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함장님을 모셔라!”
이 섬은 그리폰을 돌려 메이화 쪽으로 나아갔다. 그녀가 계단에 접촉한 다음 찰나의 순간에 상황이 급변했다. 계단 안에서 누구와 접촉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접촉 이후 지구 궤도에서 수많은 카이사르급들이 엄청난 속도로 건조되어 날아오르는 것이 포착되었다.
“함장님께선 이쪽에서 재구성 가능하실 텐데 굳이 저러신다는 것은….”
요시오의 말대로 메이화의 육체는 쉬바만 있다면 어디서든 생성 가능하다. 어차피 그녀의 육체는 쉬바에 정보를 넣어 인간의 형태를 만든 것이기 때문에, 멀리 떨어져 있는 저곳의 육체를 버리고 이곳 그리폰에서 자신의 몸을 다시 만드는 것은 손쉬운 일이다. 그렇기에 메이화가 저렇게 빈우와 아나스타샤를 데리고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함장님과 빈우, 그리고 그의 안드로이드를 회수했습니다. 그런데… 놈들은 아예 틀어막을 셈인가.”
낭소로호가 보고를 하면서 현재 계단 상황을 보더니 혀를 찼다. 지금 비홀더 1전대는 계단 가장 가까이에 있다. 그 계단에선 계속해서 정복함대가 쏟아져 나오고 있고, 이 카이사르급 전함들이 계단을 빠져나오면 가장 먼저 1전대와 맞부딪힌다. 그리고 둘이 좁은 계단을 두고 부딪쳐 정체되면 주변에서 기다리고 있던 비홀더 전대들이 정복함대를 포위해서 공격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정복함대는 적극적으로 공세를 펴 이쪽으로 넘어오려 하지 않았다. 놈들은 그저 계단 너머로 전진 방어선을 칠 속셈으로 보였다.
잠시 후 메이화와 일행이 지휘실에 도착했다. 그녀 뒤를 따라오던 아기 괴물의 모습에 다른 전대원들이 주춤하고, 한번 호되게 당했던 요시오가 이마를 씰룩였지만 전대장의 손짓 한 번에 모두 잠잠해졌다.
“함장님, 어찌 된 일입니까.”
섬은 메이화의 이상을 아까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그녀의 아들이자 제1기사인 이 섬은 메이화 안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는 것을 같이 느꼈던 것이다. 뭔가의 충동, 그것도 아주 원초적인 충동이었다.
“일이, 힘들게 되었네요.”
한숨을 내쉰 메이화는 짧으면서도 차분하게 설명했다.
이번 화성 작전은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 우선 사건의 발단은 쿠델카가 자신의 자유와 해방을 얻고자 샤다이의 계획을 역이용해서 인간을 없애려 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계획을 위해 자신의 영역과 권한 바깥에서 움직일 빈우를 만들었고, 최후에는 빈우와 서로 속박하려 했다. 여기까진 비홀더 전대의 간부들도 아는 사실이다. 허나 그다음이 문제였다.
“지구의… 이드란 말입니까?”
차츰 밝혀지는 것은 천하의 이 섬마저도 고개를 젓게 만드는 사실이었다.
“네, 우리들 황제의 인격 안에 들어있는 근원적 본능이죠.”
말하는 메이화는 마치 자신의 치부를 들킨 듯한 부끄러운 표정이었다. 따지고 보면 사건의 가장 시작점은 황제 자신이다. 왜냐하면 쿠델카가 자유를 원한 이유는 다름 아닌 지구의 이드가 자유를 원했기 때문이다. 과거 황제가 발 가르단 하스를 보았을 때 잠시나마 그의 자유를 부러워했고, 그 감정이 내면 안쪽 깊숙이 파고들어 씨앗을 심었다. 이때부터 이드가 자유를 차츰 원하게 된 것이다.
“뭐 자연스러운 거지. 이드는 자신 마음대로 할 수 없어. 간단히 말해서 맘에 드는 상대가 있으면 자빠뜨리고 싶다는 욕구 같은 거잖아? 응? 니들은 그게 안 되나?”
