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부인들의 사생활
마왕성에 돌아오니 현정은 멍하니 호수 앞에 앉아 있었다.
내가 그 옆에 앉아도 현정은 시선을 호수 가운데 석상에서 고정시킨 채였다.
“괜찮아?”
현정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새 엄마가 임신했다고 찾아왔을 때, 엄마는 큰 충격 받았지만 태연한 척 했어. 그 자리에서 말했지. 친자 확인 검사 하자고.
그 때 아빠 아들이라고 나왔어. 엄마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이혼장을 던졌지.
그런데 그 검사에서 나도 같이 검사했었나 봐. 그 때부터였어. 아빠가 날 보는 눈빛이 달라진 게. 난 모두 새엄마 탓인 줄 알았는데..."
우리 둘은 아무 말 없이 나란히 앉아 있기만 했다.
“넌 어때? 내 출생에 대해 들었다며? 그렇게 내가 생겨났는데, 괜찮겠어?”
“부모는 선택할 수 없잖아. 인연을 끊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다행히 네 엄마의 죽음을 알고 그 쪽에서 손을 뗄 것 같아. 이제 그 쪽을 신경 쓸 것 없어.”
“난 왜 태어났지? 외할아버지가 엄마를 그런 식으로...
남자들은 왜 그런 거지? 여자라면 짐승처럼 달려들어. 아무리 힘들어도 딸을 그런 남자들에게...”
난 한숨을 내쉬었다.
“내 아들 이야기를 해줄까? 내가 두 번째 세상에서 대지모 여신전에 있을 때, 내 아들이 날 찾아왔어. 아직 성인이 안 된 그 애는 자기가 살아온 개월 수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였어. 그 나이에.
그리고 술이 취한 상태에서 나에게 외쳤어. 왜 날 태어나게 했냐고.”
현정은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았다.
“내 아이들은 보통 사람의 몇 배 넘는 힘과 마력을 가졌어. 그래서 나라에서 관리했지. 그 강력한 힘으로 어릴 때부터 전쟁에 끌려 다녀야 했어.
그 애는 매일 사람을 죽이는 일에 지쳐 술에 찌들어 살았어. 견디다 못해 날 찾아왔는데, 난 여신관들과 아이 만드는 일에 힘쓸 때였지.
여자들 사이에서 웃고 즐기는 나를 보고, 그 애는 분노했어. 나에게 싸움 걸었지만, 날 이길 실력은 아니었지.
그 자리에서 그 애는 울부짖었어. 날 왜 태어나게 했냐고. 왜 날 만들어 사람 죽이는 기계로 만들었냐고 말야.”
나는 하늘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 애는 나중에 어떻게 되었어?”
“싸우다 죽었어. 보고 있던 몇 명이 알려줬는데, 그 전부터 죽고 싶어하는 눈치였대. 싸우다가 도망치지 않고 혼자서... 누군가 날 죽여 주세요 라며 전쟁터에 뛰어들었대.”
나는 현정의 손을 잡았다.
“내가 지금처럼 그 애의 손을 잡아주었다면 달라졌겠지만, 난 그 애에게 등 돌렸어.”
“왜? 아들 아냐?”
“아들이지만 그 엄마를 미워했거든. 그 엄마는 왕이 보낸 내 감시자였어. 그걸 알고도 난 그녀와 살면서 아이를 낳았어. 우리는 서로를 감시하며 살았지.
내가 그녀를 미워하게 된 건. 나보고 대지모 여신교에 들어가 자손을 많이 남기라 하는데, 난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해 거절했고 같이 다른 나라로 도망치려 했어. 그런데 그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날 버렸어. 어느날 자던 나만 놔두고 집을 나가버렸지.
난 홧김에 대지모 여신교에 당장 들어갔고, 그녀에게 복수하는 마음으로 여러 여자들을 건드렸어.”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애가 왔을 때, 그 애가 그 엄마를 너무 닮아서, 그 엄마가 생각나서. 난 등을 돌렸어. 그 애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아무렇지도 않았어.”
“우리 아빠도 그렇겠네.”
“죽을 때가 가까워서야 그 애가 불쌍해졌어. 그 때는 너무 늦었지. 다른 자식들이 많았지만, 아이 때 안아주고 커가는 모습을 본 아이는 내 전처의 아이들 뿐이야. 그 애는 날 많이 따랐지만, 그 엄마 때문에 미워했어. 생각해보면 괜한 고집이었어.”
