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3화 (3/530)

< 상황을 정리하다(2) >

중화질서에 의존한다면 당장 평화와 안전은 얻을 수 있어도 장기적으로 중국을 위협할만한 성장은 불가능하게 되니까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중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뜻을 펼칠 기회를 얻은 격이었다.

"어차피 조선 혼자서 자립하는 건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해. 그레이트 게임에서 하나의 독립된 축으로 움직이려면 독일이나 프랑스급은 되어줘야 할 텐데 그러자면 우선 인구부터 2배, 3배로 늘리고 만주까지 집어삼켜야지. 그러나 조선 따위가 만주까지 진출한다면 그걸 용인해줄 열강들은 많지 않아.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간도까지가 한계고…그걸로는 당장 입 가림도 힘들겠지. 결국, 독자적인 축으로 움직이기보다는 거대한 세력의 일부로서 발을 맞춰줘야 한다."

그러니까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만주에 지대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태평양으로 뻗어 나가는 한반도의 항구들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러시아 또한 청나라 못지않게 많은 문제점을 내포한 나라였지만, 그래도 그들은 썩어도 유럽의 변방이었다. 아니, 사실 그렇게 문제점을 많이 내포한 편이 오히려 나을 수도 있었다. 그만큼 조선에 간섭할 일도 적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러시아 이 거지들은 돈이 없어. 근대화하려면 막대한 돈이 필요한데 가장 궁극적인 돈이 없단 말이야. 수탈이고 나발이고 일단 기본적인 투자가 있어야 수탈을 할 텐데 그 치들은 조선을 수탈하는 데 필요한 투자금조차 없다고."

수탈이고 나발이고 일단 항구나 철도가 있어야 수탈할 거 아닌가? 그리고 조선의 지정학적 가치를 고려해보면 태평양으로 뻗어 나가기 위해서라도 군사기지화 시키기 위한 투자금이 필요할 텐데, 러시아는 그 투자를 위한 기초자본조차 없었다. 이는 결국 개항이 시작되고 어느 정도 근대화가 된 이후라면 모를까 근대화 초기부터 의지하기에는 모든 면에서 부족하다는 이야기 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럼 결국 개항은 다른 나라에게서 시작해야 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프랑스와 미국이었다. 이들은 각각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로 조선을 상대로 포함외교를 시도한 바 있다. 조선에서 먼저 개항을 제안한다면, 그들 또한 그런대로 긍정적인 답변을 돌려줄 것이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이 두 나라의 핵심이권 영역은 조선이 아니라는 점이다. 미국은 지금 남북전쟁이 한창일 테고, 프랑스는 베트남에 집적거리고 있을 터였다. 거기에 미국은 남북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서부개척과 하와이에 집중하지 조선까지 깊숙이 들어오지 않을 터이고, 프랑스는 조만간 보불전쟁으로 프로이센에게 곤욕을 치르게 될 테니 이렇다 할 지원을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반대로 생각하면 수탈이 어려운 만큼 저들이 조선에게 관여할 여지도 줄어든다는 거지만…."

그것도 때에 따라서는 다를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조선이 주도적으로 서구세력과 접촉을 시도하게 될 때 저들의 대응 또한 현실역사와 같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미국이 조선을 핵심이권 영역으로 여기고 대대적인 투자와 함께 경제적 수탈을 시도할 수도 있었고, 프랑스가 보불전쟁 이후 추락한 국제적 위신을 되찾기 위해 조선을 식민지화 시키려 할 여지도 충분했다.

결국, 정답이 없는 문제였고, 일단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보고서 결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저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그리고 국내로 들어간다면…일단 천주교 박해를 끝내야겠지. 아예 왕인 내가 기독교에 직접적인 관심을 드러내면서 여론 환기를 할 필요가 있다."

