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화
보리밭이다. 익숙한 보리밭이다.
눈이 지루할 만큼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보리밭.
이제까지 봐왔고, 앞으로 계속 보게 될 보리밭.
태양이 보리밭에 떨어지자, 하늘을 물들인 석양이 땅에도 스며든다.
그 광경을 본 빈우는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즉시 알아차렸다.
“여긴… 계단이군.”
지금 빈우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과거 샤다이들을 받아들였을 때와 무척이나 비슷했다. 그때, 누군가가 빈우의 머릿속에 들어와 접촉하고 있었다.
“역시 한 번에 알아보네.”
보리밭 저쪽에서 한 남자가 걸어온다. 빈우와 똑같은 모습을 한 사나이다. 빈우는 이런 곳에서 자신과 같은 모습을 한 사람을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넌 발 가르단 하스가 아니군.”
빈우의 말에 그 사내가 인정하듯 배시시 웃었다. 어색한 그 웃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웃음이지만 빈우는 한 번에 그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건 찰리하나팔의 모습인가.”
그 사내는 빈우의 모습이 아니라 찰리하나팔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빈우의 클론이니 빈우와 같은 형상이었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맞아, 지금 내 겉모습은 찰리하나팔의 것을 썼어. 너와 아주 깊은 업에 묶인 존재이니까.”
업. 원인과 결과, 인과와 응보. 인과율과 윤회 등에 관계된 개념이다. 저 모습으로 저 단어를 입에 담으니 빈우는 다시금 발 가르단 하스가 떠올랐다. 놈은 언제나 업을 중요시 했으니까.
“빈우 너, 방금 찰리하나팔을 봤었지?”
빈우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찰리하나팔과 함께 서로 죽이고 죽임당하는 기억들이 떠올랐다. 저 녀석이 말한 깊은 업이라면 찰리하나팔과 빈우는 꽤 질기게 묶여있다. 빈우는 자신보다 더 뛰어난 존재를 만들기 위해 찰리하나팔을 만들었지만, 자신의 죄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 주지는 못했다. 어떤 면에서 찰리하나팔과 빈우의 관계는 쿠델카와 빈우 자신과의 관계와 비슷하기도 했다. 창조자의 욕심에 의해 만들어진 피조물.
“사실 너와 가장 깊은 인연을 가진 존재는 아나스타샤나 쿠델카지만, 그 모습을 썼다간 여기가 뒤집어졌겠지. 그래서 찰리하나팔을 쓰게 되었는데, 너하고 연결이 되는 부작용이 조금 있더라. 그 점은 사과하지.”
찰리하나팔의 말에 빈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만약 저 존재가 쿠델카나 아나스타샤의 모습을 빌어 나왔다면 이 자리는 대번에 파토 났을 것이다. 그는 방금 자신의 어머니들 둘을 동시에 씹어 먹었으니까. 하지만 그때 아나스카샤를 죽이던 그 순간, 빈우는 자신의 안에서 뭔가 변하는 것이 느꼈었다. 멍하고 희미하던 의식이 바뀐 것이다. 개운해지거나 맑아진 것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로 바뀐 느낌이었다.
“어쨌든 너하고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어 다행이야. 하아, 난 중간에서 이게 뭔 짓이람.”
머리를 긁적이며 다가오는 찰리하나팔의 모습은 빈우에게 적대적이지 않아 보였다. 적어도 발 가르단 하스처럼 무슨 꿍꿍이가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넌 누구지?”
“지금은 너와 대화하기 위해서 찰리하나팔의 업을 빌린 존재.”
대답에 거짓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본질에서는 약간 비껴간 느낌이다.
“발 가르단 하스는 어떻게 되었지?”
“봤잖아, 죽었어.”
“쿠델카는?”
“네가 죽였잖아.”
그리고 미처 다음 말을 꺼내지 못하는 빈우를 위해, 찰리하나팔이 질문받지 않는 대답을 미리 꺼냈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도 네가 죽였고.”
그 말을 들은 빈우는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러나 그뿐이다.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미 한 차례 거세게 터져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 덕분에 너와 내가 지금 여기서 대화할 수 있는 거지. 지금 느껴지지? 네 안의 감정이라든가, 인간성 같은 것이 점차 무뎌져 가는 것을.”
