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4화 〉로렌의 공주 (74/148)



〈 74화 〉로렌의 공주

개학이 되어, 우리들의 첫등교날이었다.

마야는 워프마법진 위, 모든 부인들이 보는 앞에서 나에게 넥타이를 매어주었다. 앞으로 학교 다닐 동안 계속할 일이다.

모두 부러운 시선으로 나와 마야를 쳐다보았다.

현정이 비꼬았다.
"부러워 할 것 없어. 남자 목에 넥타이를 매어주는 것은, 한눈 팔지 말라는 뜻이니까. 남편 목에 밧줄을 걸고 당기는 아내의 의지야."

리나가 현정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말은 그래도 부러운 거지? 현정이는 츤데레라니까."

"나는 츤데레가 아니야. 그.. 그리고 리나가 어떻게 그런 말을 알지?"

리나가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흔들었다. "여러모로 편리해."

넥타이를 다 매고, 마야는 민지를 쳐다보았다. "서방님을 부탁한다."

제니스와 파르노가 내 옆에 섰다.

마야는 민지에게서 마력을 거두자, 민지가 40대 모습으로 돌아갔다.

우리가 모두 마법진 위에 서자, 제니스가 외쳤다. "그럼 학교로 갑니다."

...........

우리가 서 있는 곳은 학교 옥상이었다.

한꺼번에 내려가는 것이 좋지 않아 먼저 민지가 계단을 내려갔고, 3분 후 현정, 티리스, 리나, 엘리자, 린, 페트리아가 차례로 내려갔다

남은 우리 셋도 5분 후, 계단을 내려갔다.

2-7반, 우리 9명을 위한 특별반이었다. 새학기 조회라 민지가 교실에 들어왔는데, 절차를 위해 현정이 일어나 차렷, 경례를 했다.

"모두 잘 알겠지만, 내가 이 반의 담임을 맡은 조 민지이다."

모두 약간 웃었다.

"너희들이 2학년이라고 마음이 풀어져서는 안된다. 내년에 수능을 볼 예비 수험생의 마음으로 면학에 힘쓰기를 바라란다. 그리고 반장은 현정이다. 알겠지?"

모두 웃으며 민지를 보고 있었다.

"그럼 이상! 반장!"

현정이 일어났다. "차렷! 경례!"

현정의 호령에 따라 우리는 민지에게 인사했다.

민지가 나가자, 티리스가 불평했다. "서방님. 민지는 여기서 8번째잖아요. 그런데 저런 말투는 뭐죠?"

"티리스, 학교에서는 재신이라고 부르라고 했지? 그리고 민지가 부인이 될 때, 내가 허락한 특권이야."

"그 특권이 뭐죠?"

"학교에서는 선생으로 학생들을 갈굴 수 있는 특권. 학교에서는 민지가 나보다 위인 거야."

티리스는 중얼 거렸다. "맘에 안들어..."

1교시는 수학 시간이었다.

그 선생은 지난 달 나와 만난 민지의 친구였다. 나와 눈이 마주차자 불쾌한 듯 얼굴을 돌렸다.

"여기 반은 인원 수가 적어 좋은 것 같은데."

그녀는 티리스를 가리켰다. "너, 여기 나와서 이 것 풀어봐."

티리스가 받아보더니, 씨익 웃었다. "칠판에 적으라는 건가요?"

"그러니까 나오라고 했지."

티리스는 웃으며 풀이를 칠판에 적었다. 내용은 2학기의 정적분 문제였다.

티리스는 웃더니, 교탁에 있는 선생의 책을 뒤지더니, 한 곳의 문제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 문제를 풀어보죠."

티리스가 칠판에 적은 내용은 고교에서 미분을 이용한 계산 방법이지만, 그 증명 과정이 생략된 부분이었다. 티리스는 그 증명을 칠판에 적었다.

수학 선생이 놀랐다. "너 어떻게..."

현졍이 말했다. "지금 여기에 있는 학생들은 모두 대학 수준의 실력을 가진 사람들이에요. 이사장님의 부탁 때문에 여기 있는 거지, 지금이라도 대학 석사 과정에 지원할 수 있습니다."

수학이 모두를 둘러보다 나를 가리켰다. "그럼 여기 송 재신도?"

나는 웃었다. "이사장님께서 특별히 이 반에 저를 집어 넣으셨죠. 저는 이 반에서 제일 떨어지는 사람입니다."