딱히 내가 기독교인이라서가 아니었다. 이 시대의 유럽은 아직도 전근대적 신앙에 근거한 도덕관이 건재하던 무렵이기 때문이다. 북아프리카의 약소국에 불과했던 에티오피아가 오랜 세월 독립을 유지하고 끝내 무솔리니에 의하여 식민지화 당했을 때 유럽국가들이 한 입을 모아 이탈리아를 비난했던 것도, 다름 아닌 에티오피아가 흑인국가이기 이전에 기독교 국가였던 덕분이었다.

당장 저들이 말하는 백인의 짐에는 근대문물을 전파하여 비문명인들을 문명화시킨다는 것도 있지만, 비문명인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포교하는 것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당장 그 링컨조차 정적들에게 그가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비난당했다는 것만 봐도, 이 시대에서 종교는 서구사회에서 여전히 중요한 입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여차하면 내가 기독교로 개종하는 방법도 있다. 만약 내가 기독교로 개종한다면 일단 그것만으로 비기독교 국가인 일본이 조선을 합병할 여지가 아예 사라져버려. 온 유럽의 열강들이 달려들어서 일본을 득달같이 물어뜯을 테니."

다만 문제가 있다면 당연하게도 유림 층의 반발이 어마어마할 것이라는 점. 아예 조직적으로 봉기를 일으키거나 수도에서 정변을 시도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여기까지 막 나가려면 일단 내 친위세력부터 준비해야 할 터였다.

"아니면 외세의 군대를 끌어오는 것도 방법이겠지."

물론 최후의 방법이었다. 그 경우 잘해봐야 민심도 경제적 주권도 다 잃고 친위세력만 곁에 득실거리는 제삼 세계 독재자 꼴이다. 그것만은 어떻게든 피해야 했다.

"일단 경복궁 중건-까지야 막을 필요 없겠지만. 당백전은 흥선대원군 처소 앞에 엎드려서 죽어라 펑펑 울어서라도 어떻게든 막아내야 할 테고. 서원들은 철폐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상업을 중흥하고 공업을 장려할 필요가 있는데…빌어먹을, 이것도 저것도 일단 서구열강에 크게 한번 당하고 나서야 뭔가 바뀌어야 한다는 여론에 못 이겨 승낙해줄 텐데."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인가는 머릿속에 이미 들어있다. 그러나 그대로 실현하는 것이 어렵다. 아버지 흥선대원군도 내가 장성하는 대로 쳐내야 할 테고, 외척 민씨 일가가 득세하는 것도 막아야 한다. 민씨 외척세력이야 내가 알아서 막아내면 그만인 일이지만, 흥선군이 본래 역사에서처럼 고종을 쫓아내겠답시고 친위쿠데타를 시도한다면 또 어쩔 수 없이 키워줘야 할 수도 있었다.

천주교도들을 박해하는걸 멈추는 건 좋지만, 그 경우 그들을 비호하는 대가로 유림 층과 정면대결하는 것을 각오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무엇 하나 쉬운 게 없었다.

"그냥 확 힘으로 전부 다 찍어눌러 버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그 또한 한 가지 방법이라면 방법이었다. 아예 처음부터 작정하고 개화파 세력들과 천주교 세력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조선 특유의 막강한 권위로 찍어누르는 것도 상책은 아니라지만 하책도 아니었다.

아무튼 권위 하나는 하늘을 찌르던 조선 왕실이었다. 그 덕분에 그 개망나니 연산군조차 왕위에서 내쫓기고도 직접 뭔가 고문이나 형을 받은 것은 없이 유배지에서 목숨이 다했다. 내가 유림세력들과 적대시하여 반정이 일어나더라도, 그 연산군도 죽이지 않았는데 나를 죽일 이유는 없었다. 유배지에서 평생을 보내기는 해야겠지만 말이다.

뭐, 물론 역성혁명이라도 일어난다면 답이 없지만. 그때는 그냥 전주 이씨의 천명이 다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았다. 유림이나 민초들 모두에게서 신뢰를 잃었다는 이야기니까 말이다. 정감록대로 정도령이 나타나서 나라를 뒤엎고 새 나라를 세운다고 봐야겠지.

