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실행했던 사람의 변명
다음날 아침이 되어, 인간들은 군대를 끌고 왕궁을 포위했다. 그 때 영주들이 우리에게 몰려왔다.
총 사령관이 거만하게 외쳤다. "자아! 받으러 왔다."
이봐! 네가 빛쟁이냐? 왜 이렇게 당당히 돈 내놓으라는 거지?
왕비가 나섰다. "우리는 값을 치러 포로를 해방하고자 합니다. 정당한 값을 치룰 것이니 금액만큼 사람들을 풀어주십시오."
그리고 은화 한 개를 내밀었다. "한 사람에 은화 한 개. 어린 아이는 두 명에 한 개입니다."
"무슨 소리냐? 은화 세 개다."
"우리를 기만할 셈이냐?"
"당신들이 포로를 끌고가는 동안 열의 여섯, 일곱은 죽고, 가는 동안 많은 비용을 치러야 합니다. 여기서 이 금액에 파는 것이 더 이득 아닌가요?"
왕비의 말에 서로 모여 의논하는 했다. 아무래도 이들은 자신들의 수를 믿고 무리한 요구를 할 것 같았다.
나는 하늘에 손을 들어 마력을 주입했다. 현정이 규격 외의 물리력을 지닌 마법을 사용하는데, 나도 규격 외이다. 평소엔 고통 때문에 마력을 어느 이상 사용하지 못하는데, 고통을 감수하면 현정 만큼의 위력을 지닌 마법을 쓸 수 있다. 물론 뼈가 부서지고 근육이 끊어지는 경우가 많다.
내 몸에 규격 외의 마력을 주입했다. 고통을 참으며 최대 위력의 10% 정도의 위력으로 땅에 번개를 내리도록 했다. 병사들이 몰려 있는 가운데에 사방 100m의 범위로 번개가 병사들에게 내리쳤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병사들은 땅에 쓰러졌다.
정말 예상치 못했던 일에 영주들은 경악했다.
"신께서 노하셨다는 것을 잊으셨나요? 이 조건을 수락하지 않으시면, 정말로 병사들을 죽일 겁니다."
벼락을 피한 병사들이 쓰러진 병사들에게 가보니, 그들은 죽지 않았다. 내가 사람이 죽지 않도록 위력을 낮춘 이유였다.
나는 그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신은 두 번 경고하시지 않습니다."
그러자 총사령관이 대표로 우리에게 왔다. "좋소. 대신 지금 가지고 있는 물건들은 우리가 가져가겠소."
"이미 약탈한 물건에 대해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들의 얼굴에 안도의 웃음이 생겼다. 아무래도 어제 그들이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이 약탁물을 모아둔 곳이었던 것 같다.
총사령관이 조건을 수락했다. "좋소, 어른 한명에 은화 1개, 아이 2명에 은화 1개. 금화로는 어른 10명, 아이 20명입니다."
왕비가 수락했다. "좋습니다."
우리 뒤에 있던 왕족들이 직접 나서 포로 석방에 나섰다.
붙잡힌 포로들을 구해내자, 자유를 얻은 사람들은 모두 울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살아남은 자들보다 죽은 자들이 더 많다는 것이 가슴 아프게 했다.
석방된 포로들을 위해 돈을 쓰는데, 마왕 창고의 보물 중 2/3을 지불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풀어주어도 돈이 남다니... 마왕은 정말로 욕심쟁이 바보였다.
돈을 받은 인간들은 서둘러 마왕성을 떠났다. 돈을 벌었으니,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뿐인 것 같았다.
돌아가는 사람들 중에 우리를 인도해준 장군을 다시 만나서, 그에게 장신구를 몇 개 안겨주었다. 그는 기뻐했지만, 주위를 의식해 내색하지 않고 받았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이 것이 나의 마지막 전장입니다. 은퇴를 하려 했지만, 영주님이 놓아주시지 않았지요. 내 뒤를 아들이 맡게 되어 다행입니다."
