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티리스 구출(2)
속았다는 것을 알고 빨리 요새에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늘에서 현정이 다가 오고 있었다.
"현정아. 여기는 아니야. 우리를 유인하는 미끼야."
"뭐?"
현정이 내 앞으로 내려왔다.
"티리스는 여기에 없어. 티리스의 옷으로 우리를 유인 한 거야. 빨리 요새로 돌아가야 해. 티리스는 아직 거기에 있어."
현정은 놀라서 아무 말 못하다가 뭔가 결심한 듯, 내 손을 잡았다.
"재신아 날 안아."
"뭐?"
"널 안고 날아갈 거야. 그려니 내 몸을 꽉 잡아!"
나는 현정의 목 뒤에 두 손을 깍지 끼고 몸을 밀착시켰고, 현정은 내 옆구리 뒤로 손을 맞잡았다.
"자아! 날아간다. 꽉 잡아!"
갑자기 우리의 몸이 공중에 튀어 올랐다. 그리고 G를 느낄 정도의 스피드로 요새를 향해 튕겨나갔다.
"우아아아!" 나는 비명을 질렀다.
"시끄러워! 몸도 무거운 주제에 목소리도 크잖아! 그리고 숨 좀 참아. 네 숨이 얼굴에 닿으니..."
"내 숨이 뭐?"
현정은 붉어진 얼굴로 찡그렸다. 아무래도 어제의 격렬한 일이 머리 속에 남은 모양이었다.
우리는 그대로 날아 요새 안으로 날아갔다. 아래를 보니, 마야들이 요새 오르막 길을 내려오고 있었는데, 우리를 보고 다시 뛰어 오르고 있었다.
나는 서서 눈을 감고 마력을 느껴보았다. 건물 내부에서 마왕의 마력이 느껴졌다.
나는 무작정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마력을 쫓아가자 벽이 보였는데, 돌아갈 시간이 없어 그냥 부수고 직진했다.
그런데 마력이 아래 쪽에서 느껴졌다. 나는 손에 마력을 모아 발 아래를 가격해 바닥을 부수어 밑으로 떨어졌다.
내려가서 본 광경은, 횃불 아래서 몇 명의 남자들이 형틀에 묶인 여자를 둘러쌓고 있었다.
티리스는 大자 모양의 형틀에 손과 발이 묶여 있었고, 형틀에 의해 다리가 벌려져 있었다. 한명이 칼을 들고 티리스의 배를 겨누고 있으며, 밑에서 다른 한명이 무언가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마 티리스의 배를 가르고 아이를 꺼낼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우아아아아!" 나는 분노에 정신을 잃었다.
검은 라이트세이버를 빼들고 우선 칼을 들고 있는 놈의 팔을 잘라낸 후, 목을 베었다.
밑에서 준비하던 놈의 머리에 칼을 아래로 꽃아 넣은 후, 발로 배를 걷어찼다. 힘조절을 못해 발에 차인 놈의 몸이 산산조각났다.
두 명이 한번에 당하자, 다른 세명이 도망치려했다.
놓칠 수 없었다. 나는 빠른 이동으로 그들 앞에 나타나 한명의 목을 베고, 다른 한명의 얼굴을 잡아 들었다. 뿌드득 소리와 함께 그 놈의 발이 공중에서 허둥거렸다. 나는 그대로 그 놈의 얼굴을 땅에 쳐박았다. 머리가 부서지고 피와 뇌수가 사방에 튀었다.
남은 놈은 두려워 땅을 기어 나에게 도망치려고 했다. 나는 그 놈의 허벅지를 잘랐다. 고통 속에서 그 놈은 손으로 땅을 기어 도망치려 했다. 내가 다가오자 그 놈은 나를 보며 살려달라고 사정했다. 하지만 용서할 수 없었다. 나는 발로 그 놈의 머리를 밟고 누르며 비벼댔다. 비명이 터져 나오며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고, 더욱 힘을 주어 머리를 부숴버렸다. 내 다리가 그 놈의 피와 뇌수로 더러워졌다.