“우리 아빠도 그럴까? 시간이 지나면 나에게 미안해 질까?”
나는 말 없이 현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만약 내가 그 때 그 아이의 머리를 이렇게 쓰다듬어주었다면 달라졌을까? 그런 생각도 많이 했어.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러더라. 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라고.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에 더 신경 쓰라고.”
“나에게 하는 말이네?”
“그래. 네가 태어난 것. 부모들에게 학대 당한 것. 돈 때문에 몸 판 것. 모두 지나간 일이야. 더 생각하지 말고 오늘과 내일에 더 신경 쓰라고 하고 싶어.”
현정은 두 팔로 자기 어깨를 잡고 웅크렸다.
“하지만 없던 것으로 할 과거들이 아니잖아.”
“그래서 내가 있잖아. 이런 큰 성을 가진 남편을 두고 무슨 고민을 하지? 네 과거들? 내가 가진 금덩어리들과 마법이 있으면 해결 가능해.”
현정은 피식 웃었다. “여기만 나가면 고딩인 주제에.”
“내 마누라들이 있잖아. 마야와 제니스는 네 일이라면 반드시 나설 거야. 그런 마법사들을 친구로 두고 있잖아.”
“크하하하! 맞아. 난 용의 화신이지!” 현정은 크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고마워. 이렇게 날 위로해줘서.”
“그 보답은 밤에 받고 싶어.”
현정은 나를 보며 웃었다.
“그럼 한가지 보여줄게.”
현정은 하늘을 날아 호수 가운데의 석상 앞에 내려앉았다. 석상 아래 기단 부분에 손을 대자, 호수가 흔들렸다.
나는 흔들리는 호수에 놀라 일어섰다.
호수는 물이 빠져서 바닥이 드러났다. 아래는 오랫동안 쌓인 물때와 수초, 흙더미로 더러웠다.
“잘 봐. 송재신. 이게 내 육체니까.”
현정이 기단에 손을 대자, 호수 바닥이 갈라졌다. 바닥은 양쪽으로 갈라지더니, 위에 놓인 흙을 포함한 것들이 아래로 떨어졌다.
호수 바닥이 다 열리고 아래가 드러났다. 그 아래에 용이 잠들어 있었다.
현정이 아래로 내려갔고, 나는 따라가 현정 옆에 섰다. 바닥은 호수에 고인 여러 물질들로 더러웠고 냄새도 심했다.
나와 현정이 잠든 용을 바라보는데, 그 용 위에 더러운 것들이 많았다.
“서방님. 뭐죠?”
마야, 미야가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미야가 마야를 안고 아래로 내려왔는데, 바닥에 있는 진흙에 발을 더럽혔다.
마야는 더러운 줄 알고 땅에 내려와 우리에게 걸어왔다.
둘은 용을 보고 놀랐다.
“이 것은... 라노크...”
“맞아. 내 육체지. 너희 조상이 날 가두고 육체와 영혼을 분리했어.”
미야가 놀라서 현정을 바라보았다.
“네 육체라고? 라노크의 육체? 그런데 왜 여기 들어가지 못했지?”
“들어가도 나갈 방법이 없으니까. 더구나 난 내 마음대로 이 육체에 들어갈 수도 없어요.”
현정은 용의 목에 달린 목걸이를 두드렸다. “이 것 때문에.”
마야가 현정을 노려보았다. “서방님께 이 걸 풀어달라는 것이냐?”
“설마. 라노크는 지금이 좋대요. 내 몸으로 서방님께 사랑받는 것이 좋다나? 난 이래도 저래도 좋아요.”
마야와 미야가 안도했다.
“왜 지금까지 여기에 대해 말 안했지?”
“주위를 봐요. 호수 안에 이렇게 더러운 것이 많은데, 함부로 열고 싶나요? 지금 여기를 치우고 내 몸을 닦아 달래요.”
마야가 손을 들자, 마물들이 나타나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잠깐! 현정아. 넌 라노크 아냐? 왜 마야에게 부탁하지? 네가 마물들에게 명령하면 되잖아.”
