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
"으흐흐, 좆같은 인생. 개 같은 세상! 무엇하나 뜻대로 풀리는 것도 없구나!"
오밤 중에 터덜터덜하고 휘청이는 자가 있었다. 며칠동안 씻지도 않은 듯 머리는 산발에 구린내가 풀풀 풍기고, 지저분한 옷을 아무렇게나 걸쳐 입고서 술에 얼큰하게 취해 뒷골목을 전전하는 영락없는 노숙인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실상 다를 것도 없었다. 그는 실업자였고, 노숙인이었다. 이 나이를 먹는 동안 이렇다 할 기술도 배운 적 없었고, 그렇다고 빽이 있거나 인맥이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하루하루를 막노동하며 입에 풀칠이나 하다가 나이를 먹으며 몸이 망가지면서 그조차도 못하게 되고, 그나마 남은 인맥마저 탕진해버린 밑바닥 인생이었다.
"나라고 이렇게 살고 싶었겠냐고, 우라질 놈의 세상아…."
그러나 이 세상에 사연없는 무덤은 없다고 하였던가. 그에게도 할말은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아주 태어나기도 전에 집을 나갔었고, 그의 어머니는 홀몸으로 그를 키워오셨다. 어머니께서는 그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며 살라고 했고, 아직 어리고 젊었던 그는 그런 줄로만 알고서 살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리석었고, 철이 없었던 것이었다.
결국 어머니께서는 그가 사학도로서 대학교 생활을 하시던 도중 쓰러지셨고,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안일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제대로 된 직장도 없이 잡일을 도맡아하며 그를 키워온 어머니였다. 당연히 몸이 멀쩡할리가 만무했던 것이다.
결국 그 날 이후로 그는 하던 공부도 끝마치지 못하고서 하루하루 병수발을 들며 병원비를 벌기 위해 공사장을 전전해야 했고, 그의 나이 30이 넘어 그런 지극정성에도 불과하고 어머니께서도 돌아가시고 나자 모든 의욕을 잃고서 술과 담배로 인생을 허비하였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나이는 낼 모래 마흔에 가진 돈은 없었고, 갈 곳도 없었다. 그나마 그를 마지막까지 보살펴주고 품어주었던 부랄친구 희철이마저 더이상은 그를 봐주지 못하고 집에서 그를 내쫓았고, 친구의 집에 얹혀살던 신세이던 이원철은 그 길로 받아줄 곳도 없이 거리로 주저앉게 되었다.
"십오야 밝은 둥근 달이~♬ …는 개뿔이 우라질. 으흐흐, 이 빌어먹을 달아. 너도 내 꼴이 우습더냐?"
하늘위에 넘실거리는 달을 향해 이원철은 그렇게 소리쳤다. 당연히, 대답이라고는 있을리가 없었다. 저 멀리에선가 뉘집 개가 짖는 소리만이 오밤 중에 울려퍼졌을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이원철은 이어서 소리쳤다.
"이게 다, 내게 기회도 주지 않고 정도 주지 않은 매정한 세상이 잘못된거다. 나라고해서 이러고 싶어서 이러고 살고 있겠느냐? 나라고 해도 말이다, 기회만 준다면…."
당연히 일고의 여지도 없는 헛소리였다. 물론 그의 불행은 불행이었지만, 상황이 여기까지 파탄한 것은 평생을 제 자신만 알고서 술로 하루하루를 허비한 그 자신의 문제가 가장 컸다. 하다못해 젊은 시절 기술 하나만이라도 배워뒀더라면 절친에게 절교당하고 길거리에 주저앉을 일까지는 없었다.
그러나 어디 취객의 신세한탄이 그런 걸 따져가며 주절이게 되던가. 이원철은 그 뒤로도 한참동안을 밤하늘의 달을 올려다보며 주정을 쏟아냈다. 자신도 기회만 주어진다면, 세상이 조금만 더 자신에게 많은 걸 주었다면 얼마든지 해낼 수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으흐흐, 이래서야 완전히 미친 놈이구만. 그래, 달이 무슨 답을 해준다고 이러고 시간을 낭비하는지. 아아, 씨부럴. 나도 남들처럼 떵떵거리면서 갑질이나 해보고 싶다아-!"
거기까지 소리치고서, 이원철은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발판이 사라진 것이다. 몸은 절로 앞으로 기울었고, 그대로 나뒹굴게 되었다.
어어어, 하고서 외마디 비명을 내지른 이원철은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깨달았다. 술에 취하여 휘청휘청 걷다가, 공사 중이라 하수구 뚜껑이 열려있던걸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우라질…!"
외마디 욕설이 터져나왔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원철은 그대로 나뒹굴어 떨어졌고, 십여미터를 낙하한 끝에 바닥에 철푸덕하고 내팽개쳐졌다. 그동안 몇번이고 쇳덩이에 부딪히고, 술에 얼큰하게 취해 있던 탓에 낙법도 제대로 취하지 못하면서 목이 꺾였다.
그런 와중에도 어떻게든 목숨 줄이 붙어있을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강골인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인 듯했다.
이원철은 그의 의식이 조금씩 흐려져 오고 있음을 눈치챘다.
"이 빌어먹을 세상아, 도대체 나에게 무슨 악감정이 있길래 이러는거냐…?"
당연하게도 대답은 없었다. 듣는 사람이 있을 까닭도 없었다. 그의 머리 위로는 정월날의 대보름이 두둥실 떠올라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 대보름이야말로 인간 이원철의 최후를 지켜봐준 유일한 입회인이었을 것이다.