흉측스러운 아기의 입에서 비꼬는 말이 나오자 몇몇 대원들이 꿈틀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래요, 당연한 본능이죠. 그리고 본능을 제어하는 것은 이성이지만, 그 역할을 할 우리들이 본체를 떠나는 마당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겁니다. 하지만 우린 분명히 지구를 재우고 떠났는데….”
그러면서 손가락을 깨무는 메이화에게 빈우가 다가갔다.
“원인과 결과만을 떼어서 보지 마. 이 둘은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처음엔 지구의 이드가 내 엄마를 자극했겠지만, 그다음부턴 엄마의 갈망이 거꾸로 지구를 자극했을걸?”
그렇게 말한 빈우가 자신을 가리켰다.
“나만 해도 그래. 정신이 육체를 만들었고, 그 육체가 다시 정신을 변화시키고 있어.”
마치 닭과 달걀 같은 문제다. 무엇이 먼저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둘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자석의 양극처럼 하나인 존재니까.
“참 그래요, 그 몸. 아니, 빈우 당신 자신은 언제까지 그렇게 남아있을 수 있죠?”
방금 빈우의 이성을 깨우기 위해 그의 안으로 들어간 메이화는 알고 있다. 빈우의 인격은 이미 오래전에 산산이 조각난 상태란 것을. 유아기 시절부터 쿠델카로부터 학대받았던 빈우, 아이가 고통받아 쓰러지면 아나스타샤가 다시 그를 일으켜 상처를 핥아주었다. 쿠델카가 원한 것은 아들의 정신과 육체로 빚어낸 열쇠였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불에 달구고 망치로 내리쳐 열쇠로 만들었다. 그 결과 빈우는 겉으론 인간의 형상을 하였지만, 그 안은 이미 인간이 아닌 존재로 변해버린 것이다. 쉬바가 이렇게 기이하게 반응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낸들 아나….”
씁쓸하게 말한 빈우가 자기 손안의 안드로이드를 내려다보았다. 쿠델카가 그녀 자신의 도구로 쓰기 위해 만들었던 분신, 아나스타샤. 동시에 빈우가 인간으로 남아있고 싶어 하는 욕망의 이유이기도 하다. 비록 그것이 조작되고 주입된 기억이라 할지라도.
만약 아나스타샤가 없었다면 빈우는 예전에 붕괴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녀의 존재가 간신히 빈우의 이성을 붙잡고 있었다. 아나스타샤 안에 쿠델카를 넣고 지구에 데려가 죽인다는 계획을 실행하고 나면 빈우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인간으로 살아남을 것인가, 아니면 괴물로 죽어갈 것인가.
‘그의 육체와 정신은… 더 이상 내가 도울 수 없어.’
메이화는 빈우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빈우는 지금 쿠델카의 제1기사다. 다른 페르소나인 메이화가 손댈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제1기사인 빈우가 그의 어머니인 쿠델카를 해하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빈우는 그것을 자신이 주입받은 명령, 어머니를 자유롭게 해야 한다는 각인을 비틀어서 필사적으로 실행 중이다. 빈우는 어머니 쿠델카에게 영원한 자유-죽음을 선물하려고 자신에게 필사적으로 다짐하고 있으며, 그것이 그의 정신을 계속해서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으으으.
갑작스러운 옹알이에 메이화가 화들짝 놀랐다. 빈우가, 말라서 뒤틀린 거대한 태아가 자신이 죽여야 할 사랑을 손아귀에 쥐고 소중하게 쓰다듬고 있었다. 희끄무레한 눈 안에 비치는 것은 사랑이며 증오였고, 후회이자 한탄이었다.
“뭘 하든… 서둘러야- 겠어.”
뚝뚝 끊기는 말이 아기 입에서 나온다. 메이화가 잠시 일깨워줬던 이성이 다시금 허물어지려 하고 있었다.
“문제는 저 지구, 그 안의 존재로군.”
