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이 섬은 중성미자로 이뤄진 검을 들고 빈우의 앞에 섰다. 정확히는 쉬바에 의해 변이된 빈우다. 쉬바는 대상의 육체를 변이시키지만, 그 변이의 기본이 되는 육체의 영향은 그다지 받지 않는다. 재료가 되는 것이 외계인의 육체라면 그것을 먹이 삼아 동일한 쉬바로 복제-즉 스스로를 분열할 뿐이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다르다. 물론 순수한 인간에게는 반응하지 않지만, 대상이 육체적으로 변형이 되었거나 정신적으로 감염이 되었다면 이것을 치료하기 위해 맹렬히 활동해 최종적으로 비홀더 전대에 걸맞은 개조인간으로 재탄생시킨다. 단 이런 변이과정 중에 대상의 감염된 의식이나 무의식을 감지한 다음 이를 극복해서 재구성된 형태에 반영하기 때문에 쉬바에 의해 탄생된 비홀더 전대원들은 제각각 자신의 트라우마나 콤플렉스가 외모에 희미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허나 아무리 그래도 이런 경우는 없었다.
“어찌 이런 흉한 모습이….”
비홀더 1전대장이 흉측하게 변한 빈우의 모습을 보고 입술을 짓씹었다. 한때 자신이 그토록 칭찬해 마지않았던 엘리트 장교가 지금은 거대한 태아 형태의 괴물이 되어있는 것이다. 그것도 죽어서 말라비틀어진 태아의 시체형상이다. 대관절 어떤 정신 상태를 가지면 이런 모습으로 재구성될지 이 섬은 짐작조차 하기 힘들었다.
‘쉬바가 반응할 정도의 신경 반응계라면 이미 인간을 벗어난 존재다. 허나 그런 자들을 보충병으로 받았던 적이 있어도 이렇게까지, 아니, 애초에 정상적인 인간의 형상을 벗어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도대체 빈우는 어째서 비정상적인 사고체계를 가지게 되었으며, 또 어떻게 이런-.’
그의 생각이 채 여물기도 전에 빈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마치 워프 비스트처럼 변이된 육체에서 플라스마가 뿜어져 나온다. 그러나 고작 그 정도로는 비홀더 전대의 장갑복에 상처를 줄 수 없다.
“소용없는 짓을.”
그 소용없는 짓을 하는 것은 빈우뿐만이 아니다. 관리소 안에 있던 인류 연방의 병력들도 갑자기 쳐들어온 비홀더 전대에 대응해 즉시 반격했다. 아무리 인류 연방과 지구 제국간의 관계가 암묵적인 동맹관계라고는 하지만, 저쪽이 먼저 공격해온 마당이라 이쪽도 필사적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다.
“헛짓거리하지 마!”
요시오의 외침과 함께 사격이 퍼부어진다. 그러자 섬광과 함께 울토르 클론들이 소멸한다. 그 사이로 다시 어벤져들이 나서서 코일건을 비롯한 공격을 가했지만 비홀더 전대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했다. 반면 비홀더 전대원들의 공격 한 번에 지금까지 끈질기게 살아남은 어벤져들이 그대로 사라진다.
“불쌍한 것들.”
낭소로호 중위가 찰리하나팔과 아나스타샤 앞에 섰다. 울토르 클론이 맹공을 퍼부었지만, 이 지구 제국의 병사에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둘 다 그저 껍데기로구나. 이만 편해지거라.”
태양계 내부의 정보를 단독으로 조사하던 낭소로호는 이 둘의 정체에 대해 대략이나마 파악하고 있었다.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들. 어쩌면 비홀더 전대와 비슷하다 할 수 있지만, 그것이 가짜란 것에서 차이가 있다.
“새끼, 말 많네.”
찰리하나팔이 아나스타샤를 안고 뛰었다. 그러나 낭소로호의 공격은 이를 놓치지 않았고, 다리 하나가 불편해서 느렸던 찰리하나팔의 남은 다리 한 쪽마저 베어버렸다.
“큭!”
착지하던 찰리하나팔은 검에 맞은 다리가 점차 희미해져 가는 것을 보았다. 분자결합이 흩어져 물질 붕괴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는 붕괴가 위로 더 퍼지기 전에 중성미자 검에 스친 다리를 서둘러 진동 나이프로 잘라냈다. 낭소로호는 그것을 다 지켜본 다음 다시 검을 들었다. 중성미자들이 응집과 분해를 반복하며 희미한 검의 형태를 꾸려 일렁거린다.
“마커스! 지금이다!”
찰리하나팔은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아나스타샤를 안고 지키듯이 몸으로 가렸고, 그 모습을 본 낭소로호는 찰리하나팔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검을 돌렸다.
“…이런.”
그러나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돌아보니 클론이 안드로이드를 안고 한 팔로 뛰어서 도망치고 있었다. 클론이 안드로이드를 구하려 한다. 허나 이 둘의 주인은 지금 저기서 괴물이 되어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렇게 필사적으로 살아남으려는 것일까.
