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마왕성의 평범한 일상(2)
"그리고 오늘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뭐지?"
"오늘 우리가 한 명 더 늘어났습니다."
우리? 그럼 새로운 부인인가?
멀리 저택에서 미야가 한 명의 노인을 부축하며 걸어오고 있다. 나이가 80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가 숨을 몰아쉬며 나를 보며 달려오려 한다. 하지만 늙은 몸에 다리 힘이 풀려 땅에 넘어지려 한다.
나는 즉시 순간 이동으로 넘어진 할머니의 몸을 잡아준다.
그러자 그 할머니는 내 몸을 잡고 바닥에 무릎을 꿇는다.
"아아... 용사님. 제 소원이 이루어졌네요. 이렇게 다시 볼 수 있다니... 정말 기쁩니다."
할머니는 손으로 내 발을 잡고 그 위에 입을 맞추며 눈물을 흘린다.
"저어... 누구 시죠? 절 아시나요?"
처음 보는 할머니의 행동에 난 당황했다.
할머니는 흐르는 눈물이 가득한 얼굴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아... 용사님. 절 잊으셨나요? 괜찮습니다. 제가 용사님을 잊지 않았으니... 이렇게 다시 뵐 수 있다니, 정말로 대지모신께서 제 마지막 소원을 이루어주셨습니다.
아아 감사합니다. 테라티아님. 정말 감사합니다."
테라티아? 정말 그리운 이름이다. 내가 6번째 소환된 세계에서 풍요의 여신의 이름이었다.
"혹시 벨 사제님? 벨 사제님이신가요?"
티리스가 우리에게 달려온다. 그녀는 땅에 무릎 꿇은 할머니 - 벨에게 다가온 후, 땅에 무릎을 꿇어 그녀와 시선을 마주한다.
"그렇죠? 벨님이시죠? 그렇지요?"
"아아... 티리스... 정말 살아있었구나. 용사님께서 널 살려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정말 살아있었구나.
아아... 용사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벨은 떨리는 손으로 티리스의 얼굴을 만진다.
티리스는 벨을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린다.
"그래요. 살아있었어요. 이렇게 잘... 이렇게 용사님의 부인이 되어 행복하게..."
"아아... 용사님. 감사합니다. 이런 미천한 아이를 살려주시고, 부인으로 삼아주시다니... 정말 관대하시고 사랑이 넘치는 분이십니다. 아아... 테라티아님이시여. 감사합니다. 이렇게 다시 용사님과 티리스를 볼 수 있게 해주셔서... 이제 전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벨은 티리스를 안고 눈물을 흘리고, 그 품 안에서 티리스도 울음을 참지 못한다.
그렇게 서로 안고 우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 옆에 있는 마야와 미야에게 고개를 돌린다.
두 사람은 서로 안고 우는 두 사람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
"마야. 어떻게 된 거지? 누구지? 우리가 아는 사람이야?"
"우리의 두번째 여행에서 만난 세계의 신관이었습니다. 티리스를 살려달라고 애원했던..."
마야의 말에 기억을 더듬어 보니 생각이 난다. 나의 6번째 여행에서 만났던 티리스가 살던 시골 마을의 테라티아 신전의 여사제였다. 그 때 만났던 벨은 20대 중반의 나이였다.
"그 때의 여사제의 이름이 벨... 그럼 이 할머니가 그 때의 벨이라는 거야?"
나의 6번째 소환 여행에서 현정, 마야, 미야, 제니스가 동행했었다. 우리 여섯명은 1년 만에 손쉽게 마왕을 토벌했지만, 그 육체를 죽였어도 혼을 소멸 시키지 못해 현실 세계로 귀환할 수 없었다. 마왕의 혼은 티리스의 몸 안에 들어가 그녀의 아이로 다시 태어나려 했다. 우리는 마왕의 혼을 소멸시키기 위해 티리스를 죽이려했고, 벨이 우리를 막아섰다.
난 그 때 티리스를 다시 살려주겠다는 약속을 벨에게 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
그런데 그 세계에 있어야할 벨이 지금 내 눈 앞에 있다. 그 것도 우리가 만날 당시의 나이가 아닌 죽음을 앞둔 할머니의 모습으로.