나는 티리스에게 다가갔다. 티리스는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티리스를 묶은 줄을 풀어주고, 그녀를 공주님 안기로 들어올렸다. 티리스는 무서워 아무 말 못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고마워. 살아있어줘서."
내 말을 듣자 티리스의 눈에 눈물이 흐르고 울기 시작했다.
"우우... 우앙.... 우아앙.... 우아앙...."
티리스는 내 목을 잡고 울었다.
나는 울고 있는 티리스를 안고 건물을 나갔다.
건물 밖에는 모두가 기다리고 있었다.
벨이 제일 먼저 티리스에게 달려왔다. "티리스. 괜찮은 거야? 다치지 않은 거지?"
벨은 티리스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남자인 나보다 나을 것 같아, 미야에게 티리스를 부탁하려고 하는데, 티리스는 울면서 내 목을 잡고 놓지 않았다.
"아빠... 아빠... 고마워..."
티리스는 내 목을 안고 나를 아빠라고 불렀다. 어두워서 내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째든 티리스를 무사히 구한 것에 감사하며, 우리는 요새를 떠나기로 했다.
...............
요새에 남은 말들과 수레로 티리스를 태우고 우리는 신전으로 돌아가려 했다.
수레에서 누워 있는 티리스는 벨의 품 안에서 잘 자고 있었다.
가는 길에 엘리자가 물어왔다. "어떻게 된 거죠?"
"요새 밖으로 도망간 놈들은 시간을 벌기 위한 미끼였어. 그 놈들은 우리를 유인해 마왕을 꺼낼 시간을 벌 생각이었지."
"마왕을 꺼내요?"
"우리는 모두 자연출산만을 생각해, 10개월이 걸릴 거라 생각했어. 마왕성이 함락된지 7개월이 조금 넘었으니 한두달은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7개월 정도만 되어도 아이를 꺼낼 수 있어."
현정이 외쳤다. "제왕절개."
"그래. 그 방법이라면 7개월 정도의 미숙아라도 엄마 몸에서 꺼내어 살릴 수 있을 거야. 그들은 마왕을 꺼낼 시간을 벌려고 미끼를 던지고 요새 지하에서 마왕을 태어나게 하려고 한 거야."
제니스가 주먹을 쥐고 분노했다. "그럴 수가..."
"애초에 그 놈들은 티리스의 생명에 관심이 없었어. 그런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상처를 내고 아이를 강제로 꺼내면 티리스는 죽을 게 뻔해."
마야가 수레에서 자고 있는 티리스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티리스가 살아서."
티리스를 안고 있는 벨이 말했다. "놀랐어요. 티리스가 말을 하다니. 여기 올 때부터 말을 못했는데."
"어째든 빨리 돌아가서 티리스를 안정시켜야 합니다."
밤이 되어 우리는 텐트를 치고 휴식을 취했다. 텐트 안에 벨과 티리스를 두고 우리는 불길에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텐트에서 티리스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텐트로 뛰어갔다. 텐트 안에서는 벨의 품 안에 티리스가 울고 있었다.
"티리스, 괜찮아. 여기는 안전해."
"싫어... 싫어... 아빠, 엄마.... 살려줘. 살려줘.... 죽고 싶지 않아..." 티리스는 울부짖었다.
벨이 티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정을 시키자, 티리스는 그 품에 머리를 파묻고 울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 무서워... 어디 간거야... 살려줘..." 티리스는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나는 불쌍한 마음에 티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티리스는 나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티리스가 내 품에 뛰어들었다. "아빠. 아빠. 살려줘. 무서워... 우아앙..."
나를 아빠라 부르며 티리스는 내 품에 안겨 더 크게 울었다.
나는 그녀를 가볍게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아. 괜찮아. 나쁜 꿈을 꾼 것 뿐이야. 내가 있잖아. 그러니 울지말고 자."
"아빠. 어디 안 갈 거지? 나하고 같이 잘 거지?"
나는 벨을 보았다. 벨은 날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티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우리 착한 딸. 아빠는 어디 가지 않아. 그러니 같이 자자."
벨은 조용히 일어섰고, 나는 티리스를 안고 텐트 안에 누웠다. 티리스는 더욱 내 품을 파고들었고, 잠시 후 눈물을 멈추고 잠이 들었다.