‘그저 살고 싶어서일까, 그러면 왜 안드로이드도 구하려 하지? 혹시 주인의 명령인가.’
생각은 생각대로, 행동은 행동대로. 낭소로호는 도망치던 찰리하나팔을 쫒아가 걷어찼다. 클론은 나뒹구는 와중에도 주인을 찾아 울부짖는 안드로이드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품 안으로 밀어 넣었다.
“주인님! 안 돼요! 주인님!”
아나스타샤는 찰리하나팔의 팔 안에서 애타게 빈우를 찾고 있었다. 빈우는 지금 비홀더 1전대장인 섬과 다른 전대원들에 맞서 싸우고는 있지만, 상황은 영 좋지 않았다. 달려들던 비홀더 대원 한 명이 비틀린 태아의 다리에 검을 꽂아 넣었고, 그 대신 머리를 붙잡혔다.
“크악!”
지구 제국의 병사는 짧은 비명만을 내뱉었다. 동시에 제국제 장갑복 안에서 뭔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살과 뼈가 바깥으로 나오고, 피부와 장갑이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빈우는 기괴한 살덩어리가 된 비홀더 전대원을 내팽개쳤고, 제국 병사는 그렇게 무력화되었지만 아직도 살아 있어 꿈틀댄다.
“공간 이동을 저런 방법으로! 접촉자의 표면을 뒤집다니.”
섬이 감탄했다. 빈우는 형태는 저렇지만 엄연히 제국의 병사다. 그것도 아주 고위의, 아마도 쿠델카 직속의 병사다. 그러면 그 권한 또한 막강할 것이고, 그 능력은 전대장인 이 섬과 동급.
“계속해서 능력이 개화하는구나.”
변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는 능력을 제대로 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차츰 능력이 걸음마를 시작한다. 그러면 일이 귀찮아진다.
“서둘러라. 다소의 피해는 무릅쓴다.”
제국 병사들의 공격이 빈우에게 집중되고, 빈우 또한 반격하지만 점차 열세로 몰려갔다.
“안 돼! 안 돼에!”
아나스타샤가 그 모습을 보면서 비명을 질렀고, 찰리하나팔은 그녀를 끌어당기며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낭소로호를 보았다. 그리곤 히죽이 웃었다.
“블랙 랜스! 지금이다.”
그러면서 찰리하나팔이 아나스타샤를 지키듯이 머리를 끌어당겼다.
“소용없다.”
낭소로호는 찰리하나팔의 속임수 따윈 무시하고 검을 찔러나갔다. 그때 관리소를 뒤흔드는 충격이 있었다. 바깥쪽이 아니라 화성에서부터다.
“이건, 함선의 공격?”
이 섬이 혀를 찼다. 화성 뒤쪽으로 돌아갔던 블랙 랜스가 행성을 한 바퀴 돌고 다시 돌아와 궤도 방어기지의 아래에서부터 포격과 함께 관리소 부분을 들이받은 것이다. 평상시라면 힘들었겠지만, 지금은 계속된 샤다이의 공격과 지구 제국의 공격마저 가해진 탓인지 금방 여기까지 뚫려버렸다. 외부 장갑이 파괴되자 블랙 랜스의 중력 충각이 내부 구조물들을 밀어내며 금세 이곳 관리소까지 구축함의 함수가 들이닥쳤다. 그러나 블랙 랜스가 여기까지 오도록 아무런 경고가 없었다는 것은 심히 수상하다.
“함장님?”
전대장이 함장을 불렀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이건 그다지 좋지 않은 징조다. 허나 그것 말고도 좋지 않은 일들이 지금 그의 앞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블랙 랜스에서 장갑보병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은 무인기지만 그중에서 몇몇이 아주 골치 아픈 자들이다.
-이번에는 반대 팔을 떼어주랴?
아룹의 도발에 요시오가 히죽이 웃었다.
“뒤에 숨어서 입만 놀리기는!”
요시오가 휘두른 검에 달려들던 무인 어벤져들이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저 뒤에서 정확하게 조준해서 쏘는 아룹의 공격에 비홀더 전대원 한 명이 벌써 무릎을 꿇었다. 어벤져를 입은 울토르 클론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험성이다. 게다가 마커스와 이노우에 고토의 병력들이 대보병 무장을 하고 있었던 데다 지금까지 소모가 심했던 반면, 팔팔한 블랙 랜스의 장갑 보병들은 작정하고 고화력의 병기들로 둘둘 감싸고 왔기에 지구제국으로서도 무시할 순 없었다.
“이따위-.”
호기롭게 나서던 비홀던 전대원에게 함포사격이 집중되자 그도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었고, 동료들이 나서서 그를 엄호한다. 그 덕에 비홀더 전대의 공격이 블랙 랜스로 집중되었고, 구축함의 역장 방어막은 이를 아슬아슬하게 막아낸다.