"그런데 어떻게 이 할머니, 벨이 여기에 있는 거지? 게다가 이렇게 늙은 건 어떻게 된 거야?"
내가 6번째 여행을 끝낸 건 여기 시간으로 8개월 전이다. 그럼 몇 달 만에 이렇게 폭삭 늙은 건가?
"분명 벨은 천수를 다해 편안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쌓아 온 기도의 힘으로 세계의 벽을 넘을 수 있었습니다."
마야의 설명에 난 기가 찼다. 여기서의 한 달이 그 쪽에서 몇 십년이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벨의 기도의 힘이 시간과 공간을 모두 넘어선 겁니다. 서방님을 만나겠다는 간절한 소망이 그녀를 여기로 이끌어 온 겁니다."
"도대체 얼마나 강한 힘이었기에 시공을 넘어설 수 있어!"
"그녀의 말로는 60년 이상 매일 새벽에 별을 보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동안 정절을 지켜왔습니다. 그녀는 평생 단 한번도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날 만나기 위해 그 오랜 세월 동안?"
기가 막혀 아무 말도 못하겠다. 내가 벨을 만난 건 티리스의 일로 만난 몇 주 뿐이었다. 그 짧은 기억으로 60년 동안 한눈팔지 않고 나만 생각했다니...
벨은 땅을 기어 나에게로 다가와 다시 내 발등에 키스를 하며 눈물을 흘린다. 솔직히 이렇게 맹목적인 사랑은 나도 부담스럽다. 100명의 아내를 가져야 할 나에게도.
"서방님을 다시 보기 위해 간절히 기도해 왔습니다. 그 힘이 너무 강력해 이 세계까지 그녀를 이끌어 온 겁니다."
마야가 벨을 바라보는 눈빛에 존경의 마음이 보인다. 언제나 유아독존으로 나 외에 다른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그녀가, 벨에게 존경을 담아 바라보고 있다.
그 것 만으로 난 벨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몸을 굽혀 티리스를 안고 있는 벨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벨은 티리스와 떨어져 내 손을 잡고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대어 문지른다.
"아아... 용사님. 이렇게 제 소원이 이루어졌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내 손등을 문지르는 그녀의 늙은 피부와 눈물이 나를 더욱 애처롭게 만든다.
"잘 왔어. 벨. 이렇게 보게 되어 기뻐."
난 벨을 만났을 때와 같은 말투로 늙은 할머니에게 말한다. 이 정도 나이의 여성에게 반말을 쓰는 것이 이상하지만, 여기는 실제 나이가 통하지 않는 마왕성이다. 나도 100세가 넘었고, 현정과 티리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30세가 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난 다른 손으로 벨을 안아주고, 마야에게 시선을 보낸다. 마야도 내 시선에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의 왼쪽 두 번째 손가락을 벨에게 내밀고 마력을 주입한다.
마야의 마력이 벨의 몸에 닿자, 벨의 모습이 바뀌기 시작한다.
자신의 몸이 변하는 것을 알고, 벨이 내 품 안에서 놀라서 고개를 든다. 내가 바라보는 벨의 얼굴이 바뀌기 시작한다. 처음 만난 80대 할머니의 모습에서 점점 어려지기 시작한다.
"이건..."
벨이 놀라서 몸을 움직이려하자, 내가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어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가만히 있어. 네 몸이 변하는 거니까."
마야의 마력을 받고 2분 정도 지나자, 벨의 몸이 완전히 바뀌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20대 중반의 여성이 아닌, 티리스와 같은 나이의 모습으로.
벨은 자신의 손을 보고 놀라서 다른 손으로 만져본다.
"어떻게 된 거지? 내 몸..."
목소리까지 십대 초중반의 것으로 바뀌었다.
내 품의 벨은 완전히 16세 소녀의 모습이다.
내가 그 얼굴을 보자 웃음이 터진다. 20대 중반의 근엄하고 꽉 막혀 보이는 여사제가 아니라 16세의 새침한 소녀이다.
