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안나 닐센은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무중력 공간에서 두둥실 떠다니는 몸이지만 옛적부터 이어져 온 버릇은 어쩔 수 없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지?’
안나는 멍한 기억을 다시 더듬었다. 포말하우트 게이트 안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나는 왜 그날 거기로 향했지? 나는 거기서 무엇을 보았지?’
2216년 6월 8일, 13전대는 포말하우트 점프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서 무언가를 보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오늘날의 일까지 이르게 되었다.
‘난 거기서 무엇을 보았기에 루비콘 라인 안쪽으로 들어왔을까.’
루비콘 라인 안쪽으로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두가 잘 알고 있다. 그러니 그녀에겐 그것을 감내하고서라도 들어가야 했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제대로 떠오르는 것은 없다. 모두 파편화되고 뒤섞여 있다. 하지만 반드시 찾아야 한다. 자신이 카이사르급을 건조하고 지구로 돌아가려 했던 이유를. 황제를 다시 만들려고 했던 이유를.
“무슨 일인가요, 전대장?”
안나의 말에 아래에서 조용히 기다리던 전대장 이 섬이 황송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방해를 해서 죄송합니다, 함장님.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허공에 떠 있던 안나 닐센이 서서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모습도 변했다. 그녀의 발이 바닥에 닿았을 때 안나 닐센의 모습은 1전대의 기함인 그리폰의 함장, 샹 메이화로 돌아와 있었다.
“체메트디오프의 일이겠군요.”
“네.”
샤다이가 인류의 몸을 사용해 돌아오려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류 스스로가 이겨낼 수 있는 위기다. 굳이 비홀더 전대가 나설 일은 없다. 하지만 체메트디오프의 계획은 달랐다. 놈은 귀환의 그릇이 되는 울토르 중대의 규모를 키워 대규모 귀환을 일으킨 다음 돌아온 선조들을 몰살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이외에도 여러 가지 계책을 꾸며 일을 뒤틀리게 만들고 있다.
“새로운 정보라도 있나요?”
“낭소로호가 몇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을 들었다 합니다.”
현재 낭소로호 중위는 루비콘 라인 가장 안쪽에서 연방의 구역과 겹쳐가며 정보를 수집하는 중이었다.
“신중한 그가 주의해야 할 것이라면 정말 심각한 것이겠죠.”
“말씀대로입니다. 그중에서도 집정관의 동태가 가장 미심쩍습니다. 샤다이 집정관인 체메트디오프가 다시 병력을 모으고 있다 하는데, 낭소로호의 분석에 따르면 이번엔 본대가 나올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합니다.”
“본대라.”
메이화가 기억을 더듬었다. 본대라면 샤다이의 선조들이 계단으로 도망치기 전, 과거의 우주를 정복하고 호령했던 대함대를 말할 것이다. 당연히 그 성능은 현재의 샤다이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아마 지구 제국과 인류연방 간의 격차보다 더 심할 것이다. 하지만 체메트디오프는 그것을 쓰거나 연구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자존심 높은 놈은 자신들을 버리고 간 조상의 물건을 쓰길 꺼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을 지금 꺼냈다? 이는 체메트디오프가 이번 일에 본격적으로, 그리고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겠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행여 화성이라도 가려는 것일까요?”
함장의 말에 전대장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네, 만약 샤다이의 고대 함대가 온다면 화성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강력한 샤다이라 해도 지금까지 태양계를 건드린 적은 없었다. 여기엔 두 가지 가설이 있는데 좌표를 몰라서 못 온다는 것과 무서워서 안 온다는 것이 있다. 물론 후자가 진실일 것이다.
화성은 인류연방의 수도인 만큼 그 방어력은 연방군 안에서도 두 번째이다.