-저 독한 새끼들 봐라. 배하고 맞짱 까네, 시벌.
위르겐은 이 악물고 모든 무기를 발사했다. 반동제어를 하느라 발가락이 얼얼할 지경이다. 그의 공격과 아룹의 정밀저격이 이어지자 달려들던 요시오도 방어 일변도가 되어 천천히 다가오려 했고, 비홀더 전대원들의 기세도 많이 꺾였다.
“시발, 이건 또 뭔 개판이야.”
간신히 목숨줄을 부여잡은 마커스는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리며 찰리하나팔과 아나스타샤를 이끌고 도망쳤다. 지금 관리소 안은 블랙 랜스의 함포와 지상팀의 고화력 병기로 터져나가는 상태다.
-차관님, 대가리-
채 끝맺지도 못한 위르겐의 말에 마커스는 끌고 가던 두 사람을 깔고 넙죽 엎드렸고, 그 위로 무수한 포격들이 날아가 쫒아오던 낭소로호를 가격했다. 지금 궤도 방어병기의 관리소에선 두 번째 아수라장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침입해 온 샤다이들은 벌써 전멸했지만, 지금까지 동맹이었던 지구 제국과 인류 연방의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전투의 여파가 이곳 관리소에 변화를 강요했다.
-어어어 씨바랄! 내 이럴 줄 알았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좀 작작 갈기라고!
파트리샤의 욕 섞인 한탄이 현재 상황을 대변한다. 아무리 지구제국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구조물이라고 해도 연이은 화력집중에는 배겨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거기다 블랙 랜스에 의해 외부 장갑이 손상되고 내부 구조까지 붕괴되자 해당 블록 자체가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꽉 잡아요!
모니카의 부머가 나서서 역장을 생성하고 마커스 일행을 구하려 했지만, 비홀더 전대의 공격에 왼쪽 팔이 통째로 터져나갔다.
-악!
-모니카!
파트리샤가 달려가 자신보다 거대한 부머를 잡아 일으켰다. 다행히 부머의 팔은 착용자의 팔보다 훨씬 바깥에 있어서 모니카는 무사하지만 이래서는 마커스와 빈우, 찰리하나팔과 아나스타샤를 구하러 갈 수가 없었다. 지금 비홀더 전대와 블랙 랜스는 치열하게 화력을 주고받고 있으며, 마커스 쪽은 저 뒤에 떨어져 각개격파 당하고 있었다. 저들을 구하려면 먼저 요시오의 전선을 뚫어야 하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것을 막는 것만 해도 벅차다.
-함장님! 엄호 포격 부탁합니다.
아룹이 포격목표를 지정해서 오르 함장에게 보낸다. 마커스를 비롯한 구조 대상자를 엄호하기 위한 포격이다.
-안 됩니다! 너무 가깝습니다.
하지만 오르 함장이 난색을 표했다. 아무리 목표를 정밀지정해도 함포는 함포다. 거기에 휘말리는 것으로도 죽을 수 있는 것이다.
-안 쏴도 죽습니다. 쏘십시오!
블랙 랜스에서 부포들이 발사되자 아비규환이 따로 없다. 애꿎은 어벤져들이 터져나가고, 찰리하나팔과 아나스탸샤는 여기저기 부상을 입으며 몸을 숨긴다. 하지만 그 와중에 비홀더 전대원들은 집요했다. 이 섬은 홀로 빈우를 집중 공격했고, 요시오는 블랙 랜스의 장갑보병을 노렸으며, 낭소로호는 마커스와 찰리하나팔, 아나스타샤를 끝장낼 기세로 쫓아왔다.
“일단 튀자!”
마커스는 찰리하나팔과 아나스타샤를 집어 들고 도망치려 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다. 사방이 터져나가고 폭발한다. 호위를 부탁했던 울토르 클론들은 달려드는 비홀더 대원들을 막기에도 역부족이고, 낭소호로는 집요하다. 그리고 지금 블랙 랜스로 도망치려니 요시오 쪽을 뚫어야 하는데, 지금으론 어림도 없다.
“야, 아나스타샤를 부탁한다!”
“뭐? 당신 무슨 소리-.”
마커스는 찰리하나팔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친구의 누나와 클론을 새로이 생긴 틈으로 던져 넣었고, 그와 동시에 뒤에서 낭소로호의 검이 날아와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마커스!”
“마커스 님!”
클론과 안드로이드가 바깥으로 던져지며 소리쳤다. 그들은 샤다이 함대와 지구 방어함대의 공격이 오가는 화성 궤도로 내팽개쳐진 것이다. 그쪽도 지옥도이긴 매한가지지만 지금 여기보단 덜하다.
-마- 커- 스-
마커스는 뒤틀려 버린 친구의 비명을 들으며 점차 의식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