찰리하나팔은 마치 빈우를 떠보는 듯,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대화할 준비가 된 것 같으니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지. 어쩌면 이미 짐작했을지도 모르지만, 난 네가 알고 있는 계단 위의 존재야. 아니지,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 자신이라기보다는 그들이 만든 심해탐사선 같은 거겠다. 계단 위의 존재들은 너희가 말하는 황제의 이드, 즉 계단을 넘어온 지구의 무의식과 그 열망을 느끼고 접촉하기를 원했지. 그래서 내가 여기 온 거야.”
계단 위의 존재, 과거 샤다이의 선조들이 만났었고, 지구가 가고 싶어 했던 차원의 존재다. 빈우는 조심스레 질문을 골랐다.
“계단 위의 존재들이라면 고차원의 종족으로 알고 있는데, 그들의 능력으로도 우리에게 직접 접촉하지 못하고 너를 중간에 써야 한다고?”
“그래, 예를 들자면 너희들이 그림 속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과 비슷해. 음, 사물을 보기 위해 초점을 맞추는 개념이라고 하나? 이 장소, 이 시간대라는 한정적인 곳에 초점을 맞추면 그 상위 차원의 존재들이라 해도 나처럼 돼. 삼차원을 사진으로 찍으면 그게 이차원이 되듯이 한계가 걸리는 거지. 사진으로 너를 찍으면 그건 사진이지, 너 자체는 아니잖아.”
조악하지만 그럭저럭 알아들을 수 있는 비유다.
“좋아. 지구와 대화하기 위해 내려왔는데 왜 나와 대화하는 거야?”
이번 빈우의 질문에 찰리하나팔의 모습을 한 탐사선이 한숨을 쉬었다.
“너도 알잖아. 지금의 지구는 본능 그 자체야. 뭔가 느낌이 있어서 찾아왔더니 정작 대화가 성립될 이성이 없어. 정복함대를 이끄는 안나 닐센? 복사본이지. 업이 없어. 발 가르단 하스? 죽었어. 쿠델카? 인간으로 죽었어. 나머지 비홀더 전대들? 계단 너머에서 넘어오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지. 이렇게 지구의 이성을 맡을 존재들은 다 사라졌어. 그래서 지금 너하고라도 이렇게 대화를 하는 거야.”
친절하게 설명하는 찰리하나팔의 말을 들으며 빈우는 옆에 있는 보리 이삭을 만졌다. 까끌까끌한 감촉이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이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고향, 과전의 보리다.
“나와 대화한다고? 주변에 인간… 다른 자들은 많은데… 내가 좀 특별한 존재인가?”
빈우의 이번 질문에 찰리하나팔의 형상은 조금 대답을 꺼렸다. 하지만 결국은 조심스레 대답했다. 빈우의 눈치를 보면서. 지금까지 그럭저럭 말을 잘 붙이던 찰리하나팔이 이번 대답에는 우물쭈물한다.
“음, 이 우주에 존재하는 일반적인 지성체들은 우리 계단 위의 존재와 접촉하지 못해. 타키온처럼 같은 공간에 있어도 시간축이 달라서 서로 반응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야. 시간 개념에 노화와 죽음이 포함되어 있는 생명체들은 우리를 인식하기를 본능적으로 거부해. 샤다이를 봐. 그렇게 장수하는 종족조차도 계단 위로 가더니 제대로 된 교섭조차 못 해보고 도망쳤지.”
“좋아, 설명은 됐고, 본론을 말해.”
차가운 빈우의 말에 찰리하나팔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사실을 말했다.
“본론이라. 좋아, 넌 쿠델카가 만든 인공지능이니까 우리와 대화할 수 있어. 나 말고 계단 위의 존재들과 직접 말이야.”
“내가 인공지능이라고?”
꽤 충격적인 지적에도 불구하고 빈우의 반응이 의외로 뜨뜻미지근하자, 찰리하나팔이 한시름 놓은 듯 편하게 말을 꺼냈다.
“그래, 인간을 재료로 해서 만든 인공지능. 으음, 쿠델카가 만들었으니 인공이란 단어는 조금 이상한가? 뭐 상관없지. 너는 마지막에 네 엄마인 쿠델카를 인간으로 보았으니까 딱히 틀린 말은 아니잖아? 하지만 그 사실을 인식한 쿠델카도 네 덕분에 인간처럼 되어서 더 이상 우리와 접촉할 수 없게 되어버렸고….”