그의 뒤를 보니 그의 아들이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훌륭한 아드님을 두셨군요."
"나에게 아직 성이 차지 않지만, 그래도 잘해낼 겁니다. 내 밑에서 오랫동안 배웠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가셔서 영주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주십시오. 신께서도 영주님과 장군의 노고를 잊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정말 감사하군요."
인간들을 보내고, 궁으로 돌아오니 마야들은 왕족들과 함께 궁 안을 정리 중이었다. 우리가 도와준 일로 그들은 우리와 많이 친해졌다.
우선 나는 제니스, 멜리사를 데리고 왕비와 몇 명의 왕족들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우리의 임무는 마왕을 찾아 죽이고 그 영혼을 말살하는 겁니다."
왕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시군요. 그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도울 수 없습니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묻는 것에 솔직히 대답해 주세요. 그 것은 할 수 있죠?"
왕비는 함께 참석한 2명의 왕족들을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저 아이, 마왕의 친족을 돌려주십시오."
"멜리사? 공주님이셨나요?"
멜리사가 고개를 숙였다. "당시 의식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 마왕의 형제 자매들이었습니다. 당신이 죽인 두 사람은 그 분의 형님과 누님이었죠."
왕비가 말했다.
"당신이 한 짓. 여기서 탓할 것은 아닙니다. 당신도 인간 측의 사람입니다. 우리를 구해주신 일에 감사해도 우리는 당신을 친구로 볼 수 없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멜리사를 돌려드리지요. 단 우리가 원하는 답을 얻은 후에."
왕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알고 싶으시지요?"
제니스가 물었다. "멜리사가 포함된 그들은 어떤 의식을 진행한 거죠?"
멜리사가 대답했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소멸되고 영혼은 공중을 떠돌다 흩어집니다. 그 의식은 영혼이 흩어지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억을 잃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죠."
"그 영혼이 인간의 육체에 들어가 소생한다는 것이군. 그럼 영혼이 어떻게 다른 인간의 육체에 들어갈 수 있지?"
왕비가 대답했다.
"원래 그 의식은 마왕이 죽기 전에 시행하는 겁니다. 마왕은 죽기 직전에 그런 식으로 영혼이 육체를 버리고 다른 몸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다시 태어난다? 그럼 태아에 들어간다는 겁니까?"
"네. 원래 그 영혼을 받기 위해, 그 옆에서 마왕의 친족이 교합을 합니다. 그 때 영혼이 여성의 몸속에 들어가 아이가 되어 태어나는 겁니다."
"그렇다면 마왕은..."
"같은 영혼이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 왕국을 다스리는 겁니다."
내가 물었다. "하지만 마왕이 유아인 시기에는 어떻게 하죠?"
"이번이 문제였습니다. 마왕이 육체를 버리고 다시 태어나지 않은 시기에 인간들의 공격을 받은 겁니다. 마왕께서 없는 때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죠.
그래서 우리는 함락 직전에 그 의식을 다시 진행한 겁니다. 마왕께서 다른 몸을 찾으시도록."
"그럼 그 때 불에 탄 재는...."
멜리사가 울먹였다. "저의 동생이었습니다. 마왕을 임신한 채로 죽어야 했죠."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마왕이 그런 식으로 자기의 육체를 바꾸어 오랜 시간을 살아왔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멜리사의 동생이면, 마왕의 동생? 자기 여동생의 몸으로 소생할 생각이었나?
게다가 멜리사는 13세 정도로 보인다. 그럼 마왕을 낳는 여성이 그렇게 어리다는 거야?
제니스가 물었다. "영혼은 얼마 동안 공중에서 존속할 수 있죠? 소생할 몸을 찾기까지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요?"
"마력을 생각하면 3일 정도입니다."
나는 마왕이 사라지며 마력이 흩어진 속도를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면 수색 범위가 좁혀지게 되었다.
"마왕이 선호하는 육체가 있나요? 어떤 종류의 여성에게서 태어나는 것을 원하나요?"
