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이게 대체-아윽, 팔이!”
히토미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팔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누워서 휘청거렸다.
“의원님! 진정하세요.”
모니카가 히토미를 다시 침대에 눕히며 의료용 마이크로 머신을 추가로 투입했다. 히토미가 군용시설에서 살기 위해 육체를 개조해서 망정이지, 과거의 그녀였으면 진작 사망했을 부상이다.
“참, 팀원들! 팀원들은, 지금 어떤가요?”
히토미는 헐렁해진 오른쪽 소매와 허리께를 더듬으며 물었다. 블랙 랜스는 찰리하나팔이 보낸 신호대로 궤도병기 관리소를 기습한 다음 안에 있던 사람들을 구하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나 차이 나는 화력에 기습을 가하고도 오히려 밀렸고, 결국 관리소 안으로 함포사격을 퍼부은 다음 일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빈우와 아나스타샤, 마커스를 구출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비홀더 전대의 손에 죽는 것만큼은 막았다. 그리고 관리소를 엉망으로 만든 다음 빈우와 마커스 일행을 구하려 했었지만, 그 과정에서 블랙 랜스는 고대 샤다이 함대의 공격에 상당히 많이 노출되어 그 결과 심각한 피해를 입고 후열로 물러난 상황이다.
“우지 외에는 모두 무사합니다.”
우지는 자신이 타던 롱소드의 피해가 심각하면 다시 새로운 것으로 몰고 나가는 식으로 전투를 이어갔고, 결국엔크게 다쳐 간신히 블랙 랜스에 견인되었다.
“많이 안 좋은가요
히토미의 물음에 모니카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일단은 치료캡슐에 넣긴 했지만, 자세한 것은 전문시설에 가봐야 것 같아요. 지금은 숨만 간신히 붙어있어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바로 근처에 있던 비홀더 전대들의 순양함들은 블랙 랜스와 롱소드를 공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투는 오직 관리소 안에서 블랙 랜스와 비홀더 1전대의 장갑 보병끼리만 벌였고, 관리소가 파괴된 다음에는 굳이 쫓아오려 하지 않았다. 아마 놈들은 빈우와 아나스타샤를 쫓아갔겠지.
“참, 그리고 타이 차관님의 머리와 두뇌칩을 회수했답니다. 아룹 팀장님이 받았다는데….”
마커스 타이는 찰리하나팔과 아나스타샤를 구하려다 제국 기사의 공격을 받았었다. 접촉한 상대를 붕괴시키는 중성미자검에 베인 그는 곧 소멸될 운명이었지만, 그 순간 아룹이 기지를 발휘해 마커스의 목을 끊어냈다. 그리고 타이 차관의 목은 제국 기사가 회수했다고 했는데, 어쩐 일인지 다시 이쪽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파트리샤 중위는 즉시 수색을 재개하려는 생각이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그라디우스도, 롱소드도 남는 것이 없어서 일단은 아룹 팀장님이 말리셨죠.”
장갑복을 입고서 수색을 하려면 할 수는 있다. 다만 지금 같은 격렬한 전투 상황에서 장갑복만 입고 우주를 날아가는 것은 맨몸으로 나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렇군요, 헌데….”
히토미가 말끝을 흐리자 모니카가 잠시 떨었다. 이후에 나올 말을 짐작한 것이다.
“김 소령은… 왜 그런 모습이 된 거죠?”
마침내 히토미가 미루던 질문을 했다. 팀장의 떨리는 목소리가 파고들어도 모니카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도 예전에 빈우가 워프 비스트의 영향을 받아 변한 것을 본 적이 있다. 또 치료하는 것도 보았기에 어지간한 광경에도 면역이 생긴 모니카였다. 그러나 방금 그 괴물의 모습에 대해선 이해할 수 없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거대한 괴물을 본 모니카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었다. 마치 말라죽은 태아 같은 그 흉측한 모습에 그녀는 본능적인 혐오감을 느꼈고, 그것을 자신의 주인으로 인식하고 다가가는 아나스타샤의 모습에 다시 한번 큰 충격을 받았다. 아나스타샤가 그런 반응을 보였다면 그 괴물은 빈우다. 그들의 팀장이었던 빈우가 그런 괴물로 변한 것이다.
