 가벼워져서 일어난 것 아니겠니? 푸흐흐흐.”
“닥치라고 했어!”
“눈은 무겁단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의 무게가 얼마나 부담스러운지 너도 잘 알잖니? 그래서 그 무게에 허우적거린 것은 너였단다. 그런데 그걸 다른 사람에게 냉큼 넘겨버리고 신나서 가벼운 듯 뛰어다니다니! 아하하하!”
체메트디오프의 웃음은 거기까지였다. 아룹이 달려 나가 무너져 내리는 알탄훼아나를 감싸는 것과 동시에 조사팀의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대가리 접수!
위르겐의 입자가속포가 집정관을 박살 내고 뒤의 리퍼들마저 휩쓸었다. 리퍼들도 플라스마로 반격하지만, 모니카의 부머가 나서서 방어막으로 막는다. 아룹은 알탄훼아나를 방패로 막으며 뒤로 물러섰고, 그를 노리던 리퍼는 갑자기 바닥에서 솟구친 파트리샤의 진동 블레이드에 사타구니부터 조각났다.
-다로!
그녀의 뒤에서 클레이모어를 들고 덤벼들던 리퍼의 관자놀이에 아룹의 코일건이 정확히 명중했고, 같은 자리에 파트리샤의 블레이드가 박혔다. 지휘관의 사망과 갑작스러운 공격에 샤다이들이 우왕좌왕할 때 기습에 성공한 인필트레이터는 모습을 숨긴 뒤 사라졌고, 거기에 부머와 어벤져의 입자포 공격이 쏟아졌다.
“아니야! 나는, 나는!”
사격이 퍼부어지는 동안 알탄훼아나는 울부짖었다. 그리고 후회했다. 절망 속에서 어쩔 수 없이 했다고 자책하는 그 날의 결정을 다시금 후회했다.
-진정하시오, 호민관.
아룹이 알탄훼아나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했지만 별 효과는 없어 보였다. 알탄훼아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경련했다. 동포들의 죽음으로 평화가 찾아오는 이곳에,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고 후회하는 자가 몸서리치고 있었다.
* * *
책을 들고 달려가던 샤다이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집정관의 바로 옆에서 보필하던 자다. 그는 떨리던 손으로 책장을 넘겼다. 거기엔 체메트디오프의 죽음이 적혀있었다.
“참으로 슬프게도… 주연 배우가 죽었군요.”
그는 짧은 애도와 함께 책을 덮었다. 그리고 결연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아가며 혼잣말을 시작했다.
“그렇다 한들 공연이 멈춰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대본은 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어떻게 해야 할지 또한 압니다. 악보? 그것도 있지요.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주연을 맡으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이어서 집정관의 부하였던 자의 얼굴이, 체형이 서서히 변해간다.
“이 선조의 몰살을 기원하는 무대는 결코 멈출 수 없습니다. 멈춰서는 안 됩니다.”
그의 명령에 함대가 일사불란하게 정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격을 개시해 42전단에 거센 공격으로 피해를 준다. 또 기함 안으로 침투한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 기사들을 끌어모았다. 마지막으로 책을 펼치며 노래를 불렀다.
“우주의 끝이 터져나가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절망을 보았소.
모든 것이 끝나고 허무가 되는 순간이 비록 멀기는 하나 확실히 정해졌기 때문이지.
동포들이 이 우주를 버리고 도망칠 때, 나는 슬픔을 들었소.
허무로 가는 기나긴 동안을 벗과 가족 없이 쓸쓸히 보내야 했기 때문이지.
고향을 떠난 탕아들이 다시 돌아올 때, 나는 분노를 먹었소.
내가 힘들게 가꾼 정원에 해충들이 몰려와 짓밟을 것이기 때문이지.
이제 나는 앞으로 걸어갈 길에서 맡을 냄새가 궁금하오.
천국에서 피어난 꽃의 거짓 악취일까, 지옥에서 몸부림치는 동포들의 피 향기일까.”
노래를 끝내며 책장을 덮은 체메트디오프는 다시금 자기소개를 했다.
“제 이름은 체메트디오프, 이번 무대에서 맡을 배역은 샤다이의 집정관입니다.”
그리고는 집정관의 명령을 전 함대에 내렸다. 유에네스에 의해 묶이지 않은 함대는 모두 이탈한다. 기함도 적에게 잡아먹힌 부분은 버리고 떠난다.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시간 낭비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딸아, 결국 막지 못하는구나.”
체메트디오프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걸린다. 알탄훼아나는 유에네스 구축함을 공간이동 시켜 기습해왔다. 그리고 다음 수로는 집정관 기함의 공간이동을 막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불쌍한 딸은 그럴 겨를이 없어 보였다. 아마도 자신을 다잡는 것에 필사적이리라.
명령이 떨어진 다음 순식간에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지금 그의 함대는 유에네스의 손이 닿지 못하는 곳으로 도망쳤고, 알탄훼아나도 추적하지 못하는 곳이다. 여유를 찾은 체메트디오프는 함대의 피해 상황을 파악하고 복구하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 대본을 대폭 수정했다. 아니,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눈뜬 봉사가 찾아갑니다. 그토록 바랐던 빛을 향해.”
체메트디오프가 흥얼거리는 콧노래가 계획 수정의 이유였다. 지금까지는 그저 장님이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눈을 뜨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뻔하다.
“찾고, 죽이고, 찾고, 죽이고.”
