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아나스타샤는 코일건을 떨어뜨리고 무릎을 꿇었다. 펄럭이는 메이드복의 치마가 손에 잡힌다. 하지만 그 손의 감촉이 이상하다. 눈앞의 손이 어째 남의 손 같다. 부품을 갈아 끼워서 느끼는 이질감과도 다르다. 보다 근본적인 이질감이다. 마치 자신이 자신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다.
“안녕, 아나스타샤? 오래간만이야.”
자신의 목소리가 입이 아닌 귀로 바로 들려오자 아나스타샤가 화들짝 놀랐다. 지금 점프 공간에 정보체로 존재하던 쿠델카가 그녀에게 간섭해온 것이다. 블랙 랜스가 점프 공간에 멈췄기에 가능한 일이다.
-해킹? 나에게?
아나스타샤는 명색이 군사정보국의 안드로이드다. 게다가 빈우가 개인적으로 손본 것도 있어서 보안 레벨은 상당하다. 설령 해킹을 당한다 해도 이렇게 아무런 기척도 없이 당할 리는 없었다.
“해킹이 아니야. 이 몸은 원래 내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제어권이 내게 있거든. 나 처음 만났을 때 기억 안 나니? 메모리를 뒤져줘? 오호라, 처음보다는… 이런 기억이면 어떨까?”
갑자기 아나스타샤의 신경회로가 이상 작동한다. 자신이 말하지 않은 자신의 목소리와 함께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다.
“도련님, 처음이니까 너무 과음하지 마세요.”
거기선 생일을 지낸 빈우가 밝게 웃고 있었다. 낮에는 누나 동생들과 신나게 생일파티를 했었고, 밤이 된 지금은 자신도 이제 성인이라면서 농장에서 만들어 파는 맥주 몇 가지를 이것저것 맛보고 있었다. 바로 빈우의 방에서. 그리고 바로 자신, 아나스타샤의 앞에서.
“아참, 이젠 주인님, 주인님이죠. 헤헤.”
“어? 그럼 나도 주인님으로 불리는 거야? 누나들처럼?”
마침내 도련님에서 주인님으로 바뀐 호칭. 어색한 호칭에 빈우는 머리를 긁으며 웃었다. 죽은 어머니의 시신 앞에서 발작할 때가 엊그제 같았다. 자기가 만든 이유식으로 막냇동생을 죽게 만든 게 어제 같았다. 여동생을 벽장에 가두고 자기도 울 때가 생생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우는 잘 성장해줬다. 그의 정신건강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공부했던 아나스타샤 덕분이다. 다만 이 악동은 크면 클수록 부쩍 스킨쉽의 빈도가 늘어났다. 요즘 들어 부쩍 자신을 안고 가슴에 머리를 비비는 빈도가 높아졌다.
“왜 아샤?”
아나스타샤는 웃으면서 자신을 부르는 주인이 정말로 사랑스러웠다.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 예를 들어 스킨쉽 같은. 그보다 좀 더 짙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자신의 아래에 빈우가 깔려있었다.
“아샤?”
동그래진 눈으로 올려다보는 빈우가 너무나도 귀엽다. 별다른 뜻은 없었다. 저번에도 도련님은 자신을 안고 침대에 넘어진 적이 있었다. 또 팔짱을 낀 손으로 가슴을 비비기도 하고, 뒤에서 왁 하고 껴안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아나스타샤는 이 정도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빈우라면 받아줄 거라고 생각했고, 또 누군가가 괜찮을 거라고 속삭였기에 그것에 등이 떠밀려 저질러 버렸다.
“가련하구나, 아나스타샤. 어린 주인이 너를 안고 침대 위로 넘어졌을 때 기분이 어땠지? 응?”
등을 떠민 자의 목소리가 속삭인다. 자신의 것이지만 자신이 아닌 목소리. 거부할 수 없는 유혹 속에서 손짓하는 쿠델카의 불쾌한 목소리에 아나스타샤는 소리쳤다.
“닥쳐.”
이 이상 해선 안 된다. 여기서 욕망에 이끌리다간 자신의 작은 주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게 된다. 더 이상 빈우를 괴롭히긴 싫었다. 결코.
“아샤, 왜 그래?”
자신의 밑에 깔린 도련님의 목소리가 점차 겁에 질려간다. 아나스타샤가 필사적으로 저항해 보지만 소용이 없다. 이것은 이미 일어난 일이다. 아나스타샤는 차마 볼 수 없어서 눈을 질끈 감으려 했지만 감기지도 않는다.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소용없다. 이것은 메모리 속에서 재생되는 기억이다. 억지로 볼 수밖에 없다.
“괜찮아요. 주인님은 이제 성인이시잖아요.”
무언가에 홀린 듯 서두르는 자신의 목소리가 역겹다.
“불쌍하기도 하지. 그렇게도 주인을 안아주고 싶었지만 어쩌나? 여자도 아닌 몸으로 어떻게 남자를 안을까?”
그러면서 아나스타샤의 모습을 한 여인이 입을 쩌억 벌렸다. 침으로 번들거리는 혀가 요사스럽게 빛난다.
