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무저항의 용
"저는 당신들을 해치러 온 사람이 아닙니다. 단지 디바 마테르를 만나고 싶을 뿐입니다."
한 여성이 내 앞으로 나왔다. "네 놈은 누군데 감히 디바 마테르를 만나겠다고 하는 거냐?"
"저는 실바텍투라의 스텔라의 소개로 왔습니다."
그러자 중간에 있는 여성이 앞의 사람들을 밀치고 내 앞으로 걸어왔다.
"당신은 스텔라와 어떤 관계지요?"
"그분의 따님이 저의 부인이었습니다."
그녀는 한숨을 쉬고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런데 이렇게 무례하게 한 밤중에 여성의 침소에 침입하는 이유는 뭐죠?"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을 볼 수 없으니까요."
나는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며 그녀의 상태를 조사하며 실망했다. 그녀는 단순한 엘프이고, 용이 아니었다.
"다이애나를 만나려하는 이유가 뭐죠?"
"저는 용을 찾고 있습니다."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용은 제가 어릴 적에 죽어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왜 저에게 물으시죠?"
"그 용을 기다리는 다른 용이 있습니다. 저는 그 부탁을 받고 용을 찾는 겁니다. 지금 용은 둘 다 인간, 혹은 엘프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나의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무언가 알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정중하게 몸을 굽혔다. "알려주십시오. 천년 간 용을 기다린 그녀의 소원을 외면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네요. 저를 따라오세요."
"감사합니다. 다이애나님."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 이상했다.
한 여성이 말했다. "이분은 다이애나님이 아닙니다. 그분의 따님이신 세레스님이십니다."
그 말에 나는 놀랐다. 세레스는 분명 하이엘프인데, 다이애나의 딸? 다이애나는 분명 인간과 결혼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세레스가 말했다. "어머님은 내가 어릴 적에 웬투스님과 결혼하셨지요. 그 분과의 사이에서 다음 왕을 낳으셨습니다. 저는 알리진 2대 왕의 의붓 남매입니다."
나는 사정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다이애나님은 어디에 계시지요?"
"어머님은 2백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엘프로는 천수를 다하신 거죠."
2백년 전이면... 엘프라면 수명이 다하는 나이였다.
"그럼 다이애나님의 역할은 세레스님께서 하시고 계신 겁니까?"
세레스는 슬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레스의 인도를 받고 나는 왕궁 뒷산으로 올라가 한 동굴로 들어갔다. 동굴 안을 비춰보니, 용이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이건... 어떻게 여기에..."
"저의 의붓 아버지이시고, 알리진의 창업 군주이신 웬투스님이십니다."
그럼 웬투스가 엘프와 결혼했다는 남자?
"웬투스님께서는 용이셨지만, 어머님을 사랑하셔서 인간이 되셨지요.
하지만 당시 엘프들은 혼혈을 용서하지 않아서 두 분은 도망쳐서 결혼하셨지요.
신은 두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마왕을 보내어 웬투스님을 죽이려 하셨고, 결국 웬투스님은 마왕과 같이 죽었습니다.
그 때 어머님께서는 웬투스님을 살리기 위해 마법을 사용하셨죠."
"그 마법은... 마왕의 육체에 웬투스님의 영혼이 들어가는 건가요?"
세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육체를 땅에 묻어두고, 엘프들이 없는 이 곳으로 도망쳐 오셨지요. 그리고 여기에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마왕은 원래 인간, 수명이 너무 짧았지요. 웬투스님이 수명을 다하고, 그 영혼은 이 곳을 떠나 자신의 육체로 돌아갔는데, 얼마 후 그 육체와 함께 이 곳에 돌아왔지요. 그리고..."
"다이애나님과 함께 이 곳에서 사셨다는 겁니까?"
세레스가 슬픈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어머님이 떠나신 이후, 이 분도 상심하시어 육체를 잠재우고 영혼은 이곳을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세레스는 용의 옆에 있는 석관에 다가가 손을 대었다. "이 곳에 어머님의 육체를 봉인해두셨지요."
"봉인?"
"그 분은 어머님의 육체가 썩어서 사라지는 것을 견딜 수 없으셨어요. 그래서 여기에 육체가 영원히 썩지 않도록 마법을 걸어두신 겁니다."
내가 그 석관에 손을 대고 안을 살피니, 안에 엘프 여성이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그럼 그 분의 영혼은 어떻게 되신 거죠?"
세레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다이애나님께서 타계하신 이후, 한동안 그 분은 돌아오지 않다가 최근 돌아왔군요. 그리고 인간에 대한 복수를 외치며 전쟁을 일으켰죠."
세레스가 놀라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중간에 있었던 일을 말씀드릴까요?
