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제길! 우리만으로 더 이상 뭘 어떻게 하라고!”
42전단장 스베뜰라냐 스크로도프스카가 전투지휘실의 바닥을 세차게 굴렀다.
“어쩔 수 없지요. 더 이상 중앙함대를 빼내면 태양계가 위험합니다.”
42전단의 기함 이그젝틀리의 인공지능인 발렌티나가 대답했다. 지금 샤다이의 침공은 유례가 없을 정도다. 각지에서는 주둔 함대들이 필사적으로 대응하고 있고, 공격부대인 42전단은 소방수가 되어 급한 지역마다 날아가 방어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다만 신형입자포의 보급 덕에 이전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상대하고는 있다는 점이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뱅가드도 더 이상 여력이 없습니다. 중앙함대도… 아, 특수전 사령부에서 긴급 대응부대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발렌티나의 보고에 스크로도프스카 전단장이 화면을 보았다. 레드우드 사령관이 휘하 부대에서 대응부대를 신설해 각지로 파견한다고 했다.
“…위험해.”
스크로도프스카 전단장의 혼잣말대로 상황은 위험했다. 특수전 사령부 소속의 팀원들은 하나같이 다들 전략병기다. 그러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비밀스러운 특수 임무를 하는 장갑보병들이지 우주에서 정규전을 하는 함대가 아니다. 장갑보병이라는 한계상 이런 우주 전투에선 제빛을 발휘하기 힘들다. 그런데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레드우드 사령관이 그런 결단을 내렸다고 하니 상황이 얼마나 긴박한지 알 수 있었다.
“중앙에서 함대 하나만, 하나만 더 빼면 되지 않아? 그럼 숨 좀 돌릴 텐데.”
스크로도프스카 전단장마저 그녀답지 않게 아쉬운 소리를 할 정도로 침공 범위가 광범위했다.
“블랙 랜스는? 그 팀은 지금 어디에 있지?”
롱훅 프로젝트의 실험함인 블랙 랜스는 저번에 대샤다이용 무장으로 철저하게 바꾼 덕에 순양함 한 척 분의 작전수행력을 가지고 있다. 지금 42전단에 합류하면 상당히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 화성으로 가고 있다고 합니다.”
“화성?”
“네, 군사정보국의 비밀기지로 추정되는 곳에 정박한 다음 바로 화성으로 향했답니다.”
발렌티나의 대답에 스크로도프스카 전단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불난 곳으로 달려가도 시원찮을 판국에 화성이라니 의아할 수밖에.
“설마 그쪽은 뭔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를 챈 건가?”
빈우의 373팀은 팀장이 없어도 꽤나 정보력이 좋았다. 그런 블랙 랜스가 현재 상황에서 화성으로 가고 있다고 하니 전단장과 발렌티나의 머릿속에는 이번 샤다이의 침공이 양동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떠오른다. 이번 샤다이의 침공 목표가 실제로는 화성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연방 영토 외곽으로 42전단과 연방의 중앙함대가 나간 지금 상황에서 샤다이가 화성으로 쳐들어오면 상당히 위험하다.
“양동이라… 샤다이가 태양계를 친 적이 없지만, 현재 상황에선 그 가능성을 아예 무시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태양계는 중앙함대와 제국의 방어병기가 있습니다. 또 여차하면 비홀더 전대가 바로 날아올 거고요.”
“통제불가능의 아군은 적군보다 더 무서워.”
스크로도프스카 전단장의 말에 발렌티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비홀더는 연방군을 먼저 치진 않는다. 그러나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거기에 연방군이나 민간인이 말려드는 것에는 전혀 거리낌이 없다. 만약 샤다이가 태양계로 들어오고, 비홀더마저 이를 쫓아 태양계로 들어온다면 아비규환이 따로 없다.
“전단장님, 게이트가 완성되었습니다.”
발렌티나의 보고대로 42전단의 순양함들이 연동게이트를 만들었다.
“점프!”
이제 게이트로 들어가면 바로 전장일 것이다. 스크로도프스카 전단장은 단호한 명령을 내렸다.
* * *
“예상외로 잘 호응해주는걸?”
체메트디오프가 울 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는 화성으로 가기 전 유에네스의 전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양동을 걸었는데, 여기에 참전해준 동포들이 상당히 많았던 것이다. 기대했던 것의 두 배 이상의 동포들이 체메트디오프의 사탕발림에 넘어와 총알받이를 해주고 있다.
“빈우라는 작자의 학살극이 꽤 도움이 되었습니다.”
옆에서 부관이 말을 거들었다. 빈우는 외계인 병력으로 구성된 함대로 샤다이의 행성을 침공했고, 잔인한 고문과 처형으로 행성을 푸르게 물들였다. 그리고 체메트디오프는 잊지 않고 그 자료를 수집해 동포들에게 보여주었다.
-유에네스가 벌인 참극을 보라. 이들의 만행에 분노하라. 일어나라 동포들이여.
그 효과는 굉장했다. 예전에 42전단의 등장에 반응해 유에네스의 영역으로 침공했을 때는 사분오열된 함대들이 들어갔을 뿐이다. 그런데 이번엔 파벌과 세력의 성향을 불문하고 샤다이들이 거세게 들고 일어나 격렬하게 공격하고 있었다.
