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흥부대부인 민씨 >
"도련님, 이만 기침하시지요. 마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라질, 어느 놈이 새벽부터 지랄이야 지랄이… …응? 잠깐, 뭐? 마님?'
결국, 그날은 제대로 잠을 자지도 못했다. 해가 아직 뜨기도 전, 이른 시각 방문을 두드리는 노복의 목소리 탓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눈알은 튀어나올 듯이 아팠다. 그뿐이랴. 어린 몸이 뭐가 그렇게 무리를 했는지 온몸 구석구석 안 쑤시는 구석이 없었다. 어제 술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무슨 숙취? 아무튼, 몸 상태로만 보면 나 혼자서 소주만 대여섯 병은 깐 것 같았다.
다만 그렇다고 티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노복의 말에서 놓칠 수 없는 단어가 암시된 것이다.
'마님'.
아직 내가 익종과 신정왕후 조씨의 양자로 들어가기도 전이니, 노복이 말하는 마님은 틀림없이 나의 생모인 여흥부대부인 민씨일 터였다.
'아니, 내가 아니잖아. 이명복 그 녀석의 생모지 아무리 좋게 봐줘도 둘 다 양모나 마찬가지야. 이제 겨우 하룻밤 잤다고 왕족 기분 내냐? 정신 차려라. 이원철. 너는 ㅈ도 아닌 놈이고, 네 어머니는 따로 계신다. 그걸 잊으면 안 돼.'
"냉수를 가져오라."
급히 뺨을 번갈아 가며 때려서 정신을 차리고, 노복을 시켜 냉수를 가져오라고 했다. "예이."하고 한번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나간 노복은 얼마 지나지 않아 냉수를 바가지에 담아 떠왔고, 나는 그 물로 급히 목을 축인 다음 남은 물로 세수를 했다.
그제야 정신이 조금 드는 기분이었다. 왠지 모르게 속이 메스꺼운 것이 얼큰한 해장국이 당겼지만, 없는 걸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입을 쩝쩝 다시면서도 차마 무엇을 더 달라고 하지도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노복을 따라나섰다.
'그나저나, 여흥부대부인 민씨라….'
기억에 있는 인물이었다. 없다면 그편이 이상했다. 훗날 명성황후가 되는 민비 민자영의 12촌 자매이자, 훗날 민자영의 양 오빠가 되는 민승호의 친누이. 그리고, 독실한 천주교인으로 나-아니 이명복이가 왕위에 오르자 운현궁에서 감사 미사를 올리고 훗날 프랑스와의 정식수교로 천주교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자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인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세례를 받기도 했다.
향후 천주교 신자들을 아군으로 끌어들이려 한다면 분명 큰 힘이 되어줄 만한 인물이었다.
'다만, 한계도 있다.'
그녀는 분명 왕의 친모이기는 했으나, 이명복이가 왕으로서 즉위한 이후 그는 신정왕후 조씨의 양자로 들어가게 된다. 선왕 철종과는 17촌 간으로 멀디멀었던 촌수를 7촌 정도로 짧게 줄이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선왕과의 촌수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왕위를 승계받을 정통성도 드높아지니 필요 불가피한 일이었다. 왕이 왕 노릇을 하려면 일단 기본적으로 최소한 네가 왜 왕이냐는 목소리는 없어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그렇게 양자로 들어가게 되면서 정작 친모이던 여흥부대부인 민씨와는 소원해졌다. 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무튼 족보상으로는 나의 어머니는 신정왕후 조씨가 되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관점으로 보자면 얼핏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내가 효를 다해야 하는 상대는 조 대비이지 민씨가 아니었던 것이다.
'뭐, 인조 그 양반처럼 족보상 양자로 들어갔던 말았던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고 친부 사후 추존시켜줬듯이 행패를 부린다면 불가능한 것도 없겠지만…이 경우 조대비랑 흥선대원군 이하응을 상대로 정면대결을 신청하는 꼴이란 말이지'
거기에 후일 흥선대원군과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경우 임오군란을 계기로 아예 사이가 멀어져 버렸다. 여흥부대부인 민씨가 친척인 명성황후를 살리기 위하여 흥선대원군을 설득하는 한편으로 명성황후에게 암살자들의 존재를 알려 구사일생토록 하였기 때문이다. 후일 진실을 알게 된 흥선대원군은 크게 분개하였고, 이를 계기로 여흥부대부인 민씨를 멀리하게 된다.
