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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자 타이거 스파게티 드래곤-296화 (294/301)

296화

발 가르단 하스는 빈우의 역정 내는 모습을 보며 킬킬 웃고 있었다. 하지만 빈우는 곧 진정하고는 발 가르단 하스를 노려보았다.

“이봐, 넌 지금 황제의 페르소나라고 했지?”

“그럼, 얼굴을 잊어버린 자의 얼굴이 되어주고, 자유를 원하는 자를 도와 함께 자유를 찾으려는 훌륭한 선배지.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말이야.”

“그런데 우리에게 꽤 친절하시군. 적에게 말이야.”

빈우의 지적에 발 가르단 하스의 눈빛이 이채를 띄었다.

“당신 지금 지구의 껍데기라면서? 후배를 위한다면서 그 후배를 공격하는 자들과 이렇게 노가리 까고 있어도 되나? 뭐, 여기 시간과 바깥의 시간 흐름은 다르지만, 댁 지금 별로 적대적이지 않은데? 우리 질문에 또박또박 대답해주고 있잖아.”

실제로 발 가르단 하스는 메이화와 빈우의 정신세계에 접속한 다음 일체의 공격 없이 대화만 하고 있는 중이었다. 얼마 전 메이화와 쿠델카 간의 살벌했던 전투에 비하면 일상대화나 다름없다. 아니, 아주 친근한 일상 대화 그 자체였다.

“말로 해서 주먹질을 멈출 수 있다면 이익이지, 안 그래?”

물론 그의 말대로 폭력 사태로 가기 전에 교섭으로 문제를 푸는 것이 가장 이득이긴 하다. 그러나 빈우와 메이화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둘 다 발 가르단 하스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행성 지성체는 대상이 가진 업, 카르마를 먹이로 삼는다. 게다가 그것을 진수성찬이라고 부를 정도로 좋아한다. 다시 말해 발 가르단 하스는 대상이 사고를 저질렀던 과거와, 혹은 앞으로 저지를 미래의 사건에 대해 환장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죽어가면서까지 쿠델카의 유혹을 받아들인 것도 앞으로 일어날 거대한 사건의 중심부에 있기 위해서였고, 지금 빈우와 메이화에게 협조적으로 나오는 것도 이 사건을 앞으로 더욱 크게 만들려는 속셈인 게 분명했다.

“우리하고 대화로 해결해 본다고? 정복함대로 밀어붙이기만 해도 이쪽은 질 텐데.”

메이화가 말했다. 그녀와 다른 함장들은 합의를 통해 화성까지 비홀더 전대를 끌고 왔다. 허나 지구에서 카이사르급 전함들이 계속해서 생산되고 있는 지금으로선 비홀더 전대가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순간은 잠깐뿐이다.

“네 말대로야. 하지만 모든 비홀더 전대를 상대론 이쪽의 피해도 무시할 수 없지. 그만큼 너희들의 존재가 치명적이라고 해두는 게 어떨까. 난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데?”

게다가 현재 비홀더 전대가 있을 수 있는 곳은 이곳 화성궤도까지다. 계단을 넘어서 지구까진 가지 못한다. 계단 부근에서 버티기만 해도 저쪽의 승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 가르단 하스는 불리한 이쪽과 어떻게든 대화를 하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대놓고 유인을 해대니 대화하기도 껄끄럽다.

“오케이, 접수. 그러면 교섭을 진행해 보자. -안나 닐센은 어떻게 된 거지?”

하지만 빈우는 넉살 좋게 떡밥을 낼름 물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후반부의 질문은 빈우의 말이라기보다는 그의 안에 있는 메이화의 질문이었다.

“메이화, 네 짐작대로 쿠델카가 데려왔어. 정복함대를 쓰기 위해선 유능한 페르소나가 필요했거든. 한때 카이사르급을 만들고 운용했던 그녀라면 안성맞춤이지. 근데 웃기기도 하지. 정작 나나 안나 같은 말을 열심히 구했건만, 정작 쿠델카 자신이 너희들에게 잡혀버렸잖아. 큭큭큭.”