책에 연신 글을 적으며 콧노래를 부른다. 원래 선조들의 계획은 우선 울토르 중대란 클론들을 만들고, 거기에 계단을 만들어 방주로 만든다. 다음 단계로 울토르 클론을 시발점으로 삼아 마음의 상처를 유에네스 사회에 퍼트려 선조들을 한꺼번에 내려오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체메트디오프 자신의 계획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돌아온 선조를 몰살시키는 것이다. 이곳 통상우주로 내려오게 하는 것까지는 같다. 그다음 죽이는 과정이 문제다.
“그것을 위한 키가 눈을 떠버렸네.”
그의 공연을 부드럽게 진행하기 위해서 울토르 프로젝트의 지휘관이 필요했다. 그래서 포말하우트 게이트 안에서 클론들의 원본이었던 빈우를 포섭하려 했었는데, 하필 방해가 들어왔었다. 제국의 칼날이었던 주시자들, 우주를 떠돌며 학살을 하던 자들이 갑자기 들어와 체메트디오프의 계획을 방해한 것이다. 덕분에 반편이 같던 목표물을 놓치고야 말았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눈을 떴다. 왜 눈을 가져갔을까.”
알탄훼아나가 눈을 포기했다고 해도 그게 쉽게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격이 있어야 한다. 몸이 바뀌어야 한다. 물론 빈우는 몸을 바꾼 적이 있다. 그러니 다시 몸을 바꿀 수도 있었겠지.
“헌신, 자기희생, 무엇을 위해서 그는 그 선택을 했을까. 무엇이 그를 희생으로 몰아넣었을까. 흠, 의무감과 죄책감이겠지.”
자문자답하는 체메트디오프는 스스로가 긴장하고 흥분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말이야, 뭔가 있어.”
체메트디오프는 책장을 앞으로 넘겨 빈 페이지를 만지작거렸다. 극의 대본 부분이며 전임자들이 작성했던 부분들이다. 그러나 체메트디오프란 배역에 관한 정보가 적혀있는 부분이 일정부분 비어있다. 게이트 안에서, 주시자들에게 죽을 때 지워진 부분들이다. 물론 전임자가 죽을 경우 빌 수는 있다.
“지금까지는 그러려니 했거늘.”
샤다이 집정관은 빈 페이지를 손가락으로 삭삭 긁어보았다. 아무리 정보가 물질에 우선하는 계단 내부라고는 해도 이렇게 필요한 부분만 딱딱 끊어서 지워질 수 있을까.
“설마, 설마, 설마.”
그의 머릿속으로 추리와 상상의 나무가 봄날 비를 만난 것처럼 가지를 뽑아내고 싹을 틔운다. 체메트디오프는 거기서 어떤 꽃이 필지 심히 궁금했지만, 호기심을 억누르고 가지치기를 했다. 그래도 싹은 끊임없이 솟구쳐 올랐다.
누군가 고의로 체메트디오프의 대본을 수정했다. 그것도 계단 안에서. 그런 일이 가능하려면 집정관 이상의 능력이 필요하며, 그것이 가능한 것은 고대의 현자 발 가르단 하스 같은 고밀도 신경계 생명체 정도다.
“하지만 발 가르단 하스가 이런 일에 참견을 할까? 아니지. 계단 안에서 이런 일을 할 만한 자가 달리 누가 있으랴.”
체메트디오프는 간신히 자신의 호기심을 멈추었다. 지금 당장 생각할 것은 각성한 키의 행방이다. 빈우가 원하는 것은 샤다이의 죽음. 그리고 방금 죽인 것은 과거부터 숨어 살아오던 샤다이 변절자들, 유에네스를 사육하는 타락한 존재들이다. 이들은 계단을 올라갔다가 돌아온 다음부터 이 우주를 멸망시킬 운명을 가진 존재, 유에네스들을 보호하며 키워주고 있다. 다시 말해 유에네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우에게 죽었다. 즉, 빈우가 원하는 것은 모든 샤다이의 죽음이다. 아군 적군을 가리지 않고.
“많은 샤다이를 죽이려면 선조를 계단에서 내려오게 하면 될 텐데, 그래도 그는 하지 않겠지. 아하아, 그걸 또 설득하는 게 내 역할일 텐데, 이거 힘들 거 같아.”
체메트디오프는 웃는 얼굴로 우는 소리를 하며 계속해서 대본을 써 내려갔다.
“어디로 갔을까, 그는 어디로 갔을까.”
아까 알탄훼아나의 반응을 봤을 때, 빈우는 저 팀에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것도 자연스레 떨어진 것이 아니라 중간과정에 무슨 사고가 있었던 게 분명했다.
“저런 헌신적인 존재가 동료를 버리고 떠났을 때 할 일은 하나뿐이지. 외계인을 죽이고 싶어 안달 난 존재가 갈 곳은 한 곳뿐이지.”
대본을 다 쓴 체메트디오프는 책을 덮었다.
“우리는 유에네스의 수도, 화성으로 갑니다.”
마치 봄날 소풍 가자는 신난 말투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주변 샤다이들의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화성은 유에네스의 심장부다. 그래서 제아무리 지금의 샤다이라 해도 함부로 칠 수는 없는 곳이다. 현재 샤다이가 유에네스를 상대로 우위에 있으나 그들의 주력함대는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리고 만약 수도가 공격받는다면 외우주를 떠돌던 주시자들이 한꺼번에 돌아와 건방진 방해자들을 모두 몰살시킬 것이다.
그래도 체메트디오프는 화성으로 갈 계획이었다. 거기서 빈우가 벌일 일에 숟가락을 얻을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