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빈우야.”
방안에서 엄마가 빈우를 부른다.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헛웃음이 섞인 부름이다.
“네, 가요.”
엄마가 무엇 때문에 자기를 부른 줄 잘 아는 빈우가 신나서 달려갔다.
“왜요?”
“얘가 또 안 먹어.”
엄마는 죽이 든 숟가락을 들고 요리조리 흔들고 있다. 그리고 그 앞에선 밥을 먹어야 할 막냇동생이 죽으로 범벅이 된 입을 꼭 다물고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고 있었다.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막 고개를 가누기 시작한 막냇동생이지만 좋고 싫은 것은 확실했다.
“헤헤, 내가 할게요.”
빈우가 죽그릇을 받아들고 한 숟갈 작게 퍼서는 살살 흔들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숟가락에 동생의 시선도 이리저리 따라간다.
“씨유웅~.”
빈우의 입에서 비행기 소리가 나면서 숟가락이 높이 올라갔다. 그리고 착륙하기 위해서 동생의 입으로 점점 내려간다.
“착륙합니다~ 씨유웅.”
그 모습과 소리에 신이 난 막냇동생은 팔다리를 흔들었고, 입을 짝 벌려 죽을 먹을 준비를 했다. 그렇게 숟가락이 아기의 입안으로 들어간다. 반은 들어가고, 반은 흐른다. 빈우는 흐르는 죽을 다시 숟가락으로 받아 동생의 입 안에 넣어주었다.
“와아~.”
엄마와 아나스타샤가 박수를 치고 있다. 엄마는 빈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고, 아나스타샤는 빈우를 꼭 안아주었다.
“도련님, 최고.”
“헤헤헤헤.”
그렇게 동생 밥을 먹이고 나면 나가서 누나들 일을 거들어 준다. 빈우 생각으로는 도와준다는 거지만, 누나들 입장에선 노는 것이었다. 농장 일을 하기 위해 짧은 옷으로 갈아입은 아나스타샤가 지나가면 빈우가 거기에 물을 뿌린다.
“도련님!”
짐짓 화낸 목소리의 아나스타샤가 쫓아오면 빈우는 신나서 도망친다.
“냉각수! 냉각수야! 아악!”
아이가 도망쳐 봤자 성인의 걸음은 금방 따라잡는다. 빈우는 겨드랑이를 잡혀 위로 휙 들어 올라갔고, 아나스타샤는 도련님의 겨드랑이를 잡은 손을 세게 조물락거렸다.
“아, 간지러! 간지러. 항복, 히히힉.”
빈우가 간지러워 웃으면 그 아래에선 아나스타샤도 웃고 있다. 그리고 안드로이드가 손을 놓는다 싶더니 떨어지는 작은 도련님을 가슴으로 받아 꼭 안아준다.
“우리 장난꾸러기 도련니임.”
그러면서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턱으로 빈우의 머리를 지근지근 눌렀다. 사랑스러운 아나스타샤의 턱이 정수리를 훑고 지나가는 감촉이 느껴진다.
“으아아아악!”
빈우가 비명을 지르면서 깨어났다.
“아아아악!”
그는 결코 있을 수 없는 행복한 광경에 절규했다. 차라리 엄마가 죽는 악몽이 나았다. 동생이 죽는 꿈이 나았다. 전우가 죽는 꿈이라면 참을 수 있다. 자신이 전투에서 죽어가는 기억이라도 이겨낼 수 있다. 빈우에게 고통과 슬픔이라면 익숙하다. 그러나 방금 보았던 행복은, 결코 올 수 없는 행복은 빈우로선 이겨내기 힘든 것이었다.
“헉헉.”
빈우는 그르렁대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 일을 할 시간이다. 일단 판을 벌였으면 마무리를 잘해야 하는 법이다. 언제까지나 판의 흐름을 동료와 부하에게 맡겨둘 수는 없으니까.
* * *
“개판이군.”