빈우의 안에서 메이화가 인상을 썼다. 쿠델카의 음모를 알아채고 혼자서 움직였던 자매, 안나 닐센. 그러나 그녀는 음모에 이용당한 비홀더 1전대의 손에 죽었고, 메이화에게 흡수당했으며, 결국엔 쿠델카의 손에 넘어가 저렇게 이용되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발 가르단 하스의 비웃음이 마치 자신을 향한 것 같았다.

이번엔 빈우가 질문했다.

“지금 정복함대를 이끄는 안나 닐센은… 제정신이 아니겠지?”

“응? 글쎄에- 뭐, 나 정도겠지.”

역시나 별로 재미없다는 투의 대답이었다. 그 모습에 빈우는 발 가르단 하스가 뭣 때문에 대화에 응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더 알아야 할 것이 있나?”

“있고 말고!”

이번엔 발 가르단 하스가 반색을 하더니 빈우에게 다가왔다. 그 모습이 마치 진미를 눈앞에 두고 군침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입에서 군침 대신 말이 흘러나왔다.

“샤다이가 이 계단을 만든 이유는 알고 있겠지?”

계단. 고대 종족 샤다이가 이 우주의 멸망을 피해 다른 차원으로 도망가기 위해 만들었던 통로. 인류 연방이나 후발 종족들은 이 계단을 물리적 좌표의 이동에 쓰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이었고, 실제 목적은 샤다이를 정보화시킨 다음 다른 차원으로 올려보내기 위한 것이었다. 허나 다른 차원으로 도망간 샤다이는 그곳에서 선주 종족들에게 고문과 고통을 겪었고, 다시 이 우주로 떨어져 내려왔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워프 비스트 사건의 전말이다.

“이유라….”

빈우가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 이유 정도는 여기에 있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굳이 새삼스레 꺼낼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배후에 다른 이야기가 숨겨져 있지 않는 한. 여기서 행성 지성체가 꺼낼만한 배후의 이야기라면 후보가 몇 가지 없었고, 빈우는 거기서 후보를 골랐다.

“그 위쪽, 다른 차원의 종족이 연관된 일인가?”

빈우의 말에 발 가르단 하스의 눈빛이 요동쳤다. 정확히는 눈 안에 있던 지구의 이드가, 욕망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정답! 그들이 마침내 지구에게 눈을 돌렸어.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이쪽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단 말이야.”

빈우는 발 가르단 하스가 짓는 자신의 미소를 보았다. 자신은 저런 미소를 적에게 보여준 적이 없다. 동료들에게나 보여주는 만족스러운 미소다.

“왜 나에게 이런 것을 가르쳐 주는 거지?”

“가르쳐 주다니, 난 숨기고 싶어. 지금 네가 대화를 통해 알아내고 있는 거야.”

지금 발 가르단 하스가 하고 있는 것은 교섭이 아니다. 녀석은 이쪽에 정보를 흘려 싸움을 붙이고 싶어 하고, 또 그 싸움을 크게 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놈은 구경하겠지.

“너, 벌써 계단 너머의 존재와 접촉했군.”

“날카롭군. 하지만 그들을 너무 위험한 존재로 보지 마. 그들은 샤다이들을 고문한 적이 없어. 죽인 것은 바로- 나지.”

그러면서 발 가르단 하스가 빈우에게 감정을 공유해 주었다. 빈우도 익히 아는 샤다이들의 고통과 단말마다. 자신의 속으로 들어온 샤다이들을 고문하고 죽였을 때 몇 번이나 겪었던 감정이다. 그러나 지금 발 가르단 하스가 보여주는 것은 그 규모가 달랐다. 체메트디오프가 말한 것처럼 조 단위의 규모에서 나오는 고통이었다.

“조심해요!”

“썅.”

감당할 수 없는 의식의 흐름에 빈우가 휘청이자 안에서 메이화가 잡아주었다. 자칫했으면 빈우 자신도 휩쓸려갈 뻔했던 것이다.

방금 계단에 있던 무수한 샤다이들의 정신체가 감지되지 않은 이유가 이것이었다. 과거 이 우주를 버리고 계단을 올라갔던 고대의 샤다이들 전원은 오늘 발 가르단 하스, 그리고 지구에게 죽은 것이다.