나로서는 그것이 역성혁명이기보다는 공화 혁명이기를 기대하지만 말이다. 공화 혁명이라고 해봐야 적어도 반백 년 간은 개발독재에 시달리게 되겠지마는, 이 시대에 어느 나라는 또 안 그랬던가? 당장 유럽의 문명국들조차 개발독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 판국에 조선 같은 전근대 국가가 단기간에 도약하려면 개발독재는 불가피했다.

결국, 누군가는 개발독재를 벌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되었건, 아니면 나를 쫓아내고서 대한민국을 세우고 민족주의를 명분 삼아 독재정치를 펼칠 이 시대의 흔한 정치인이 되었건 간에 말이다.

"말로 해서 알아듣게 설명할 자신도 없고, 시간은 부족한데 나라 꼴은 엉망이다. 그럼 방해하는 놈들은 모조리 죽이고 억지로라도 밀어붙이는 수밖에."

결국, 결론은 그러했다. 약육강식의 시대에, 개발독재보다 빠르게 나라를 수습하는 방법은 없었다. 그 청나라조차 서역 오랑캐들에게 당했는데 조선이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면서 불평불만 하는 유림세력의 불만을 모조리 찍어누르면서, 개화파와 천주교에게만 힘을 몰아주고 그들을 내 친위세력으로 삼아 서구열강들의 지원을 받으며 국내개혁을 시행한다면 조선도 열강으로 도약하는 것까지는 꿈속의 꿈이더라도 당장 생존이라면 가능했다.

하지만 그러자면 의문이 있었다.

"내가 왜 그렇게 해야 하지? 물론 내가 갑질을 하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손에 피를 묻히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게 독재자가 되어가면서까지 조선을 살려봤자 정작 나는 격무에 시달릴 뿐일 텐데, 무엇 하러? 막말로 이 한 몸의 쾌락을 바란다면 그보다 좋은 방법도 많지 않은가?"

나 스스로 자문했지만,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내가 무엇 하려 거기까지 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 내가 이 나라의 왕족이라서? 언제부터? 오늘부터? 고작 왕족이 된 지 하루 만에 왕으로서 온 나라의 백성들을 책임져야 한다고? 그게 얼마나 엄청난 노동인지는 사학도인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래, 민족을 위하여. 말은 좋다. 그러나 실제로 민족을 위하여 제 한 목숨과 사명을 바쳐가면서까지 모든 걸 바칠 사람이 몇이나 될까? 독립운동가들이 괜히 찬양받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평범한 이들은 할 수 없었던 일을 끝까지 관철했기에 그들이 찬양받는 것이 아니던가?

나는 그들처럼 대단한 인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언가 이 나라와 민족에 부채의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한낮 시궁창에서 뒹굴뒹굴하다 운 좋게 왕이라는 자리에 얻어걸린 길바닥 쓰레기 인생일 뿐.

"그리고 그건 내 일이 아니야. 엄밀하게 말하자면 익성군 이명복의 일이지. 왜 내가 그 녀석의 일까지 대신해줘야 하는 거냐고."

아니, 그전에 이 몸이 익성군 이명복의 몸이라면 본래의 이명복은 어디로 간 것일까. 나의 몸으로 들어간 건가? 그 다 죽어가던 비루한 몸뚱어리로? 아니면, 나는 사실 스스로를 이원철이라고 착각할 뿐인 미치광이 왕족 익성군 이명복일 뿐인가?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아직 어린 몸뚱어리로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한 탓인지, 머리가 지끈거리고 잠이 쏟아졌다. 그저 피곤했다.

"빌어먹을, 일단 자자. 자고 일어난 다음에 생각하자. …아, 자고 일어나면 궁에서 사람이 오려나. 우라질, 무엇하나 내 뜻대로 되는 게 없군."

나는 그렇게 독백하고서, 그대로 잠자리에 누워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왕이 되어있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무거웠다.

무엇하나 낯설지 않은 것이 없으니 과연 잠이 올까에 대해 의문이 들었지만, 애초에 의미 없는 고민이었다. 나는 누운 즉시 깊은 잠에 빠졌다.

기념할만한 조선에서의 첫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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