나는 잠이든 티리스를 놔두고 일어섰다. 텐트를 나오니 모든 여성들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불길 가까이에 앉아 먹던 저녁을 다시 먹기 시작했다.
마야가 나에게 물어왔다. "티리스는?"
"지금 잠들었어."
현정이 물었다. "너를 아빠라고 부르던데?"
어이! 이런 상황에서 뭘 알고 싶다는 거지?
벨이 말했다. "티리스가 말을 하게 되다니 놀랐어요. 그리고 용사님을 아빠라고 부르다니..."
용사님? 나 말야?
"다행이에요. 티리스가 말을 할 수 있게 돼서. 평생 한마디도 못할 것 같았는데."
"티리스가 겪은 일에 대해 말해주시겠습니까?"
모든 여성들이 나를 노려보았다.
"티리스를 고치려면 사정을 알아야 합니다."
벨은 한숨을 내쉬었다.
"티리스가 있던 마을에 마왕군의 패잔병이 도주해왔죠. 마왕이 다스리던 지역이었지만, 그들은 자국민이라고 그 마을을 봐주지 않았어요. 그 마을 사람들은 인간측 군인들이 아닌, 평소에 자기들을 지켜주던 군인들에게 당한 거죠."
모두들 주먹을 쥐고 분노를 품었다.
"자국민이라 자비가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들은 인간 군인들보다 더 잔혹했어요. 보이는 대로 죽이고 약탈하고 불 지르고, 티리스의 부모님도 그 때 죽었죠. 티리스의 눈 앞에서. 그리고.... 그리고..."
그 이후의 일이 무언지 잘 알고 있었다.
"티리스는 같이 범해진 마을 여성들과 함께 여기에 왔어요. 그 때부터 티리스는 아무 말 못했죠. 같이 온 사람들 중에 하나가 자살을 하고, 그 때 티리스는 너무 충격 받아 땅만 파고 지냈죠. 이후 티리스가 임신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같이 온 사람 중에 임신한 사람과 부둥켜 안고 울었어요. 그 날이 티리스가 처음 울음 소리를 낸 날이죠."
벨은 눈물을 흘리며 계속했다.
"티리스와 같이 온 사람 중에 같이 임신한 그녀 밖에 남지 않았어요. 다행히 임신을 피한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지나던 행상을 따라가고 그렇게 하나씩 우리를 떠났죠. 티리스의 친구도 아이를 낳고 자기만 떠나겠다고 했어요. 나에게 부탁했죠. 내 아이를 키워달라고.
모두 그러니까 나도 그러라고 했어요. 하지만 티리스는 여기 남고 싶다고 했죠.
상상이 가요? 티리스는 이제 겨우 12세입니다. 저런 아이가 아이를 낳는 기막힌 상황이 너무 억울해요. 티리스의 친구도 이제 겨우 15세입니다. 그런 소녀들이 전쟁 때문에...
그리고 우리 신전에 있는 아이들을 보셨나요? 어쩔 수 없이 낳고, 키울 수 없어 버리고, 낳았지만 키울 수 없어 여기에 맡기고 간 사람들도 많아요.
나도 나도... 힘들어 그만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하지만..."
옆에 있던 엘리자가 벨의 어깨를 잡고 안아주었다. 벨은 그녀 품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결혼도 못해본 20대 여성이 감당하기에 너무 힘든 일이었다.
벨은 울다가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티리스의 아이를 죽일 건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티리스는 살려주실 건가요?"
다시 끄덕였다.
"그럼 부탁드려요. 티리스를 살려주세요. 그 불쌍한 아이를..."
현정이 물었다. "벨 사제님도 티리스의 아이를 살릴 마음이 없네요."
"나는 아이를 키울 수 없는 사람들을 많이 봤어요. 그들은 짐스러워 했죠. 자기가 배 아파 낳은 아이 때문에 자기가 죽을 수 없다고 했어요. 그나마 나 같은 사람이 가까이 있다면 다행이죠. 어떤 곳에서는 아이를 그냥 방치하는 사람도 있어요. 죽으면 땅에 묻으면 그만이라고.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나도 그들에게 아이가 불쌍하지 않냐고 말했어요. 그래서 제가 맡는 거죠. 원래 키울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생겨진 아이니까요. 누가 낳으면 알아서 큰다고 말하죠. 그건 무책임한 말이에요. 원해서 생긴 아이가 아니라면 포기하는 것이 현명하다 생각할 때가 많아요.