내가 파르노를 바라보자, 그녀는 일어서 앞으로 나오더니 칠판에 선형 회귀 이론을 적고 설명했다.

수학 선생은 놀라서 아무 말 못했다.

파르노가 선생을 보고 웃었다. "우리의 수준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대한민국 고교 과정은 우리에게 낮은 수준입니다."

그 후, 수학 선생은 시간만 채우다 나갔다.

이 후 수업 시간에서 다른 교사들도 같았다. 특히 독일어 교사는 라틴어를 설명하는 제니스의 설명을 듣고 얼굴이 빨개졌다.

한달 후, 우리 반은 ‘천재 반’으로 알려졌고, 나는 그 반의 유일한 남자라며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놈’이 되었다.

.........................

린에게서 팔찌를 받은 이후, 나는 마야의 간섭 없이 마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워프 마법으로 마왕성 곳곳을 돌아다녔는데, 용이 있는 방 주위에 그만큼 빈 방이 몇 개 있었다.

마왕성 탐험 중, 4마리 용들이 잠들어 있는 방에 들어갈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그 안에 용은 3마리뿐이었다. 라노크가 없어져 있었다.

놀라서 그 방을 둘러보던 중, 가운데 서 있는 기둥에 손을 대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당장 그 기둥을 스캔 마법으로 조사해 보았다. 기둥 가운데에 사람의 형상이 보여서, 그 형상의 가까이에 손을 대어 보았다.

그러자 마야와 둘 만의 대화 때처럼 머리 속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 당신이 나의 주인님인가요?

“너는 누구지?”

- 저는 6대 마왕. 마야와 미야의 조상입니다.

"왜 여기에 있지?”

- 저는 제 몸을 여기에 봉인하고, 제 후손들에게 힘을 주어 나라를 다스리게 했죠.
그런데 당신은 마력으로 나를 이겼습니다. 진자는 이긴자의 노예가 되는 법. 나는 당신의 노예입니다.

“마족은 노예가 되면 불명예가 아니었나?”

- 그래서 당신이 오면 부탁드리고 싶었습니다. 나를 노예에서 벗어나게 해 주세요.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지?”

- 다른 마왕처럼 나도 당신의 부인으로 삼아주세요.

다른 마왕? 내 부인 중에 마왕이 있다?

이후에 있었던 일은 나중에 말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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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고사를 치룬 후, 전교 1등은 현정이고, 나를 제외한 모두가 10등 안에 들어있었다. 나는 80등 정도로만 했다.

시험이 끝나고 조금 풀어진 마음으로 점심시간에 책상을 엎드려 잠에 들었다.

그런데 무책임한 놈의 세계였다.

"여어. 또 만났네?"

- 이번에는 마왕 토벌이냐? 아니면 용의 부활?

"둘 다 아니야. 이번에는 여신을 깨워 줘."

- 여신?

"네가 처음 마왕을 죽인 그 세계에서 여신이 가출했거든. 그러니 그 여신을 찾아서 복귀 시켜줘야 해."

- 내가 왜 그런 일을 해야하지?

"네 책임이 있어. 그 세계에서 네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서로 죽고 죽이다가 세상이 엉망이 되었거든. 그래서 그 여신이 가출해 버린 거야."

- 그럼... 내가 아이들을 많이 만든 그 세계?

"네 책임이 있으니까. 다시 가서 수습해줘야 겠어."

- 어떻게 여신을 깨우지?

...................

이번 여행은 나만 홀로 가기로 했다. 내가 수 많은 여성들에게서 수 많은 아이를 만들었다는 것을 부인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고, 무책임한 놈에게 제시한 특전이 기대되었다.

무책임한 놈의 설명을 다 듣고 깨어보니, 옛날 내가 살던 대지모여신의 신전이었다.

그렇지만, 신전 내부가 너무 더럽고 부서져 있었다. 버려진 지 오래 지난 것 같았다.

신전을 나와 보니, 신전 앞의 제단에 불이 없었다. 그 불은 절대 꺼지지 않는 여신의 불이라 칭해진 것인데, 지금 꺼져 있었다.

신전으로 올라오는 길은 통행인이 없는지 잡초 투성이였다. 신전이 버려진 지 꽤 오래되어 보였다. 이 정도라면 무책임한 놈 말대로 여신이 가출한 것 같았다.