“설마 이게 그자의 속셈일까요?”
부하가 현재 상황을 보며 곤혹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이리 돌렸다. 호응이 좋아도 너무 좋은 것이다.
“그럴 리가, 말 그대로 설마지.”
하지만 체메트디오프는 일축했다. 빈우는 만에 하나라도 동족들에게 해가 될 일은 결코 하지 않을 위인이다. 자신이 죽는 한이 있어도 그것만큼은 막을 사람이다.
‘그래서 궁금하단 말이야.’
이런 이유로 체메트디오프는 빈우가 화성에서 벌일 사건이 정말 기대되었다. 동포를 지키고 수호하는 자가 동포의 몸에 스며든 외계인을 죽이기 위해 수도를 친다. 거기에 무고한 사람이 휘말릴 것인가 어떤가, 그리고 한술 더 떠 그 사건에 샤다이인 자신들을 끌어들인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함부로 끌어들일까. 이 얼마나 멋진 타락이란 말인가.
“조심하십시오, 집정관. 자칫 잘못하다간 뒤통수 맞을 수도 있습니다.”
부하의 충고에 체메트디오프는 피식 웃었다.
“알면서도 맞는 거지. 저놈들처럼.”
체메트디오프는 꾸역꾸역 외곽으로 퍼져나오는 연방의 함대를 가리켰다. 이들은 침략자를 막고 동족을 구하기 위해 점프 게이트를 몇 번이나 걸쳐서 나온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계단을 사용하지 못하게 막아버린다면 태양계로 갈 지원군은 상당히 줄어든다. 이쪽의 병력들이 워낙 오합지졸에 작전 없이 마구잡이로 쳐들어가고 있는지라 유에네스 측에서도 이 공격이 양동이란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악순환을 끊을 도리가 없었다.
“알면서도 맞는다고요?”
부하의 어처구니없다는 반문에 체메트디오프는 활짝 웃어 보였다.
“자네도 내가 되어보면 알 거야. 큰 것을 노리려면 큰 것을 잃어야지.”
그리고 체메트디오프는 큰 판에 어울릴 큰 판돈을 준비해 놓았다. 구역질 나는 선조들의 함대다. 예전에는 쳐다보기도 싫은 물건이었지만, 이것으로 선조들의 숨통을 끊을 수 있다 생각하니 그것도 나름 운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모두 멈춰요!”
알탄훼아나가 애원했다.
“이건 체메트디오프의 함정이에요.”
그녀의 말에 전투함으로 달려가던 민병대들이 멈춰 섰다. 그리고 항의했다.
“동포들이 죽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푸른 고깃덩이가 되었다. 그것을 보고도 가만히 있으란 말인가!”
이들의 분노는 정당하다. 체메트디오프가 샤다이 영토 전역에 보낸 충격적인 영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빈우가 이끄는 함대가 동포의 행성을 침략해서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영상이었다. 그리고 집정관은 선동했다. 분노의 불씨를 일으켜 달아오른 이들이 전장으로 나서길 부추겼다. 이번에 일어난 불길은 저번의 42전단의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저번의 것이 단순한 공격이었다면, 이번의 것은 고문과 학살이었다. 샤다이 대중들 사이로 격노의 불길이 일렁인다.
“분노의 방향이 잘못되었단 말입니다. 지금 당신들이 나가면 체메트디오프의 전장에서 총알받이가 될 뿐입니다. 그 방향을 돌려야 해요.”
알탄훼아나의 필사적인 말에 사람들은 차츰 발걸음을 멈췄다. 파벌은 달라도 호민관의 말, 상처를 입고 능력을 잃었다 해도 체메트디오프의 딸이자 발 가르단 하스와 대화를 성공한 알탄훼아나다. 분노한 민병대들의 시선이 잠시 그녀에게 모였다.
“그렇다면 그 방향은 어디요.”
잠시 주변을 둘러본 알탄훼아나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전에, 제가 지정한 자를 공격하겠다고 약속하겠습니까?”
“알탄훼아나 호민관, 당신의 말이라면 기꺼이 따르리다.”
샤다이의 호민관은 잠시 생각을 추스르더니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화성, 유에네스의 수도입니다.”
“수도? 거긴 위험하오. 아무리 유에네스라 해도 거긴….”
강대한 적 앞에 분노가 한풀 꺾인다. 이들도 들어서 알고 있는 것이다. 압도적인 유에네스 본대의 위력을.
“걱정들 마세요. 제가 알려드린 대로 하면 사건의 원흉을 제거할 수 있을 겁니다.”
알탄훼아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들을 이끌고 실제로 이번 사건의 원흉을 칠 것이다. 이 모든 사태의 시발점이 된 귀환한 선조들을.
* * *
-차관, 설명을 좀-.
이노우에 국장의 말이 들려온다.
“쓸 수 있는 병력을 전부 주십시오. 지금 당장.”