"와아... 벨 사제님의 모습이 이렇게 귀엽다니."
티리스가 벨을 보고 먼저 웃는다.
"네? 제가 어떻게 된 거죠? 그리고 이 목소리... 정말 내 것인가요?"
자신도 믿어지지 않는 듯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는 벨. 그 주위에 다른 여성들도 웃으며 그녀를 보고 있다.
"마야의 마법이야. 이 성에서 모든 여성들은 16세의 모습으로 바뀌게 되지."
벨을 부축했던 미야가 그녀를 보고 말한다.
"그럼 내가... 16세가 된다는 건가요?"
"말하자면 그런 거야. 이 것이 서방님의 취향이니까. 여자는 16세의 모습이 가장 예쁘다고 해서 말이지."
벨은 아직도 상황이 파악되지 않은 듯 주위를 둘러보고 있다.
마야가 벨에게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고 내 품에서 떼어 놓는다.
"우리는 모두 서방님의 아내들이다. 난 서방님의 본처이자 첫부인이지. 그러니 넌 이제부터 서방님의 아내 중 한 명이 되었다."
"네? 그럼 내가 용사님의 아내가 된다는 겁니까?"
벨은 먀야의 말에 놀라며 나를 쳐다본다.
나는 벨의 시선에 고개를 끄덕인다.
벨은 나를 향해 무릎을 꿇고 절을 한다.
"정말 감사합니다. 티리스를 살려주시고, 절 살려주시고, 이런 비천한 저를 부인으로 삼아주신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이봐요, 할머니! 당신은 당신 손자뻘 되는 남자에게 시집가고, 게다가 12번째라는데 자존심도 없나요...
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 세계의 상식은 우리의 것과 너무나 다르다. 그리고 나 정도의 남자의 부인이 10명 이하라면 수치라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고칠 데가 많아서 견적이 안 나오는데..." 뒤에서 졸린 목소리가 들린다.
"린, 언제 나온 거지? 벨의 소개를 위해 빨리 나오라고 했는데?"
미야의 화난 목소리가 성 안 전체에 울려 퍼진다.
"포션을 만들려면 불조절이 필수! 눈을 뗄 수 없잖아."
"그러니까 자동 온도 조절 장치를 쓰라고 했을 텐데?" 나는 린을 탓한다.
린. 그녀는 페트리아 토벌 여행 때 만난 마왕의 전속 의사였다. 의사라기보다 미친 과학자 부류에 가까웠고, 그녀의 성형 수술로 외모가 변한 마왕을 찾기 힘들었다.
제니스의 마법으로 겨우 찾아낸 마왕은 아예 여자로 변해있었다. D컵이 넘는 흔들리는 가슴을 가진 작은 키의 개과 수족을 누가 마왕이라고 생각할까? 그만큼 린의 성형 수술은 완벽했다.
나는 그동안 고생에 화가 나서 린과 마왕을 우리 세계에 같이 데려왔고, 둘을 내 부인으로 삼아버렸다.
린은 졸린 눈빛과 몸동작으로 벨에게 다가온다.
"어디보자... 이건 정말로 서방님의 취향이 아닌데..."
린은 벨의 몸 이곳저곳을 살펴보다 혼잣말을 한다.
"먼저 이 소박한 가슴을... 그리고 턱은 더 갸름하게 깍아내고... 입술 위아래 두께가 틀리니 아래를 조금 째어내고... 어라? 눈 크기가 틀린데? 왼쪽을 조금 크게 해야하고... 눈썹이 너무 흐리니 털을 심어야 하니까..."
린의 혼잣말에 벨은 당황하는 눈치다.
"네? 제 몸이 어떻다는 거죠?"
"먼저 네 가난한 가슴과 부유한 엉덩이부터 문제네. 전혀 서방님 취향이 아니야. 이렇다면 너무 깍고 붙여야 할 게 많아... 정말 시간이 많이 걸리겠어..."
"네? 무슨 말이죠? 내 몸을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요? 당신은 뭐죠?"
난 당황하는 벨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걱정하지마. 그렇게 아픈 것도 아니고, 당장 할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린! 난 고치기 전의 벨과 할 일이 있어. 너의 할 일은 그 이후야."
