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화
“나는- 어떨까.”
빈우가 말을 꺼냈지만, 점차 그의 말이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아기의 모습을 메이화가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내려 그가 품 안에 소중히 안고 있는 아나스탸사도 보았다. 이 둘의 운명을 떠올리면 그녀의 마음은 편안치 못하다.
“지-금, 엄마에게·자유를 주어도·자유-.”
아기는 거기까지 말하고선 어질거리는 정신을 다잡으려는 듯 고개를 휘두르며 머리를 쳤다. 메이화보다는 그의 한계가 더 급한 듯하다.
“그래요, 쿠델카를 지구에서 죽인다는 처음의 계획 말이지요.”
만약 지구의 이드가 날뛰는 이 순간, 그 원인이 되었던 쿠델카를 죽인다면 어떻게 될까. 그녀가 죽어서 이드 안으로 되돌아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황제의 이드와 그 페르소나인 쿠델카는 각자 자신의 욕망으로 서로를 자극한다. 만약 쿠델카가 죽어서 황제 안으로 돌아갈 경우 그 이드는 더욱 날뛸 것인가, 반대로 진정될 것인가, 아니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인가.
“쿠델카의 삶에 대한 욕망은 우리들 누구보다도 커요. 그리고 그녀는 자유를 원했던 만큼 그 바람이 꺾이는 것에도 충격이 크겠죠.”
메이화는 함을 움직이면서 다른 함장들과 회의를 해보았다. 다른 비홀더 전대들도 한층 거세지는 정복함대와 포화를 주고받으면서도 메이화의 대화에 응했다. 어찌 보면 자문자답이랄 수 있는 대화다.
-발 가르단 하스가 일을 너무 키웠군.
-우리가 이제까지 무시해왔던 본능을 마주 보게 한 거지. 당연히 있을 법한 감정이지만 이 정도까지 극단적으로 치달으니 추악하군.
-그러게, 헌데 처음 빈우와 메이화가 계단에 들어갔을 때, 놈은 왜 모습을 드러내고 대화를 시도했을까? 어차피 막을 의도는 없었을 텐데?
-놈도 쿠델카가 죽으면 곤란했던 게 아닐까?
-그보다는 쿠델카가 없는 사이 우리들의 잠든 이드를 자극하기 위해서였겠지. 메이화와 대화를 하면서 불을 지폈잖아. 자신은 임시 페르소나였으니 생각만큼 자극이 안 되었을 테고, 그래서 우리를 이용한 것이야.
-쿠델카는 고양이한테 생선가게를 맡겼군. 아니, 이것도 그녀의 계획일까?
-글쎄, 그만큼 급했던 거겠지. 자신의 계획이 이리저리 실패하니 초조했을 거야.
-그런가. 자유와 승천이라. 끌리긴 하지만 우리의 의무를 저버릴 만한 것은 아니야.
-그리고 인류를 저버릴 만한 이유가 되는 것도 아니고.
-자, 그러면 우리 자매인 쿠델카가 죽었을 경우, 그것이 지구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생각해보지.
생각은 금방 끝났다.
“다른 함장들과 시뮬레이션을 해봤습니다.”
짧은 회의 끝에 메이화는 고개를 들어 빈우와 마주 보았다.
“쿠델카를 죽입시다. 지구에서.”
이미 결심했던 일이지만 그것을 들은 아기의 손이 움찔하고 떨렸다. 그 떨림에 안드로이드가 흔들렸고, 빈우는 그녀를 조심스레 바로 잡았다. 이제 그녀를 자유롭게 해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 * *
지금 화성과 지구가 계단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는 전대미문의 상황에서, 제대로 싸우고 있는 것은 제국의 함대들 뿐이다. 이쪽 화성에는 비홀더 전대들이, 저쪽 지구에선 한층 거대한 카이사르급 전함들이 서로를 맹렬하게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그 등쌀에 아까까지만 해도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연방군 함대과 샤다이 함대들은 서로를 견제하면서 물러나고 있었다. 살기 위해서.
“상황 한번 희한하게 돌아가네요.”
연방의 상원의원 오다 히토미는 펄럭이는 소매로 이마를 쓸었다가 멋쩍게 웃었다.
“제가 이런, 이런 터무니없는 무리를 중간에서 달래게 되다니.”
