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피와 살점이 날뛴다. 기합과 비명이 달린다.
“아악!”
체메트디오프의 정예 병력들이 단신으로 덤벼든 동포와 맞선다. 그러나 다들 얼마 버티지 못하고 배반자의 공격에 고기 조각이 될 뿐이다.
“각하! 피하십시오!”
집정관의 친위기사들이 그렇게 말하지만 어디로 피할까. 다시 공간이동으로 날기엔 아직 시간이 부족하다. 뒤에서는 배반자 동포가 덤벼들고, 앞쪽의 관리소에는 무장해제 된 유에네스들이 있다. 몇몇이 길을 트기 위해 그쪽으로 이동했다가 숨겨진 폭탄과 미사일에 당했다. 그래도 이전에 비해선 훨씬 약해진 화력이다.
“길을 뚫어라!”
어차피 뚫어야 할 곳이고, 체메트디오프가 자신의 능력으로 무력화시킨 놈들만 남아있다. 지금의 전력이라면 가볍게 밀고 갈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크억!”
기습을 가한 동포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 이들이 앞으로 가는 속도보다 뒤에서 따라오는 놈의 속도가 더 빨랐던 것이다. 물론 이 친위기사들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별심장의 불길이 통하지 않는 동포와의 싸움도 염두에 두었기에 다른 무장도 챙겨왔다. 그러나 그것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에겐 버텨낼 도리가 없었다.
“각… 하.”
기사 한 명이 잡혀 등이 뜯겨나간다. 그리고 그 뜯긴 장갑으로 배반자의 잘린 손이 들어간다.
“커- 어- 으그르윽.”
비명을 새어나오던 입에서 피와 살점이 부글거리는 소리가 나며 기사의 얼굴이 흉측하게 변한다. 그리고 그 기사의 몸은 통째로 배반자의 팔이 되었다. 집정관의 친위기사들이 달려들어 잘라냈던 배반자의 한쪽 팔, 그 잘린 팔이 기사의 몸에 붙자 그의 몸이 그대로 비틀려 배반자의 팔로 변형되고 재생되었다.
“물러서지- 으아악!”
귀찮은 타이밍에 관리소 안에서도 공격이 날아온다. 아까보다 약해진 공격이라고는 하나 지금의 상황에선 치명적이다.
“자네는… 자네는 대체 누구지?”
체메트디오프가 얼이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눈엔, 그리고 샤다이의 눈엔 일행을 덮친 동포가 보인다. 파장이나 발산하는 에너지는 분명 동포의 것이다. 그러나 그 행동은 분명 이상했다.
‘내가 뭘 놓치고 있지?’
문득 불길한 생각이 떠오른 체메트디오프는 시야를 달리했다. 평상시처럼 전자기장으로 상대의 파장이나 신경계의 흐름을 위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반사된 광선만 인식하도록 했다.
“아아.”
마침내 체메트디오프가 탄성을 냈다. 감각을 바꾸자 시야가 탁 트인 기분이다. 그리고 의문 또한 풀렸다. 상대방은 자신이 발산하는 파장을 의도적으로 바꾸어 눈속임을 한 것이다. 단순하지만 정말 절묘한 속임이었다. 만약 이 속임수가 아니었다면 그의 기습은 이렇게 효과적이지 못했을 것이다.
“하하, 자네였구만.”
의문에 대한 해답과 자신의 앞날에 대한 답을 얻어서 웃고 있는 체메트디오프의 얼굴에 빈우의 공격이 꽂혔다.
* * *
“저쪽에서 뭔 난리가 났는데.”
마커스가 미사일을 수동으로 쏘면서 말했다. 동력이 나갔어도 대응할 방법은 있다. 이미 장착된 수류탄들도 이런 상황에선 기계식 신관으로 작동한다.
“뻔하지. 빈우다. 그놈 말고 이런 짓 할 놈이 더 있나?”