이것이 마커스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그가 몰고 온 솔리드 시리즈 다섯 척은 화성의 궤도를 따라 설치된 거대한 링, 제국 시절의 방어 병기 관리소까지 힘겹게 뚫고 갔다. 물론 방해는 심했다. 갑자기 나타난 마커스의 함대는 체메트디오프에게 있어 상당히 눈에 거슬리는 대상이었고, 이들이 향하는 목적지가 방어 병기 관리소다 보니 공격이 집중된 것은 당연했다. 만약 조용하던 저 제국 시절의 병기들이 다시 작동하기 시작하면 전세가 역전되는 것은 순식간이기 때문이다.
“솔리드 알파가 소멸했습니다.”
격침이 아니라 소멸이다. 함의 제어를 맡은 인공지능이 현재 상황을 담담히 보고한다. 이 솔리드 시리즈는 울토르 중대를 위해 특별히 개조한 페가수스급 강습함이다. 게다가 롱훅 프로젝트에서 나온 기술들을 사용한 데다 주적들을 샤다이로 설정한 상태라 대 플라스마 공격에도 착실히 대비해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거함들의 집중포화에는 버텨낼 도리가 없었다. 놈들은 너무 크고, 너무 많은데다, 결정적으로 너무 강했다.
“솔리드 베타도 소멸합니다.”
이어 다른 한 척도 사라진다. 거대한 플라스마 포격이 쓸고 지나가자 파편만이 남았고, 그 파편들마저 이어지는 포격에 증발한다. 물론 이들의 뒤로 알탄훼아나의 함대들이 나서서 포격을 막아주었고, 그 덕에 세 척이나 살아남아 목적지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체메트디오프 쪽도 이쪽의 의중을 읽었는지 대형이 무너지는 것을 각오하고서 이쪽으로 별동대를 보냈다.
“아예 작정하고 뚫고 들어오는데.”
무너지는 알탄훼아나의 방어선을 보며 마커스가 침을 삼켰다. 원래 샤다이는 서로 자기들 무기에 면역이다. 그러나 알탄훼아나는 히토미가 보내준 설계도대로 입자 가속 무기를 만들었고, 체메트디오프의 고대 함대에는 플라스마 말고도 여러 가지 다양한 무기들이 있었다. 그래서 집정관과 호민관의 함대는 동족상잔을 하며 난타전을 벌이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지금 체메트디오프의 함대는 마커스의 솔리드 시리즈들을 막기 위해 공격의 방향을 이리로 돌렸고, 그 덕에 블랙 랜스는 몰래 화성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또 늘어진 체메트디오프의 함대 옆으로 화성 방어함대와 비홀더 전대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래도 샤다이의 고대 함대는 옆이 잘리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마커스를 막으려 했다. 저 고대의 전투함 중 한 대라도 빠져나온다면 솔리드 시리즈는 그대로 전멸이다. 그때 저 멀리 새로운 전력이 나타나는 것이 보였다.
“중앙함대!”
마커스는 이제야 화성 근거리 궤도로 돌아온 연방군 중앙함대를 보며 탄성을 질렀다. 화성의 중앙함대는 전열이 무너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최고속으로 날아온 것이 분명했다. 선두에선 구축함들이 중력충각으로 대형을 짜서 달려들고, 후열의 순양함들이 코일건을 난사한다. 중앙함대는 그 성격상 어떤 적과도 싸울 수 있어서 표준형 무장을 하고 있다. 그래서 비록 대 샤다이용 입자 무기는 없지만, 중앙함대는 연방의 최정예 함대 전력이다. 이들이 나서서 샤다이 고대함대의 뒤를 치자 그제야 추격이 느려졌다.
“궤도병기의 그늘로 돌아.”
마커스의 명령에 살아남은 솔리드 시리즈들이 화성의 오비탈 링, 궤도를 감싼 반지형 구조물의 그늘로 숨어들었다. 샤다이들의 공격이 날아오지만, 궤도 병기의 자체적인 방어막이 이를 막았고, 그 틈으로 솔리드 시리즈들이 비집고 들어가 접현했다.