지금 그녀는 화성에서 충돌한 각 세력의 중간에서 이들을 조율하고 있었다. 물론 연방 상원의원이라면 꽤나 높은 직책이긴 하다. 그러나 이런 자리에 어울릴 지위는 아니다. 상원의원보다 높은 직책도 많을뿐더러, 지금 이 상황에 어울리는 자들은 더 많다. 그러나 다 여기에 없다. 대부분 전사하거나, 화성에서 빈우의 계획에 의해 고립되거나, 워프 비스트의 폭주 사건 때 휩쓸려 죽었다.
“무슨 말씀을, 의원님께선 충분히 대단한 일을 하셨습니다. 자랑스러워하십시오.”
아룹이 웃으면서 히토미를 치켜세웠다. 실제로 빈말이 아닌 것이 그녀는 이 전투에서 총 한 방 쏴보지는 않았지만 사방팔방 연락을 하면서 각 세력들의 불필요한 충돌을 막고 중재를 했다. 제국과 연방, 샤다이의 세력들이 서로 터져나가는 아수라장 속에서 잠시라도 틈이 나면 히토미는 자신의 인맥들과 연락했다. 그렇게 알탄훼아나와 이야기를 하면 알탄훼아나는 다시 집정관의 함대와 대화를 했고, 그사이 히토미는 다시 비홀더 전대와 연락을 하거나 연방 측 함대와 교섭을 했다. 그녀는 꺼진 화재 속의 남은 불씨를 하나하나 찾아 껐으며, 그 결과 소강상태에 빠진 전투는 점차 진화되어갔고, 방금까지 죽일 듯 싸웠던 상대들 사이에 다시 불길이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의원님. 김 빈우 소령의 통신입니다만.
그때 오르 함장의 말이 들려오자 히토미는 반색했다. 이번 사건의 중요한 키가 될 사람에게 연락이 닿은 것이다.
“김 소령이? 빨리 회선을 이쪽으로 돌려주세요.”
-그것이….
잠시 머뭇거리는 오르 함장을 보며 히토미는 지금 빈우의 상태가 어떤지 다시 떠올렸다. 기괴한 모습의 괴물이 된 빈우. 그가 지금 대화를 원하는 것이다.
“괜찮아요. 연결해주세요.”
그러자 빈우와의 통신이 연결되었다.
-의-원,님.
화면 너머에선 마치 죽은 태아 같은 끔찍한 모습의 괴물이 떠듬떠듬 말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히토미는 섬뜩해서 잠시 할 말을 잊었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힘겹게 입술을 열었다.
“…으흠, 썩 좋아 보이진 않는군요.”
좋아 보이지 않는 것은 외모뿐만이 아닌 듯했다. 화면 너머의 움직임으로도 빈우의 내면이 무너져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히토미. 도·망쳐.
마치 처음 말을 배우는 아이의 옹알이 같은 말이 괴물의 입에서 나왔다.
-나-는 블랙-랜스가… 필·요·해.
“저보고는 도망치라고 하면서 블랙 랜스는 필요하다고요? 좋아요. 무슨 일인지 설명해주세요. 그러면 시키는 대로 하죠.”
지금 빈우가 있는 곳은 계단 앞의 비홀더 1전대 기함이다.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이며 빈우는 거기서 블랙 랜스를 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 막강한 제국 순양함에서 연방제 개조 구축함을 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구가-황제를-막아야·해.
거기까지 말한 빈우는 히토미를 조용히 마주 보았다. 잠시 아무 말 없이 이쪽을 바라보는 아기의 모습에 히토미는 자기가 먼저 말을 꺼내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윽!”
히토미의 두뇌 칩으로 정보가 맹렬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상원의원의 보안을 뚫고 강제적으로 연결이 된 것이다.
“아아악!”
“의원님!”
옆에 있던 아룹이 놀라서 달려왔지만, 이미 히토미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아아. 괜찮아요.”
히토미는 비틀거리면서 화면 너머의 빈우를 째려보았다.
“두 번 다신. 이런 짓 하지 말아요. 으읍!”
방금 들어온 정보와 감각의 부조화에 히토미는 욕지기를 느끼고 입을 열었다. 그리고 거하게 토했다. 토사물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신맛이 나는 침이 입술에 맺혔다.
“…나 마카롱 안 먹었는데.”
히토미는 빈 소매를 손수건 삼아 입을 슥슥 닦은 다음 자신이 방금 받은 정보를 정리해서 자신의 팀원들에게도 전송했다. 그러면서 그 정보의 무거움을 다시금 실감했다. 이건 단지 화성의 문제가 아니었다. 또한 인류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 * *
-알탄훼아나 씨.