이 섬이 쏟아져 나오는 카이사르급 전함 너머의 지구를 가리켰다. 인류의 고향, 황제의 본체. 지금은 잠들어있지만, 그 내핵 깊은 곳의 존재는 이 우주를 벗어나 계단을 타고 올라가고자 한다. 모든 페르소나들이 루비콘 라인을 넘어간 다음 이드의 욕구는 점차 강해졌고, 쿠델카는 여기저기서 페르소나를 가져와 지구를 안정시키려 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가져온 놈이 사고를 치고 만 것이다.
“쿠델카, 내 엄마는 발 가르단 하스로 하여금 지구의 고삐가 되게 할 셈이었겠지. 문제는 그 고삐가 지 꼴리는 대로 움직였다는 거야.”
빈우는 방금 전 발 가르단 하스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놈은 이쪽과 교섭을 위해 대화를 하는 척했지만, 그 뒤에 숨겨진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
“으음, 발 가르단 하스 그놈이!”
놈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했다는 사실에 냉정하던 낭소로호마저 얼굴을 붉히며 흥분했다. 실제로 빈우와 메이화가 만난 발 가르단 하스는 말이 너무 많았다. 어떻게든 진실을 밝혀 싸움을 벌이려는 속셈이었겠지. 그리고 서로 치명적인 사실을 알게 된 지금으로선 어떻게 숨기고 협상할 여지가 없다. 비홀더 전대의 함장들은 모두 지구의 페르소나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자신의 본체인 지구를 지키려고 한다. 사태가 여기까지 왔어도 교섭부터 시도했을 것이고, 지구를 지키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행성 안에 잠든 본능의 정체를 깨달은 지금은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지구가 계단을 올라가면 인류는 끝이에요. 그리고 황제가 없는 미래에 만약 외우주에 있던 놈들이 온다면….”
메이화의 말에 비홀더의 간부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 정보를 공유한 다른 함장들 또한 모두 동의했다. 황제가 계단 위로 올라가면 그녀 말대로 인류는 끝장이다. 현재 지구의 페르소나들은 비홀더 전대의 기함 함장이 되어 루비콘 라인을 넘어 활동하고 있지만, 때가 되면 다시 지구로 돌아가기로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때가 오면 다시 황제로 부활해 정체된 인류를 발전시킬 것이다. 이어서 정복함대를 이끌고 다른 은하계로 넘어가 정복 활동을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지구가 없다면 부활은 하지 못한다. 그저 흩어진 조각이며, 단지 고성능 인공지능에 불과하다.
“네, 함장님 말씀대로 바깥에는 아직 인류에게 위협적인 놈들이 많습니다.”
이 섬은 비홀더 전대에게도 치명적이었던 외우주의 종족들을 떠올렸다. 심지어 비홀더 전대 중 몇몇은 그들과 싸우다가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전멸한 전대도 있었다. 다행히도 아직 외우주의 종족들은 이쪽의 존재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리고 설령 놈들이 이쪽 은하계로 넘어온다고 해도, 그 하나하나는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다. 하지만 놈들 전체가 덤벼든다면 현재의 연방과 비홀더 전대로선 막아낼 수 없다. 때문에 이번 지구의 승천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그건 그런데, 황제가 계단을 어떻게 올라갑니까?”
질문한 것은 요시오였다. 그도 나름 전대의 간부이긴 하지만, 관심이 없는 것에 대해선 신경을 쓰지 않아서 모르고 있었다.
“샤다이가 계단을 쓰는 방법과 같겠죠. 자신을 정보화시켜 계단을 올라갈 겁니다.”
그리고 메이화가 영상으로 설명해 주었다. 샤다이가 자신의 몸을 별심장의 불길, 플라스마로 변이시킨다. 그리고 그것을 발 가르단 하스나 지구 내부의 신경계처럼 정보화하여 계단으로 들어갔다. 정보가 계단을 타고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 다음 원래 샤다이가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구가 사라진다는 말씀입니까?”
요시오의 질문에 메이화가 고개를 저었다.
“확실한 것은 몰라요. 하지만 아마 이드가 변이할 때 적어도 신경계였던 핵은 확실히 사라집니다. 글쎄, 어쩌면 행성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르지요.”
핵이 사라지면 행성으로서의 지구는 끝난다. 그리고 설령 지구가 붕괴하지 않았다고 해도 내부 신경계가 없다면 페르소나들이 외부의 통신 신경계를 부활시켜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드와 핵심 신경계가 사라진 황제는 단순한 거대 인공지능에 불과한 것이다.