요컨대 후일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몰라도, 일단 당장 현실역사 진행만 본다면 친해진다고 한들 큰 도움이 되기는 어려운 사람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아주 멀리할 이유도 없지. 아무튼, 그녀는 내 친모다. 내가 효를 다한다고 한들 주위에서 그걸 반대할 명분은 없어. 물론 조 대비가 불편해할 수는 있겠지마는…젠장, 또 나도 모르게 이명복이 녀석을 나라고 자칭하고 있었군.'
내 실수를 자각하고서 머리를 툭툭 치며 자책하고 있자니, 노복이 그런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면서 "마님, 도련님을 모셔왔습니다."라고 말했다. 그제야 고개를 번쩍 들고 앞을 보니, 자그마한 별채가 눈에 들어왔다. 보아하니 이하응에게 비밀로 하고서 노복을 시켜 나를 이곳으로 부른 모양이었다.
"수고했다. 이만 돌아가 보아라. 그리고 명복아, 바람이 차갑구나. 이리 들어오거라."
안에서부터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과연 명색이 종친 집안에서 13살 적부 터 시집살이를 해온 사람답게도, 목소리만 들었는데도 함부로 대하여서는 안될 것만 같은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 어조는 한없이 부드럽고, 또 애처롭게만 느껴졌다.
눈물이 핑 돌았다. 10여 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님께서 살아생전 나를 이런 어조로 부르셨다는 것이 기억난 것이다.
'우라질, 아침부터 쪽팔리게 이게 뭐 하는 꼴이라냐?'
나는 서둘러 손등으로 쓱쓱 눈매를 비비고 별채로 들어갔다. 괜히 분했다. 이명복의 어머니이지 내 어머니도 아닌 사람에게 어머니를 연상하여 눈물을 보이다니. 기실 나이로만 따지자면 나와 큰 차이도 없지 않던가? 고작 해봤자 대학교 선배뻘 될 아지매 앞에서 어머니를 연상해 눈물을 보이다니 창피하고 분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어딘가 지쳐 보이는 중년 여성이 있었다. 눈시울은 붉었고, 지난밤 잠 못 이루고 밤을 지새운 듯 머리는 정돈되지 못하고 가닥가닥이 삐져나와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잘 들어보니, 목소리도 쉬어있는 것 같았다. 전형적인 펑펑 울고 난 뒤 아닌척하려고 강해 보이려 하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어머니, 지난밤 평안 무탈하셨습니까."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우선 엎드려 절을 올렸다. 그것이 예의이고 법도이기 이전에, 조금 전 급히 지운 눈물 자국을 들킬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한숨도 자지 못했다. 이렇게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참으로 애달프구나."
그러나 무의미한 발버둥이였다. 민씨는 내게 어서 일어나라며 재촉했고, 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민씨가 내게 건네준 방석 위에 앉아야 했다.
민씨는 웃고 있었다. 대견함과 자부심, 그리고 씁쓸함과 아쉬움이 뒤섞인, 뭐라 말하기 어려운 미소였다.
"내 설마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느니라. 그래, 네가 이 나라 조선의 왕이 된다는 말이더냐. 허허허, 어찌 그럴 수가 있는지. 주 야소의 뜻은 참으로 헤아리기 어렵구나."
"어머니…."
"걱정할 것 하나 없느니라. 야소께서 너를 인도하셨으니 야소께서 너를 도우시리라. 이리 오너라. 내 새끼, 마지막으로 한 번만 안아보자꾸나."
그렇게 말하고서, 민씨는 나를 향하여 양팔을 벌렸다. 어서 달려와 품 안에 안기라는 모습이었다.
눈물이 핑 돌 것만 같았지만, 이번에는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다. 애써 참은 덕분이기도 했지만, 어딘가 마음속으로 식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야 물론 민씨의 입장에서 나는 애지중지 키운 아들이요, 이제 궁으로 떠나 앞으로 먼발치에서 밖에는 만나기 어려울 사람이었지만. 나로서는 민씨를 만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고 나는 그녀의 아들 이명복이가 아니었다. 이렇게 별채로 불려오기 전까지는 이별한다는 인식조차 없었던 것이 실정이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나에게 이리 다가와 어리광을 피워보라고 해봤자, 내가 그녀의 말에서 감동을 얻거나 하기는 어려웠다.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나 눈물이 찔끔 흐르기는 했지만, 그것이 끝.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의 앞에서 어린애처럼 달려가 펑펑 울면서 어리광을 피우기에는, 나도 너무 나이가 들어있었고 또 메말라 있었다.