현정은 나를 가리켰다. “내가 너와 계약했으니, 전처럼 마물들을 다룰 수 없어. 너 때문이잖아.”
“그게 왜 나 때문이야?”
“네가 이 마왕성의 관리를 모두 네 본처에게 맡겼잖아. 마음 속으로 그렇게 결심했고 그렇게 계약했어. 난 이 성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어.”
마야가 물었다. “혹시 마왕성의 마력이 모자른 것도?”
“맞아요. 저 재신이, 아니 서방님에게서 마력을 받아야 하는데, 이 마왕성은 마야씨에게서만 마력을 받을 수 있어요. 그러니 마력이 부족하죠.”
“나와 서방님은... 그 정도로 그 만큼 마력이 채워져?“
“본처 외의 부인들에게서도 마력을 가져오는 게 누구시더라?”
마야가 조금 물러섰다. 아마 마야는 부인들에게서도 마력을 가져와 마왕성에 채우는 것 같았다.
마야가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지금까지 그랬다 쳐.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마력을 채워야지?”
“별 수 있어요? 다 저 서방님에게 달려있지.”
3명이 날 봤다.
“뭐야? 그럼 내가 줄기장창 그런 짓 하라는 거야?”
“마왕성을 유지하려면.”
마야와 미야는 얼굴을 찡그렸다. 여자로서는 그렇게 많이 하는 것을 좋아할 리 없다.
“걱정 말아요. 서방님의 레벨도 올라가, 하루에 두 번 정도면 문제 없어요. 더 사용하려면 문제지만.”
마야가 중얼거렸다.
“하루에 두명... 두 명 씩 봉사하면 되겠네. 나, 미야. 제니스, 티리스, 리나, 엘리자, 현정 그렇게 돌아가면... 부인을 더 늘려야 겠어.”
어이! 나보고 매일 그 일하라고? 여자를 바꿔가며?
3명의 여자들이 나를 보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내가 힘쓰면 되는 건가? 너희들은?”
3명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마야는 현정을 바라보았다. “많이 나아진 것 같네?”
“티리스나 다른 사람들만큼 내가 불행한 것도 아닌 것 같으니까.”
현정은 두손을 깍지 끼고 위로 들어 올려 기지개를 켰다.
“어쨋든 아직 죽기 싫어. 울면서 시간 낭비하기도 싫고. 그런 일 하는 와중에서도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부인이 될래?”
“아직은요.”
마야의 얼굴이 실망이 보였다. “이렇게 거부하는 진짜 이유는 뭐지?”
“아마 부모의 이혼 때문 아닐까?”
내 말에 마야와 미야가 바라보았다.
“게다가 아이를 안고 들어온 계모. 결혼에 대해 혐오를 가지는 것이 아닐까?”
현정은 고개를 돌렸다. 긍정이었다.
“이혼이 없는 세상에서 살았던 마야나 미야는 널 이해 못해. 그래서 내가 나선 거야.”
나는 마야에게 얼굴을 돌렸다. “마야. 여기를 정리하고 현정이와 함께 와.”
여자들 끼리의 대화에 내가 끼는 것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
저녁 식사 시간에 모두 모여 식사를 했다.
현정이 식사에 꼭 참여하는 이유는 다른 곳의 음식보다 훨씬 낫기 때문이었다. 현정은 자기 앞에 놓인 생선 스프를 맛있게 먹었다.
마야는 현정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미야, 제니스, 엘리자는 왕족 출신이라 예의가 몸에 배어 있는데, 현정은 그런 것이 없었다.
나는 웃으며 다른 부인들을 보는데, 티리스도 현정 만큼 식사 예절이 좋지 않았다.
티리스가 입을 열었다. “저어... 서방님. 이런 부탁을 드려도 괜찮은지...”
나는 티리스를 보며 웃었다.
“전 농사를 짓고 싶어요. 소와 양도 키우고 싶고.”
티리스는 역시 농민의 딸이었다.
미야가 말했다. “성 밖에서 땅은 얼마든지 있어. 마물을 시켜 농사를 지을 수도 있고. 서방님만 허락하신다면.”
“미야. 티리스가 원하는 대로 해줘. 그리고 농사를 지으려면 논밭과 가까이 살아야 하는데, 성 밖에 집이 필요하지 않아?”
