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5화 (5/530)

< 입궁 >

"귀하의 성명과 연령을 들을 수 있겠소?"

"성명은 이명복이요, 올해로 나이는 열둘이 되옵니다."

"익성군 이명복은 대비마마의 교서를 받들라!"

'저자가 영의정 김좌근, 저자가 행 도승지 민치상, 그리고 저들이 함께 온 기사관들인가'

대청에서 내려와 몸을 굽히고 예를 표한 다음 남쪽을 향해 서자, 행 도승지 민치상이 앞으로 나와서 나의 이름과 나이를 물었다. 교서를 읽기 전, 우선 나의 신원을 확인하는 것이다. 어차피 이 시대의 신원확인이라고 해봐야 대강의 인상착의와 겉으로 보이는 나이, 이름, 위치, 눈치 등으로 파악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므로 별다른 의미가 없어 보여도, 실제로는 굉장히 중요한 절차였다.

현대 대한민국으로 따지자면 엔 프로텍트라든가 엑티브 X 깔고 공인인증서로 인증하는 것과 비슷할까. …흠, 기분 탓인가. 조선보다도 대한민국이 신원확인에서는 정확도는 더 높아지고 위조 가능성은 더 낮아졌어도 전체적으로 보면 더 퇴화한 기분이 든다.

아무튼 나는 답하는 동안 나를 데리러 찾아온 이들의 인상착의를 대강 빠르게 훑었다. 앞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자주 얼굴을 마주 보게 될 테니 싫어도 외워둘 필요가 있었다. 물론 내가 그들의 얼굴을 아는 이유는 일찍이 한 번씩 본 얼굴들이라서가 결코 아니었다.

사학도로서 일찍이 고종을 김좌근과 민치상이 기사관들과 함께 데리러 왔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그러한 사전정보와 함께 입고 있는 관복들을 통하여 관품을 읽어 누가 누구인지를 확인한 것이다.

예순이 가까운 김좌근은 익히 듣고 있었고, 알고 있었던 대로 영락없는 간신의 상이였다. 콧수염은 옅고 양 볼로 더듬이처럼 튀어나온 것이 메기수염을 보는 것 같았고, 겉으로는 기품있는 양반의 행세를 하며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었으나 그 눈빛은 영락없이 탐욕으로 물들어 있었다.

'작업반장이 꼭 저와 같은 눈빛을 가지고 있으면 나에게 들어오는 돈은 많지 않고 중간에 줄줄 새는 돈들이 많았지.'

무능한 인물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일단 첫인상부터가 강렬했고, 무언가 말로서 표현하기 어려운 위압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다만 그는 자신의 그 출중한 능력을 타인을 위하여 쓰지 않는 부류의 인물이었다. 유능하되, 그 재능을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쓰는 부류의 인물. 그것이 나의 개인적인 평가였다.

'어차피 지금의 내가 맞서기에는 너무 벅찬 상대다. 지금은 아직 대원군과 대비에게 맡겨두고서 잊어두는 편이 좋아.'

한편 민치상은 영락없는 간신의 상인 김좌근에 비하면 뺀들뺀들한 것이 일 잘하게 생긴 관료의 상이였다. 김좌근과 달리 집안이 명문가 민씨 출신이기는 해도 그다지 대단한 권세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지금까지 24년간 차근차근 커리어를 쌓아올려 도승지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후일 오페르트 도굴사건 당시 관찰사로서 조선 측 일선 책임자로 오페트르의 추적에 나서기도 했다.

'일단 실록에서도 환곡의 폐단을 건의하거나, 면농을 망친 백성들에게 돈으로 대납하게 하거나, 꾸준히 국방에 관심을 기울이고 새로 전선을 만들고 병사들을 훈련하던 걸 보면 아주 생각이 없던 관료는 아니야.'

물론 흠을 잡고자 한다면 많았지만, 아무리 낙하산으로 자기 가문 사람을 천거해도 최소한 재능은 보았던 안동 김씨와 비교하면 되는대로 사람을 천거했던 민씨 일가 중에서는 그나마 비교적 일 잘하고 충직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그와 나는 민유중의 자손으로 그가 5대손, 내가 7대손이었다. 16촌 내외까지는 친족으로 보던 조선 시대에서는 엄연한 친족이었던 것이다.

'앞으로 민씨 일가를 적으로 돌리든 아군으로 삼든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인물이다.'