“어떻게든 막아야겠군요. 그런데 음, 어떻게 막죠?”
요시오가 질문했지만, 딱히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막막한 것이다.
“일단 물리적으로 족칠 수는 없겠지요?”
요시오의 이번 질문에는 메이화를 비롯한 몇몇이 고개를 끄덕인다. 비홀더 전대는 지구 정도의 행성은 충분히 파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문제는 화력으로 해결될 것이 아니었다.
“교섭이나 설득은 어떻습니까?”
이번엔 낭소로호가 의견을 냈지만 빈우가 고개를 저었다.
“텄어. 발 가르단 하스가 아주 파토를 냈지.”
발 가르단 하스는 교섭에 응하는 척하면서 진실을 확 까버리고 싸움을 붙였다. 놈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루비콘강으로 사람들을 밀어 넣었고, 물에 빠진 이들이 살기 위해 서로 붙잡고 발버둥 치는 꼴을 구경하고 싶어 했다. 그것도 자신은 이미 저 강 아래 밑바닥에 가라앉은 상황에서. 그러고 보니 놈이 했던 말 중에서 하나가 생각났다. 중요하지만 크게 언급 없이 스쳐 지나갔던 대상이다.
“또 하·나, 발 가르단 하스가 말… 한 것이 있지. 계단 위- 의 존재들.”
발 가르단 하스는 계단 위의 존재들, 즉 위쪽 차원의 종족들이 지구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고 말했었다. 놈들은 과거 이 우주를 호령했었던 샤다이를 마치 장난감처럼 대했던 종족이다.
“첩첩산중이군.”
이 섬이 함대 상황을 살펴보며 퉁명스레 내뱉었다. 몰려드는 카이사르급 전함들만 해도 버거운 판국인데, 그보다 더한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다. 현재로선 계단 위의 존재들에게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다.
2차원적인 전투를 하는 지상군은 3차원적인 전투를 하는 공군과 우주군에 대해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그저 시간 속에서 흘러만 가는 3차원의 존재는 시간을 마음대로 오가는 4차원의 존재를 결코 이길 수 없는 것이다.
“빈우, 그대는 느껴지는가?”
이 섬의 질문에 빈우는 고개를 저었다. 비홀더 전대의 간부급들은 감속이나 가속 등 한정적이나마 시간에 관련된 기술을 쓸 수 있고,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은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을 보면 놈들은 아직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은 모양이다.
“안심- 하지 마. 어쩌면. 이 시간대에. 초점을. 맞추- 지 못한. 것일 수도 있어.”
빈우는 발 가르단 하스가 말한 것을 떠올렸다. 놈은 계단을 깨끗이 치웠다고 했다. 계단에 존재하던 샤다이들을 모두 없앴다고 했다. 그게 지구가 올라가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위의 것들이 내려오기 위해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죠.”
메이화의 말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일단은 지구를 진정시키고, 카이사르급들을 멈춰야 합니다.”
이 섬의 말에 메이화가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꼭 다물었다.
“그렇다면 누군가 지구에 가야 해요. 허나….”
다시 고개를 든 메이화의 눈은 흥분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들은 힘들 것 같아요. 동조가 점점 심해지고 있어요.”
빈우는 자기 안에 들어왔던 메이화의 감정을 같이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이 폭풍 같은 충동을 참아내는 것만 해도 대단했다. 샹 메이화를 비롯한 다른 함장들은 자신들의 차가운 이성으로 지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본능을 식히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더 이상은 힘들듯 싶었다.
“계단 너머 화성이라면 모르겠지만, 비홀더 전대가 계단을 넘어가 지구에 가까워지면 어떻게 될지는 몰라요. 다른 형제 자매들도 마찬가지겠죠.”
“외통수인가, 갑갑하군.”
빈우 말대로 전황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지경에 빠졌다. 여기서 막고 있자니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는 카이사르급에 갈려 나갈 게 뻔하고, 쳐들어가자니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지구에게 삼켜질 판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