"하긴... 처음엔 그대로인 것을 좋아하시니까... 서방님은..."
"도대체 뭐죠? 날 어떻게 한다는 거죠?"
티리스가 설명해준다. "안심하세요. 사제님의 몸을 서방님의 취향으로 만들어주는 거니까."
"뭐? 내 몸을 만들어? 용사님의 취향?"
벨은 당황한 얼굴로 나와 다른 여성들을 둘러본다. 확실히 마야와 현정을 제외한 다른 여성들의 몸은 자연 그대로가 아니다. 린의 마법 수술로 변형된 이후이다.
내가 마야를 처음 부인으로 삼은 이후, 내 여성 취향이 마야로 굳어 버렸다. 린을 부인으로 삼은 후, 린은 모든 부인들의 신체를 마야와 비슷하게 만들었다. 가슴과 눈이 큰....
난 개성을 존중하는 편이라, 린에게 되돌려 놓을 것을 명령했지만, 몇몇이 반대했다.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변했는데 원래대로 돌아가기 싫다고.
그래서 내 아내들의 모습은 객관적 기준으로도 절세 미녀들이다.
그런 면에서 지금 벨의 모습은 수준이 떨어져 보인다. 하지만 뜯어 고쳐진 것은 기분이 나쁘다. 더구나 처음인데...
내 기분을 아는지, 마야가 나선다.
"오늘 서방님을 모시는 것은 벨이 한다.
벨! 오늘 전심전력을 다해 서방님을 모셔야 한다. 알았나?"
"잠깐! 오늘은 저희 차례잖아요?" 리나와 엘리자가 불만 어린 목소리로 마야를 바라본다.
"너희들은 큰 잘못을 저지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가?"
마야의 몸에서 목소리와 함께 마력이 분출된다. 마야가 분출하는 마력은 ‘본처의 명령’. 본처의 명령에 첩들이 복종하게 만드는 마법이다. 마야의 마법에 리나와 엘리자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바닥에 닿도록 숙인다.
"그러니, 티리스. 벨을 데리고 가서 서방님을 모실 준비를 해라. 저 모습을 보니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다. 우선 목욕부터 시켜야겠다."
"그렇습니다만... 우선 벨 사제님에게 결혼 의식이 먼저 아닌가요?"
티리스의 말에 마야가 당황한다. "그... 그런가? 아직 그 것을..."
마야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나는 마야를 보며 어깨를 으쓱한다.
결혼의 계약. 마왕이나 그 반려가 아내를 맞이하는 마법 계약이다. 마왕의 법으로 일부다처제가 원칙이기 때문에, 한명의 남성이 복수의 여성과 결혼할 수 있다. 마야가 속한 마족의 전통으로는 부인이 100명 이하로 한정되어 있다. 물론 첩의 경우 1000명까지 가능하지만...
이 경우 부인들 사이의 서열이 문제가 된다. 이 서열을 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본처의 권한이다. 아무리 부인이 많아도 본처는 1명이어야 한다. 물론 남편의 권한으로 100명까지 부인을 늘릴 수 있지만, 본처의 허락이 필수이다. 더욱이 한번 정한 본처는 본인이나 남편이 죽기 전까지 바뀌지 않는다. 그런 계약이다.
나는 지금까지 본처 마야와 10명의 부인을 얻었고, 지금 12번째 부인을 얻으려 한다.
마야는 벨에게 다가간다.
"벨.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어라."
마야의 목소리에 벨은 마야 앞에 무릎을 꿇는다.
마야는 자신의 왼쪽 새끼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 이빨로 손가락을 세게 문다. 마야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지고, 그녀는 그 손가락을 입에서 꺼낸다. 손가락에 피가 흐른다.
마야가 왼쪽 손을 벨을 향해 펴자, 마법의 불이 벨을 태우기 시작한다.
"괜찮아요 벨 사제님."
당황하는 벨의 어깨에 티리스가 손을 올린다.