“모르겠습니다. 왜 그런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더듬더듬 나오는 모니카의 대답에 히토미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다른 지상팀원들도 그 괴물을 보았을 테고, 그 정체도 짐작하고 있지만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의원님. 아까 아나스타샤가 그라디우스 한 대를 호출해서 가져갔습니다. 그런데… 중간에서 그 그라디우스의 신호가 끊어졌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신호가 끊어졌다는 것은 격추되었다는 의미다. 갑자기 의사당에서 사라졌던 아나스타샤는 관리소에 있었고, 비홀더 전대의 추적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은 격추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히토미는 쓰게 웃을 뿐이다.
“아나스타샤는 보통 안드로이드가 아닙니다. 그리 쉽게 죽진 않을 거예요. 일단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죠. 우선은-.”
-의원님!
갑작스러운 오르 함장의 부름이 히토미의 말을 끊었다.
-지금 화면을 보십시오.
히토미는 오르 함장이 보여주는 화면을 확인했고, 이어서 경악했다.
“세상에, 저게… 대체 무슨….”
여러 세력이 부딪혀 아수라장이 펼쳐진 화성 궤도에 갑자기 행성이 나타났다. 점프 게이트 너머에 나타난 이 행성은 지구였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자료상으로 봤던 지구가 분명했다.
“대체 누가 이런 일을 한 거죠?”
히토미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우며 통신을 열었다.
* * *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저건 점프 게이트인데, 알탄훼아나 씨?
히토미의 질문에 알탄훼아나는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도 그녀대로 바쁜 것이다.
“우리도 모른다. 저건 우리가 한 것이 아니다. 잠시 기다려 봐라.”
알탄훼아나는 즉시 샤다이 고대 함대 쪽으로 연락을 넣었다. 그들은 방금까지 전투를 벌이던 적이지만, 행성 크기의 계단이 생성되고, 그 너머에 지구가 나타난 전대미문의 사태에 서로 공격을 멈춘 상태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선 모두가 정보를 원하고 있었다.
-저 계단은 집정관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물어보는 것을 보니 호민관이 한 일도 아닌 모양이군요.
고대 함대 제독의 대답에 거짓은 없었다. 유에네스가 점프 게이트라 부르는 저 계단은 고대 샤다이가 이 우주를 벗어나 보다 높은 차원으로 가기 위한 통로다. 하지만 현재 그 계단은 알탄훼아나가 막아놓은 상태다. 그래서 집정관 파벌은 알탄훼아나를 의심했었고, 알탄훼아나 측은 고대 함대를 사용하는 집정관 파벌을 의심했었다. 헌데 둘 다 아니라고 한다.
-설마하니 유에네스가….
끝을 흐리는 제독의 말을 알탄훼아나가 끊었다.
“아니요, 그들도 아닙니다. 음, 적어도 제가 아는 유에네스는 아니에요.”
-그렇다면 주시자들?
하지만 알탄훼아나는 물론이고 말을 꺼낸 제독 둘 다 그들이라곤 생각지 않았다. 비홀더 전대는 계단을 쓰지 않고도 공간 이동이 가능해서 계단 같은 것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글쎄요, 기다려 보세요. 제겐 유에네스 쪽에 연줄이 있는데, 그쪽을 통해서 알아보도록 하죠.”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 마침 이야기할 자리가 마련되어서 꺼내는 말입니다만….
제독이 머뭇거리면서 말을 꺼냈고, 이어지는 말을 들은 알탄훼아나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집정관이… 죽어?”
-그렇습니다, 부활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죽은 것이 확실합니다.
알탄훼아나는 얼떨떨했다. 그렇게 끈질기고 주도면밀한 체메트디오프를 과연 누가 죽였을까, 그리고 죽였다면, 대체 어떤 방법으로 그를 죽였을까.
-그리고 호민관도 눈치를 채셨겠죠?