"월경을 시작하지 않은 처녀가 처음 남성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완전 로리콘이잖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럼 우리는 내일 떠나겠습니다."
왕비가 일어나 우리를 잡았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네?"
"저는 당신을 따라가겠습니다."
나는 황당히 바라보는데, 제니스는 무언가 아는 눈치였다.
"당신이 마왕을 낳은 분입니까?"
제니스의 물음에 왕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이 일찍 죽은 거네요. 지병이 있었나요? 당신 때문에?"
왕비는 고개를 숙였다.
잠깐! 그렇다면 이 여자는 왕비가 아니라, 왕의 어머니?
"당시 노령의 육체였던 마왕께서 한 남자와 저를 선택하셨죠. 의식이 이루어지며, 저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와.... 그리고 마왕께서 내 몸에 들어와 태어나셨습니다.
그런데 마왕께서는 치명적인 실수를 하셨죠. 그는... 그의 집안에 유전적인 병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에서 손자로 이어지는 병이... 그 때문에 마왕께서는 빨리 육체를 바꾸려 하셨지요."
"그래서 선택한 것이 멜리사의 집안..."
"우리는 철저히 집안 내력을 조사했고, 여기 멜리사의 동생을 선택했죠. 그리고 전 마왕의 육체적 아들과의 사이에 다시 태어나시려 했습니다. 둘 다 집안에서 유전병이 없었습니다."
멜리사가 덧붙였다. "당신이 처음 목을 벤 그 사람이 내 동생의 상대였습니다. 전 마왕의 아들이었죠."
왕비, 아니 왕의 어머니는 나를 붙잡고 다시 부탁했다.
"아무리 마왕님이시지만, 내 몸을 통해 낳은 아이였습니다. 내 젖을 먹고 자랐죠.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않았지만, 나는 그를 아들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내 손으로 정리하고 싶습니다."
제니스는 애처로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표정도 반칙이었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좋아요. 하지만 이 이후로 당신은 왕족이 아닌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나는 왕족으로서의 모든 것을 버리겠습니다."
"허락하지요. 당신의 이름은?"
"엘리자입니다."
나는 제니스와 함께 우리들의 숙소로 돌아와 모두들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마야가 턱에 손을 대고 혼잣말을 했다. "3일... 그럼 수색 범위가 줄어들겠지만..."
"당장 내일 출발할 거야. 근처를 뒤지다 보면 답이 나올지 몰라."
"그렇다 해도 이번에는 시간이 많이 걸리겠어요."
"어쩔 수 없어. 돌아갈 길은 마왕의 영혼을 말살하는 것 뿐이야. 그렇게 하려면 이 곳 지리와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해."
제니스가 말했다. "그런 일은 상인들이 적격입니다. 그들은 각 마을의 사정을 잘 알겁니다. 게다가 우리가 찾는 사람은 10세 전후의 소녀입니다. 그리고 그 나이에 그런 일이 있는 경우도 흔치 않겠지요."
미야가 물었다. "흔치 않다니, 무슨 말이지?"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삼는 남자들은 드물죠. 이런 경우 마을에서 문제가 될 겁니다. 상인들을 이용해 정보를 캐보면 알려질 겁니다.
게다가 마왕의 영혼은 행위가 이뤄지는 바로 그 때 여성의 몸에 들어가겠죠? 그렇다면 여성을 찾기 쉬울 겁니다."
"왜지?"
"그런 여성을 찾기도 힘들고 그런 경우도 만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마왕은 건강한 육체를 원하지요. 전쟁 중에 그런 일을 발견하기 쉬운 경우는?"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 건가? 약탈과 그렇게... 건장한 육체라면 병사..."
"우리는 상인들을 통해 마을들을 조사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제니스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
다음날 새벽, 엘리자는 짐을 챙겨서 우리 숙소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준비를 끝낸 우리는 엘리자와 함께 길을 떠났다. 그런데 왕족이나 시민들 누구도 우리를 배웅하지 않았다. 우리가 마왕을 소멸시킬 것을 알기 때문에.