이 세계에 용은 2명입니다. 웬투스는 다른 용을 찾아다녔지만, 찾지 못했죠. 그러던 중 로터스에 가서 용의 거처를 발견했지만, 용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마왕이 그 용에게 해왔던 괴롭힘을 알고 분노했죠. 그래서 모든 인간들에게 복수하려고 전쟁을 일으킨 거죠?"
"다... 당신이 그 것을 어떻게 알죠?"
"마왕을 이기고 그 용을 해방시킨 것이 저입니다."
세레스는 놀라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지금 그 용은 어디에 있죠?"
"지금 성 안에 있습니다. 내 부인이죠."
"용이 여성이었나요? 부인으로 삼았다는 것은 뭐죠?"
"저는 그녀 외에 7명의 용을 부인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세레스가 나를 노려보았다. "지금 말도 되지 않는 허풍으로 나를 속이려 합니까?"
"그럼 지금 당장 그녀들을 여기로 불러오죠. 방어막을 잠시 해제하시면, 바로 그녀들은 이 곳으로 올 겁니다."
세레스는 무슨 생각을 하다가 손을 하늘로 들었다. 방어벽이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
10분 정도 후에, 티리스, 마르티나, 페트리아가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서방님." 티리스가 제일 먼저 내 품에 안겼다.
마르티나와 페트리아도 나와 포옹을 하며 기뻐했다.
"정말 불안했어요. 혼자 그렇게 들어가시니."
"궁 안이 소란스러워. 얼마나 조마조마했는데요."
세레스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 사람들은... 혹시 모두 용... 인가요?"
"잘 아시는 군요. 3사람 모두 용으로, 내 부인들입니다."
티리스가 세레스를 바라보았다. "당신... 용을 만난 적 있나요?"
"그.... 그래요. 저의 아버지 웬투스는 원래 용이었습니다. 인간의 몸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지금 그는 어디에 있지요?"
세레스는 고개를 돌렸다. "저도 몰라요. 가끔 이 곳에 오시지만, 언제 오실지 잘 모릅니다."
티리스는 용의 육체에 가까이 갔다. 그런데 그 육체의 주위에 방어 결계가 있었다.
세레스가 외쳤다. "그만! 더 이상 가까이가면 결계가 공격을..."
티리스는 멈추지 않고 걸어가는데, 결계를 뚫고 육체에 다가갔다.
티리스는 육체에 손을 대었다.
"그래요... 제가 왔어요... 이제야 만나게 되네요..."
티리스는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티리스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여기로 온다고 해요."
세레스가 당황했다.
"말도 안돼요. 그 결계는 아무도... 저도 어머니도 들어 갈 수 없었어요. 가까이가면 불에 데인 듯 몸이 뜨거워져서... 그런데 어떻게 된 거죠?"
"이 용은 저를 기다려 왔어요. 오직 저 만이 이 육체에 가까이 올 수 있죠."
"티리스. 생각이 난 거야?"
"모두가 아니라 조각조각 생각이 나요.
제가 이 용을 기다린 것처럼, 이 용은 저를 기다려 왔어요.
이 용은 매우 화가 나 있어요. 제가 사라졌으니까요. 마왕이 제 영혼을 소멸시켰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인간을 증오하고 있네요."
"만약 네가 나의 부인이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세레스가 놀라서 나와 티리스를 번갈아 보았다.
"그럼 어쩔 수 없어요. 서방님께서 용과 싸워 이겨야 해요. 그래야 용이 납득하겠죠."
"이 용을 내 부인으로 삼으려면 이기면 되는 거야?"
"맞아요. 용은 이긴 자를 따라야 해요. 아무리 남성이었어도, 서방님께서 원하시면 여성이 될 거예요."
용의 몸이 흔들리고, 눈이 떠졌다. 먼저 용은 티리스를 보고 입에 미소를 띄었다.
티리스는 용의 턱에 얼굴을 대고 비볐다.
남편의 입장에서 티리스의 행동에 조금 호흡이 달라졌다. 저 용은 남자일텐데... 아무리 같은 종족이고 내 부인이 될 거지만, 티리스가 저 용과 몸을 비비는 모습에 질투가 났다.
그런 나를 보고 마르티나가 내 앞으로 와서 등을 내 몸에 기대며 안겼다. "질투나세요?"
"조금."
"조금이 아닌데요? 이렇게 숨이 흐트러진 서방님... 처음이에요."
티리스와 용은 몸을 대며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갑자기 그 용의 눈빛이 달라지며 나를 노려보았다.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이! 내 부인이 되는 것이 싫은 거야?"
"물론이다. 내가 왜 여자가 되어야 하고, 네 부인이 되어야지? 게다가 네 부인이 12명인데, 내가 그 중에 하나라는 말이냐?"
뭐... 남자라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니지만...
"지금까지의 해결책처럼 너도 나와 싸우면 되는 것 아냐? 나는 모두를 이겨서 내 부인으로 삼았어. 너라고 틀릴 것 없잖아?"