마야의 마법의 불은 벨의 몸에 하나의 상처를 남기지 않는다. 마법의 불에 둘러쌓여 있는 벨에게 마야가 다가온다. 티리스는 무릎 꿇은 벨의 몸을 굽혀 등을 보이게 만들고, 입은 옷을 아래로 끌어내려 벨의 목 뒤가 드러나게 만든다.
마야는 벨에게 다가와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벨의 목 밑의 등에 대고 마법진을 그린다. 조금 복잡해 보이는 마법진이 그려진 후, 마야는 오른손을 마법진에 대고 마력을 주입한다.
마력의 빛이 마야와 벨을 감싸고 잠시 후 빛이 사라진다.
"이로서 넌 서방님의 부인이 된 것이다. 앞으로 넌 서방님의 부인으로 말과 행동에 항상 조심해야 할 것이다."
마야의 말을 듣고 벨이 몸을 일으킨다.
벨은 나를 보고 절을 한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의 남편이시여. 내 몸과 마음은 모두 제 남편이신 당신의 것입니다. 저를 잘 사용해 주십시오."
11번째 듣는 계약 완료의 멘트... 라지만, 내 몸의 닭살은 어쩔 수 없다.
벨은 일어서 다른 여성들에게 몸을 굽혀 인사한다.
"오늘부터 서방님의 부인이 된 벨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반가워. 난 리나. 나이는 400세. 전직 엘프였어. 여기서는 5번째야."
"잘 부탁드립니다. 리나님."
"난 엘리자. 나이는 40... 세. 전직 마왕의 비. 7번째. 본 적이 있지?"
"혹시 왕비님? 어떻게... 그럼 그 때는..."
"왕비의 자리보다 서방님의 아내의 자리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이야."
벨은 놀란 얼굴이지만, 엘리자의 얼굴은 ‘원하는 것을 얻은’ 모습이다.
"나는 린. 나이는 33세. 직업은 과학자. 특기는 성형수술. 8번째. 그리고 여기는 페트리아. 나이는 20세. 전직 마왕. 9번째."
린의 설명에 페트리아는 말 없이 고개를 숙이며 린 뒤에 몸을 숨긴다.
"네? 전직 마왕이시라고요? 마왕이 어떻게..."
"나도 전직 마왕이었어." 마야가 설명을 시작한다.
"마왕으로서 세상을 호령 했지만, 서방님에게 져서 이 세계로 오게 되었지. 페트리아도 같은... 경우라 할 수 있고."
"그렇군요. 그렇게..." 벨이 고개를 끄덕인다.
벨의 시선이 아무 말 없이 우리를 쳐다보던 파르노와 현정에게 향한다.
"난 파르노. 나이는 58세니까 벨과 비슷하네. 3번째야."
현정은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난 이현정. 나이는 17세. 이제는 12번째가 되겠어."
현정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까지 현정이가 11번째이었지만, 벨이 왔으니 벨이 11 번째이고 현정이 12번째가 되어야 겠어."
"네? 저보다 앞에 있던 분보다 제가 앞서야 한다구요? 왜 그렇죠?"
"내가 그렇게 정했어. 현정이는 항상 부인들 중에 가장 마지막이야."
벨은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이지만, 나와 눈이 마주쳐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리나님이 5번째. 그 다음이 엘리자님이 7번째라면, 6번째는 누구죠?"
"나야.... 벨..."
갑자기 티리스가 벨에게 반말을 한다.
이것은 결혼 계약의 효과이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부인들 사이에서는 본처가 정한 서열이 최우선이다. 결혼 계약 이후로, 벨은 티리스의 아래 사람이 되었다.
"그렇군요. 티리스님.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벨은 티리스를 보며 몸을 굽혀 인사를 보낸다.
"잘 부탁해..." 갑자기 반말을 하는 것이 어색한지 말을 더듬는 티리스.
"전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서방님의 부인이 된 이후로는 새로 태어난 것이다. 그러니 결혼 전에 있었던 일은 지금 우리에게 아무 영향이 없어야 한다. 알았나? 티리스, 벨!"
마야의 호령에 두 사람이 움찔하며 마야를 향해 몸을 굽힌다.
"여기 온 이상 티리스는 6번째 부인이야. 엘리자보다 높은 사람이야.
