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이거 절경이로군.”
체메트디오프가 감탄했다. 최초의 사건은 지상에서 벌어진 학살과 갑작스레 벌어진 동포들의 발현이었다. 그리고 이에 호응해 체메트디오프가 친히 고대의 선조 함대를 이끌고 화성으로 점프했다. 빈우가 알려준 좌표는 정확했다. 이어서 노린 듯이 나타난 비홀더 전대. 감탄과 경탄의 연속들이다.
“기다렸다가 오시는 편이 나았을 텐데요.”
부하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체메트디오프는 고개를 저었다. 만약 저기에 있던 화성 방어 병기들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둘 다 이렇게 태연하게 말할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다.
“안될 말이지. 지금처럼 상황이 급변할 때는 직접 간섭해서 일을 벌여야지, 한 발짝 떨어져 있다간 영영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아.”
집정관은 입 발린 변명과 함께 지상의 동태를 살폈다. 그가 한 말이 사실이긴 하다. 만약 화성의 궤도 방어 병기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아무리 고대의 귀환함대라 해도 심각한 피해를 입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체메트디오프는 계단을 내려온 자들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느낀 이상 그 광경을 직접 보는 재미를 결코 놓칠 수 없었다. 더구나 빈우가 화성에 있는 선조들을 죽이는 것으로 약속을 지켰으니 자신도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 예의다. 그리고 실제로 화성의 방어 병기도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이건 정말 예상외야.”
체메트디오프는 화성의 지상을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빈우와 그의 부하들은 동포의 몸에 들어온 선조들을 죽이고 있었다. 그것도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라 워프 비스트란 뒤틀린 형태로 정체를 드러내기까지 하니 금상첨화다.
“대관절 어떻게 한 거지?”
체메트디오프가 빈우의 행적을 다시 한번 자세히 훑었다. 우선 빈우는 지상으로 내려와 선조들을 찾아 닥치는 대로 죽였다. 그다음 의사당이란 건물로 가더니 거기서 하나의 장치를 자신에게 연결했다.
“설마… 이런!”
체메트디오프는 저 장치가 무엇인지 안다. 자신도 쓰려고 했던 장치였으니까. 바로 의원들끼리 두뇌 동기화를 할 때 쓰는 물건이다. 체메트디오프는 저 장치를 통해 울토르 클론들의 쌓이고 쌓인 PTSD를 연방 전체에 흘려보낼 계획이었다. 빈우는 그것을 자신 혼자서 해낸 것이다. 그는 자신이 겪은 고통을 연방 시민들의 두뇌 통신에 억지로 밀어 넣어 상처를 옮긴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상처로 계단을 완성시키고 선조들을 내려오게 했을 것이다.
“대단하군요. 유에네스 고작 하나에 그만한 고통이 있었을 줄이야.”
사정을 파악한 부하가 감탄한다. 고작 단 한 명이 가진 고통으로 이런 일이 발생하다니, 그리고 그 정도의 고통을 혼자서 짊어지고 있다니. 아무리 열등한 종족이라 해도 뛰어난 것은 뛰어나다고 인정해야 한다. 이들은 빈우의 놀라운 정신력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래, 고통. 고통이지.”
그러나 체메트디오프의 예리한 감이 무언가 이상한 것을 눈치챘다. 날카로운 눈은 수상한 것을 놓치지 않았다.
“흐음, 그런데 이상하군? 변이하는 것은 계단을 내려온 선조들 뿐이야. 일반 인간은 변하지 않았어.”
“네? 그러고 보니….”
부하도 다시금 지상을 살펴보았다. 집정관의 말대로 유에네스는 변이하지 않았다. 변이한 것은 유에네스 속에 숨어든 선조들이다. 그들은 지구 제국 시절 내려와 오늘날까지 몸을 숨기고 있다가 방금 정체가 들통난 셈이다.
-아아아!
눈앞에 유에네스 하나가 다시 변하는 과정이 보인다. 그러나 샤다이들은 볼 수 있다. 저 유에네스의 몸에 선조가 ‘지금은’ 내려오지 않았다. 이미 내려온 선조의 유에네스 육체가 흉측하게 뒤틀리고 있다. 이어서 그의 정신마저 비틀리고 있다.
“설마하니!”
체메트디오프가 탄성을 지르며 혀를 찼다.
머나먼 과거, 계단을 통해 도망친 선조들이 다시 이 우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다른 종족의 몸을 차지했다. 그러나 고통받은 선조의 정신들이 궁합이 맞지 않는 육체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급격한 변이를 일으켰다. 그 결과 이성을 잃고 흉측하게 변한 괴물만이 남게 되었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후, 선조들은 마침내 알맞은 그릇을 찾았다. 바로 이 우주를 멸망시킬 운명을 타고난 종결자 종족, 유에네스였다. 샤다이와 유에네스는 서로 비슷한 감정선과 사고체계를 가졌던 덕분에 선조들은 상처 입은 정신을 가지고도 유에네스의 몸으로 안전하게 들어와 그 몸을 온전한 그대로 뺏을 수 있었다. 그러나 황제는 이를 좌시하지 않았고, 계단을 부쉈다. 때문에 그 이후로 내려온 선조들은 다시금 뒤틀린 육체와 정신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 저 지상의 선조들은 분명히 제대로 내려온 자들이다. 제국 시절 몰래 내려와 똬리를 튼 자들이다. 그런데 지금 갑작스레 워프 비스트로 육체와 정신 모두가 비틀어지고 있으니 이상하다.