우선 근처 도시로 갔다.

대지모여신 신전에 참배하려면 이 곳에서 쉬면서 순번을 기다렸기 때문에, 이 마을은 항상 사람으로 붐볐다.
더욱이 내가 온 이후, 임신한 여신관들이 이 도시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곳이었다.

그 도시도 쇠락한지 오래였다. 지금 도시는 크기가 십분지일 이하로 줄어 있고, 버려진 건물도 많았다.

우선 이 곳의 사정을 알기 위해, 잘 알고 지내던 여관으로 갔다.

이곳 여관 주인을 보니, 옛날 어릴 때 몇 번 본 사람이었다. 나이를 보니 30대 중반, 내가 죽은 지 20년은 넘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지나가는 여행객인데 쉬어 가고 싶습니다."

"하루에 동화 3개입니다."

나는 주머니에서 장신구를 꺼냈다. "돈이 없으니 이걸로 대신할 수 없을까요?"

주석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머리핀을 보고, 주인이 나와 그 물건을 번갈아 보았다.

나는 주머니에서 또 하나를 꺼냈다. 구리 반지였다. "이 정도면 3일은 괜찮겠습니까?"

주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2층의 구석방으로 안내 되었다. 과거 이 여관은 3층 건물 4개로 운영했는데, 지금 하나 밖에 없는 것 같았다. 3개의 건물이 버려져 있어 황량했다.

우선, 이 곳에서 머물며 상황을 파악하기로 했다. 몇몇 여행가들과 친해져 이야기를 나누니, 무책임한 놈의 설명이 맞았다.

나의 후손들은 내가 죽자 서로 싸우기 시작했고, 거기에 여러 국가가 끼어들어 나의 후손들은 저주받은 일족으로 알려졌고, 전쟁 막바지에 모두 체포되어 죽었다. 어느 나라의 왕족들만 빼고.

내가 낳은 아이들이 그렇게 배척당하고 비참하게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가슴 속에서 무언가 끓어올랐다.

그 날, 나는 이성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셨다.

다음날, 나는 도시 주변을 돌아보며 옛 추억을 되짚어 보았다.

이 도시는 내가 가끔 변장을 하고 나와서 놀던 곳이었다. 그 때 이 도시는 대지모여신 참배객들로 매우 복잡한 곳인데, 대지모여신이 없는 지금, 이 도시가 완전히 쇠퇴해 버렸다.

옛날 여신관들과 놀던 술집, 분수들을 돌아보며, 지금의 폐허에 너무나 슬퍼졌다.

더 이상 이 곳에 있을 수 없다는 마음에 도시를 떠났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 이 도시에서 다음 마을로 가려면, 새벽 일찍 출발해야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해가 진 이후에 숲에 있는 것은 마물의 표적이 될 뿐이었다.

지금 해가 진 숲 가운데 있는 나는 마물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내 주위로 마물들이 몰려드는 것이 느껴졌다.

과거에 같은 경험이 있었다. 우리 파티의 리더인 프레드릭은 너무 자신감이 넘치는 근육바보였다. 그는 주위의 충고를 무시하고 암살에 나섰다. 암살을 성공해도 도망치는 것이 문제였고, 우리는 마물들이 득실거리는 숲으로 일부러 들어갔다.

그 곳에서 우리는 마물에게 위험에 빠졌고, 그는 죽을 때까지 싸우다 마물에게 먹혀버렸다.

나와 메트라, 야다, 쥬스도 등은 마물들의 포위망을 뚫고 필사의 탈출을 했고, 그 와중에서 나는 차츰 전위 전사의 역할을 하며 파티를 이끌었다.

그 때 프레드릭의 애인들이었던, 메트라와 야다는 탈출에 성공한 이후 자연스레 내 애인이 되었다.

지금 그 때가 생각났다. 마물들의 추적을 받으며, 숲속의 어둠을 헤매던 때가. 우리를 조여 오던 늑대들의 울음 소리와 뱀들의 숨소리가 지금 내 귀에 들려왔다.

내 꿀꿀한 마음에 짐승의 소리가 들려오자, 피가 끓어올랐다.

"흐흐...흐흐.. 우하하하!" 내 웃음 소리가 울려 퍼지고, 그 신호로 마물들이 달려들었다.

..............