티리스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어요. 포기하라고. 티리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위해서라도. 그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되는 때가 많아요."
"하지만 불쌍하잖아요. 원해서 생기지 않았어도 세상에 나온 것도 그 아이들 책임은 아니잖아요."
"그럼 그 아이 때문에 그녀들이 힘들어 해야 해요? 그녀들의 책임도 아니에요."
"하지만..."
"원해서 생긴 아이가 아니라면, 나는 그들에게 포기해도 좋다고 말해요. 그들이 쉽게 아이를 포기하는 줄 아세요? 맡겨 놨다가 달려와 다시 데려가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은 아이를 안고 펑펑 울어요. 그 사람들이 평생 그 아이를 생각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왜 모르죠?
아아... 모르겠죠. 아이를 낳아보지 못한 나도 잘 모르겠는데, 당신 같은 사람이 뭘 아시죠?"
"하지만 불쌍하잖아요. 살아 있잖아요. 그런데..."
"그들도 죽지도, 죽이지도 못해서 나에게 맡기는 거예요."
갑자기 텐트에서 티리스의 울음 소리가 났다.
"아빠. 아빠..." 티리스는 아빠를 찾았다.
벨과 여자들은 나를 바라보았다. 티리스가 찾는 것은 나라며.
내가 텐트 안에 들어가니 티리스는 나에게 달려들었다.
"아빠. 아빠. 무서워.... 무서워..."
나는 티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착하지. 아빠가 여기 있어. 그러니 걱정말고..."
티리스는 내 품에서 울다가 잠이 들었다.
.................
다음날 아침. 내가 먼저 잠에서 깨어 티리스 몰래 텐트를 나섰다. 우리는 해가 뜨기까지 기다렸다. 밝은 날이면 티리스가 안심할 것이라 생각했다.
제니스와 엘리자는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엘리자의 손놀림이 많이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그런데 16세의 제니스가 40세의 엘리자에게 명령하는 모습을 보니 많이 우스웠다. 엘리자가 제니스처럼 16세로 어려지면 어떤 모습일까 상상해보니, 보통 키에 천연 거유 소녀였다. 제니스와 달리 실수가 많고, 단순하고, 순진했다. 일본식으로 표현하자면 천연이었다.
지금도 채소를 칼로 자르다 손가락을 베었다. 제니스는 힐링으로 상처를 치료해주고 엘리자에게 잔소리를 했다. 철든 딸이 철모르는 어머니에게 세상 사는 법을 가르쳐주는 모습이었다.
벨은 텐트에서 티리스와 함께 나왔다. 티리스는 나를 보고 무서워 벨의 등 뒤에 숨었다. 밤새 나를 아빠라고 부르고 내 품에서 떨어지지 않았는데, 지금은 피하고 있었다.
제니스는 만든 스프를 떠서 제일 먼저 티리스에게 가지고 갔다.
"티리스, 어서 먹어."
벨과 함께 앉은 티리스는 스프를 맛보더니,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벨이 빵을 내밀자 빵을 미친 듯이 뜯어 먹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우리는 티리스가 먹는 것을 보며, 각자 먹기 시작했다. 나는 티리스에게서 떨어져 그녀가 먹는 모습을 바라보았고, 눈이 마주치자 티리스는 무서워 벨 뒤로 숨었다.
아침을 먹고 우리는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수레에 벨과 함께 탄 티리스는 벨의 품 안에서 떠나지 않았다. 수레 주변을 우리가 호위하는데,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아 고개를 돌리면 내 시선을 피했다.
다시 점심을 먹기 위해 이동을 멈추었고, 제니스와 엘리자가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그런데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티리스의 눈빛이 느껴졌다.
내가 돌아보자 티리스는 내 눈을 피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에게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일어서 다가가자 티리스는 벨 품에 안겨서 나를 바라보았다.