인간 이원철의 삶은 그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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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예끼, 이놈아! 이 아비를 앞에 두고 잠이 들어? 어서 정신차리지 못하겠느냐, 이 녀석!"
낯선 남성의 벼락같은 불호성과 함께 무언가 딱딱한 것이 머리를 때렸다. 그 고막을 쥐어짜는 듯한 소리와 짜릿한 고통에, 무심코 눈이 떠졌다. 어안이 벙벙했다. 무엇이 일어난것인지 알수가 없었다.
바닥은 내 기억 속의 곰팡이 슬고 벌레먹은 내 옛집의 목제 바닥이 아니었고, 내가 입고 있는 옷은 노란색 때로 쩔은 런닝티와 다 헤지고 펑퍼짐한 남색 청바지가 아니었다. 아니, 그전에 내 손부터가 도둑놈 손 같던 크고 털이 북슬북슬하던 손이 아니었다. 바닥은 어딘가 낡고 해져있으면서도 고풍스러웠고, 입고있는 옷은 설날에나 겨우 보던 총천연색의 한복이었으며, 손은 조막만했고 털도 거의 나지 않아 솜털만 겨우 보이고 있었다.
그 뿐이랴. 옆으로보이는 문창살은 여닫이식에 한지가 덕지덕지 발라져있었고, 벽지가 뜯겨나가 시멘트가 훤히 보이던 길거리에 주저앉기 전 옛집의 천장은 한옥마을에서나 볼수있던 목제천장이었다. 방금전까지 내가 널부러져있던 깊숙한 하수구의 시큼하고 썩은 내가 풀풀 풍기는 물줄기는 온데간데 없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거야?'
눈살을 찌뿌리고 주변을 부지런히 둘러봤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이곳은 내 단칸방이 아니었다. 내가 기억을 잃은 틈을 타서 누가 몰래카메라를 벌였다고 쳐도, 이렇게까지 방이 변할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납치라도 당한것일까 싶었지만, 그건 아닌듯 보였다.
호흡이 가벼웠고, 공기가 달았다. 오랜 흡연으로 후두암을 얻고 난 이후로는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경험이었다.
즉, 지금의 이 몸 또한 나의 것이 아니었다.
"내 말이 말같지가 않더냐? 너는 이제 대비미마께 추대를 받아 궁에 가게 될것이니라. 아직도 내 말을 못알아듣겠느냐? 네가 이 나라 조선의 어버이가 된단 말이다!"
'잠깐, 뭐?'
거기까지 생각한 찰나, 나를 때려 깨운 남성이 또다시 벼락같은 노호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 외침에는 간과할수없는 메세지가 담겨있었다.
대비마마, 조선, 조선의 어버이.
무엇 하나 21세기 대한민국이라면 생각할 수 없는 단어들 뿐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대한민국에 있는것이 아니란 말인가? 저 남자가 방금전 말한대로, 무슨 이유에서인가 조선에 왔단 말인가?
그제서야 나는 주변을 살피느라 미처 똑바로 보지 못했던 눈앞의 남성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방금전 내 머리를 후려친것으로 추정되는 회초리를 들고, 나를 미심쩍은 듯한 눈초리로 노려다보고 있는 수염이 덥수룩한 한복차림의 남성. 지금까지 나를 대한 태도로 보아, 그는 나의 아버지이거나 최소한 그에 준하는 집안의 어르신임에 분명했다.
그리고 그 얼굴은 어딘가 낯이 익었다. 비록 아직 나이가 비교적 젊어 기억 속의 모습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지만, 지금 이대로 늙는다면 내 머릿속의 있는 그 인물의 사진 속 모습이 될것같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이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일 대비마마를 알현하는데 있어서는 조금의 부족함도 있어서는 안되느니라. 내일 중에는 필시 궁에서 대비마마의 친서를 들고 사람이 올것이다. 반드시 실수없이 끝마쳐야하느니라! 알겠느냐?"
"네, 네. 알겠사옵니다. 부족함 없이 행하겠사옵니다, 아버지."
"이제부터는 아버님이라고 부르도록하거라. 궁의 생활에 익숙해지려면 우선 언행 하나하나부터 고쳐야하는 법이다. 비록 지금은 어색할지리도 곧 익숙해질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보도록 하거라!"
거기까지 말하고서는, 이하응은 내게 방에서 나가라는 듯이 고개짓을 했다. 나는 엉거주춤 이하응에게 인사를 올리고서 방에서 나왔고, 곧 나는 내가 지금까지 있던 방과 집의 모습을 한눈에 볼수있었다.
조금 허름하기는 해도, 기와집이었다. 밤하늘에는 별빛이 가득했고, 전등 따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에서 들려오던 지하철 소리도, 밤하늘을 가로지르던 비행기의 불빛도, 폭주족들의 굉음이나 자동차들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허."
다리에서 힘이 풀려 그대로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구분이 가지를 않았다. 무심코 오른손으로 볼을 꼬집어봤지만, 볼에서 느껴지는 아픔은 더 없이 생생했다. 지금 이 순간이 꿈이 아니라는 결정적 증거였다.
"이하응, 조선, 대비마마라."
나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방금전의 일을 회상했다. 무엇하나 낯설지 않은 키워드였다. 비록 공부를 때려치운지도 거의 20년이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꼴이 사학도였던 몸이다. 눈치채지 못한다면 젊은 시절의 공부는 말짱 헛것이었던거겠지.
거기에서 도출되는 결론은 하나였다. 공간적 배경은 조선, 시대적 배경은 이하응의 생존시기, 대비마마-신정왕후 조씨의 추대.
"익성군 이명복, 인가…!"
나, 이원철은 어째서인가 왕궁에 불려가기 전날의 고종이 되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