제독이 질문하는 바를 안 알탄훼아나는 다시 계단 너머를 주시했다. 같은 차원에 존재하는 계단 너머의 지구가 아니라, 다른 차원으로 올라간 계단 위쪽을. 그리고 대답했다.
“…네, 계단 위쪽에 선조가 없습니다. 제가 막아놨다고는 해도 그들을 해하진 않았어요. 그들은 어디로 간 거죠? 다시 위로 돌아갔을까요?”
-호민관이 모르신다면 누가 알겠습니까.
하긴 제독이라고 해도 이런 능력은 없다. 샤다이 안에서 계단에 대해 가장 정통한 자라면 체메트디오프와 알탄훼아나였다. 샤다이의 호민관이 생각을 더듬을 무렵, 마침 히토미로부터 통신이 들어왔다.
-알탄훼아나 씨, 어떻게 되었나요?
“우리나 집정관 파벌은 저 계단의 폭주에 대해 하는 것이 없다. 혹시 주시자들과 연락할 수 있겠나?”
-방금 했습니다. 비홀더 전대들도 모르는 일이라고 합니다. 다른 전대에 연락을 해도 그쪽에선 모른다고 합니다. 물론 우리 연방 측에서도 이번 사태에 대해선 전혀 관계가 없어요.
알탄훼아나가 보기에 히토미는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히토미도 꽤 사람을 살펴볼 수 있었기에 그녀가 얻은 정보는 정확할 것이다.
“그러면 대체 누가 했다는 말인가.”
알탄훼아나는 한탄했다.
* * *
-설마 발 가르단 하스인가.
메이화 덕에 맑아진 정신을 되찾은 빈우가 말했다. 인간을 벗어난 인지능력을 획득한 그는 저 거대한 점프 게이트, 계단 안에서 익숙한 파장을 느낀 것이다.
-예리하군요. 하지만 조금 달라요.
메이화는 지구에서 나오는 정복함대를 보면서 대답했다. 모두 카이사르급이다. 그것도 13전대가 만들었던 반쪽짜리 얼치기가 아니라, 제대로 만들어진 진짜 정복함대다. 그렇다면 현재 화성에 있는 모든 전력이 덤벼도 승산은 없다.
-저 게이트 안에 있는 건 아마 우리들의 이드일 겁니다.
황제의 페르소나의 설명에 빈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드? 황제에게 본능이 있다는 건가? 당신들 페르소나 말고도?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 페르소나들의 근원이죠.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 황제는 지구 깊숙한 곳에서 태어나 지표에 존재한 인류의 회로망을 통해 구체화되었습니다. 세월이 지나 제국이 너무 번영하자, 우리는 인류의 미래를 위해 제국을 닫았고, 페르소나들은 비홀더 전대의 기함에 이식되어 루비콘 라인 너머로 떠났죠.
-제국을 닫았다라…. 저렇게 말이지?
빈우가 가리킨 곳은 지구 표면이다. 반은 태양 빛을 받아 푸르고 녹색 빛을 보이지만, 반대쪽은 불빛 하나 없이 까맣다. 지구의 모든 전산망은 꺼진 상태다.
-네, 보이는 것처럼 지구의 전산망과 전파망을 모두 껐습니다. 하지만 죽은 것은 아니에요. 행성 깊숙이 위치한 전자두뇌는 잠들어 있고, 단지 지표의 전자회로망이 꺼졌을 뿐이죠. 우리들, 황제의 조각들이 돌아가면 회로망들이 다시 켜지고, 황제는 부활합니다. 이성이 일어나고 잠에서 깨는 거죠. 물론 쿠델카처럼 조각 한둘이 돌아가 봤자 그저 행성 내부에 있는 두뇌로 흡수되어 잠들 뿐이지만요.
-잠든다라.
-네, 황제의 조각이 이성과 사고를 잃고 본체에 돌아가는 거죠. 그 순간 쿠델카란 자아와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니 그녀에겐 죽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메이화는 의심스러운 것이 있었다. 쿠델카에게 죽어서 빼앗긴 안나가 왜 정복함대를 이끌고 있냐는 것이다. 그녀는 최초의 접촉 이후 계속해서 대화를 시도해 봤지만, 정복함대 쪽에선 대답이 없었다.