티리스! 앞으로 이 사실을 명심하고 행동해. 벨! 넌 11번째야. 그 의미를 알겠지?"
"잘 알겠습니다. 마야님."
"명심하겠습니다."
마야는 현정을 바라본다.
"나와 미야, 현정이, 제니스는 전에 봤던 사람들이라 잘 알거야. 여기의 현정이는, 12번째라 하지만 우리와 경우가 다르다. 그녀는 계약을 맺지 않은 상태이다."
벨은 놀라서 현정을 바라본다. "네? 전에 봤을 때 서방님 부인이라고 하셨잖아요."
"사정이 있어서 서방님의 부인 중의 하나로 우리와 함께하지만, 그녀는 우리와 달리 이 세상의 사람이다. 그래서 계약을 맺지 않은 상태로 부인이 된 것이다. 그러니 현정은 우리와 틀리다."
내가 덧붙여 말한다. "현정이는 나와 같은 세상에서 사는 사람이야. 사정이 있어 나의 부인 중 하나로 여기에 있지만, 얼마 후 여기를 떠날 생각이라서 계약을 맺지 않았지."
"여기 있는 사람들은 우리 세계와 생각이 달라서 현실 생활 적응이 힘들거든. 내가 같이 생활하며 우리 세계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야. 그 것 뿐이야."
벨은 현정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형식적으로 나도 이 바람둥이의 부인 중의 하나이지만, 정식 부인은 아니고 도와주는 사람 정도라 생각해."
현정은 벨에게 다가와 손을 내민다.
"이건 우리 세계의 인사법. 너도 손을 내밀어."
벨이 어색하게 손을 내밀자, 현정은 벨의 손을 잡고 악수를 한다.
벨은 현정의 손을 놓고 마야에게 시선을 돌린다.
"리나님부터가 5번째이니까... 첫 번째는 마야님이시고, 다음은 어떻게 되죠?"
"내가 2번째인 미야. 여기 있는 마야와 아버지가 같은 사이지. 내가 20년 먼저."
"그럼 미야님은 마야님의 언니... 이신가요?"
언니라는 말에 미야의 이마가 일그러진다.
"8번째는 방금 전 화나서 사라진 조민지. 우리의 선생님이야."
"선생님? 서방님의 스승님이신가요?"
내가 즉답한다. "여러 선생들 중 하나일 뿐이야. 그 정도로 스승이라 부르기 아까워."
"어째든 이 사람들이 우리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서 우리 세계의 사람들이 필요하고, 민지와 현정이 있는 거야. 현정이는 거절했지만, 민지는 결혼을 원했어. 자세한 내막은 알려고 하지 마."
내 말에 벨은 고개를 끄덕인다.
"4번째는 제니스. 여기 오자마자 자기의 방에 들어갔어. 많이 까다로운 사람이니까 조심하는 것이 좋아. 우리와 달리 까칠하니까."
제니스를 기억하고 벨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마야님, 미야, 파르노, 제니스, 리나, 티리스, 엘리자, 민지, 린, 페트리아, 그리고 나... 이렇게 되는 거네요."
벨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
"저는 식사를 준비해야 하니 들어가 볼게요. 벨. 나와 함께 가...지."
"알겠습니다, 티리스님."
님이라고 부르는 벨을 보며 티리스는 어색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다.
티리스는 벨의 손을 잡고 마왕성 안으로 들어가고, 현정과 파르노도 뒤를 따라간다.
리나와 엘리자는 마야의 눈길을 피하며 움츠려 있다.
"오늘 일은 너의 잘못이 아니라 내 탓이다. 그러니 방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벨과의 일이 끝나면 너희에게 갈 거니까."
내 말에 리나와 엘리자의 표정이 밝아진다.
"마야. 오늘 일은 내가 결정한 거야."
내 단호한 말에 마야도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마왕성 안으로 향하자, 리나와 엘리자가 내 옆에 붙으려 하지만 마야의 시선을 받고 뒤로 물러선다.
내 뒤를 따라 마야, 미야가 따라오고 리나와 엘리자는 10m 떨어져 따라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