우선 연방군의 주력인 중앙함대가 주둔하는 곳이 바로 화성이다. 중앙함대 중 하나만 나가도 어지간한 외계 종족은 멸종당하며, 그 전체 전투력은 샤다이에게도 치명적이다. 다만 넓은 연방의 영역을 전부 커버하기엔 무리라 신속대응군 격인 뱅가드 연대를 먼저 출격시킨 다음, 추이를 살펴보고 변방 함대나 중앙함대를 파견하는 것이 현재 연방의 대 외계인 전법이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화성의 가장 큰 전력은 아직까지 움직이는 제국 시절의 자동방어 시스템이다. 지구를 시작으로 각 행성마다 배치된 태양계 내 방어시스템은 현재에도 자동으로 보수, 작동 중이며 태양계 안으로 들어온 외계 함선을 제국 시절의 무기로 공격한다.
또한 가장 뛰어난 방어력을 지닌 곳은 지구. 현재는 접근 불가 영역이지만 과거 제국의 수도였던 만큼 그 모여 있는 병기의 수는 어마어마하다.
“그런가요. 결국 침략자들은 화성의 방어 전력에 전멸하겠지만, 그때 인류가 입게 될 피해도 무시하진 못할 겁니다.”
연방의 중앙함대에 제국의 무인 방어 병기가 있다 해도, 샤다이의 본대가 쳐들어온다면 상당한 피해를 입을 것은 자명하다. 메이화는 창밖을 보며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체메트디오프는 왜 굳이 화성으로 가려 할까요.”
“그야 놈의 계획을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울토르 중대를 이용하겠다는 계획. 화성에 있는 샤다이 침략자 놈들과 뭔가 거래가 있겠지요.”
일리가 있다. 체메트디오프는 얼핏 흥미 위주로 움직이는 자 같아 보이지만, 그 흥미를 유발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그의 계획에 연관된 것뿐이다. 만약 아무리 신기한 일이 일어난다 한들, 자신의 계획에 상관이 없다면 그는 일말의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네, 체메트디오프는 언제나 자신의 사명에 따라 움직였으니 이런 큰 움직임은 반드시 그 계획을 위해서겠지요. 사명.”
메이화는 자신의 말을 다시 중얼거리며 왔다 갔다 걸었다.
“사명이라….”
그녀는 문득 돌아서서 이 섬을 바라보았다.
“전대장, 안나 닐센의 사명이 무엇이었을까요?”
함장의 말에 전대장은 잠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본 다음 다시 머리를 숙였다. 함장의 모습에 안나 닐센의 모습이 잠시 엿보였다. 자매의 기억을 더듬는 것이리라.
“함장님들의 사명은 인류 발전의 터전을 만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맞아요. 폭발적인 기술을 얻은 인류에게 이를 소화할 시간을 주고, 바깥에 있는 외계 종족을 쓸어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는 서로 지구로 돌아오지 않기로 약속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인류를 위해서란 말이지요.”
메이화 함장이 바깥으로 걸어 나가자 이 섬이 따라붙었다. 육중한 거구가 마치 무게감이 없는 것처럼 가볍게 움직인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죠. 전대장, 쿠델카를 아나요?”
“함장님과 마찬가지로 황제의 페르소나 중 하나 아닙니까.”
“네, 또한 빈우란 자의 옆에도 있었지요.”
메이화의 말에 이 전대장은 그런 안드로이드를 떠올렸다. 분명 김 빈우란 연방군 소령의 옆에는 쿠델카 모습을 한 안드로이드 메이드가 있었다.
“저도 보았습니다만, 그것은 그저 자신의 모습을 본뜬 안드로이드 아닐런지요. 쿠델카의 임무는 샤다이의 계단을 감시하고 그것으로부터 인류를 지키는 것입니다. 쿠델카 타입 안드로이드는 이미 인류 안으로 들어온 샤다이를 제거, 혹은 견제하기 위한 방편 중 하나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네, 그래서 제 자매는 점프공간 안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어요. 그곳은 통상공간과는 다른 곳이라 루비콘 라인의 영향을 받지 않지요.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통신을 이용해 외부와 잠시 연동하는 것뿐. 그마저도 연동 시간이 길어지면 자신의 좌표를 바깥으로 인식하고 말아요. 루비콘 라인 안쪽에 있는 것으로 인식합니다. 그럼 결국 자아가 지구, 우리의 본체로 흡수되고 말지요.”