"「…하여, 이 나라 조선의 종묘와 사직을 위하여 흥선군의 적자에서 둘째 아들 이명복을 익성군으로 하비(下批)하고 입승(入承)하려 하니, 익성군 이명복은 조속히 입궐하도록 하라.」"

"대조선국 천세! 천세!"

민치상이 교서를 모두 읽자, 나는 천세를 외친 후 곧 대청 아래로 내려와 사배례하고 상 위에 놓인 교서를 향하여 나아갔다. 민치상은 무릎을 꿇고 내게 교서를 전하였고, 나는 무릎을 꿇고 조심스럽게 민치상이 건넨 교서를 받아 읽었다.

교서는 언문으로 되어있었다. 아마도 나의 나이가 아직 어리니, 학문의 깊이가 깊지 않을 것이라 여기고 일부러 배려한 듯 보였다.

'옳아, 그러니까 이게 말하자면 취업합격증 같은 것이다, 이 말이지? 그것도 평생직장이야. 으흐흐…이쯤 되면 성공한 인생이로군.'

나는 무심코 웃음이 새어 나오려고 하는 것을 억지로 꾹 참아 눌렀다. 철종이 죽은 지 고작 하루밖에 되지 않았으니, 아직 온 나라가 상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새로이 왕에 오를 자가 슬퍼하는 기색은 없이 왕위를 건네받은 것에 대하여 기뻐하기만 한다면 새로운 왕에게 좋은 시선이 올 리 만무하다. 아무리 나와 철종이 생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고 해도 말이다.

'참자. 아직 나는 정식으로 왕이 된 것조차 아니다. 지금은 우선 참고서 때를 기다려야 해.'

나는 그렇게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어 마음을 가까스로 진정시킨 다음, 대비의 교서를 다시 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러자 대신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이제 옷을 갈아입고, 가교를 타고 나와 입궐할 시간이었다.

옷은 따로 가지러 갈 필요도 없었다. 아버지 흥선군 이하응이, 노복과 함께 의상 일체를 준비하여 나타난 것이다.

"아버님,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나는 그대로 제자리에 엎드려 흥선군에게 절을 했다. 물론 이제 곧 흥선군도 정식으로 대원군으로 임명받아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그렇게 했다. 무지를 가장하여 흥선군은 궁으로 올 필요가 없는 사람 취급한 것이다.

꿈틀, 하고 흥선군이 동요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의 눈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아마, 내가 그를 놀리려고 들고 있다고 판단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자 흥선군은 화를 내지 않고, 꾹 눌러 참으며 말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법이다. 너도 이제 앞으로 궁에서 생활하게 되었으니, 언행을 하는 데 있어서 언제나 누군가 이 말을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 염두에 두고 행동하거라."

얼핏 듣기에는 부모로서 아들에게 따뜻한 충고의 한마디를 건네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뻔했다. 오늘 새벽녘에 민씨 부인 앞에서 큰소리를 떵떵 친 것을 두고서 경고해둔 것이다. 물론 제 자식에 대한 걱정이라기보다는, 앞으로 자신이 펼치고자 하는 뜻에 아직 어린 내가 장차 방해될지도 모르니 미리미리 이렇게 기를 죽여두려는 것이겠지.

나로서는 조금 질린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 내가 12살밖에 되지 않았으니 그냥 어린아이의 무지라고 흘려넘기거나 이 자리에서 직접 면박을 주고 꾸중을 주었어도 될 것을, 굳이 일부러 훈계를 가장하여 행동에 제약을 걸다니. 이게 지금 12살 어린애에게 할 짓인가. 같은 선비들 끼리라면 모를까 12살 어린애에게도 여기까지 하는가.

'훗날의 행보를 보고서 노욕이 들어 권력에 환장하게 되었다 여겼는데, 그것과는 거리가 있다. 이 자는 처음부터 자신이 펼치고자 하는 뜻에 방해가 되면 누구라도 치워버릴 수 있는 위인이다.'

나는 내심 그렇게 혀를 내두르고서, 겉으로는 "명심해두겠습니다, 아버지."하고 말하고 일어났다. 노복이 내가 입고 있던 도포를 벗기고 궁에 입궐하기 위한 청도포와 흑피화, 백사대와 복건을 쓰는 동안에도 흥선군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되려 등을 돌려 그대로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나로서는 기가 막힌 일이었지만, 그것이 본래 그의 성정이라고 생각하고 넘겼다.

"그대는 내가 새벽녘에 뭐라 하였는지 들었소?"