“이런 찌꺼기들이 계단에 있으니까 소통에 힘이 들지. 그래서 깨끗하게 청소한 거야. 그들과 접촉하기 위해서.”

여기서 발 가르단 하스가 말한 ‘그들’이란 샤다이가 도망가려고 했던 차원의 종족임이 분명하다.

“이쯤 되면 짐작했겠지만, 그들에게 시간은 또 다른 좌표의 하나에 불과해. 우리들이 전후좌우로 갈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은 과거와 미래를 자유롭게 오가지. 물건이 내일 온다면 내일 가서 받으면 되고, 어제 못 받았으면 어제 가서 받으면 될 일이야. 개념이 3차원의 우리랑 달라. 그래서 샤다이들이 고통을 받은 거지.”

그때 발 가르단 하스의 얼굴에 쩍하고 큰 금이 갔다. 그리고 그 틈으로 격렬한 본능의 색이 뿜어져 나오려 한다.

“잠깐잠깐, 기다려. 내가 설득 중이잖아. 서두르지 말라고. 잠시만 기다려줘.”

발 가르단 하스는 숨을 들이쉬며 진정하려 했다. 마치 자신의 내부에서 터져 나오는 엄청난 감정과 충동을 느끼곤 그것을 다스리려는 모습 같았다. 아마도 그 감정이란 지구, 페르소나가 사라져 잠든 지구의 것이겠지. 이성도 없이 본능만으로 날뛰려는 행성 규모의 괴물. 쿠델카가 왜 껍데기들을 찾아 헤맸는지 알겠다. 그녀는 야수를 자기 마음대로 이끌 올가미가 필요했던 것이다.

“후우- 계속하지. 계단 위의 그들은 단지 자신들에게까지 올라온 샤다이를 구경한 것뿐이야. 하지만 샤다이들에겐 뭐랄까. 그들은 자신의 책을 옆에서 훔쳐보고 스포일러하는 존재였어. 잊고 싶어 하는 과거를 일깨우고, 아직 보지 못한 미래를 들춰보는 자랄까. 오만한 샤다이들에겐 받아들일 수 없는 치욕이었겠지. 음, 아니야. 갓난아기에게 롤러코스터를 태웠다는 느낌이 더 정확하겠다. 그래, 맞아. ‘그들’의 무지에서 비롯된 친절이 샤다이에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되었던 거야. 자신들의 역사와 인생, 기억을 이리저리 늘리며 뒤집히는 경험은 정말 고문이었겠지.”

발 가르단 하스의 말이라면 계단 위의 존재란 시간을 자유로이 이동 가능한 고차원의 존재일 것이다. 그러면 빈우에게도 짚이는 것이 있다.

“그렇다면 지구가 원했던 자유는-.”

빈우가 말을 끊자 발 가르단 하스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쿠델카가 원했던 자유와 다른 개념이겠군?”

“맞았어! 쿠델카는 단지 인류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했지만, 지구의 본능은 그것보다 더했어. 처음엔 나를 보면서 자유를 갈망했고, 계단을 보면서 그 갈망을 키워나갔지. 종내에는 이 3차원을 넘어서 보다 높은 차원으로 떠나고 싶어 했어. 후후, 그리고 그것이 페르소나를 거치며 작아진 것이 쿠델카의 욕망이 된 거지. 참 소박한 자유 아닌가?”

원하는 해답을 들은 발 가르단 하스는 박수를 치며 웃었다. 하지만 빈우는 웃을 수 없었다.

“씨발, 이거 일이 자꾸 커지는데…. 메이화 함장님, 이거 당신 일이잖아. 뭐 짚이는 거 없어요?”

빈우와 메이화는 계단 안에 무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접촉했다. 그러나 까면 깔수록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나고 있었다. 빈우는 일개 인간이 가늠할 수 없는 사건을 마주하고는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자에게 폭탄을 돌렸다.

“흐음…. 솔직히 말해서, 발 가르단 하스의 말은 긍정할 수밖에 없네요.”