성을 나오니 우리를 기다리는 무리들이 있었다. 엘리자가 모집한 사람들로 보였다.
엘리자는 그들 앞으로 걸어갔다.
"모두 들어서 알 것이다. 우리가 찾는 것은 10세에서 15세, 전쟁으로 인해 아이를 가진 소녀이다. 각 마을에 퍼져 그런 사람이 있으면 우리에게 알려라."
이 후 우리들은 마왕성에서 떨어진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마을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어느 세상에서나 군대가 지나간 자리에 사생아가 남는다는 것은 같았다.
임신한 여성들은 수치로 여겨 이야기를 꺼내려 하지 않았다. 더욱이 나를 보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후로 나는 그녀들과의 면담에서 빠졌다.
그러자 그녀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런 여성들을 만나고 온 마야, 제니스, 엘리자, 현정은 모두 분노가 가득한 얼굴로 돌아왔다. 나를 보는 시선에서도 경멸이 섞여 있었다.
며칠 후 면담을 마치고 돌아와,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나를 보는 눈빛이 두려웠다. 마야에게 까지도.
그런 말을 듣고 나에게 안길 사람은 없었고, 미야 만이 나의 상대가 되기로 했다. 그래도 그녀들이 있어 나는 미야와도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이후 나는 미야와 같이 시간을 보냈다. 식사도 그녀와 함께 했다. 마야도 나를 멀리 했다.
며칠 후, 나는 견딜 수 없어 미야를 안았다.
그런데 그날 저녁 식사에서 미야를 제외한 여성들이 나를 노려보았다. 그녀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 미야 만 남겨놓고 따로 식사를 했다.
특히 현정은 나를 용서 못한다고 대놓고 말했다. 마야도 아무 말 없이 경멸을 섞어 나를 노려보았다.
그 마을에 대한 조사가 끝나고, 우리는 다른 마을로 이동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엘리자가 보낸 사람이 달려왔다.
"오셨습니까? 여기에도 피해자가 있습니다."
그는 피해자라고 말했다.
엘리자가 물었다. "몇 명이죠?"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여기에 인족의 군대가 지나갔습니다. 그런 일이 없을 수 없죠."
순간 마야, 제니스, 현정의 얼굴에 분노가 일어났다.
"없을 수 없다구요?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시면 어떻게 해요?"
현정이 나서는데 제니스가 제지했다.
"우리는 피해자들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파악하신 겁니까?"
그는 머리를 긁었다. "아무래도 그 것에 대해 함구하고 있으니... 하지만 이 곳에서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증언도 있습니다."
"증언?"
"이 곳에서 납치되어 포위 진영까지 끌려간 사람이 몇 있습니다."
"끌려갔어요? 2년 전에?"
"지금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습니다."
여성들의 얼굴에 더욱 분노가 커졌다. 전쟁 범죄라 어쩔 수 없었다 해도, 각각의 피해 사실을 확인하는 일을 하다보니 피해자의 수와 피해 사실이 너무 큰 것을 알았다.
나는 마을 밖에서 미야와 함께 있고, 4명이 마을로 들어갔다.
이틀 후에 그녀들이 돌아왔는데, 이번에도 붉어져 부은 눈과 분노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나를 보자 현정이 달려들었다. 정말로 죽이겠다는 분위기였다.
나는 현정이 날리는 주먹을 잡고 팔을 비틀었다. "무슨 짓이야?"
"다 남자들이 나쁜 거야? 너희들이 없다면.... 너희들 때문에..."
현정이 나의 손을 뿌리쳤다. 용의 마력을 사용한 현정의 힘이 엄청났다. 나는 현정의 힘에 뒤로 날려졌다.
현정이 나를 공격하자, 미야가 칼을 뽑아 현정을 겨누었다.
"현정! 서방님께 뭐하는 거지?"
"비켜. 방해하면 너도 죽여버리겠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서방님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저 놈도 남자야. 남자들은 다 똑 같아. 폭행하고 강간하고. 여자들은 당하기만 하고. 모두 다 죽일 놈들이야."