"쇤네는 귀가 어두워 아무것도 듣지 못하였나이다."

"어허, 그거 큰일이구려. 100세까지 사셔야 하는데 벌써 귀가 안 좋으셔야 원. 내 좋은 의원이라도 소개해 드리리다."

나는 그렇게 노복에게 농을 던지고, 복식을 갖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실 노복이 못 들었을 리가 없었겠지만, 나는 큰 의의를 두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들었다고 해봤자 흥선군에게 밖에 더 말해주었겠는가. 그렇다면 흥선군이 저렇게 꽁해져 있는 것도 이해는 갔다.

대청마루 앞에는 내가 타고 갈 가마와 가마를 끌 하인들이 나와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위에 올랐고, 곧 가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식으로 관례를 올리게 되는 것은 3일 후. 그러나, 그렇다고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조선은 유교를 국시로 두고 있는 나라였고, 그만큼 무언가 일을 진행할 때마다 따라야 하는 관례라든가 예법 같은 것이 무궁무진했다. 물론 그간 흥선군이 미리 대비와 만남을 가지며 이리저리 연줄을 만들어뒀다고는 하지만, 나는 줄곧 궁 밖에서 살아 궁 내의 예법에 대하여는 완전히 까막눈이였다.

필시 정식으로 임금의 관례를 행하기 전 예법부터 달달 익히게 만들 터였다. 장차 왕이 될 놈이 임금의 관례조차 익히지 못하고 헤맨다면 누가 그를 왕으로 봐주겠는가. 소위 동방예의지국이라는 그 조선에서 말이다.

'뭐, 결국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다. 당분간은 인턴 생활이라고 치면 되겠지. 화를 눌러 참고 여러 사람 앞에서 고분고분한 일이야 익숙하다. 어려울 것도 없어.'

거기까지 생각하자니, 내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기다리던 민치상과 김좌근이 보였다. 이제부터 그들의 안내를 받아 돈치문으로 갈 테고, 문무백관들의 환영을 받으며 정식으로 입궁하게 될 터.

나는 가마 위에 앉아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민치상과 김좌근에게 물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내 그대들에게 한가지 여쭈어도 괜찮겠소?"

"예, 도령. 말씀하시지요."

"내 공부를 하면서 항상 궁금하였던 것이 있소. 주명이 망국하고 야인 오랑캐들이 중원을 차지한 지 200년하고도 스무 년의 시간이 흘렀소. 한데 이 나라 조선은 항상 속으로는 주명의 적통을 이었다고 하나, 겉으로는 야인 오랑캐들을 상국이라 모시고 있으니 이는 어떻게 된 일이오?"

알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질문이었다. 아직 나이가 12살밖에 되지 않았고, 겉으로는 천진난만하기 그지없는 어린아이니까 가능한 질문이기도 했다. 목적은 말할 것도 없이 나의 존재감을 그들에게 확실히 각인시키기 위함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도승지 민치상은 단번에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고, 영의정 김좌근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으나 눈 끝이 파르르 떨렸다. 아직 젊은 사관들은 흥분한 기색이 감돌면서도, 차마 자신들보다 아득히 상관인 두 사람 앞에서 먼저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눈치만 살폈다.

"그것이…."

"나라에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옵니다, 도령. 조선은 약소하고 오랑캐들은 강대하니, 종묘와 사직을 지키고 민초를 지키려면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지요."

민치상의 말을 가로채고 내게 답한 것은 김좌근이였다. 매우 흔한 명분론이나 현실도피가 아닌, 정확한 현실 인식에서 나오는 직설적이고 현실적인 답변이기도 했다. 당연히 이 말에 사관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는 반응을 보였으나, 김좌근의 태도는 어디까지나 당당했다. 그 짧은 새에 나의 성정을 꿰뚫어 보고서, 내가 이러한 직설적인 대답을 원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이렇게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제 잇속만 챙기고 있었단 말이지….'

내심 황당하기도 했으나, 굳이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괜히 공공연히 도승지와 사관들이 듣는 앞에서 김좌근의 죄를 추궁하여봤자 그는 능구렁이처럼 태연하게 빠져 나갈뿐더러 내가 그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서 무언가 행동을 취하려 들 터였다. 그건 단지 존재감을 각인시키려 할 뿐인 나에게는 맞지 않았다.

"어허, 진정 그렇게나 차이가 난단 말이오?"