'그러나 친모가 저리 말하는데 매정하게 거절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어찌할까?'
거기까지 생각하고서, 불현듯 무언가 깨닫는 것이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대로 무릎을 꿇고서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바닥에 이마를 박았다. 그 소리에 깜짝 놀라 민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나는 그녀가 무언가 말하기 전에 모든 힘을 아랫배에 때려 박고서 큰소리로 쩌렁쩌렁 울리라고 소리쳤다.
"어머님,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소자 이명복, 기필코 어머님의 숙원을 풀어드리겠나이다. 그리하여 이 나라 조선에서 두 번 다시는 병오년의 참극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조처하겠습니다. 소자를 믿고 기다려주소서!"
아랫배에 힘을 끌어모아서 외친 탓인지, 목소리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어쩌면 별채 바깥으로 울려 퍼졌을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이 노복이라든가 오늘 있을 즉위식에 대비하여 미리 준비 중일 조정의 눈과 귀들, 안채의 이하응 등이 내 목소리를 들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나의 뜻은 이러니까, 만약 내가 마음에 들지 않거든 지금 당장 내치라는 선전포고이기도 했다.
어머니의 숙원? 병오년의 참극? 뭔지 뻔하지 않은가. 병오년의 참극은 병오박해를 말하는 것이고, 민씨 부인의 숙원이라고 해봐야 당연히 천주교도로서 자유롭게 미사를 보는 일이다. 요컨대, 나는 왕이 된다면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멈추겠다고 민씨 부인의 앞에서 맹세한 것이다.
즉, 아직 왕위에 오르기도 전에 유림과 척을 지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우리 이개똥이가 벌써 이렇게도 컸구나."
내 맹세를 들은 민씨 부인은 감격한 듯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조대비처럼 오랜 세월 궁에 들어가 정치 실정을 익히지도 못하였고, 또 이제 내 아들이 왕이 되었으니 무엇인들 불가능하겠느냐는 생각에 저렇게 가벼이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조차도 나 스스로 입 밖에 내고서도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을 지경인데, 이 소리를 엿들었을 이들의 기분은 어떨까. 경악이라는 두 글자로는 부족한 심정일 것이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없애겠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야 뻔한 것 아닌가. 이 나라의 국시 유교를 내치거나, 혹은 그 지위를 격하시키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설령 그것이 아니더라도, 차기 왕이 본인 입으로 괴력난신을 가까이하겠다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현대답게 해석하면 대통령이 무속인들에게 파격 인사를 내리겠다는 수준이었다.
'빌어먹을, 내가 어쩌자고 이런 사고를 쳤지? 이게 다 괜히 어머니라는 존재 앞에서 약해진 나 자신 때문이다. 오냐, 좋다. 이유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 일단 저지르고 보자. 어차피 무엇 하나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 없이 옆에서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하면서 살다가 죽은 음경 같은 내 인생이다. 얼기설기 이기는 해도 난생처음으로 미래계획이라는 놈을 세운 거야. 그렇다면 일단 들쑤셔보는 수밖에. 내 운수라는 놈을 시험해보는 거다.'