용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안된다. 나는 너와 싸울 수 없다."
"왜지?"
용은 고개를 돌려 석관을 바라보았다. "다이애나와 약속했다. 절대 마왕과 싸우지 않겠다고. 마왕을 보면 도망치겠다고."
"나는 마왕이 아니다."
"네 몸에 뿜어져 나오는 신의 기운. 신이 선택한 인간. 너는 마왕이 분명하다."
내가 마왕이라고? 마왕의 남편이니 마왕인 것은 같은데...
"이봐! 나를 마왕이라고 부르지 마! 자존심 상해. 마왕은 내 부인들이야. 나는 12명의 마왕을 부인으로 삼을 신이라고."
"다이애나와의 약속은 마왕과 같은 강한 인간과 싸우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
"창조주의 명령보다 더 중요한가? 너는 너를 이긴자에게 복종한다는 신의 명령을 거역할 셈인가?"
"그 명령을 지키기 위해 싸우지 않는 것이다."
용은 몸을 일으켜 눈을 감고 배를 내밀었다.
"자! 나를 죽이려면 죽여라. 나는 절대 싸우지 않으니 너에게 지지 않는다. 너는 나를 굴복시킬 수 없다."
무저항이 제일 성가시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다. 이기면 그만이지만 싸우지 않는 자를 어떻게 이기지?
나의 머리에 한가지가 떠올랐다. "이봐! 내가 너를 이기는 방법이 너와 싸우는 것 뿐 인줄 알아?"
"어떻게 하려는 거냐?"
"알리진을 멸망시키겠다. 다른 인간들의 나라들을 통해 망하게 해주겠다."
3명의 부인들은 물론, 세레스와 웬투스도 놀랐다.
"내가 병사들을 이끌고 이 성을 무너트리겠다. 네 백성들을 죽이고 노예로 삼고, 너희들의 나라를 황무지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어떤가? 이 것이면 승부가 되지 않겠나?"
세레스가 말했다. "말도 안돼요. 당신과 용의 싸움에 왜 우리 백성들이 끼어드는 거죠?"
"전쟁은 알리진이 먼저 시작했어. 나는 다른 쪽에 서서 알리진과 싸울 거야."
웬투스가 웃었다. "좋다. 인간. 알리진이 멸망하면 내가 진 것으로 하겠다."
"네 마력으로 약속해라!"
나의 마력과 그의 마력이 합쳐졌다. 우리 사이에 계약이 성립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말하지 않은 한가지 조건이 있었다. 나는 그 조건을 보고 움찔해 웬투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간절했고, 나는 동의했다.
.................
마력으로 계약이 성립되자, 우리는 세레스와 함께 그 동굴을 나왔다.
가는 길에 세레스가 물었다. "정말 그렇게 하실 건가요? 알리진을 멸망시킬 건가요?"
"방금 웬투스와 그렇게 약속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당신과 적이 될 겁니다."
"이미 적이 될 운명 아닌가요?"
세레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페트리아가 말했다. "당신은 웬투스가 서방님에게 지기를 바라고 있네요."
"그래요... 난 더 이상 아버지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요.
아버지는... 어머니와 나를 데리고 이 곳으로 도망쳐 오셔서, 마왕에게서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알리진을 건국하셨지요.
그 동안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너무나 힘들었어요. 그분은 육체가 죽은 후에도 어머니와 함께 알리진을 다스렸어요. 언제나 알리진의 백성들을 생각하시며, 흉년이 들면 자기 일처럼 슬퍼하셨죠.
어머님께서 죽으신 이후, 나는 아버지가 해방될 수 있다고 기뻐했지만, 아버지는 알리진을 버리지 못하셨어요. 매일 같이 어머니를 찾는 백성들을 외면할 수 없으셔서, 그들에게 어머니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죠. 하지만 지금은..."
"복수심에 가득차 모든 인간을 증오하고 있지요."
세레스가 눈물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100년 전에 그 분은 육체를 놔두고 영혼의 형태로 멀리 떠나셨습니다. 제가 권유했어요. 더 이상 어머님 대신 알리진의 큰 짐을 지지 마시라고.
3년 전 그 분이 다시 돌아오셨을 때, 그분은 이 세상의 가장 두려운 말로 인간들을 저주하셨어요. 그리고 자기 손으로 모든 인간들을 죽이겠다고 맹세하셨죠. 저도 오늘에서야 그 이유를 알았어요. 그 분은..."
나는 티리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웬투스가 기다려온 만큼 티리스도 그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티리스는 제 부인이고, 웬투스도 제 부인이 되어야 합니다."
세레스는 눈물을 흘리며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부탁드립니다. 제발 아버지를 이 고통의 굴레에서 풀어주세요. 그리고 알리진 백성들을 죽이지 말아주세요."
우리 모두는 세레스를 슬프게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