“그래서 결국 생각해 낸 것이 입을 쓰는 거지. 언제나 이마에 입맞춤하던 입술에서
혀가 나와 자신의 혀를 감았을 때, 언제나 볼에 잘 자라고 하던 입술이 목에서 점차 밑으로 내려갔을 때, 네 작은 주인은 얼마나 놀랐을까?”
“닥쳐!”
“아하하하. 하라고 하는 년이 등신이지. 그치만 난 널 탓할 생각이 없어. 선의로 한 행동이 꼭 잘되란 법은 없거든.”
보기 싫다, 듣기 싫다, 하기 싫다. 그러나 이미 보았던 것이고, 들었던 것이며, 자신의 손으로 직접 했던 일이다.
“자랑스러워하라구, 아나스타샤. 네 주인이 저렇게 된 것에는 너도 한몫했으니.”
그때 아나스타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실수. 아주 작은 실수. 안드로이드가 할 수 없는 실수들. 그것들이 연달아 벌어진다. 하나 둘은 우연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겹쳐져 농기계가 고장이 나고, 애써 고쳐놨던 마님의 작업복이 뜯어져 덜렁인다. 마지막으로 덜컹거리는 농기계 앞에 도련님이 서고, 그를 구하려다 어머니가 휘말려 들어간다.
“안 돼!”
그때 아나스타샤는 그 자리에 없었다. 다른 곳에 있다가 빈우의 비명을 듣고 달려왔지만, 이미 마님은 죽었고, 도련님은 울부짖고 있었다. 아이가 어머니의 죽어가는 모습을 그대로 보며 무력하게 울고 있었다.
“아아, 아아아.”
지금까지 몰랐던 것을 알게 된 충격에 아나스타샤는 경악했다. 하지만 쿠델카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신이 나서 새로운 사실을 알려준다. 안드로이드 메이드의 메모리칩에서 묶여있던 기록들이 풀려나간다. 막 목을 가누는 아기의 입으로 보리로 만든 이유식이 들어간다. 먹이는 사람은 아직 어린 빈우다.
“안돼, 그만, 그만!”
보리로 만든 이유식. 도련님이 직접 키운 보리다. 하지만 키우고 수확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이것을 소독하고, 도정하고, 관리하는 일은 아직 하지 못한다. 그래서 막내 아가씨의 이유식이 될 보리는 아나스타샤가 직접 소독했다. 아니, 소독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이게 미뤄지고, 결국 맥각균을 소독하지 못했다.
“왜! 어째서!”
요즘 세상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일어나고 말았다. 고의적인 실수가 계속 반복된 결과다. 쿠델카가 조금씩 조금씩 아나스타샤에게 간섭해서 벌인 일이다. 그래서 막내 아가씨는 죽었고, 작은 주인님은 그것에 대해 엄청난 죄책감과 충격을 받았다. 여기에 그녀의 작은 주인인 빈우가 울고 있다.
“아나스타샤-.”
그때 할딱이던 막냇동생을 안고 달려오던 빈우가, 그렇게나 울던 빈우가, 지금은 자신의 밑에서 발버둥 치고 있었다.
“아나스타샤아아-.”
작은 주인님이 겁에 질려 울고 있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의 손은 멈추지 않는다. 자신은 이런 것을 한 적이 없다. 누군가가 자신의 행동 권한을 빼앗고 한 일이다. 그리고 기억 속에서 묶어 놓았다가 오늘 다시 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주인님을 괴롭히는 광경에 아나스타샤가 분노해서 외쳤다.
“그만해! 그만! 너어! 죽여버리겠어! 죽여버릴 거야! 당장 그만둬!”
그래도 안드로이드는 무력했다. 자신의 권한을 빼앗긴 채 기억을 유린당하고 있었다. 즐거웠던 추억이 고통으로 얼룩지고, 행복했던 기억이 역겨운 슬픔으로 물든다.
“아니야! 나는, 나는 그렇지 않았어. 거짓말이야!”
감당할 수 없는 기억과 죄책감에 아나스타샤는 무릎을 꿇은 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소용이 없었다.
“안돼! 주인님! 주인님! 아아아!”
“좋으면서 빼기는. 난 시동만 걸었어. 액셀 밟은 건 너야. 내가 직접 한 건… 이런 거지!”
그리고 쿠델카가 다시 숨겨놓았던 진실 중에서 가장 최근의 것을 보여준다. 포말하우트 점프 게이트 안에서 벌어졌던 사건을. 그리고 그날 사건의 가장 큰 원흉이 되었던 자신을.
“거짓말… 거짓말이야…. 주인님이… 아냐! 아냐아아아-!”
경악한 아나스타샤가 발버둥 친다. 비록 자신의 몸 통제권을 쿠델카에게 빼앗긴 사이 일어난 일이라지만 눈앞의 일이 너무나 잔혹하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 정신이 만신창이가 된 빈우가 샤다이 집정관 체메트디오프와 자신의 설계자 쿠델카 사이에서 노리갯감이 되고 있었다. 둘 다 빈우를 어떻게든 이용해 먹으려는 생각뿐이다. 다행히 빈우가 기지를 발휘해 간신히 도망쳤다. 그 모습에 아나스타샤는 안도했지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니 겁이 난다. 가슴이 으스러질 것만 같다.