“전 대원 돌입!”
마커스도 어벤져를 입고 거대한 방어 병기 안의 전장으로 직접 뛰쳐나갔다. 그의 주변으로 무수한 빈우의 얼굴을 한 울토르 클론들이 따라온다. 허나 이것들은 기존에 있던 클론들의 전두엽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두뇌칩과 폴리머를 다수 집어넣은 생체 안드로이드들이다. 장갑복을 움직이기 위한 부품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전투력이라면 기존의 울토르 시리즈에 비해 큰 손색이 없다고 한다.
“여기는 마커스 타이 국방차관입니다, 궤도 방어 병기 관리소는-!”
마커스가 궤도병기 내부로 들어가 관리소를 호출할 때였다. 시설 곳곳에서 폭음과 함께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고대 함대의 공격은 아니다. 그런 것은 궤도 병기의 자체적인 방어체계가 막아준다. 이번의 공격은 작은 공격이다.
“이런 제길…!”
아니나 다를까, 체메트디오프 쪽에서도 죽음을 각오하고 단거리 점프로 궤도 병기 쪽에 직접 강하하는 놈들이 있었던 것이다.
미친 듯이 갱신되는 전투정보를 살펴보자 암울하다. 궤도병기 관리소 측은 아까부터 체메트디오프를 상대로 묶인 안전장치를 풀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지만 풀리지 않고 있다고 한다. 푸는 방법은 아무리 살펴봐도 군사정보국의 방식이다. 원격으로 해제는 불가능하고, 접속 권한을 가진 자가 직접 가야 풀리는 보안체계다. 즉 잠수나 트리니티 패턴처럼 승인받은 자의 뇌와 두뇌칩이 직접 필요한 방식인 것이다.
“독한 새끼.”
마커스는 보안을 잠가놓은 빈우를 항해 이를 갈며 관리소 쪽으로 달렸다. 내부 정보를 보니 샤다이들은 이곳저곳 떨어져서 침투했지만, 놈들 개개인의 전투 능력은 연방 장갑보병 일개 소대를 능가한다. 게다가 체메트디오프의 친위대라면 더할 것이다. 궤도 병기 내부의 자체 병력이 응전하지만, 순식간에 쓸려나간다. 게다가 놈들도 대략적인 위치는 짐작하고 있는지 관리소 쪽으로 서서히 다가가고 있었다. 저 샤다이들이 관리소에 도착하기 전에 마커스가 먼저 가서 보안장치를 해제해야 한다.
그때 격벽이 열리며 한 무리의 장갑 보병이 나타났다. 어벤져다. 그것도 보안국 사양으로 튜닝된 어벤져. 서로 아군임을 파악하자 서로 무기를 거뒀고, 저쪽 무리에서 리더가 걸어와 헬멧의 전면 보호구를 열었다. 그러자 착용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미치겠네.”
말 그대로 마커스는 미칠 지경이었다. 저 장갑 보병은 마커스도 아는 얼굴이다. 바로 군사정보국장 이노우에 고토의 얼굴인 것이다. 하지만 당연히 본인은 아니다. 업무용으로 만들어 놓은 안드로이드에 허수아비를 넣어놓은 것이다. 그 모습에 마커스는 솔리드 시리즈를 끌고 올 때 고토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코드를 맞춰 보내주겠소.’
마커스는 그때 국장이 했던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뭐 씹은 얼굴을 한 마커스에게 고토의 얼굴이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왔다.
“이런, 꼴을 보아하니 고토 국장이 보낸 것은 아니고… 억지로 온 모양이구먼?”
허수아비라 그런지 얄미운 말투가 그대로다. 이노우에 고토는 현재 연방의 상황이 심상찮다는 것을 느끼고 이곳에도 자신의 손도장을 찍어놓은 것이다. 허나 외계종족을 상대로 하는 군사정보국이 연방군 내부에 몰래 들어와 있다면 이건 심하게 꼬투리 잡힐 일이다.