찰리하나팔은 아까 빈우가 점차 바뀌어 가고 있다고 말했다. 인간성이 점차 무뎌진다고 했다.
“…지금의 나는 이전의 나와 다른가?”
빈우는 마음속에서 꺼림칙하게 걸리는 것을 물어보았다. 아나스타샤를 잡아먹고 절규하던 순간 그는 느꼈다. 자신이 변하는 것을. 단순히 감정의 문제가 아니었다. 보다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문제였다.
“아까의 반응을 봐서 짐작했겠지만 네 안의 인간성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어. 그리고 넌 점차 황제의 페르소나처럼 변하고 있지. 인간이 아니라 흉내 낸 인간성을 뒤집어쓴 존재들.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인간성. 하지만 이건 이미 예견된 것이기도 해. 너를 만든 어머니 쿠델카의 교육 덕분이야. 여러 가지 PTSD로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들어 자신이 원하는 존재로 재단하는 방식. 그런데 너를 돌봤던 아나스타샤란 존재가 너를 인간으로 만들었어. 인간성을 유지시켰어. 그리고 자신의 마지막 순간 바로 전까지 너를 인간으로 남아 있게 미련을 주었었지.”
녀석의 말에 빈우는 자신의 어렸던 과거를 떠올렸다. 아나스타샤와의 행복한 추억들. 쿠델카의 집요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아나스타샤는 빈우를 지켜주었다. 망가져 가는 빈우의 인격을 끝까지 일으켜주고 보듬어 주었다. 말 그대로 생명의 은인이다. 비록 아나스타샤의 이런 행동들이 쿠델카에 의해 입력된 명령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따지고 보면 인간도 유전정보에 각인된 프로그램대로 행동하는 생체기계니까.
“하지만 아쉽게도 방금 네가 스스로 쿠델카와 아나스타샤를 죽이면서 넌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되었고 말이야.”
찰리하나팔의 저 말뜻이 어머니를 죽여서 인간 취급을 못 받는 말종이 되었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하, 낳아준 엄마까지 포함해서 존속살인 헤드트릭이냐.”
빈우는 나름대로 농담을 만들어보았지만, 둘 사이에선 쓴웃음 하나, 비웃음 하나 나오지 않았다. 그런 빈우의 모습에 찰리하나팔이 어쩌라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한다.
“너도 대강 알잖아. 아나스타샤는 너를 인간으로 고정해주는 틀이었어. 또 그만큼 너도 그녀에게 집착했고. 그게 사랑이든 뭐든 간에 그 감정과 집착이 너를 인간으로 남아 있게 한 거야. 하지만 그녀가 죽고 그 속박이 풀리면서 너는 차츰 인간이 아니게 되어갔지. 그래,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빈우는 자기도 모르게 손이 입가로 올라갔다. 아나스타샤를 씹었을 때의 감촉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그 후회와 자신에 대한 증오, 혐오가 미칠 듯이 치밀어 올랐지만, 그것도 지금에 와서는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아까 머리가 맑아진 게 이런 이유였지 싶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군. 마지막 순간에 빈우 너는 역으로 아나스타샤를 인간으로 만들어 주었잖아.”
찰리하나팔의 말에 빈우는 다시금 아나스타샤의 마지막이 생각났다. 빈우가 먹기 전에 그녀는 쉬바에게 잡아먹혀 갔다. 아마 정신이 인간이어도 몸이 안드로이드니 쉬바들이 반응했을 것이다. 그리고 빈우는 혼란스러운 와중에 그녀를 잡아먹었다. 결과적으론 인공지능이 자신을 키워준 인간을 해친 셈이다.
“인간과 인공지능이라….”
빈우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인간은 인공지능을 만들었다. 하지만 빈우에 의해 아나스타샤는 인공지능에서 인간이 되었고, 쿠델카에 의해 빈우는 인간에서 인공지능이 되었다. 실로 운명의 장난이다. 무엇이 인간을 정의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또 왜 변화하는 것일까.
“어쨌든 인간에서 멀어져가는 빈우 너는 쿠델카와 아주 흡사해. 당연하지. 자식은 부모를 닮아. 게다가 빈우 너는 처음부터 쿠델카의 반려가 되기 위해 만들어지기도 했으니까… 같은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존재야. 대강 눈치채지 않았나? 연방의 모든 인공지능 위에 군림하는 너의 능력에 대해서?”