“설마하니 빈우 이놈이?”
여기서 의심할 만한 것은 빈우다. 그가 연방의 의회 회선에 접속했고, 그때부터 워프 비스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인간이 아닌 선조들만 워프 비스트로 변했으니 당연히 수상했다.
“집정관! 주시자가 공격합니다.”
하지만 둘은 자세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연방의 방어함대와 비홀더 전대가 동시에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연방의 공격은 약하고, 주시자의 숫자는 적다. 하지만 둘의 협공이라면 꽤 위험하다.
“흐음, 우리의 함대가 강해도 모는 자들이 이래서야.”
체메트디오프의 불평대로 고대 함대의 공격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송구합니다.”
부하가 고개를 조아리지만 체메트디오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냐, 어쩔 수 없는 것을 탓해 무엇 하나. 일단 대응하게.”
분명 고대 샤다이의 함대는 강하다. 그러나 그 배를 모는 자들은 아직 경험이 일천해 그 능력을 백분 활용할 수가 없었다. 반면 화성 쪽의 궤도에는 살육과 파괴의 종족인 유에네스, 반대쪽엔 그것을 월등히 뛰어넘는 황제의 검들이다. 화성 궤도에서 벌어진 전투는 차츰 가열차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 * *
“함장님, 괜찮으십니까?”
비홀더 1전대의 함장실에서 이 섬이 무릎을 꿇고 있다. 그런 그의 앞에는 그리폰의 함장인 샹 메이화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꽤나 고통스러운지 그녀의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히고 있다. 그러다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호응해 준 형제자매들이 적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성공했네요.”
함장의 힘겨운 웃음에 전대장의 속은 타오른다. 메이화 함장의 계획은 1전대가 루비콘 라인 안으로 들어갔을 때 겪게 되는 제약과 부하를 다른 전대의 함장들과 함께 나누어, 깎여나가는 능력을 최소화한다는 것이었다.
“이만하길 다행입니다. 다른 함장들도 바쁘니까요.”
메이화의 말대로 다른 비홀더 전대들은 지금 갑자기 활동하기 시작한 샤다이 고대 함대를 상대로 우주 곳곳에 흩어져 전투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메이화가 겪는 제약까지 나눠 받길 선택한 함장들이 있다는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그 결과 비홀더 1전대는 일부의 병력만 가지고 상당히 전력이 약해진 상태로 체메트디오프를 뒤쫓아 화성까지 올 수 있었다.
“으음, 김 빈우. 이 교활한 놈!”
이 섬의 시선이 메이화에게서 떨어져 화성으로 향한다. 의사당에선 위은쓸납학들이 샤다이들을 죽이고 있다. 즉 지금 인류의 영토인 화성에선 인간의 지휘하에 외계인들이 외계인들을 죽이고 있으며, 이는 비홀더 전대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의미다. 만약 인류에게 심각한 위협이 닥친다면 비홀더 전대는 루비콘 라인 안쪽으로 들어올 수 있다. 그때는 함장들에게 걸린 제약이 풀리고 마음껏 싸울 수 있다.
그러나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그 제약은 풀리지 않는다. 눈앞에 일렁이는 불씨가 거대한 대화재가 될 것임이 분명하지만, 함장들에게 걸린 제약은 유연함 하나 없이 완고할 뿐이다.
또 눈앞의 체메트디오프도 문제다. 놈이 이끌고 온 고대 함대는 인류에 있어 심각한 위험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홀더 1전대의 제약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었다. 샹 메이화의 말로는 중간에 쿠델카가 모종의 수작을 부리고 있다고 했다. 점프공간에 숨어있던 그녀가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그 승인과정에 간섭하고 있다는 것이다.
“쿠델카! 김 빈우!”
이 섬이 자신들을 가지고 노는 상대들의 이름을 부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안 돼요, 전대장.”
눈앞의 사내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눈치채고 나직이 타이르는 함장의 목소리에 이 섬은 고함을 삼켰다. 대신 낮게 으르렁거렸다.
“저 혼자 내려가서 빈우만을 쳐낸다면 될 일입니다.”
지금 이 사태를 지휘하고 있는 것은 김 빈우가 분명하다. 원래 샤다이 같은 외계 종족이 태양계로 들어온다면, 그리고 인간이 살고 있는 행성에 접근한다면 제국의 방어 병기가 즉시 작동해 침입자를 공격한다. 그러나 지금 방어 병기들은 체메트디오프의 선조 함대를 보고서도 그저 조용히 있을 뿐이다.
