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2화 (2/530)

< 상황을 정리하다(1) >

"빌어먹을, 뭐가 어떻고 어떻게 된 거지?"

그날 밤은 잠이 오지 않았다. 아직 어린 몸은 그동안의 생활주기에 맞춰 날이 어두워지자마자 피곤하다고 난리인데, 정작 정신이라는 놈은 말똥말똥하기 그지없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도 없이 뻗어 나갔고, 심장은 터질 듯이 쿵쾅거렸다.

그것은 흥분인가, 동요인가, 그도 아니면 공포인가. 어쩌면 전부 다인지도 몰랐다. 무엇보다도, 지금의 나는 일이 어째서 어떻게 이렇게 되는 것인지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무언가가 일어났다는 것은 확실하고, 지금이 꿈도 아닌 생시라는 것은 확실한데, 그 현실이라는 놈이 도통 상식의 범주 안에서 놀고 있지를 않았다.

"우선,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지금의 나는 낼모레 마흔 대한민국의 밑바닥 인생 이원철이 아니라, 철종이 승하하고 익종과 조대비의 양자로 들어가 왕위에 오르기 전 훗날의 고종-익성군 이명복이다."

어째서 그러한가를 물어도 소용없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현실이 그러했다. 그냥 인정해야지 별도리가 없었다. 이런 진귀한 경험을 한 놈이 이 세상에 그리 흔할 리도 없고, 그럼 결국 나 혼자서 알고서 끙끙 앓아야 하는 부분이다. 어차피 타인에게 상담할 수도, 함부로 털어놓을 수도 없는 이상 그냥 그런가보다-하고 일단 넘어가지 않으면 이야기가 시작되지를 않았다.

"그나마 가장 과학적으로 생각해봤을 경우의 내 처지는 정부에서 웬 미치광이 실험을 한답시고 내 뇌만 가져다가 바이오액에 띄워놓고 이상한 전기자극을 주면서 반응을 관찰하고 있는 건가."

스스로 말하고서도 어이가 없었다. 현실이 만화영화도 아니고, 그런 현실 따위 있을까 보냐. 그리고 정부에서 도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얻겠답시고 나 같은 놈의 뇌를 가져다가 비싼 바이오액까지 써가면서 배양한단 말인가. 그래 봤자 정부에서 얻는 건 쥐뿔도 없을 터인데.

그럼 지금의 내 상황은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 초자연적인 현상일 터. 아마도, 굳이 표현을 찾자면 빙의나 환생이라는 표현이 정확하겠지. 누가 어째서 나 같은 것의 영혼을 굳이 과거로 돌려가면서까지 익성군의 몸뚱어리에 집어넣었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말이다.

아니, 사실 짐작이 가는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죽어가면서? 뭐, 아마도 그때 인간 이원철은 죽은 것이 맞겠지. 아무튼, 죽어가면서 하늘을 저주했고, 나도 갑질 한번 해보고 싶다고 큰소리 떵떵 치기도 했다. 만에 하나 천에 하나 신이라거나 그에 준하는 존재가 존재한다면, 그때의 나의 절규를 들어줬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물론 하필이면 그 익성군 이명복에게 빙의시킨 것은 또 나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러는 거냐고 한마디 불평이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말이다.

"우라질, 정말로 내가 무슨 전생에 나라라도 팔아먹었소? 그래, 뭐 어차피 끝날 삶 조금이나마 연장해준 건 감사하오만, 그래도 조금 다른 몸뚱어리는 없었단 말이오. 하필이면 익성군 이명복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머리가 지끈거렸고, 어질어질했다. 뭐, 나도 갑질을 하고 싶다고 빌었으니 그럼 어디 갑질 한번 해보라고 갑 중의 갑인 왕으로 만들어준 것일 수도 있겠지. 그러나, 나 같은 막장 인생 왕으로 만들어준 건 감지덕지 하다 쳐도 하필이면 익성군 이명복이라니.