마야가 반대했다. “서방님. 부인들은 반드시 성 안에 살아야 합니다.”
“워프석이 있으면 문제 없잖아. 아침과 저녁 식사는 빠지면 안되고, 언제든지 내가 부르면 여기로 와야 해. 그 정도면 되지?”
마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야. 티리스를 도와줘.”
미야가 고개를 끄덕였고, 티리스는 기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그리고 티리스. 정원에 있는 네 육체를 지하로 넣어. 현정아. 티리스를 도와줘.”
티리스는 영문을 모른채 나와 현정을 번갈아 보다, 현정과 눈이 마주쳐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현정이 전날처럼 호수 바닥을 열고 티리스 몸에서 빠져나간 아리아가 날아와 라노크의 옆에 누웠다.
현정이 마력을 투입하니, 호수 바닥이 다시 닫히고 물이 채워졌다. 호수가 달라진 것은 전에는 여러 물질로 물이 탁해 바닥이 보이지 않았는데, 지금 깨끗하게 청소해 바닥의 돌들이 보였다. 깊이를 보니 2m는 넘는 것 같았다.
수문을 열고 물이 채워지자, 물고기들이 다시 들어왔다.
어제 엘리자와 밤을 보내는데, 정말로 신선했다. 수 많은 여자들과 밤을 보냈지만, 엘리자는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해주었다. 두 번째 세계에서 몇 번 밖에 느껴보지 못한 느낌이었다.
처음 엘리자는 리나와 함께 나를 기다렸다. 침대 위에서 그녀는 부끄러운 듯 눈을 뜨지 못하고 벌벌 떨며 누워 있었다. 그런데 점차 나에게 안겨 왔다.
리나가 고양이라면, 엘리자는 강아지의 느낌이었다. 나에게 안겨오는 모습이 커다란 강아지가 내 얼굴을 혀로 핥는 기분이었다. 강아지처럼 내게 조르는 모습에 귀여움이 더해졌다.
아침식사를 위해 회랑으로 나오는데, 엘리자는 잘 걷지 못하고 리나의 부축을 받았다.
마야가 놀렸다. "엘리자, 어제 서방님을 잘 모신 것 같구나."
엘리자는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돌렸다.
"서방님은 너무하세요. 리나와 같이 해도 감당할 수 없어요. 리나가 중간에 힐링을 걸어주지 않았다면... 그런데도 리나도 쓰러져 버리고 나만 감당하려니 힘이 들어서 중간에..."
티리스가 물었다. "서방님을 모시는 일이 힘들어요?"
제니스가 말했다.
"서방님을 모시려면 하루에 열명도 힘들어. 그나마 자제하시니까 하루에 2명이 시중을 드는 거야. 2명이 서로 힐링을 걸어주지 않으면 그 것도 힘들어."
"그럼 내가 시중을 들 때는 몇 명이 있어야 하죠?"
"티리스가 처음 서방님을 모실 때, 내가 옆에 있어줄게."
제니스는 티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 앉아 음식을 먹는데, 마야가 제안을 했다.
"올해는 거의 연말이니, 내년에 부인들을 명성학원에 다니게 할 생각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마야에게 쏠렸다.
"나와 미야는 괜찮고, 나머지 부인들은 학교에 같이 가서 서방님을 모셨으면 합니다."
"나야 뭐... 상관 없지만... 그럼 모두 같은 반으로?"
"당연하죠."
"하지만 티리스는 12세, 내년이면 겨우 13세야. 16세인 우리와 학교를 다니기엔..."
"서방님과 동갑으로 해서 다니면 됩니다. 마법으로 공부를 하면, 못 다닐 이유도 없지요."
나는 생각에 잠겼다. "혹시 민지를 받아드리려는 이유가 그 것 때문이야?"
"그렇습니다."
하긴... 우리를 한 반에 몰아넣으면 담임도 우리 편인 것이 좋다. 담임이 내 부인이라면 더욱 좋고...
"그래서 오늘 내려가 민지를 만나볼 생각입니다. 부인이 되지 못해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현정이 말했다. "나는 그 떡칠 화장 마녀가 싫어요. 재신이도 싫어하는데."
"아무리 싫어도 본처의 결정이야. 난 반대할 생각이 없어."
내가 선언하자 현정을 뺀 모두 마야의 결정에 따르는 분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