“오다 의원.”
알탄훼아나는 간신히 한숨 돌린 다음 히토미의 통신을 받았다.
-그쪽은 대강 정리되었나요?
“대강은. 안심하지 마라. 말 그대로 대강이다.”
알탄훼아나 그녀가 끌고 온 세력과 체메트디오프가 끌고 온 세력은 어떻게든 휴전을 했다. 호민관인 그녀가 중재한 것도 있지만, 계단 안에 있어야 할 선조들이 모두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이 꽤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샤다이가 서로 나뉘어 다툰 것도 선조 귀환을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의 의견대립 때문이었기 때문에 원인이 되는 선조가 사라지자 자연히 다툴 필요도 없게 되었다. 허나 방금까지 동족상잔을 벌였던 탓에 아직 앙금은 남아있고, 더 큰 문제는 샤다이들은 연방을 싫어한다는 점이다.
“우리끼린 어떻게 되었지만, 아직 연방 측을 보는 시선은 곱지 않다. 그쪽이 우릴 묶어놓고 있는 것도 있고 말이지.”
-어머, 살려줬는데도 아직 그런 시선인가요?
능청스러운 히토미의 말에 알탄훼아나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지금 샤다이 함대는 연방과 비홀더 전대의 중력닻에 묶여 화성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히토미와 알탄훼아나는 체메트디오프의 고대 함대에게도 초청장을 주어 화성의 궤도병기로부터 공격받지 않게 해주었고, 비홀더 전대에도 연락해 공격을 멈추도록 했다.
“오랜 감정의 골은 하루아침에 메워지지 않는 법이야.”
알탄훼아나의 말에 화면 너머의 히토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들이 중간에서 뛰어야 하죠. 참, 우리들에 대해서 공부하셨다 들었습니다. 혹시 오월동주란 말을 아세요?
“큰 위기를 앞두고 적들끼리 합심하는 것 말인가? 협력은 반가운데 위기는 반갑지 않군.”
또 뭔가 희한한 건수를 들고 온 것 같은 히토미의 모습에 알탄훼아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 * *
“우와, 저 아줌마 수완 좋은데.”
요시오는 서서히 대형을 짜는 연방과 샤다이 함대를 보고 감탄했다. 빈우가 히토미에게 이번 사건에 대한 정보를 넘겨주자마자 히토미는 그것을 토대로 저 중구난방의 세력들을 설득해 판을 바꾸려 시도하고 있었다. 황제가 이 우주를 버리고 떠난 다음 일어날 사건과 여파에 대해 알게 된 저들은 좋든 싫든 이쪽의 권유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허나 같은 선물이라 해도 포장해서 전달하는 자의 실력에 의해 받아들이는 자의 기분이 달라진다. 히토미는 꽤 솜씨 좋게 각 세력들을 설득했고, 그 결과 방금까지 죽자고 싸웠던 연방과 샤다이 함대가 서로를 경계하면서도 머리를 같이 해 비홀더 1전대 뒤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니 그 나이에 벌써 상원의원이다. 게다가 자신이 속한 파벌의 간부급이지.”
히토미를 요주의인물로 점찍었던 낭소로호가 그 무리 앞에 선 블랙 랜스를 보며 말했다. 만신창이가 된 구형 구축함은 자신의 생명을 연료 삼아 태우는 듯,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그 뒤로는 연방의 함대와 샤다이의 함대들이 늦을세라 따라붙었다. 그걸 본 낭소로호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이제 저들은 계단을 넘어 지구로 가게 될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연방이 지구로 가는 것은 괜찮다고 하자. 금지되었다 한들 지구는 인류의 고향이니까. 그러나 인류에게 그토록 적대적인 샤다이들에게 성지인 지구로의 접근을 허락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갈 수 없는 사지에 대신 몰아넣는 것 아닌가. 이번만은 너그럽게 봐주지.”
그렇게 대답한 이 섬은 무장을 점검하며 자신과 같은 곳을 바라보는 빈우에게 물었다.
“정말 저들이면 되겠는가?”