"정신 차려. 서방님은 그런 사람이 아니야."
"저 놈도 남자야. 그리고 너도 남자였지? 비켜. 아니면 너도 남자로 생각해 죽여버릴테니까."
그렇게 외치는 현정을 보며, 나는 타냐가 생각났다. 두 번째 세계에서 날 아버지로 생각해 죽이려 했던 사람이.
나는 한숨을 쉬고 미야 앞으로 걸어가 현정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날 죽이고 싶어?"
"그래! 죽일 거야. 이 세상 남자들을 모두 죽일 거야."
"그럼 저 마을 안에 있는 여성들이 낳은 사내 아이들도 있겠지? 그 아이들도 죽일 거야?"
그러자 현정이 머뭇거렸다.
"나를 비롯해 그런 일을 한 남자들을 죽여도 좋아. 모든 남자들을 죽인다면 저 마을 안에 있는 사내 아이들은 어떻게 할 거지? 그녀들이 낳은 아이들은?"
"궤변이야. 나는 그런 짓을 한 남자들을 죽인다 했어. 아무 죄 없는 아이들은 아니야. 너도 그런 거잖아? 그러니 너도 죽이겠어."
현정의 몸에서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그런데 그 사이에 마야가 끼어들었다. "그만해 현정. 서방님에게 화풀이할 일이 아니야."
제니스는 천천히 걸어와 현정을 안아주었다. "네가 분노하는 것을 이해해. 하지만 이런다고 아무 것도 해결 되지 않아."
엘리자가 옆에서 말했다. "그래도 서방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애써주셨어."
현정은 제니스의 품에서 울부짖었다.
..............
제니스가 만든 저녁 식사를 하며,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두에게 말했지만, 나에게 부인이 있었어."
제니스가 말했다. "파르노, 말인가요? 몇 번 말씀하셨던."
"아니. 파르노도 있지만, 이번엔 다른 사람 이야기야. 부인으로 한다면, 세 번째 부인이라고 할 수 있어. 이름은 타냐였어."
미야가 중얼거렸다. "타냐...라면, 저번 여행에서 말해준, 서방님을 죽이려 했던..."
"그래. 날 죽이겠다고 찾아온, 나의 딸이라고 주장하는 여자였지. 그녀는 너희들이 방금 전 보고 온 그 아이들과 같은 경우였어. 전쟁으로 인해 태어난 사생아."
모두가 아무 말 없이 나의 이야기를 들으려 했다.
"모두 알겠지만, 나는 군인이었어. 군인으로 적을 죽이고, 마왕을 죽인 용사였지. 한 명의 군인이 되어 전쟁의 소모품처럼 죽어야 할 때도 있었고, 이번과 같이 민간인을 공격했던 일도 있었어."
나는 마야와 제니스를 번갈아 보았다.
"마야와 제니스는 잘 알 거야. 한 명의 병사가 소중하지만, 승리를 위해 버려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전황에 따라 잔혹한 일을 명령하는 것을.
위에 있는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실제 행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지... 엘리자는 알 수 있겠어?"
나는 엘리자를 보았다.
"마야에게 들었어. 네가 우리를 따라오고 부인이 되겠다고 했지? 그럼 이제부터 내 이야기를 들어줘. 위에서 명령하는 사람이 아닌 직접 행하는 사람들의 말을. 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행했던 사람이 이야기도 들어줘. 판단은 너희들 몫이야."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처음 소환되었을 때, 나는 아무 힘도 없었어. 먹고 살기 위해 군인이 되었고, 소모품으로 전장에 투입되어 살아남았지. 그렇게 살아남다 보니 나름 능력 있는 군인이 되었어. 보통 전쟁에서 전사자들의 반 이상은 신병들이야. 첫 전투에서 죽을 확률이 반이 넘어. 나는 그런 곳에서 몇 번이고 살아남았어. 그동안 내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을 봐야했고.
전쟁터에서 오래 살아남았다는 것은 많이 죽였다는 의미야. 죽고 죽이는 것이 일상인 생활에서 제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어.