해뜨기까지 처절한 싸움을 하고, 나는 마물들의 피를 뒤집어 쓴 채 갈증이 몰려왔다. 그 동안 물을 마시지 못할 정도로 쉼 없이 마물들이 나를 공격했고, 나는 주위에 마물들의 시체를 쌓아나갔다.

해가 떠서 보이는 광경은 마물들의 시체 조각들과 피로 뒤덮여 있는 지옥이었다.

나는 물 냄새를 맡고 따라갔다. 그 곳에 작은 샘이 있었다.

물을 마시려는데, 내 목 뒤에 칼 끝이 느껴졌다.
"너는 누구냐?"

마물과 한바탕 싸움을 해 온 나는 다시 살의가 끌어 올랐다.

"그만 두세요. 저 분이 먼저 온 겁니다. 기다리죠."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였다.

내가 물을 먹고 일어서니, 여성 한명을 20명 이상의 기사들이 보호하고 있었다. 기사 갑옷의 문장을 보니, 그는 로렌 왕국 사람이었다. 깃발을 보니 왕족을 호위하는 것 같았다.

"로렌의 공주님께서 이런 깊은 산 속에 무슨 일이죠?"

"근처에 널린 마물들의 시체를 보고 조사 중입니다. 귀하의 옷의 피를 보니, 저 마물들을 죽인 이가 당신인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할 거지?"

그 기사가 칼을 나에게 겨누었다. "네 이놈. 에스더 공주님을 보고도 예를 갖추지 않는 거냐?"

나는 에스더를 향해 몸을 굽혀 예를 표했다. "죄송합니다. 밤 새 마물들과 싸우다 보니, 예를 잊었습니다."

"아닙니다. 생사를 건 전투를 거친 이에게 그런 번거로운 일을 요구할 수 없지요.
루카. 검을 거두세요. 이 분께서는 어제의 긴장이 풀리지 않은 것 뿐입니다."

루카라는 기사가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귀하의 이름과 여기 있는 이유를 설명해 주시지 않겠나요?"

"내 이름은 아나킨 스카이워커. 대지모여신의 신탁을 받고 여행 중입니다."

루카가 다시 칼을 뽑았다. "이런 숲 속에 헤매는 놈이 거짓말로 공주님을 능멸할 셈이냐?"

에스더는 루카의 팔을 잡고 검을 내린 후, 나에게 다가왔다.
"대지모 여신님의 신탁이요? 무슨 명령이시죠?"

"자신을 깨우라 하셨습니다."

에스더는 기쁨과 놀람이 섞인 얼굴로 물었다. "대지모 여신님을 깨우라고요? 어떻게?"

"우선 파샤폴리로 가야합니다."

루카가 소리를 질렀다. "거짓말! 이미 폐허가 된 곳에 무슨 일이 있다는 거냐?"

"대지모 여신의 명령을 일일이 당신 같은 말단에게 말할 이유가 없군요."

"여기 에스더 공주님이 계시다."

"로렌의 영주님께서 직접 질문하시면 대답해 드리지요."

"네 이놈! 네 놈은 에스더 공주님이 누구인 줄 아느냐? 다쓰 베이더의 적통이시다."

"이 세상을 망쳐버린 자의 혈통을 주장하십니까?"

"깔깔깔!" 에스더가 웃었다.
"그 말이 맞네요. 이 세상이 그 분 혈족들에 의해 엉망이 되었지요. 하지만 그 분의 적통들은 나름 이 세상의 질서를 잡으러 노력 중입니다."

"적통이라... 당신은 누구의 후손이시죠?"

루카가 말했다. "이 분은 베이더님의 정실이신 야다님의 증손녀시다."

그러고 보니, 야다의 딸이 로렌에 시집갔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었다.

"어쨋든 대지모여신의 복귀는 우리 인족들의 숙명. 귀하를 따라가고 싶군요."

"거친 사내들의 여행에 여성이 낄 수 없지요."

"왜죠?"

"저기 루카가 설명해줄 겁니다."

루가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 자를 어떻게 믿고 따라간다는 건가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는 에스더에게 인사하고 파샤폴리로 향하기로 했다.

그 혼란에서 살아남은 내 손녀를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

파샤폴리로 가는 길에 작은 도시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려 했다.

우선 자금을 마련하려고, 가져온 장신구를 내놓으니 비싼 값에 팔렸다. 금을 사용할 수 있지만, 금덩어리를 함부로 내밀면 오히려 의심을 살 것 같았다.