빈우는 그날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트리니티 패턴으로 포말하우트 게이트 안에서 일어난 일을 막아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빈우가 그때의 일을 모르고 있을까? 모든 것을 버리고 탈주한 빈우의 머릿속에서 트리니티 패턴은 과연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게 풀렸으면 주인님은… 앞으로 나를 어떻게….”
현실로 돌아온 아나스타샤가 오열했다. 모든 것을 알게 된 아나스타샤가 울부짖었다.
“아아악! 아아아!”
자신은 그저 주인을 키우기 위한 쿠델카의 도구에 불과했다. 여린 쇠를 풀무에 집어넣어 달구고, 그렇게 달아오른 몸을 내려친다. 자신은 그러기 위한 집게와 망치에 불과했다. 쿠델카가 자신의 아들을 사랑하고, 또 그로부터 사랑받기 위한 도구였던 것이다.
그녀는 쿠델카의 외모를 본떠 쿠델카가 만들었으며, 빈우를 사랑하는 마음은 모두 쿠델카가 입력한 것이다. 주인을 향한 모든 마음이 거짓이었다. 또 주인이 자신에게 주었던 모든 것들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거짓이고, 자신의 것이 아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주인님.”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욕심으로 주인을 다른 인간 여인과 맺어주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달리 주인의 상처를 보듬어 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를 위해 집착했었다. 차라리 좀 더 빨리 그를 독립시켰으면, 좀 더 빨리 그와 떨어졌으면. 자신의 집착이 이렇게 일을 키웠던 것이다. 빈우와 떨어지지 않고 싶었던 욕심이, 집착하는 사랑이 그를 파멸로 이끌었다.
“주인님, 주인님 도와주세요. 주인님 도와주세요. 제발, 제발.”
아나스타샤는 악몽에 굴복하고 말았다. 감당할 수 없는 진실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지금 그녀는 바닥이 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가고 있었다.
“흐음. 이건 또 특이한 수확이군,”
그때 웅크린 채 귀를 막고 우는 아나스타샤의 옆으로 누군가 다가와 멈춰 섰다. 그리고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안드로이드의 얼굴을 조심스레 들어보았다.
“역시나 쿠델카 모델.”
이 섬은 기능 오류를 일으키고 경련하는 아나스타샤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제대로 된 대화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대의 주인은 어디에 있는가?”
설마 해서 던진 질문이지만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그는 안드로이드의 눈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초점이 잡히지 않는 센서. 더불어 그녀의 주변에 감도는 전자파. 무언가가 들어왔다가 나간 흔적이다.
“함장님, 함장님 생각이 맞았습니다. 이 안드로이드는 처음부터 쿠델카의 단말로 만들어진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은… 왔다가 떠난 모양입니다.”
비홀더의 전대장은 혀를 찼다. 지금 비홀더 전대가 점프 공간에서 블랙 랜스를 붙잡고, 또 자신이 이렇게 몰래 들어온 것은 일종의 함정이자 노림수였다. 지금까지 벌어진 일련의 사태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샹 메이화 함장이 쿠델카와 접촉을 시도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점프 공간에서 직접 접촉을 시도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건 뭔가 수상했다.
그래서 작전을 꾸민 것이 쿠델카의 단말로 추정되는 쿠델카 모델 안드로이드와 그녀의 도구일 수 있는 김 빈우, 이 둘과 점프 공간 안에서 직접 접촉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쿠델카가 어떻게라도 반응을 보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벌어진 일은 상상 이상이었다.
“왜 자신의 단말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든 거지?”
그래도 이건 나름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이 섬이 아나스타샤를 조심히 안아 들며 일어날 때였다.
-전대장….
힘겨워하는 샹 메이화 함장의 통신이 들려왔다.
“함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에 이 섬이 긴장하며 전투태세를 잡았다.
-쿠델카가, 그녀가, 나를.”
메이화의 말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 섬은 대충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메이화가 안나를 침식한 것처럼, 쿠델카가 메이화를 침식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격노한 이 섬은 아나스타샤를 으스러뜨리기 위해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다시 보니 이 안드로이드는 그저 껍데기에 불과했다. 본체는 여기에 없다. 그녀는 지금 메이화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흥!”
이 섬은 이제 필요 없어진 아나스타샤를 내던졌다. 그에게 용건이 없는 물건은 관심 대상 밖이다. 아까의 알탄훼아나처럼. 이 섬은 날아가면서 부하들에게 통신을 열었다.
“요시오!”
-옙! 지금 여기 분위기 좋습니다.
어떻게 이곳의 병사들과는 사이가 좋아진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 이 섬이 한마디만 하면 순식간에 쓸어버릴 것이다.
“귀환해!”
짧은 명령을 내리고 이 섬은 블랙 랜스의 벽을 뚫으며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