“혹시 보안국 라인?”
짧은 마커스의 질문에 고토의 허수아비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걸 본 마커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고토는 보안국의 쿠사키나 국장이 실각하자 그쪽 라인을 훔쳐 와 쓰고 있었던 것이다. 보안국이라면 연방군 내부를 감찰하는 곳이기에 안쪽을 돌아다닐 권한이 충분하고, 이렇게 요원을 심어놓기도 편하다.
“상황 설명해.”
마커스는 다시 목적지로 달리며 물었다.
“락은 아직 잠겨있는 상황이고, 큰놈들은 그물에 걸려 못 들어오지만, 작은놈들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중이야.”
고토의 허수아비가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따라온다. 놈은 궤도병기 내부에 새로 파견된 장갑보병-당연히 정체를 감춘 울토르 시리즈-들의 권한을 이미 빼앗아 놓은 상태다. 아마 내부에 숨어든 샤다이들의 혹시 있을지 모를 테러를 견제하기 위해서겠지. 모퉁이에서 샤다이들이 나타나자 고토의 울토르 시리즈들이 달려가 응전하고, 그사이 마커스와 고토의 허수아비는 목적지로 향했다.
“42전단이나 다른 곳은?”
마커스는 42전단이 아쉬웠다. 그들이야말로 대 샤다이 결전부대다. 연동 게이트를 쓰는 그들이라면 어떻게든 늦지 않게 화성으로 올 수 있다.
“아예 묶였어. 샤다이 놈들이 양동으로 연방 곳곳에서 전투를 걸어오는 바람에 이쪽 전력이 분산되었지. 게다가.”
고토의 허수아비가 영상을 틀어주었다. 연방 곳곳에서 발생한 워프 비스트들이다.
“화성뿐만이 아니야. 연방의 모든 곳에서 워프 비스트들이 나타났어. 비록 숫자는 적지만 그 여파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야. 가용 전력은 없다고 봐야 해. 이제 화성의 일은 우리들만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허수아비의 말에 마커스가 혀를 찼다.
“특수전 사령부는, 젠장. 이미 차 떠났지.”
“그래, 이쪽으로 조금 와주면 좋겠는데 레드우드 사령관이 너무 일찍 반응했어.”
그때 다시금 샤다이들이 나타난다. 리퍼, 그것도 포말하우트 게이트 안에서 나타났다는 놈들이다. 이쪽의 울토르 시리즈들이 달려가서 공격하고, 저쪽이 맞이해 싸운다. 대 샤다이 무장으로 세팅한 마커스의 병력들이지만 고전을 면치 못한다. 하나하나가 전차급의 능력들이며 전투 실력도 상당하다. 아마도 저들이 체메트디오프의 친위대일 것이다.
“여길 뚫어야 해. 더 이상 돌아갈 순 없어.”
지금 마커스의 앞을 막은 놈들은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고 오히려 지연전을 펼치고 있었다. 저 샤다이들은 관리소로 가는 이쪽 병력을 막기 위해 달려온 놈들이 분명했다. 포화가 오고 가고 폭발을 주고받는다. 벽이 부서지고 자재가 터져나간다. 그때 마커스는 부서진 파편들이 이상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무언가 투명한 것이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썅!”
마커스는 내열 방패를 들었고, 동시에 그의 앞에 나타난 리퍼가 플라스마 대검을 내리쳤다. 발포장갑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순식간에 날아갔고, 어벤져의 왼쪽 팔과 어깨에 클레이모어가 닿았다. 검이 닿은 것은 순간, 그리고 팔이 증발하는 것도 순간이었다. 열폭발과 함께 마커스가 튕겨져 나갔고, 주변에선 리퍼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놈은 모든 것을 무시하고 오직 마커스를 죽이기 위해 다시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