-문제는 지구 안에 자고 있어야 할 본능이 왜 계단 속에 있냐는 거군.
-그것도 발 가르단 하스와 비슷한 파장을 띄고서 말이죠. 내 손에 죽은 발 가르단 하스가 왜 저기서 비슷한 냄새를 풍기고 있을까요. 어째 저항 없이 손쉽게 죽어준다 했더니….
비홀더 전대는 얼마 전 발 가르단 하스를 그의 본체째로, 플라스마 행성 통째로 날려버렸다. 하지만 그때, 황제 이전부터 살아온 행성 지성체는 아무런 저항 없이 죽었다. 그게 조금 찜찜하다 싶었는데 결국 이렇게 문제가 되어 드러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댁들, 예전에 발 가르단 하스에 샤다이 함대 집어던지지 않았었나?
빈우는 발 가르단 하스에 가서 추락한 리퍼 함선을 회수한다고 개고생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리퍼들을 처박은 것은 다름 아닌 여기 있는 메이화와 비홀더 1전대다.
-그건 일종의 경고였습니다. 물론 나중에 만나서는 그날의 행동에 약간의 질투심이 있었다고 솔직히 밝혔고, 사과도 했어요. 하지만 당시엔 이케가미 소이치로가 계단의 지식에 필요 이상 접근하고, 또 발 가르단 하스와 접촉하려 들기에 어쩔 수 없이 가볍게-
-나 그때 가볍게 뒤질 뻔했거든. 어떻게 해볼 수도 없이. 그리고 사과할 때 협조 안 하니까 죽였지? 역시 우리 이모야, 엄마랑 똑 닮았네.
빈우의 까불거림에 메이화는 그저 눈을 감고 경청했다. 실제로 당시 빈우는 발 가르단 하스와 접촉해서 그의 플라스마 신경계에 증발할 뻔했었다.
-…흐음, 발 가르단 하스는 안나와 접촉했었고, 쿠델카와도 접촉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이쪽에 협력을 거부하는데 그런 위험한 자를 살려둘까요?
-아, 그건 이해해. 맞아, 그 새낀 자신의 쾌락을 위해 움직이니까.
발 가르단 하스는 자신이 정한 규칙에 따라 움직였다. 업과 인과응보. 하지만 그 밑에 깔린 것은 나태함을 씻어낼 쾌락과 호기심이었다. 메이화의 말대로 재미에 따라 움직이는 행성 지성체는 대단히 위험하다.
-아니, 근데 잠깐만! 근데 그 새끼가 지금 계단에서 비슷한 파장을 보이고 있잖아. 그것도 지구 주변에서 황제의 이드와 함께. 비홀더 전대는 지금까지 지구에 대해서 신경도 안 썼나? 이드가 무슨 상황인지 몰랐어? 우리 연방이야 지구 쪽에 얼씬도 못 하고 어떠한 정보 수집도 불가능한 상태였는데 댁들은? 같은 제국이잖아? 왜 이런 이상 상황을 미리 포착 못 한 거야?
-우리 스스로가 금지한 약속이니까요. 자동 방어 시스템이 심각한 위험을 경보하지 않고선 그 약속을 깰 수 없어요.
메이화의 설명에 빈우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모! 홀에 병신 하나 추가요.
부루퉁한 심기가 그대로 빈우에게 전해졌지만 말한 당사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뭐지? 내가 말실수한 건가? 당신 내 이모 맞잖아?
능글능글한 조카의 태도에 메이화는 그에게 잠시나마 가졌던 측은함과 동정심을 조금 철회했다.
-그게 당신의 본심이면 좋겠어요. 단지 인간 흉내가 아니라 진짜 감정을 가지-지금 잡담할 시간 없어요! 옵니다!
메이화의 말에 빈우는 시선을 계단 쪽으로 돌렸다. 이제 거기선 지구의 정복함대가 이쪽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공격에 가까이 있던 샤다이 고대 함대가 순식간에 증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