파사폴리로 가려면, 로렌의 영토를 지나야 했다.

로렌의 도시에 다다르자, 정문에서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루카였다.

"에스더 공주님이 널 보자고 하신다."

"저는 당신들에게 용무가 없습니다. 저를 만나고 싶으면, 내일 아침 제가 쉬는 여관으로 오라고 하시죠."

"그럴 줄 알고 공주님께서 여관을 잡아 놓으셨다."

아무래도 그 공주님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루카의 인도로 간 여관은 그 도시에서 가장 좋은 곳이었다.

저녁이 되니, 에스더가 평상복을 입고 나를 찾아왔다.

"나를 찾아온 용무가 뭐죠?"

"대지모 여신의 부활은 인족의 소망. 그런 일에 우리가 빠지면 안 되지요."

"다쓰 베이더가 여신을 더럽혔기 때문인가요? 조상의 죄를 속죄하려는 후손입니까?"

"부정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베이더의 후손으로서 세상에 대한 의무지요."

"베이더의 후손이라고 그런 무거운 짐을 지려하시는 가요?"

"아바마마께서도 베이더님의 후손입니다. 그 분도 저의 여행을 허가하셨습니다."

아무래도 이 여자를 떨어트려 놓기 어려울 것 같았다.

"좋습니다. 하지만 공주님의 신변을 보장할 수 없군요."

에스더는 웃었다.

"한가지만 묻지요. 당신도 베이더님의 후손인가요?"

"눈치가 빠르군요. 하지만 제가 누구인지, 제 어머니가 누구인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 이유를 잘 아시죠?"

"물론이죠. 베이더의 후손들이 악마로 몰려 몰살 된 일이 있으니까요."

나와 에스더는 서로를 보며 웃었다.

이렇게 마주 보니, 야다가 생각났다.

원래 내가 원했던 사람은 메트라였다. 그녀는 파샤 왕의 조카로, 그녀의 아버지와 집안 전체가 반란을 일으켜 그녀는 도망자의 삶을 살아왔다.
마왕을 죽인 후, 그녀의 소원은 파샤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평범하게 사는 것.

나는 그녀에게 청혼했지만, 승낙 일주일 만에 버림받았다. 그녀는 황태자의 세 번째 부인이 되었다.

실의에 빠진 나를 위로한 사람이 야다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야다와 결혼했다.

하지만 그 결혼도 파샤의 명령이었다. 황태자의 부인이자, 차기 왕위 계승자를 낳아야할 여인에게 옛애인이 독신인 것은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었다. 파샤는 빨리 날 결혼시키려 했고, 야다를 보냈다. 전에 알고 지내던 파티 멤버이고 메트라와 함께 내 애인이어서, 나도 싫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도 파샤가 심어둔 나의 감시역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치열한 눈치싸움을 하며 살았다.

지금 내 앞의 에스더는 야다와 같은 모습이었다. 목소리 뒤에 칼을 숨기며 나의 목을 조르는... 나의 아내이자 감시역이었던 그녀가 다시 돌아온 것 같았다.

"타냐님에 대한 소식이 있는데, 알려드릴까요?"

순간 내 마음 속에 무언가 내려앉았다. "타냐의 소식이라면..."

"그분은 혼란 속에 돌아가셨고, 그 분의 자녀들도 다른 베이더님의 자녀들과 비슷한 운명이었죠. 그래도 그 분의 셋째 따님이 아버님의 후궁이시고, 많은 자녀를 낳으셨습니다."

가슴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래도 타냐의 자식 중에 살아있는 사람이 있다니...

"파샤폴리로 언제 떠나실 거죠?"

"여독을 풀고, 3일 후 떠나지요."

"필요하신 것은?"

"내가 필요한 것보다 당신들이 원하는 것이 있지 않나요?"

에스더가 웃더니, 손뼉을 쳤다. 우리에게 3명의 여성이 왔다.

"결국 원하는 것은 베이더의 혈통인가요?"

"물론이죠. 베이더님의 혈통이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나는 이 정도로 만족 못합니다."

"얼마나 원하시죠?"

"10명이면 어떨까요. 나와 동행하는 조건으로."

에스더가 웃었다. "좋아요."