그러다가 계급이 오르니, 전투 외의 다른 임무가 주어졌어. 너희가 들었던 민간인 토벌이야. 그 곳에 투입된 병사들은 오랜 기간 전장의 긴장으로 제 정신이 아닌 사람들이 있었지. 나처럼. 일부러 그런 병사들을 보내는 경우도 있어. 민간인이 아닌 적 기지를 공격한다고.
적에 대한 적의가 가득한 우리가 민간인들을 보고 민간인이라 판단하기 힘들어. 늘 명령에 살고 죽는 군인들이 상부에서 이들은 적이다라고 말하면 그들은 적인 것이야. 내가 죽여왔고, 내 동료들을 죽인 적들이야. 그 상황에서 무장을 했다 안했다는 의미가 없어. 적이라고 명령 받은 순간 그들은 죽여야할 적이고, 죽이지 않으면 나와 내 동료들이 그들의 손에 죽는 것이야. 그런 단순한 논리가 성립해.
그렇게 우리는 한 마을에 들어갔어. 우리에게 저항할 힘이 있는 사람들은 보이는 대로 죽였어. 하지만 죽일대로 죽인 후에 여자들을 보니 이성을 잃을 수밖에 없어. 피를 보고 피냄새를 맡으며 제정신 차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와보라고 말하고 싶어. 그 때 벌어진 일은 너희들이 잘 알 거야."
현정이 일어서 항의했다. "지금 그 것을 변명이라고 하는 거야?"
"현정아. 너는 나와 같이 21세기를 사는 사람이야. 이런 일이 잘못되었다 생각하지. 그런데 여기 제니스도 그렇게 생각할까?"
제니스가 말했다. "그런 일은 전쟁에서 다반사이죠. 우리가 당할 수도 할 수도 있는 당연히 일어나는 일이죠."
현정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럼 이런 일이 정당하다는 거야?"
"정당하다는 것은 아니야. 단지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거야.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났다고 그 일을 부정할 셈이야?
그건 말도 안 돼. 일어난 일은 일어난 거야. 문제는 이후 어떻게 하느냐는 거야."
"21세기의 우리처럼, 그 비극을 기억하고 기록한다면 다음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지 모르지. 하지만 여기는 다른 세계야. 내 힘으로 어쩔 수 없어."
현정은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건 궤변이야."
"그럴지 몰라. 하지만 네 힘으로 모든 남자, 아니 전쟁에서 잔혹행위를 한 모든 사람을 죽일 수 있어. 할 수 있을지 몰라. 그동안 너는 이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게 돼. 그 것을 알아?"
현정이 화를 내자 마야가 나섰다.
"그만해. 서방님 말씀이 맞아. 너는 이해 못하지만 우리는 그런 세계에 살았어. 이런 일에 화가 나지만, 나의 군대도 했던 일이야."
현정은 놀라서 마야를 바라보았다.
미야도 나섰다. "나도 그랬어. 피해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힘든 일이지만, 위에서 명령하는 입장에서는 필요한 거야. 상대에게 공포를 주기 위해. 나도 명령했고, 직접 나서서 실행한 적이 있어."
엘리자도 나섰다. "나도 마왕님께서 그런 일을 명령하는 것을 봤어. 나는 내 일이 아니라며 방관했지만, 지금 많이 후회돼."
제니스가 현정의 팔을 잡았다. "너는 처음이지만, 나는 몇 번이고 이런 일을 보았어. 피해자의 한사람이었던 적도 있어."
모두의 시선이 제니스에게 쏠렸다.
제니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말 안하려 했지만, 나도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있었어. 나는 아랑 왕국 사람이 아니야. 전쟁에 진 우리 나라는 아랑 왕국 군인들에게 참혹한 일을 당했어. 나를 포함해서.
나와 같이 끌려간 여자들은 아랑왕국 군대에 끌려가 왕에게 전리품으로 바쳐졌지. 그리고... 그리고..."
제니스가 눈물을 흘렸다.