이 섬은 질문하긴 했지만 그 자신도 답을 알고 있다. 저 계단을 넘어 지구로 갈 수 있는 것은 연방과 샤다이들 뿐이다. 만약 비홀더 함선이 지구 근처에 가게 되면 각 전대 기함 함장들의 정신상태는 보장 못한다. 미친 듯이 날뛰는 이드의 충동에 휘말릴 게 뻔하다. 자칫 잘못하면 쿠델카의 사상에 동조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
빈우는 중얼거리며 걸어갔다.
“그 중-에서도, 오직…그들 만. 그들만·같이-갈 것. 마지막, 까지.”
빈우가 말한 ‘그들’이란 아마도 예전의 동료들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렇군. 허면 아쉽지만 이거라도 가져가게. 나름 도움이 될 거야.”
이 섬은 비홀던 전대의 장비 중에서 그나마 연방의 군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을 골라 건네주었다. 현재 연방이 사용하는 장비보다 월등히 뛰어난 것들이지만, 앞으로의 상황에서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였다.
“고, 고마워.”
빈우는 한 손에는 자신의 어머니를, 다른 한 손에는 그 무기들을 들고 그리폰의 지휘실을 엉금엉금 기어나갔다.
“흐음. 저 모양 저 꼴로 제대로 할 수 있으려나.”
요시오는 빈우에게 꽤 당한 적이 있어서 툴툴거렸지만, 이 섬은 피식 웃을 뿐이다.
“그 또한 엄연히 1기사다. 실력과 자격은 차고도 넘치지. 게다가 우린 그가 가는 곳으로 가지 못하지 않은가.”
그리고 이 섬은 자신의 무장을 점검했다. 앞으로의 전투를 위해서다. 황제의 페르소나인 쿠델카를 죽이기 위해선 먼저 그녀를 황제의 본체가 있는 지구로 데려간 다음 제1기사인 빈우가 그 손으로 직접 황제의 페르소나를 죽여야 한다. 하지만 거기까지 가는 길은 카이사르급 전함으로 이뤄진 정복함대들로 막혀있다. 연방이나 샤다이의 전투력으론 결코 돌파할 수 없다. 때문에 비홀더 전대의 함선이나 병력들은 지구 근처로 가지 못한다 해도 적어도 계단 까지만은 길을 열어줘야 하는 것이다.
“이제 가는가.”
섬은 블랙 랜스가 그리폰의 옆을 스치듯이 지나갔고, 그 순간 빈우가 자신의 옛 배로 옮겨 타는 것을 느꼈다. 공간이동조차 하지 못하고 직접 이동하는 것을 보면 그의 몸과 정신상태가 매우 위태위태하다. 이제 지구의 함대와 샤다이 함대가 비홀더 1전대의 진형 안을 뚫고 지나 계단까지 갈 것이다. 그리고 1전대는 오합지졸인 저들을 지켜서 계단 너머 지구로 밀어 넣어야 한다. 인류를 그토록 싫어하는 샤다이를 인류의 보금자리로 안내해야 하는 사실이 아이러니하지만 지금은 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샤다이라면 계단을 넘어서 갈 수 있는 총알받이 중에서 그나마 단단한 축에 속한다. 카이사르급의 맹공에도 그나마 조금은 더 버틸 수 있는 것이다.
“들이받아!”
전대장의 명령에 1전대의 모든 함들이 돌진했다. 그리고 이쪽을 향해 포화를 퍼붓는 전함들에게 접근해 부딪혀 나간다. 그 무모한 돌격의 대가로 1전대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결국엔 그리폰급 순양함들이 카이사르급 전함에 달라붙었다. 이어서 서로 추진기를 최대출력으로 해서 밀어붙이고, 장갑보병들이 투입된다.
“역시나.”
마주한 정복함대의 장갑보병을 본 이 섬은 입맛이 썼다. 지금 마주친 카이사르급들은 예전에 안나가 이끌던 13전대보다 강했다. 그러나 그 안에 타고 있던 장갑보병들은 그저 빈 껍데기였다. 쉬바로 만들어진 제국제 장갑복은 탑승자 없이 장갑복만 움직이고 있었다.
“인류를 위하여!”
“평화를 위하여!”
메아리 없는 외침과 함께 두 장갑보병 세력이 격돌했다. 양성자 포격이 오가고 중성미자 검들이 충돌한다. 바깥에선 제국 함대들의 포격전이 벌어지고, 안에서는 장갑보병들의 혈투가 벌어진다. 그리고 그 아비규환 사이로 연방의 함대와 샤다이 함대가 지나간다. 그 안에 마지막 카드인 블랙 랜스를 숨긴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