고종! 전근대의 군주로서는 범군 이상이었지만, 근대의 군주로서는 낙제점이었던 인물. 나라가 망하는 와중에도 나라보다는 왕가와 자신의 절대권력에 집착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외척 민씨 일가의 득세를 모른 척 눈감아주었던 왕. 그리고 중립외교를 펼친답시고 간에 붙고 쓸개에 붙고 편을 바꾸다가 열강들에게 불신을 받아 열강들의 외면 속에서 일본에게 나라가 망하는 단초를 제공한 인물.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은 그의 능력이나 왕으로서의 행보가 아니었다. 결국,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은 지금의 시대와 조선 그 자체였다. 약육강식이 당연하고, 합리적 이성과 과학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시대. 그러면서도 여전히 전근대적 종교적 도덕관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백인의 짐이니 뭐니 하는 기상천외한 논리와 사회진화론인지 뭔지 하는 진화론을 처음 들고나온 다윈조차 부정한 궤변을 통치이념이랍시고 써먹던 시대.

훗날 유럽인들이 '그 좋은 시대(Belle Époque)'라고 부르는 제국주의의 시대. 그 격동의 시대 속에서, 조선은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채로 야수들이 우글거리는 밀림 한복판에 내던져진 것이다. 무기는커녕 이 밀림에 어떤 야수들이 있었고 그들이 무엇을 노리는지조차 몰랐다.

그러니까 결국 온 나라가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하다가 결국에는 망해버렸다. 놀라울 것도 없는 일이다. 만약 나라가 조금 더 부강했다면 중국처럼 갈기갈기 찢겼을지언정 아주 합병되지는 않을 수도 있었을 테고, 조금 더 고종이 현명했더라면 어느 나라의 속국이 되었을지언정 아주 나라가 망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조선은 나라가 특별히 부강한 것도 아니었고 고종은 이 혼란의 시대에 어울리는 왕도 아니었다.

경술국치는 엉망인 나라 꼴과 엉망인 군주의 기적의 콜라보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물론 나는 그보다는 낫지. 최소한 이 밀림에 어떤 야수들이 들끓고 있고, 그 야수들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를 알고 있으니."

정보의 선점은 언제나 중요했다. 나에게 왕의 자질이 있는지 어떤지는 몰라도, 최소한 정보를 선점한 것만으로 나는 진짜 고종은 물론이요 지금 이 나라 조선의 그 어떤 고명한 학자보다도 앞서나가고 있었다.

지금의 시대는 그레이트 게임의 시대로, 어떻게든 바다로 뻗어 나가기 위하여 남하하던 러시아와 그런 러시아의 확장을 저지하려는 영국이 세계 곳곳에서 정면충돌하던 시대였다. 7년 전에 마무리되었을 크림전쟁 또한 그런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이었고, 마찬가지로 그 해에 러시아가 국채를 변제하기 위하여 미국에 팔아치운 알래스카도 미국으로 하여금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영국의 세력확장을 견제하려는 러시아의 의도가 깔린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이었다.

그나마도 아직은 이제 막 발동이 걸렸을 뿐으로, 조만간 양국은 티베트, 위구르, 아프가니스탄, 페르시아, 발칸, 캄챠카 등 전 세계에 걸쳐서 충돌하게 될 터였다. 한반도와 만주는 덤이었다. 영일동맹이라든가 조선 책략은 모두 이와 같은 시대적 맥락에서 등장한 결과물이었다.

"당장 조선 책략에서 말하는 대로 조선과 청과 일본이 힘을 합쳐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한다면 가장 이익을 보는 나라가 어디였더라?"

말할 것도 없이 영국이다. 정말로 그대로 실현된다면 영국은 코 한 번 풀지 않고 극동 아시아에서의 러시아의 세력확장을 저지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결국 조선 책략은 영국의 입장에서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시대를 대변하는 책이나 다름없었다. 그걸 저술한 황순헌 본인은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우위를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었다지만 말이다. 그도 결국 영국의 손아귀에 놀아난 어리석은 인물 중 하나일 뿐이었다.