그녀가 아는 것은 그 정도 뿐이다. 이미 루비콘 라인 바깥으로 돌던 그녀에게 선 안의 일은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녀가 신경 써야 할 일은 지금 여기, 루비콘 라인 밖이고 그 일들이 현재 창 바깥에서 벌어지고 있다. 걸어가는 복도의 바깥으로 전장의 화염이 일렁인다. 정확히 말하면 전투가 아니라 학살이다. 오늘도 또 하나의 종족이 비홀더의 눈에 띄어 멸망당하는 중이다.
“안나는 이전부터 쿠델카를 견제했지요. 성향이 달라서가 아니라 너무나 비슷했었기 때문입니다. 평행선을 이루던 둘의 사이는 그리 좋지 못했지만, 언제나 훌륭한 결과가 나왔기에 우리는 그녀들의 다툼을 오히려 반겼습니다.”
메이화는 제국 시절 인간의 모습을 한 쿠델카와 안나의 다툼을 떠올리며 싱긋 웃었다. 즐거운 추억이었다.
“안나가 굳이 점프공간으로 들어갔다면 그것은 십중팔구 쿠델카가 목적이었을 겁니다. 뭔가 중요한 것을 알아냈음이 분명해요. 심지어 외부에서 통신을 한 것이 아니라 직접 자신의 함대를 끌고 들어간 것이니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겠죠.”
아쉽게도 비홀더 전대들은 거의 독립적으로 움직이며 협조를 하는 일은 드물다. 그래서 서로의 일은 알 수 없다.
“쿠델카 타입 안드로이드가 기른 군인은 지금까지 네 명. 그중에서 살아있는 것은 김 빈우와 마커스 타이에요.”
이 섬은 조용히 듣고 있었지만 이해하긴 힘들었다. 그래봤자 연방의 군인이다. 빈우도 직접 본 적이 있지만 그리 강한 이는 아니었다. 요시오 한 명만 보내도 그의 배와 팀은 순식간에 전멸할 정도다.
“후후, 납득이 안 간다는 표정인데요?”
“송구합니다.”
메이화가 급히 고개를 숙이는 전대장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제국의 군인이 무릎을 굽혔고, 함장은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 섬. 저는 당신을 키웠습니다. 말하자면 제 아들이지요.”
이 섬은 말없이 그녀의 손에서 자신을 길러준 인공지능을 보고 있었다.
“오늘날까지 당신을 키우면서 저는 몇 가지 월권행위를 했습니다. 제 행동 원리상 가능할 리가 없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저는 그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저 당신을 위해서 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그 생각만으로 불가능이 가능케 되었죠.”
전대장은 함장이 저지른 월권행위들의 내용이 짐작이 가는지 얼굴을 붉혔다. 어린 시절의 치기였다.
“만약 쿠델카의 안드로이드가 단순히 자신의 모습을 본뜬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쿠델카 그녀 자신의 사고방식을 모조한 페르소나라면, 그리고 그 안드로이드들이 키우는 인간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왔다면 일이 복잡해질지 몰라요.”
이 섬의 얼굴에서 손을 떼는 메이화의 표정은 어느새 심각해져 있었다.
“안드로이드가 자신의 보육대상을 위한다는 헌신과 사랑. 그것을 모조해 열쇠를 만든다면 그녀는 그 열쇠로 자신의 상자, 판도라의 상자를 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마치 제가 이 전대장을 위해 제 행동 원리를 뛰어넘은 것처럼 말이죠.”