벨은 티리스를 안고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시죠?"
"티리스가 나에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아요."
벨이 티리스를 바라보자, 티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
티리스는 배를 만지며 물었다. "내 아이를 죽이실 건가요?"
티리스가 말을 했다. 모두가 놀라서 티리스를 바라보았다.
나는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나도 죽일 거예요?"
"아니, 넌 반드시 살릴 거야."
"내 아이를 죽인다면서 나를 살릴 수 있어요?"
"그게 가능하니까 너를 구한 거야."
"내 아이를 살려주세요."
"안돼."
티리스는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조금 차가운 목소리를 냈다.
"내가 지금부터 할 말이 있어. 듣기 싫으면 지금 듣기 싫다고 말해. 하지만 시작하면 누구도 날 말릴 수 없어. 끝까지 말할 거고, 넌 끝까지 들어야 해.
묻겠어. 듣고 싶어?"
티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너는 네가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맞아. 넌 불행에 빠졌고 힘든 상황이야. 그래서 우리가 널 도와주는 거야.
하지만 넌 특별하지 않아. 그걸 아는 거야?"
티리스는 나를 바라만 보았다.
"너는 지금 자신이 특별히 불행하고 특별히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너는 특별하지 않아.
알아? 너는 특별하지 않아. 너와 같은 수백명 중의 하나일 뿐이야. 너만큼 불쌍한 사람이 수백, 수천이 넘어? 그 것을 알고 있어?"
티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너는 우리 같이 널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 죽을 순간에도 살려줬고, 널 죽도록 놔두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지금도 널 보호하고 있어. 넌 불행하지만, 다른 사람들 보다 덜 불행한 거야. 너보다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많아. 그걸 알아?"
내 말을 들은 모든 여자들이 일어서 나를 바라보았다.
"여기에 오는 동안 수백명의 너 같은 여자들을 만났어. 부모가 죽고, 남편이 죽고, 범해져 아이를 가지고, 원치 않는 아이를 낳고... 그런 수많은 여자들을 만났어.
만약 네 몸 안에 있는 아이가 마왕이 아니라면 너도 그들 중의 하나야. 우리가 스쳐지나갔던 수백명 중의 하나라는 말이야."
현정이 나를 말렸다. "송재신! 그만 해!"
나는 여자들을 돌아보았다.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만났지? 그들이 낳은 사생아들이 몇 명이었지? 마왕이 아니었다면 티리스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 지나쳤을 거야. 아니야?"
모두들 아무 말 못했다.
"티리스, 넌 벨 사제님의 보호로 살고 있지? 그 안에 너와 비슷한 사람이 몇 명이지? 너는 그래도 운이 좋아. 벨 사제같이 자비심이 많으신 분이 계시니까. 우리가 스쳐지나온 몇 개의 마을에서 아이를 안고 힘든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을 봤어. 너와 비슷한 경우 때문에.
그 사람들 중에 몇 명이 이렇게 말했어. 살아야 한다고. 죽을 수 없다고.
너한테 이 말을 해주겠어. 살아! 죽지 마!"
티리스를 비롯한 모두가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네 몸 안에 있는 아이를 살려둘 수 없어. 그리고 너도 죽일 수 없어. 그러니 내가 해줄 말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라고 말해주고 싶어."
"나는 살고 싶어요. 이 아이와..." 티리스는 자기의 배를 만졌다.
"그럼 그 아이와 살아갈 힘이 있니? 벨 사제님 없이 혼자서?"
티리스는 아무 말 못했다.
"지금 힘들다고 앞으로 닥쳐올 현실을 외면할 셈이야? 넌 어떻게 이 아이와 살아남을 거지? 이 아이를 낳고, 어떻게 굶지 않고 따뜻하게 살 거지?"
"이 아이는... 로엔 언니처럼 벨 사제님에게 맡기고..."
"아이를 버리고 혼자 살 생각이었구나."
"이 아이를 죽일 수 없어요."
엘리자가 다가와 티리스의 손을 잡았다.
"티리스, 난 마왕을 낳은 사람이야. 내가 너 만한 나이에 너처럼 마왕을 임신하고 낳았어. 나도 그 때는 너처럼 매일 내 배를 만지며 내 아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었어. 네 아이도 아니야. 마왕일 뿐이야."