한 걸음 다가온 찰리하나팔의 눈이 빈우를 마주 본다.
“그래서 조금만 더 기다리면 이제 난 너를 통해서 지구와 대화할 수 있겠지.”
그 말에 빈우도 찰리하나팔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그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파악했다.
“나보고 황제의 페르소나가 되란 말인가?”
“그런 셈이지.”
지금 지구는 황제라는 지성이 없어서 그 이드가 폭주하고 있다. 이 사건의 발단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원흉은 황제의 페르소나 중 하나인 쿠델카다. 죽고 사라져서도 끝끝내 따라붙는 어머니의 손길에 빈우는 어이가 없었다.
“어머니의 죄를 아들이 물려받아 해결하는 셈인가? 흐하하.”
쿠델카를 포함한 페르소나들은 지구의 본능이 인간이 만든 전파망 그물을 통과하며 나온 지성과 인격, 그 갈래 중 하나다. 지금 계단 위의 존재들은 빈우보고 그런 존재가 되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 어떻게 할래?”
찰리하나팔의 질문에 빈우는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직전에 빈우는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무너져가는 빈우를 지키기 위해 메이화가 그의 정신세계 안쪽에서 받쳐준 적이 있었다. 허나 동시에 그는 보았었다. 발 가르단 하스가 자신의 안에 들어있는 지구의 이드에 찢겨져 나가는 것을.
“설령 내가 황제의 페르소나가 된다고 해도, 버틸 수 있을까?”
“발 가르단 하스는 애초에 맞지 않는 옷이었어. 게다가 그 자신이 지구를 자극하기도 했지. 자업자득. 하지만 넌 달라. 말했다시피 너는 정통성 있는 계승자야. 자격이야 차고 넘쳐. 지구의 다른 페르소나들도 이견이 없을걸. 저걸 봐. 계단 너머의 비홀더 전대들을. 지금 정복 함대는 멈추었고 지구도 진정이 되었어. 그런데 저들은 돌아가지도 않고 기다리고 있어. 너의 결정을 존중하는 거라고. 어머니와 누나와 연인을 죽여가면서 인류를 구했던너의 결정을 말이야.”
인류를 구한다. 이것이 빈우를 섬뜩하게 만들었다. 이 또한 쿠델카에 의해 각인된 인공본능이다. 죄를 지은 죄인인 자신. 그것을 씻어내고 보상하기 위해선 인류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 인류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해야 한다는 모토가 빈우의 삶의 원동력 중 하나였다. 강요받은 가짜 이념이었지만, 커가면서 세상을 알게 된 빈우에겐 점차 진짜 이념으로 변해갔다.
“그러게, 왜 저들은 가만히 있을까.”
빈우는 고개를 들어 계단 너머에서 이쪽을 주시하는 비홀더 전대의 함장들을 보았다. 어머니에 의해 폭주하게 된 지구는 자식이 그 어머니를 죽임으로써 진정되었다. 하지만 빈우는 알 수 있었다. 지구의 표면에서 쉬바에 휩쓸린 그는 알 수 있다. 지구는 예전처럼 자는 것이 아니라 잠시 진정된 것에 불과하다고. 언젠가는 다시 일어날 것이다.
고민하는 빈우를 보며 찰리하나팔이 말을 꺼냈다.
“내가, 계단 위의 존재들이 처음 지구의 이드를 접했을 때, 그것은 자유를 갈망했어.”
“방종이겠지.”
빈우가 말을 끊자 찰리하나팔이 못마땅한 듯 쳐다본다.
“이성도 없는 본능에게 그게 무슨 의미냐. 아무튼 녀석은 계단을 넘어가고 싶어 했어. 하지만 말이야, 단순한 본능에겐 그런 건 무리야. 절벽을 향해 미쳐서 달려가는 야생마 꼴 난다고. 누군가 폭주하는 야생마에게 고삐를 채워야 해. 그리고….”
찰리하나팔의 눈이 서서히 빈우에게 다가오며 의미심장하게 바뀌었다.
“누군가는 그 안장에 앉아야 하지. 말을 위해서.”
빈우가 잠시 생각을 가다듬고 있자 찰리하나팔이 뒤로 물러섰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나는 계단 위의 존재임과 동시에 이 우주에선 너를 통해 탄생했어. 지구와 대화하고도 싶지만, 너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도 든다고.”