판도라의 상자는 과거 인류에게 금기를 나타내는 단어였다. 인공지능에, 그것도 황제의 페르소나에게 금기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자매가 함대까지 이끌고 들어갈 일은 몇 없습니다. 쿠델카는 인류에게 반기를 들 가능성이 높아요. 바로 자신이 키운 존재를 위해서. 만약 그가 폭군이 되려 한다면 그녀는 그것을 도울 것이고, 그가 인류를 멸하려 한다면 그 또한 도울 겁니다. 그래서 안나는 이를 막기 위해 계단 안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뭔가 본 것일 겁니다.”
거기까지 말한 메이화가 고개를 저으며 정정했다.
“아니, 당했겠죠. 그 안은 쿠델카의 영역이었을 테니. 그리고 간신히 돌아 나와 귀환함대를 만들고 태양계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사태가 돌아가는 방향을 짐작한 이 섬이 얼굴을 굳혔다. 13전대는 지구로 돌아가던 중 1전대와 마주쳤고, 싸웠으며, 결국 전멸했다.
“그 말씀은 우리가 누군가의 계획에 놀아났다는 말씀입니까?”
아무리 그라 해도 같은 비홀더 전대를 공격한 것은 썩 좋지 않은 기억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누군가의 음모라고 하니 좋은 기분이 들 리 없다.
“그럴 가능성이 높죠. 이건 계획이 아니라 숫제 판이에요. 놈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 계획을 짰을 겁니다. 규칙을 정하고, 말을 만들고, 하나의 보드게임을 만들었죠. 우린 그 게임에 들어간 이상 게임의 규칙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어요. 어쩌면 체메트디오프도 그 말의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함장의 말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이 섬이 재차 질문했다.
“허면 마커스 타이나 김 빈우. 둘 중 하나를 잡아 족치면 답이 나오겠군요.”
“정확히는 답이 아니라 답을 향한 실마리죠. 서두릅시다.”
메이화의 말에 섬은 몸을 돌려 달려 나갔다. 그리폰의 함장 샹 메이화는 시선을 다시 바깥으로 돌렸다. 거기엔 자신과 동류인 존재가 죽어가고 있었다.
“발 가르단 하스. 이 바보 같은 자가.”
행성 생명체인 발 가르단 하스가 자신의 표면에 달라붙은 1전대원들에게 죽어가는 중이다. 제국의 군인들은 행성의 표면을 부수고 반물질 폭탄을 밀어 넣어 그의 신경계를 소멸시키고 있었다.
“안나에게 알려줬던 사실을 순순히 말했으면 죽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메이화는 자매인 안나가 발 가르단 하스와 접촉했다는 것을 알게 된 다음 그를 찾아가 물었다. 그녀와 무슨 대화를 했냐고. 물론 과거에 1전대가 벌였던 사건에 대해서는 정중히, 그리고 깍듯이 사과했다. 체메트디오프의 수하를 치면서 당신도 같이 공격한 것에 질투심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라고.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무료했던 발 가르단 하스에겐 대답할 의사가 없어 보였다. 메이화와 1전대가 수많은 업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발 가르단 하스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려주기는 싫은 듯, 정확히는 미래에 일어날 대사건을 막기 싫은 듯 보였다.
-앞으로 벌어질 일이 궁금하지 않아?
그게 그의 유언이었다. 메이화로선 자신의 까마득한 선배이자 그녀들보다 윗줄의 능력을 가진 자가 무대 뒤에서 난리를 피우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선택을 했다. 그 선택의 결과가 지금 그녀의 눈 아래에 펼쳐지고 있었다.
-죽어, 병신아! 죽어! 뒈져!
저 아래에서 요시오가 물 만난 물고기마냥 날뛰고 있다. 발 가르단 하스의 관리자 종족들이 나와서 저항하지만 전대원들에게 비할 바는 아니다. 그들은 말 그대로 풍선 터지듯 터져나가고 있었다.
“잘 가시게.”
오랜 선배의 숨통을 끊으며 샹 메이화는 묵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