"조건이 있지요. 첫째로 베이더의 혈통이면 곤란합니다. 우리는 피가 섞인 이들과의 교합을 금지하고 있고, 둘째로 나에게 거부권을 주시죠."

"거부권?"

"너무 못생기면 곤란해요."

에스더가 크게 웃었다.

그 뒤에 일어난 일은 상상에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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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후, 에스더를 호위하는 20명의 기사들과 나에게 봉사하기 위한 10명을 포함해, 50명이 넘는 행렬이 파샤 폴리로 향했다.

그런데 한 중년 남자가 에스더와 동행했다. 들어보니 그는 내 손자였다.

파샤폴리로 가는 길에 에스더는 나와 함께 걸었다.

"저 분은 내 약혼자입니다. 베이더의 혈통을 보전하려는 아버님의 의지지요."

"언제 결혼할 것이지요?"

"이번 여행이 끝나면, 뭐... 저분과 저는 이미 결혼한 것이나 같지요."

"베이더 혈통의 여성들은 아이 낳는 것이 의무군요."

"그러니 부탁드려요." 에스더는 나를 모시는 여성들을 바라보았다.

나와 그녀가 함께 걷자, 그녀의 약혼자가 우리 사이에 말을 타고 끼어들었다.

"공주, 이런 자와 함께 걷다니, 위험하지 않소."

이 건방진 놈의 얼굴을 보니, 모친이 누구인지 예상이 되었다.
당시 신관들은 귀족 집안의 여성들이었는데, 귀족의 역겨운 행동을 하는 여성들이 꽤 있었다.

"이런 자를 믿고 먼 여행에 나가다니, 정말 공주를 이해할 수가 없소."

"5년 만에 나타난 여신의 신탁입니다.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이 자의 말을 믿는다는 말이오?"

"믿던 안믿던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해야 하지요."

말 위에서 바라보는 이 녀석의 눈길이 재수 없었다. 내 손자라지만, 정말 밥 맛없는 놈이었다.

"저와 동행을 사정하신 분은 공주님이십니다."

"네 이놈. 무슨 소리냐?"

"지금이라도 로렌으로 돌아가시지요. 저는 제 갈 길만 가면 되니까요."

그 자는 말 위에서 발로 내 머리를 찼다. 별로 아프지 않았지만 기분이 나빠졌다.

나는 참지 않고, 마력으로 말을 위협했다. 갑자기 말이 날뛰어대고, 말을 진정시키려 그는 우리에게서 멀어졌다.

에스더가 웃으며 걷는데, 그 자는 말에서 내려 우리에게 달려왔다.

내가 웃는 모습을 보고 그 자는 화를 냈다. "네 이놈. 왜 웃는 것이냐?"

"베이더의 후손이라는 자가 말 하나 제어 못해서 발로 오시나요?"

내 비웃음에 그 자가 칼을 뽑았다. "네 이놈! 근본도 모르는 놈이 감히 베이더의 혈통을 비웃는 것이냐?"

아무래도 이 자식에게 교육을 시켜야 겠다. 할아버지로.

나는 그의 칼을 엄지와 검지로 잡고 비틀었다. 그러자 그가 칼을 놓쳤다.

자루를 잡고 보니, 좋은 칼이었다.

"이렇게 좋은 칼을 고작 여행객에게 휘두르시나요? 그럼 이 칼은 가치가 없군요."

나는 수도로 칼을 부러트렸다.

"이제 칼을 돌려드리지요."

내가 동강난 칼을 땅에 던지자, 그에게서 마력이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과연 내 아들임을 증명하듯, 마력이 모이는 양이 상당했다.

나는 빠르게 이동해 그의 앞에 서서 뺨을 살짝 때렸다.
"전쟁터가 아닌데, 이런 흉한 마력은 옳지 않네요."

그리고 그의 가슴에 손을 대서 마력을 분산시켰다.

자기 몸 안에서 흩어진 마력을 느끼고, 그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에스더가 말했다. "나의 남편이시여. 싸우지 마세요. 저 분도 베이더님의 후손입니다."

에스더의 ‘남편’이라는 말에 그의 얼굴이 풀렸다.

나는 그의 귀에 대고 말했다.
"당신에게는 공주님 한분이시지만, 저는 저에게 봉사할 10명이 있습니다. 공주님이 저 같은 호색한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는 나에게서 떨어져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내 시중을 드는 여자들에게 가서 두 사람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 안도감이 비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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