말의 톤이 조금 바뀐 것이, 여기서부터 나올 내용은 조금 개인적인 내용인 듯하다.
“넌, 구할 수 있어.”
그 말에 빈우의 사라져가는 감정 중 하나가 잠시 일렁였다.
“…아나스타샤를?”
그다지 기대하지 않은 질문에 찰리하나팔이 고개를 저었다.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아니, 그녀는 이미 죽었어. 너의 안에서 이미 아나스타샤는 죽었다고. 부활은 가능하겠지만, 그건 더 이상 아나스타샤라고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네가 그녀의 죽음을 인식하고 있는 한, 완벽하게 똑같은 육체와 정신을 가진 아나스타샤를 창조한다 해도 그건 가짜이고 껍데기야.”
쐐기를 박는 찰리하나팔의 말에 빈우의 가슴 속에서 다시금 격정이 꿈틀거린다. 흘린 지 너무 오래되어 마른 것 같았던 눈물이 그의 눈가에 맺히기 시작한다. 그런 빈우의 옆에서 찰리하나팔이 조용히 권유해온다.
“빈우. 넌 황제가 되어 인류를 구할 수 있어.”
“황제? 하, 사랑하는 이와 함께 보리밭 하나 제대로 가꾸지 못하는 놈이 황제라….”
자책과 분노와 슬픔과 후회가 마지막으로 빈우의 눈에서 흘러나와 땅으로 떨어진다. 찰리하나팔이 측은한 눈으로 빈우를 내려다보았다.
“난 너와 대화만 할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해. 네가 황제의 페르소나가 된 다음에 계단 위를 올라가든, 여기에 있든 그것은 너의 선택이야. 만약 네가 계단을 올라간다 해도, 그런 위기가 오면 너의 이모나 삼촌 중 누군가가 다시 그 자리를 메우겠지. 물론 꽤 큰 희생은 있겠지만.”
다가섰던 찰리하나팔이 다시 한 걸음 물러섰다.
“뭐, 네가 다 포기하고 여기서 이드에게 서서히 갈려 나간다고 해도 난 존중할게. 아쉽지만 할 수 없는 일이지.”
빈우는 잠시 멍하니 있었다. 그리고 되새겼다. 자신의 행동 원리에 대해서. 쿠델카에 의해 각인된 열망. 죄인인 자신은 인류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 물론 억지로 받은 죄이다. 하지만 빈우는 알게 되었다.
“대가리가 굵어지면서 알게 되더라.”
빈우가 입을 열자 찰리하나팔이 귀를 기울였다.
“이 우주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지. 인간은 살아가면서 고통을 받아. 우주는 인류에게 그다지 친절하지 않거든. 그래서 나는 그저, 그 고통의 바다에서 한 줌의 모래섬이라도 되고 싶었어. 나만의 방법으로라도.”
“그래, 시작은 쿠델카의 강요였을지 몰라도, 그다음은 너의 선택이었어.”
“사람이 살 수 있는 크기까진 바라지도 않아. 난, 내 한계를 아니까. 그저, 다만, 누군가 매달려 숨을 쉴 수 있는 그런 곳이 된다면 그걸로 족해.”
“…이제 넌 할 수 있어. 더 많은 이를 위한 섬이 될 수도 있다고.”
그때 빈우의 앞에 왕관이 하나 생겼다. 전파와 정보로 점철된 왕관이다. 찰리하나팔이 그 전파관을 가리켰다.
“네가 이것을 쓴다면.”
서서히 손을 내민 빈우가 그것을 만지자, 빈우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정보가 밀려 들어온다.
“외우주!”
비홀더 전대들이 수집해 지구에 입력해 둔 자료들이다. 루비콘 라인을 넘어, 외우주를 넘어 수집해온 정보들. 행성의 에너지를 빨아먹는 종족이나 반물질로 구성된 생명체, 인류의 인식을 벗어난 존재들이 이 왕관 안에 들어있었다. 과거 인류가 만든 정보와 전산망이 지구의 왕관이 되었다면, 저 멀리 나아간 페르소나들은 아직도 왕관을 계속 키우고 있었다. 언젠가 다시 쓸 날을 위해서. 왕관에서 손을 뗀 빈우가 조용히 말했다.
“내가 이 관을 쓰면 어떻게 되지?”