애초에 이 시대의 동양인들에게 그런 대단한 국제외교적 식견을 기대해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러나…조선이 영국과 손잡아봤자 좋을 것이 없지."

딱히 영국이 러시아보다 사악하다거나 탐욕스럽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영국도 러시아도 똑같이 탐욕스러웠고 똑같이 지독한 나라들이었다. 이건 굳이 따지자면 진영논리의 문제였다.

일본을 개항시킨 미국은 일본을 식민지화 시키기보다는 경제적으로 종속시켜서 그들을 수탈하려고 들었고, 일본의 근대화에 지대한 공헌을 한 영국은 일본을 장기 말로 삼아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고 들었다. 그리고 미국과 영국, 이 두 나라는 이 시대까지는 아직 독립전쟁과 뒤이은 영미전쟁 시절의 악감정이 남아있기는 했어도 기본적으로 아메리카 대륙 바깥 국제외교에서는 서로 협력하는 외교적 동반자였다.

요컨대 일본은 영국과 미국의 세력권이었다. 아직은 신정부군과 막부군이 무진전쟁을 벌이고 있는 참이겠지만, 곧 신정부군이 승리하고 메이지유신이 시작될 터였다. 메이지유신이 시작되고 난 다음부터 일본은 영국의 태평양 방면 세력투사를 위한 디딤돌이 된다.

이 상황에서 조선이 뒤늦게 영국과 손을 잡는다면 어떨까. 조선은 일본보다 나라가 큰 것도 인구가 더 많은 것도 국력이 더 강한 것도 아니니, 영국은 조선을 일본의 부속물 정도로 취급할 것이다. 그래야지만 태평양 방면에서의 일은 일본에게 맡겨두고 자신들은 그보다 중요한 인도양과 대서양 일대에 집중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일본은 미국과 영국에게 경제적으로 수탈당한 분량만큼을 조선에게 수탈하려고 들 테고, 영국은 일본이 아주 조선을 병합하는 것은 용인하지 않을지 몰라도 일본이 조선을 괴뢰국화시키는 정도야 가볍게 용인할 터였다.

거기에 청나라는 확실한 친영파는 아니었지만, 반러라는 기치에서는 영국과 뜻을 함께했다. 청나라로서는 영국 같은 소국(?)보다는 당장 북방에 국경을 접하고 있는 러시아가 더욱 위협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동북아 3개국 중 조선보다 강력한 2개국이 그레이트 게임에서 영국의 편에 이미 붙었거나 거기에 가까운 곳에 있는데, 뒤늦게 조선이 영국과 손잡아봤자 영국은 조선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말할 것도 없다.

"러시아의 장기 말이 되어주는 수밖에. 청나라에 의지해봤자 답도 없으니까."

청나라는 이미 국력이 쇠한 지 오래였다. 흔히 중화질서식으로 말하자면 천명이 다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한족 민족주의 의식과 뒤섞인 사교도 반란이 연달아 터져나왔고 이 와중에 천자는 어린데 섭정으로 들어선 서태후는 탐욕스럽고 무능한 여자이다.

안 그래도 100만 명이 조금 안 되는 만주족으로 수억의 한족을 지배하는 기형적인 통치구조의 청나라였다. 한족 왕조였다면 그나마 우국충정을 바치는 민족주의자들을 내세워 개화를 밀어붙일 수도 있었겠지만, 한족 민족주의자들에게 청나라는 그들의 지배자이지 그들의 조국이 아니었다.

그 결과 청나라는 결국 한족 민족주의를 앞세운 개화파의 손에 멸망해버렸다. 물론 그 과정에서 서태후를 비롯한 청나라 황실의 무능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한족과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고립된 만주족들의 한계였다.

"짱꼴라가 재수 없는 놈들이기는 해도 이런 시대에 의지하려고 하면 가장 나았을 텐데…."

나는 아쉬운 마음을 담아 입맛을 쩝쩝 다셨지만, 이내 없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중국이 강하다면 천조질서에 의지하여 외세를 막아내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그것이 반드시 최선의 결과라고는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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