마커스는 지금 군사정보국의 비밀기지에서 닦달하고 있었다. 한때는 한 식구, 그것도 차장이었지만 지금은 남이 된 마커스 앞에서-그래도 국방부차관 앞에서 군사정보국 요원들이 쩔쩔매고 있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일에는 절차가 있는 법이외다. 아무리 차관이라 해도….
“여기 있소, 그 절차를 위한 명령서요.”
하지만 국방부는 군사작전을 하는 곳이 아니라 군에 관련된 행정업무를 하는 곳이다. 아무리 국방부 명령서라 해도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없는 것이 있다.
-이것은….
마커스가 내민 명령서를 본 이노우에 국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것은 뻐꾸기 작전을 진행 중에 필요한 장비를 가져가겠다는 명령서다. 병력이 아닌 장비. 이것이라면 문제없다.
울토르 클론은 인간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장갑복을 작동하기 위한 보조 장비로 취급한다. 그리고 솔리드 시리즈라면 역시 운반에 문제없다.
-화성으로 가시려는 게요?
이노우에 국장의 말에 마커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그러자 군사정보국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코드를 맞춰 보내주겠소.
코드. 연방군의 피아식별 코드 외에 코드가 있다면 비밀작전을 위해 피아를 구분하기 위한 코드다. 그 말인즉, 이노우에 고토는 이미 화성에 손을 뻗어놨다는 얘기다. 병력을 받고 확인하는 마커스에게로 고토의 충고가 들려온다.
-차관, 내 말 들으시오. 당신의 어머니를 죽인 친구는 일단 신경 끄시오.
화면을 두들기던 마커스의 손이 잠깐 멈췄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연방을 지키는 거요. 연방 사회와 연방의 시민을 지키는 것이란 말입니다. 마커스 타이의 개인적인 은원과 연방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된 김 빈우 개인에 대해선 신경 끄시오.
정답이고 정론이다. 이노우에 고토 역시 온갖 음흉한 음모와 협잡을 꾸몄지만, 그 모든 것들은 연방을 위한 것이었고, 사리사욕을 위해 권력을 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랬기에 마커스와 빈우 모두 이를 갈면서도 그를 따랐다.
“현장 상황에 따라 행동하지요.”
마커스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통신을 끊었다.
* * *
“모두 죽여라!”
이 섬의 명령에 비홀더 전대의 장갑보병들이 뛰쳐나갔다. 푸른 피 분수가 일고 샤다이들이 갈려 나간다. 시체 조각들을 밟고 제국의 어설트급 장갑복들이 거침없이 뚫고 지나간다.
-다로! 유에네스!
-까잡숴!
요시오가 노호성과 함께 덤비는 샤다이를 반으로 갈라버리며 앞서 나간다. 허나 놈들의 무장이나 전투 실력이 심상치 않다. 만약 이들이 연방의 영역 안으로 들어갔다면 아무리 42전단이라 해도 꽤나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함장님, 틀림없습니다. 샤다이의 고대 함대입니다.”
주변을 둘러본 이 섬이 보고했다. 과거의 이 전투함들은 요즘 샤다이들이 만든 배들과 기술력의 차이는 크진 않지만, 그 운용이라던가 숙련도 측면에선 아주 큰 차이가 났다. 지금까지 비홀더 전대조차 몇 번 보지 못했던 샤다이의 고대 함대. 이들 역시 비홀더 전대에겐 큰 차이가 없을지언정 인류 연방군에겐 상당한 위협이 될 것이다.
-수상하군요. 곳곳에 펼쳐진 함대들을 왜 집결하지 않았을까요?
기함 그리폰의 함장인 샹 메이화가 루비콘 라인 바깥에서 몰려드는 샤다이 고대 함대의 위치를 살펴보고 있었다. 아무리 자유로운 공간이동이 가능한 샤다이라 하지만 함대의 운용이 이상하다.
“집결이라….”
샤다이들의 비명 속에서 이 섬은 함대들의 이동 경로를 살펴보고 있었다.
“마침내 시작되었군요. 놈들은 연방군을 꾀어내고 있습니다.”
-꾀어낸다고요?
“네, 고대 함대가 아닙니다. 각 성계에서 샤다이들의 산발적인 침공이 시작되었습니다. 연방군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병력을 분산하고 있고요.”
이 섬은 고대 함대들의 이동 경로를 집어 최종 목적지라 예상되는 곳을 찍어 보였다.
-화성.
메이화가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방군은 중앙함대를 최저한도로 태양계에 남겨둔 다음 나머지는 각지로 지원을 보냈다. 때문에 현재 태양계는 병력의 공백이 심한 상태다. 지금 샤다이의 고대 함대가 태양계로 쳐들어오면 아무리 제국의 방어병기가 있다 해도 피해가 커진다.
“미리 갈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이 섬은 혀를 찼다. 화성과 태양계는 엄연히 루비콘 라인 안쪽이다. 위험한 사고가 먼저 터지지 않는 이상은 비홀더 전대는 결코 들어갈 수 없다. 즉 예방은 할 수 없고, 불이 나야 불을 끌 수 있는 소방수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제 자매들을 불러야겠습니다.
사태를 파악한 메이화는 예전에 세워둔 계획을 실행시키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