이를 악물었다. 아랫배에 들어간 힘이 도저히 풀리지를 않았다. 뭐든지 충동적으로 일을 벌이는 게 내 나쁜 버릇이었다. 그래서 전생에서도 끝내 뭐든지 마음 가는 대로만 살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서는 술과 담배에 찌들어 초라하게 생을 마치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과 그때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그때는 어떠한 미래계획도 직업도 없었지만, 지금은 아직 어려도 번듯한 직장(?)이 곧 생길 예정이었고 그 직장에서 무엇을 할 생각인지에 대한 개략적인 미래계획도 세운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 친 사고도 그냥 충동적으로 벌인 사고라고 볼 수도 있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내 장대한 미래계획을 위한 첫걸음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아무튼, 이렇게 일찍부터 내 친 천주교적 관점을 반쯤 공개적으로 밝힘으로써 악평이든 호평이든 평가를 얻지 않았는가. 악평이 무평보다는 낫다고 했다. 장차 아버지 이하응에게 휘두르지 않으려면, 일단 어떤 식으로건 왕으로서의 존재감을 꾸준히 드러내야만 했다. 사람들의 입에 꾸준히 입방아가 오르다 보면, 그 사람에게는 좋은 면에서건 나쁜 면에서건 아무튼, 권위가 모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 이건 직장이다. 내 직업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하, 우라질. 고작 12살에 정규직 취직이라니 일평생 막노동에 알바, 인턴 노릇만 하다가 죽은 전생에 비하면 천지 차이로군. 뭐, 좋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권력이니 부귀영화니 가문이니 신앙이니 민족이니 조국이니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결국, 이건 내 직업이고 내 일이다. 나는 내게 주어진 일을 하면 되는 거야.'
나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그렇게 되뇌었다. 그러자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왕이니 뭐니 해봤자 결국 직업이다. 궁전은 고작 해봤자 직장이다. 조정의 신하들은 부하직원들이고 말이다.
일을 하자. 나의 일을 하자. 나에게 맡겨진, 나의 일을 하자. 직업 소명을 다하라! 사회의 톱니바퀴로서 이 얼마나 바람직한 마음가짐이란 말인가?
'지금은 우선 이것으로 된 거다.'
그렇게 마음을 추스르고, 나는 마지막으로 별채의 민씨 부인에게 다시금 정식으로 절을 올린 후 별채를 나왔다. 민씨 부인은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감격한 듯한 얼굴로 내가 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눈물을 훔치고 있을 뿐이었다.
곧 이하응의 부름이 있을 거로 추측했지만, 공교롭게도 없었다. 조금 전 내 말을 듣지 못한 것일 수도 있었고, 아니면 듣고도 모른 체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쪽이건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그는 유학자라기보다는 권력욕으로 똘똘 뭉친 정치가였다. 내 선언을 듣고서도 그저 어린애의 멋모르는 허세 정도로 치부하거나 별 의미를 두지 않고 나의 뜻을 이용할 방법을 궁리할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건 지금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결과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방으로 돌아가 논어를 읽었다. 사실 12살이라는 나이를 고려했을 때 이명복이 벌써부터 논어를 떼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지만, 내게는 어머니의 병시중을 드느라 공부를 끝내지 못한 나로서는 이번에야말로 내 공부를 끝마치고 싶었던 것이다.
"자왈 구유용아자(自曰 苟有用我者)면 기월이이(期月而已)라도 가야(可也)니 삼년(三年)이면 유성(有成)이리라!"
진실로 나를 써줄 사람만 있다면 1년이면 나라를 바로잡을 수 있고 3년이면 그 성과가 나올 것이라는 논어 13편 10장의 문지였다. 요컨대, 공자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듯이 나 또한 중임을 맡는다면 기꺼이 그렇게 해보겠다는 뜻이었다.
"자왈 현자피세(子曰 賢者避世)하고 기차피지(基次避地)하며 기차피색(基次疲色)하니 기차피언(基次避言)이니라! 자왈 작자 칠인의(子曰 作者七人矣)로다."
현명한 사람은 난세를 피하고, 그다음 가는 사람은 난국을 피하며, 그다음 가는 사람은 폭군 앞을 피하고, 그다음 가는 사람은 폭군의 말을 피한다는 논어 14편 헌문 39장의 문지였다. 본래의 뜻은 현실정치에 실망하여 정치를 등진 일곱 현인에 대한 그리움의 말이었지만, 나는 내가 바로 그 폭군이 되어줄 테니 각오하라는 의미에서 인용한 구절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밖에 있는 이들에게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공부도 공부지만, 그 이상으로 나에게 원대한 뜻이 있음을 주변에 알리고자 일부러 그런 구절들만 골라서 읽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일부러 목청을 키워가며 그렇게 내 방에서 죽으라고 논어를 읽었다. 노복이 주는 밥을 얻어먹을 때를 제하고서, 나는 그날 종일 소리 내 책을 읽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동이 트고, 해가 중천에 뜨고, 목이 쉬고, 배가 곯기 시작할 무렵.
"익성군 이명복은 대비마마의 교서를 들라!"
마침내, 궁에서 나를 데리러 올 이들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