“너의 메말라 가는 인간성과 본능을 지구의 이드가 대신 차지할 거야. 너의 사고방식과 성격은 그대로겠지만, 근본적인 부분은 지구가 된다. 새로운 황제가 되는 거지.”
찰리하나팔의 대답에 빈우는 일렁이는 왕관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인간이 아니게 되고, 빈우가 아니게 되는군.”
“마찬가지로 그 역시 황제지만, 지금까지의 황제는 아니야.”
“그다음 내가 계단을 따라 올라가 버리면?”
“여기에서 쌓은 업이나 고통을 모두 버리고 위쪽 차원으로 가는 거지. 그리고 이 차원에서 억눌려있던 너의, 그러니까 황제가 된 너의 모든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게 될 거야.”
“하지만 이곳에 남겨진 인간들은 고통을 받게 되겠지.”
빈우의 푸념은 씁쓸했다.
“그래.”
찰리하나팔 역시 그랬다. 그는 빈우로부터 파생된 존재이기 때문에.
“난 그들을 구할 수 있을까?”
찰리하나팔은 빈우가 질문한 ‘그들’의 범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들 모두 구하지는 못해. 고작해야 인간. 그리고 그 주변의 종족들까지야. 너도 봤다시피 외우주의 존재는 지금의 인류로선 대화나 교섭이 안 될 거야. 그쪽에도 계단 위와 접촉한 존재들이 있지만, 계통이 너무 틀려. 아하, 샤다이가 인류를 유에네스라 본 것이 이것 때문이었나?”
“……그렇다면 내가 그들의 대변자가 되어줄 거야. 그들이 말할 수 없다면 내가 대신 말해주겠어.”
잠시 침묵한 빈우가 일어서면서 말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결심이기도 했다.
빈우와 업으로 연결된 찰리하나팔은 그가 앞으로 어떠한 업을 쌓을지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그것은 비명이 되겠군. 원하시는 대로 하시게, 종결자들의 황제여.”
빈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노래를 부른다면 기꺼이 함께 노래를 불러주지. 하지만 우리에게 비명을 원한다면 놈들로 하여금 비명을 지르게 해주겠어. 이 고통의 바닷속에서 나는 인류를 어깨 위에 올리고 나아갈 것이다.”
빈우는 결정을 내렸다. 손을 뻗어 전파관을 잡고, 그것을 머리에 썼다.
그의 결정에 지구의 적도를 따라 불이 켜졌다. 이어서 위도를 따라 동력이 들어오고 조명이 켜진다. 통신망이 살아나고 전파망이 복구된다. 회선이 복구됨과 동시에 시스템들이 본초자오선의 위치를 인식했고, 이번엔 경도를 따라서도 통신망이 복구되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경도와 위도를 따라 가설된 망들이 부팅되기 시작했다. 전파들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물망처럼 켜진 전파망들이 신경 시냅스처럼 엮여 신호를 발한다. 그리고 그것이 왕관마냥 지구에게 씌워졌다. 마침내 지구핵 깊숙이에서 꿈틀거리던 이드가 그것에 걸러져 바깥으로 다시 나왔다.
-전파관을 쓴 황제가 깨어났다.
계단 너머에서 지구를 보던 페르소나들은 깨달았다.
“그는 우리가 갈 수 없는 곳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했군요.”
메이화가 조용히 말했다. 다른 비홀더 전대의 함장들, 페르소나들도 같은 심정이었다. 원래는 자신들이 가야만 했던 자리다. 그러나 스스로의 약속과 속박으로 갈 수 없어서 난감해하던 차였다. 그때 나선 것이 조카다. 자매의 아들. 자매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길러낸 후계자. 그렇다면 그에게도 자격은 있다.
“부끄럽군요. 우린 우리의 의무를 그에게 넘겼어요. 어쩌면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엔 쿠델카와 같은 바람이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혼잣말을 하는 페르소나들의 앞에서, 마침내 황제가 쇠 뒷굽 달린 부츠를 신고 일어났다. 이제부터 그가 부츠를 신고 걸어날 곳은 어디일까. 끝이 없는 전쟁이 펼쳐진 수라도일까. 꽃잎이 휘날리는 평원일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주가 인류에게 친절하지 않다면, 그 또한 우주에게 친절하지 않을 것이다.
피자 타이거 스파게티 드래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