찰리하나팔이 녹아서 날아간 다리에 지지대를 박으며 일어섰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동력이 꺼져 마치 잠든 것처럼 조용히 누운 아나스타샤가 있었다. 급히 장갑복을 벗기고 꺼냈지만, 그녀에게도 체메트디오프의 능력이 닿았는지 예전처럼 꺼진 상태가 되어있었다.
‘한시름 돌렸나.’
찰리하나팔은 사지로 가려던 순간 자신에게 따라붙은 아나스타샤를 보고 기겁했다. 그녀가 빈우에게 있어 어떤 존재인지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빈우는 최악의 경우에 아나스타샤를 찰리하나팔에게 부탁한다고 말했지만, 그게 택도 없는 소리란 것은 아까 증명이 되었다. 아나스타샤는 한 번 보는 것만으로 주인과 클론을 구분했다. 어찌 되었건 빈우가 지금 기습을 성공해서 이쪽으로 오고 있으니, 그녀를 무사히 주인에게 돌려보낼 수 있게 되어 찰리하나팔은 마음의 짐을 하나 내려놓았다.
“주인님?”
그때 아나스타샤의 눈이 떠졌다. 아마 지금의 공격으로 체메트디오프의 영향력이 사라진 듯하다. 그리고 안드로이드의 눈이 찰리하나팔을 향하더니 잠시 응시했다.
“주인님?”
기대와 환희가 벅차오르는 시선이다. 그러나 그녀의 열망은 찰리하나팔의 미소를 보고선 금세 가라앉았다.
“주인님은?”
온도 차가 극심한 차가운 시선이 클론을 올려다본다.
“매정하긴. 빈우는 저기서 오고 있어.”
찰리하나팔이 엄지로 뒤쪽을 가리키자 아나스타샤가 벌떡 일어났다.
“야, 조심해. 아직 샤다이들이-.”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복도 저 너머에서 샤다이 하나가 날아온다. 놈은 관리소 안 바닥에 부딪혀 푸른 피를 흩뿌리며 데굴데굴 굴렀다. 그리고 그 위로 무언가가 날아와 짓밟았다.
“아아아아--!”
체메트디오프는 산채로 사지가 뜯겨나가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빈우는 그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저 고통을 줄 뿐이다. 육체적인 고문뿐만이 아니다. 체메트디오프의 정신으로도 빈우의 정신이 연결되었다. 마치 인류가 두뇌 칩으로 서로의 정보를 교환하듯, 샤다이의 능력을 얻은 빈우가 체메트디오프의 뇌에 직접 연결해 자신이 겪었던 고통과 상처를 그대로 퍼붓고 있었다.
“어거억. 어억!”
푸른 고깃덩이가 된 체메트디오프가 빈우의 손에 들려 움찔거린다. 지금 그는 육체의 고통 때문에 뇌가 쇼크로 터지기 직전이다. 그것에 더해 빈우가 겪었던 PTSD들이 마치 낙인 찍듯이 샤다이 집정관의 뇌에 쑤셔 박힌다. 원래대로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체메트디오프의 정신세계는 다른 동포의 뇌를 그대로 빼앗을 만큼 굳건하다. 그러나 만신창이가 된 그의 육체는 한계에 달했고, 새로운 육체를 가진 빈우의 능력은 이전에 비해 더더욱 강해졌다.
‘고통.’
빈우가 겪었던 기억들이 들어온다. 어머니가 눈앞에서 죽었던 기억, 막내아우가 죽었던 기억을 비롯해 그가 쿠델카에 의해 겪었던 고통들이 흘러들어온다. 단순히 기억이 아니다. 그 일로 인해 겪었던 빈우의 고통들이 그대로 체메트디오프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설마!’
체메트디오프는 빈우가 무엇을 하려는 지 깨달았다. 이것은 단순한 고문이 아니었다. 그는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집요하게 공격하고 있었다.
‘…계단!’