"왕에게 바쳐져 당해야 했어. 많은 군인들이 보는 앞에서 옷이 벗겨진 채,
그 왕은 우리를 묶어 놓고 하나씩 차례로 범했어. 그 중에 마음에 드는 몇 명을 놔두고 다른 여자들은 병사들에게 던져졌어. 우리는 병사들에게 당하는 동료들을 보며 왕의 여자가 된 거야. 나는 운이 좋아 임신했지만, 열마 후 그 왕은 임신하지 못한 여자들을 병사들에게 던져버렸어. 그 곳으로 던져진 여자들은 병사들의 노리개가 되어야 했어."
마야가 나서서 제니스를 안아주었다. 제니스는 마야의 품 안에서 울면서 말을 계속했다.
"나는 그 때 안도의 한숨을 쉬었어. 내가 저런 자리에 가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나는 그런 여자들과 다른 사람이라 생각했어. 운좋게 그 짐승의 아들을 낳은 이유로 난... 난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 그런 일을 당하지 않고, 그들은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거야. 생각해보면 나와 그들은 다를 것이 없는데 말야.
그리고 내가 높은 위치에 올라갔을 때, 그런 일을 묵인하고, 때때로 명령했어. 전쟁에 필요하다고, 그런 일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그 말을 들으니 제니스가 그런 일을 싫어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러니 현정. 서방님을 미워하지마. 나도 그런 일을 당했지만, 그런 일을 명령했어. 내가 당하지 않은 일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어. 내가 그런 일을 당하고 낳은 내 아들을 특별하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나도 같은 인간이야. 서방님이 했던 일... 나는 명령하고 더욱 잔인하게 하라고 했어. 그러니 나도 비난 받아야 해."
현정을 비롯한 누구도 말할 수 없었다. 현정을 제외한 여기의 모든 사람들이 경험했던 일이었다. 특히 나는 실행하는 쪽에 있었고, 제니스는 당하는 쪽에서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목에서 무언가 막히는 것을 뚫고 입을 열었다.
"현정아. 그 때 타냐는 너처럼 날 죽이려 했어.
그리고 소리 질렀지. 왜 나를 태어나게 했냐고. 내가 아니었지만, 내 동료로 태어난 그녀는 자기가 세상에 잘 못 태어난 사람이라고 했어. 그래서 나는 그녀를 내 곁에 두고 나의 아이를 낳게 했지. 마지막까지 내가 손을 놓지 못했던 이가 그녀야. 그녀는 나를 원망하면서 내 곁을 떠나지 않았어. 날 받아들이고 내 아이들을 낳았어.
몇 년 후, 나는 그녀에게 물었어. 왜 이렇게 하는지. 내가 미우면 그냥 떠나라고, 하지만 그녀는 떠나지 않고 내 곁에서 나를 미워하며 살았어.
마지막에 그 이유를 말해주더군. 살아야 했다고."
그 말에 모두가 놀라서 날 바라보았다.
"타냐는 언제나 나를 원망하고 미워했어. 그래도 나의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을 사랑했어. 그 모든 것이 살기 위해서 였다고 했어. 살고 싶다고 살아야 했다고. 자기가 내 곁에서 있다면 죽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말야.
그녀는 나를 증오했지만, 살기위해 참아냈어.
저들도 같은 거야. 고통스러워도 살고 싶은 거야. 치욕을 당하고, 비난을 당하고, 사생아를 낳아도 살아남고 싶은 거야.
나는 마지막에 깨달았어. 내가 했던 일들을 되돌릴 수 없지만, 사람들을 살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그들이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내가 해 야할 일이라고. 하지만 그 세계에서는 그럴 수 없었어."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한 일은 용서받을 수 없을 거야. 언젠가 큰 벌을 받을 거야. 지금도 나는 죄를 짓고 있는지 몰라. 하지만 나는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 그런 일을 당한 사람들도 살아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 내 힘이 닿는 대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현정은 납득한 얼굴이 아니었다. 판단을 유보해두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