“보십시오. 궤도 상의 방어 병기들이 작동하지 않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체메트디오프가 이끄는 샤다이 함대를 아군이라고 속여 입력한 결과입니다. 이런 짓거리를 할 사람이 달리 누가 있겠습니까? 빈우의 계략임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놈의 계략은 결코 이 정도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가 계획하고 있는 것은 거대한 폭풍과 몰아치는 화재다. 자신마저 어쩔 수 없는 재앙을 만들어 그 격류 위에서 외줄 타기를 할 심산인 것이다. 게다가 눈앞에 있는 체메트디오프가 부채질할 것은 명약관화하다.
“그러지 마세요.”
이어지는 메이화의 만류에 이 섬은 벽을 후려쳤다.
“함장님! 김 빈우란 자는 쿠델카의 꼭두각시입니다. 놈이 무슨 일을 벌일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 밑에서 일어나는 일은 쿠델카의 계획일 겁니다. 그러나 아직 김 빈우 소령은 연방에 적대적이지 않아요. 오히려 샤다이를 쳐내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 자체가 쿠델카의 계획이겠지만, 지금으로선 성급하게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추이를 지켜보고 결정적인 순간에 끼어들어야 합니다.”
메이화 함장의 말은 옳다. 그래서 이 섬은 분을 삭였다. 쿠델카는 점프 공간에서 암약했던 황제의 페르소나들 중 하나다. 그녀는 자신의 자유를 위해 인간과 인류를 해치겠단 생각을 품었고, 자신을 말리려던 자매 안나 닐센을 해쳤으며, 종내엔 1전대의 기함 함장인 샹 메이화 마저 공격했다. 그런 쿠델카가 빚어낸 음모의 결실이 지금 화성의 지표에서 익어가는 중이다. 섣불리 나섰다간 죽도밥도 안 되고 그녀를 놓칠 수 있는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이라….”
1전대장인 이 섬은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비홀더 1전대는 이전부터 타인의 계획에 놀아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타인의 계획을 구경하고 있어야 한다니, 부아가 치미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어서 그의 시선이 포격을 주고받고 있는 샤다이 함대 쪽으로 향했다.
“…제법 버티는군요.”
버티는 정도가 아니다. 샤다이 함대는 화력과 수로 화성의 인류 연방과 지구 제국을 상대로 유리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제 섬은 슬슬 자신이 나설 차례란 것을 깨달았다.
“네, 전대장은 지금 전대장이 해야 할 일을 하세요.”
메이화 함장의 말에 이 섬은 고개를 숙였다.
“출격하겠습니다.”
“조심하세요.”
이 섬은 메이화의 배웅을 받으며 걸어 나갔다. 그리고 부하들을 불렀다.
“요시오.”
-옛, 전대장님.
전대장의 명령에 요시오가 기합이 바짝 든 목소리로 대답한다.
“체메트디오프가 타고 있는 기함으로 바로 쳐들어갈 수 있을까?”
-바로요? 지금?
천하의 요시오마저 되물을 정도라면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니란 뜻이다.
-쳐들어갈 수야 있지만, 지금 우리 숫자로는 재미 보지 못할 겁니다. 주변에 적함이 너무 많습니다. 아차 했다간 둘러싸여 두들겨 맞을걸요?
“그러면 겉부터 차근차근 쳐나가지.”
이 섬이 자세한 작전 명령을 내릴 때, 화성에는 다시 샤다이의 점프 반응이 생겼다.
“뭐지? 체메트디오프의 지원군인가?”
1전대장은 새로이 나타난 적들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점프해온 샤다이 함대의 앞에 익숙한 배가 보였다. 저번에 직접 쳐들어 가본 적이 있는 이 섬은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연방의 실험 구축함인 블랙 랜스였다.
-여기는 연방 상원의원인 오다 히토미와 조사팀인 블랙 랜스입니다.
그리고 블랙 랜스에서 광역 회선으로 통신이 뿜어져 나와 수도 방위함대와 체메트디오프의 고대 함대, 그리고 비홀더 1전대에게 수신되었다.
-제가 데려온 샤다이 함대는 샤다이 호민관인 알탄훼아나의 병력으로서 그들의 반역자인 체메트디오프를 치기 위해 우리 인류에게 협력하기로 한 자들입니다.
이 말을 들은 방위함대의 안토니오 피아프 대령, 샤다이 집정관 체메트디오프, 비홀더 1전대장 이 섬의 공통된 반응은 ‘뭐가 어쩌고 어째’였다. 그리고 이들이 히토미의 말에 각자 뭐라고 반응을 하기도 전에 새로 나타난 샤다이 함대들은 자기 선조들의 고대 함대에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호민관의 함대가 집정관의 함대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플라스마가 아닌 대샤다이 무기인 제국제 신형 입자 가속포로 말이다.
이제 화성의 지표와 궤도의 상황은 한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개판 오 분 전의 상황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