그런데 폭탄을 받은 사람은 그 폭탄이 꽤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당신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아뇨, 발 가르단 하스의 말이 맞아요. 우린, 나는 지구란 행성에서 태어났고, 인류가 만든 전파망을 신경계로 써서 깨어났어요. 그리고 그 안의 지식에 속박되었죠. 발 가르단 하스를 보고 자유를 원한다? 내 깊숙한 곳에서? 그렇겠죠. 그럴 수 있어요. 인정해요. 그리고 계단을 보고서 그 위로 올라가고 싶어 한다? 으음.”

빈우는 자신의 속내에서 끓어오르는 호기심과 욕망을 느끼고는 가슴을 억눌렀다.

“아니, 이모까지 왜 이래, 진정하시라고.”

“실례군요. 이건 문제 해결을 위해 나 스스로를 냉정하게 되짚어 보는 거예요. 쿠델카의 목적은 자신의 자유를 위해 모든 인류를 죽이는 거죠. 이건 당연히 막아야 해요. 그리고 발 가르단 하스의 말대로라면 지구는, 우리의 본능은 계단을 통해 위 차원으로 올라가고 싶어한다죠?”

빈우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에서 뜨거운 열망이 묻어나왔다.

“하지만 우리가, 황제가, 지구가 승천하게 되면? 그땐 어떤 일이 벌어지죠? 황제가 사라지는 겁니다. 네, 지구와 전자신경망은 그대로 있겠지만, 황제란 인격과 존재가 사라져요. 그러면 인류는 홀로 이 우주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겁니다. 친절하지 않은 이 우주와! 지구는 승천해서는 안 됩니다! 황제는 이 우주에 있어야 해요. 아니, 황제가 아니죠. 우리는 인류의 길동무로서 같이 걸어 나갈 거예요. 함께 배우고 서로 가르쳐가며 이 우주에서 살아갈 겁니다.”

메이화는 자신의 욕망을 필사적으로 부둥켜 잡고, 억눌렀다. 그 기세에 빈우는 껍데기인 자신이 찢겨져 나갈 것만 같았다. 몸속 깊숙이 솟구치는 충동의 폭풍우에 올가미를 씌워 대해에 내동댕이치는 것만 같았다.

“흐흥, 선녀께서 날개옷을 입기엔 자식들이 너무 많으셨구먼. 자식 농사가 아주 풍년이야.”

하지만 돌아온 것은 비웃음이었다. 빈우가 그 소리에 간신히 감정을 억누르며 눈을 떴을 때, 그가 본 것은 갈가리 찢겨진 자신의 모습이었다.

“발 가르단 하스. 너, 형체가….”

억누르는 자는 빈우만이 아니었다. 맞은편에 있던 발 가르단 하스도 엉망진창이 되어있었다. 그의 안에 있는 지구도 이제 폭발 일보 직전인 것이다.

“내 교섭은 실패군. 쌍방 간의 대화는 다음 단계의 대화로 넘어갈 모양이야.”

빈우는 발 가르단 하스의 안에서 타오르는 색과 자신의 몸 안에서 흘러나오는 색이 비슷한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상황이 돌아가는 형세도 깨달았다.

“이 씹새끼가 약 팔고 자빠졌네. 지구하고 이쪽 이모들하고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랐잖아! 교섭?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었던 교섭도 이제 물 건너갔네! 썅!”

빈우 안에 든 메이화는 지구의 페르소나이고, 발 가르단 하스에 든 것은 지구의 이드다. 그리고 지금 이 둘은 서로 동조해가며 폭발 직전까지 치닫고 있었다.

“흐흐흐, 나는 관찰자야. 그늘에 싹튼 잡초의 새싹을 보는 아이일 수도 있고, 웅장한 오케스트라에 압도된 문외한일 수 있으며, 인지를 벗어난 자연 광경에 경도된 미약한 존재일 수도 있지.”

“좆까 씨발! 불구경하고 싶어서 불을 지르는 미친놈이잖아!”

빈우의 지적에 발 가르단 하스는 딱히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나는 자네의 앞길을 보고 싶어. 자네의 업이 어느 정도인지 아나? 황제에 의해 만들어지고 키워진 너의 업이 꽃피기 시작할 때-.”

마침내 껍데기가 부스러지며 흩어졌고, 그 안에 억눌렸던 지구의 이드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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