빈우는 자신의 몸에 계단의 마지막 부분을 만들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이 체메트디오프의 육체는 추악한 괴물이 되고 정신은 넝마주이가 되어 더 이상 동포의 몸을 빼앗아 부활하지 못한다. 아니, 그보다 체메트디오프는 자신의 몸에 그 구역질 나는 선조들이 내려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안돼.’
허나 이젠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의 기도에선 그저 피거품이 뻐끔거리고 있다. 다 죽어가는 집정관의 육체와 엉망진창이 된 정신에 유에네스의 흉터가 차곡차곡 쌓여간다. 마음의 상처가 만든 흉터들. 자신이 더 이상 자신이 아니게 된 원인들이 켜켜이 올려진다. 어찌 한 개인에게 이 정도의 상처가 있을까 싶을 정도다. 분명히 쿠델카가 어르고 달래가며 일으켜 세운 덕일 것이다. 정신적으로 죽어가던 빈우를 억지로 되살려 가며 채찍질한 결과다. 그리고 빈우의 그 많고 많은 고통의 흔적들이 체메트디오프의 정신세계에 쌓여 마침내 계단이 만들어졌다.
‘그만둬.’
그리고 완성된 계단을 통해 선조들이 내려온다. 체메트디오프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이미 그에게 입은 없었다.
‘그만!’
분명히 쿠델카가 막고 있어야 할 계단에서 자신들을 버리고 도망쳤던 선조들이 내려와 그의 몸으로 들어온다. 체메트디오프는 분노와 공포에 휩쓸렸다. 비겁자들, 도망자들, 자식과 가족을 버리고 떠났던 쓰레기들이 망가진 자신의 몸에 허겁지겁 들어와 여기저기 자리 잡는 게 느껴진다. 놈들은 체메트디오프의 기억과 정보를 그 더러운 손으로 만지작거리고, 집정관의 몸을 자신의 집으로 삼으려 두리번거린다.
‘그만해!’
그러나 체메트디오프는 막을 수가 없었다. 육체와 정신 모두 빈우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는 불구가 된 채 자신의 집이 부서지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그의 기억이, 추억이 짓밟힌다. 의무가, 명예가 찢겨 흩날린다. 게걸스런 선조의 몸짓에 밀려 넘어진 체메트디오프의 위로 다른 선조들이 달려든다. 제대로 내려오지 못해 미쳐버린 선조들은 그들을 증오하는 후손의 정보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이런 씨발.”
마커스가 저도 모르게 욕을 했다. 그만큼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구역질 나기 때문이었다. 푸른 고깃덩이가 꿈틀대더니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듯한 마지막 몸부림이 보는 이로 하여금 그의 고통을 체감케 했다. 허나 그 몸짓도 잠시, 추악한 변이가 시작되었다. 먼저 촉수가 튀어나왔다. 이어서 가시가 솟구치고 이빨이 돋아난다. 마지막으로 뿔이 자라고 눈이 튀어나온다. 워프 비스트다. 샤다이 였던 고깃덩이가 워프 비스트로 변한 것이다.
-캬아아!
워프 비스트가 소리를 질렀다. 허나 그것은 단말마였다. 워프 비스트는 나타나자마자 그대로 찢겨지고 으깨져 죽고 말았다. 체메트디오프는 산채로 고통을 받아 워프 비스트가 된다음, 다시 고통을 받으며 잔인하게 죽은 것이다.
그 워프 비스트를 으깬 것은 태아였다. 아니, 태아의 형상을 한 커다란 괴물이었다. 마치 엄마의 뱃속에서 죽어서 태어난 듯, 마르고 뒤틀린 팔다리를 한 거대한 태아가 워프 비스트였던 것을 무참하게 짓이기고 있었다.