엘리자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요새에서 네가 묶여진 형틀... 30년 전에 내가 묶였던 형틀이야. 나는 그 방에서 마왕을 임신하게 되었어. 네가 묶였던 그 형틀에 묶여, 손발이 묶여진 채 옷이 벗겨지고... 어두운 곳에서 누가 내 배 위에 올라오는 지도 몰랐지. 그리고 몸이 찢겨지는 아픔을 겪고 나는 마왕을 내 몸속에서 키우게 된 거야.
내 몸 속에서 자라는 아이를 보며, 나는 그 아이를 눈으로 볼 날을 기다렸어. 수시로 내 배를 발로 차는 아이를 느끼며, 난 행복해 했어. 그 날 그 방 안에서 당한 두려운 기억을 잊어버릴 정도로... 그 아이가 내 몸 밖에 나오고 내 품에 안겼을 때, 나는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어.
그런데 그 것은 거짓이었어. 나는... 나는... 그 아이가 내 아이인줄 알고 젖을 물리고 품에서 키웠어. 하지만 그는 내 아이가 아닌 마왕이었어. 걸어다니고 말을 할 수 있게 된 순간, 나는 그의 엄마가 아니었던 거야. 그는 마왕으로 날 대했어... 그리고... 그리고..."
엘리자는 울음을 터트렸다. "난... 나는... 그의 아내가 되어야 했어...."
모두 충격 받고 아무 말 못했다. 마왕을 낳고 그의 아내가 된다고? 도대체 이런 막장이...
"그건, 마왕의 관습이야. 마왕을 낳은 여성은 나중에 마왕의 왕비가 되어야 해. 내가 낳은 아이가... 그는 날 범하고 임신까지 시켰어. 나는 그의 아이를 낳아야 했어. 내가 낳은 아이의 아이를..."
엘리자의 울음이 더욱 커졌고, 모두 아무 말 없이 엘리자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아무리 나라에서 내려오는 관습이지만, 그런 일을 당해야 하는 난... 난...
그 전에 나는 그를 내 아들이라 생각했어. 어느 순간 그는 나의 남편이 된 거야.
그가... 그가... 처음 날 범하던 날. 나는 스스로 목숨을 버리려 했어. 하지만 그에게 강제로... 난 난... 그 날 이후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또 받아들여야 했어.
그리고... 그리고... 내가 그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아는 순간... 나는..."
엘리자는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몸을 펴서 티리스를 안았다.
"마왕이 죽고 다시 아이 몸에서 다시 태어나려고 했어. 너만한 여자 아이였어. 그녀는 내가 겪은 일을 앞으로 겪을 사람이었어. 그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고 가슴 아픈 일인지 모른 채, 그 때의 나처럼 자기가 특별해졌다고 좋아했어.
티리스, 너는 이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힘들 거야. 아플 거야.
하지만 이 아이가 크면 너는 더 아파야 해.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을 수백수천번 하게 돼.
지금 네 몸 속에 있는 아이는 네 아이가 아니야. 마왕이야. 장차 네 남편으로 널 범할 남자야. 그 때 너의 아빠엄마가 죽던 날에 당했던 그 일을 너에게 할 남자야. 널 임신시키고 아이를 낳게 만들 남자라는 거야. 그 걸 알아야 해.
아플거야. 힘들 거야. 하지만 내가 겪은 고통을 너는 겪지 말았으면 해. 지금 마왕을 포기하면 너는 아플 거야. 하지만 그 것으로 끝나. 나처럼 몇 배 더한 고통을 겪지 않아도 돼."
엘리자는 티리스를 몸에서 떨어져 그녀의 어깨를 잡고 눈을 마주했다.
"티리스. 제발 내가 겪었던 고통을 너는 겪지만, 이제 그만 끝내줘. 제발 네 몸 속의 마왕을 포기해줘. 이대로..."
"우아앙.... 안돼... 안돼..." 티리스는 엘리자의 품에 뛰어들어 울음을 터트렸다.
주위에서 그들을 보는 우리는 아무 말 못하고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