-으으응-
마침내 워프 비스트였던 것이 그저 핏물 조각이 되자 흥미를 잃은 듯, 태아 모습의 흉물이 옹알이를 한다. 흉물의 시선이 이리로 향하자 천하의 마커스와 찰리하나팔도 순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둘의 앞에서 일어난 사건과 형상이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흉물의 시선은 둘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더 뒤를 보고 있었다. 흉물은 두 사람 뒤의 아나스타샤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눈치챈 둘은 무심결에 모여 자신들의 몸으로 아나스타샤를 가렸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 허나 그것과 동시에 태아 모습의 괴물이 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가렸다.
“주인님?”
뒤에서 들려온 아나스타샤의 목소리에 둘은 전율했다. 그녀가 주인이라고 부를 존재는 우주에서 단 하나 뿐이다. 그들의 친구이자 원본이 되는 자다.
“주인님이죠? 맞죠? 그렇죠?”
아나스타샤가 둘의 어깨를 비집고 나와 앞으로 나섰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찰리하나팔과 마커스의 손이 나가 아나스타샤를 잡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 손을 뿌리치고 앞으로 나갔다. 그 앞에 자신의 주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아, 주인님.”
아나스타샤는 기억하고 있었다. 어릴 적의 빈우는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 눈을 꼭 감고선 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가렸었다. 그는 뭣 때문에 눈을 가렸을까.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보기 싫어 가렸을까, 아니면 자신을 혼내는 아나스타샤가 무서워 가렸을까. 직접 물어봐도 모른다는 대답이 나왔다. 다 컸을 때 물어보면 기억이 안 난다고 얼버무렸다.
그러나 아나스탸샤는 알고 있었다. 도련님은 저 자신을 보기 싫었다. 잘못을 저지른 자신을 숨기고 싶었다. 아무도 자길 보지 않길 원해서 눈을 가린 것이다. 마치 자신이 보지 않으면 세상이 없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보지마-
흉물의 입에서 말소리가 새어나온다. 빈우의 것이 아닌 목소리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나을 수 있어요. 제가 낫게 해드릴게요. 주인님.”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아랑곳 없이 괴물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가 계속해서 다가오자 괴물이 뒤로 물러선다.
-오지마-
“자, 겁먹지 마세요. 전 도련님 편이에요. 제가 도련님 곁에 있을게요. 생각해 보세요. 그때도 나았죠? 그쵸?”
계속해서 뒤로 물러서는 괴물. 그런 빈우의 곁으로 아나스타샤가 조심조심 다가간다.
“착하죠, 우리 도련님. 자, 이리 오세요. 응, 옳지옳지. 이리로.”
아나스타샤가 어르고 달래자 빈우의 뒷걸음질이 점차 느려지고, 조심스레 다가간 아나스타샤가 마침내 빈우의 손가락을 잡았다. 체메트디오프의 피와 살점이 묻은 손가락이다.
“에헤헤, 잡았다아.”
마치 어릴 적 술래잡기 하던 도련님을 잡았을 때의 미소가 아나스타샤의 얼굴에 퍼져나갔다. 비슷한 뒤틀림이 흉물의 입가에 희미하게 걸린다. 그와 동시에 관리소의 벽이 관통되며 공격이 쏟아져 들어왔다. 흉물로 변한 빈우의 몸에 구멍이 뚫리며 옆으로 쓰러진다.
“도련님!”
비명을 지르는 아나스타샤를 찰리하나팔이 안고 굴렀고, 그 위로 검이 지나갔다. 희미한 지구제국의 중성미자 검이다.
-반역자들을 죽여라!
이 섬의 목소리와 함께 비홀더 1전대원들이 관리소를 부수며 들어오고 있었다. 마커스의 명령에 다시 완전무장한 울토르 클론들이 뛰쳐나간다.
-인류를 위하여!
노노무라 요시오 상사가 양성자 포를 쏘자 완전무장한 어벤져들이 섬광만을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평화를 위하여!
낭소로호 중위가 중성미자 검을 휘두르자 그 궤적에 걸린 장갑복들이 희미해지더니 물질 붕괴가 일어나 그대로 분해된다.
-모두 죽여라.
이 섬이 검을 들고 바닥에 쓰러진 빈우를 향해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