"청은 대국이옵니다. 그들이 천하의 천명을 이어받았거늘, 어찌할 도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그들의 천하 또한 영원하지는 않을 터이니, 그들의 천하가 끝나기를 기다릴 따름이지요."

"하나, 그것은 너무 무책임하지 않소? 단지 기다리는 일이 어찌 주명에 도리를 다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소. 조선 또한 주명의 적통을 이었다 한다면 마땅히 스스로 떨쳐 일어나야 하지 않겠소?"

"하오나 도령, 오늘날의 조선은 백성들은 피폐하고 관료들을 부패하였으며 나라에는 힘이 부족한 것이 실정이옵니다. 아직 청 또한 무너질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지금은 단지 기다릴 따름이지요."

'말은 잘하는구먼, 그 조선을 피폐하게 만든 당사자가.'

울컥하고 터져 나오려고 하는 마지막 말을 덧붙이지 않은 건 천운이었다. 때마침 코끝이 시려 재채기하느라 말문이 막히고 잠시 마음을 정리할 틈을 얻은 덕분이었다. 괜히 김좌근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것이 없다는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하늘이 도우심이었다.

한편 김좌근은 점점 나라를 진정으로 생각하는 애국충정이 넘치는 충신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옆에서 도승지 민치상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바라보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그는 태연하게 정말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까지 푹푹 쉬어가며 내게 말을 맞추어갔다.

아마도 그는 나의 성정을 대강 파악하고서 나에게 좋은 첫인상을 남겨주려고 일부러 연기하고 있는 것일 터였다. 아마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내가 아니라 익성군 이명복이었다면 실제로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왕족이니 뭐니해도 결국에는 어린애이니 노련한 정치인의 표정 연기에는 당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너 같은 놈에게 휘둘릴 생각이라고는 없다.'

"어허, 방도가 진정 없단 말이오?"

"그러하옵니다, 도령. 곧 가마가 궁에 다다를 터이니, 마음의 채비를 하시지요."

"하나 그것은 이상하구려. 예부터 이이제이라고 하여, 오랑캐들은 오랑캐로서 다스린다고 하였소. 분명 조선의 힘은 야인 오랑캐들에 미치지 못하나, 서역의 오랑캐들은 한때 북경마저 점령하고 얼마 전에는 야인들에게서 연해주를 얻어내지 않았는가? 그럼 그들의 힘을 빌려 야인들을 토벌할 수는 없는 것이오?"

그 한순간, 시종일관 웃고 있던 김좌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주변을 슬쩍 돌아보니, 도승지 민치상은 아예 얼굴빛이 새하얗게 질려있었고 사관들도 제각각 그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거나 손이 떨려 지금의 대화를 마저 적어 내리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그것이면 된 것이었다. 지금의 대화는 필시 어떤 식으로건 주변에 퍼져나가게 될 터였고,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김좌근과 민치상이라는 두 인물에게 나라는 존재를 어떤 식으로 건 각인시킨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들이 냉정함을 되찾고 난 다음 나의 발상을 어린아이의 공상으로 치부하고 넘기든 진지하게 고뇌하건 간에, 아무튼 내가 청나라를 좋지 않게 바라보고 있음만큼은 분명하게 인식했을 터였다.

지금은 우선 그 정도면 충분했다.

"도령, 그것은―.'

뒤늦게 뭐라고 나에게 답을 주려 한 도승지 민치상이었으나, 그의 목소리는 나의 입궁을 구경하러 나온 백성들의 목소리에 눌려버렸다. 백성들은 내게 환호하고 있었으나, 하나같이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나긴 세도정치로 피로와 가난에 찌든 모습들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답해주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애민정신 같은 대단한 건 모른다. 그래도 최소한 나도 인간으로서의 동정심은 있고, 어제까지만 해도 비슷했던 처지로서의 동질감도 있다. 나 같은 놈에게 기대해봤자 실망하기만 하겠지만, 뭐. 최소한 너희들의 삶을 더 낫게 해줄 수는 없더라도 나라 없는 백성 소리는 듣지 않게 해주마.'

"주상전하 천세! 대조선국 천세!"

""천세! 천세! 천세!!!""

아직 정식으로 보위에 오른 것도 아닌데, 군중들 틈에서 천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 궁정 예법이니 뭐니 하는 복잡한 것도 모르는 그들이니만큼, 선왕인 철종이 죽고 내가 입궁한다는 소리만 듣고서 내가 이미 왕이 된 줄 착각한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굳이 그것을 제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포졸들이 군중들을 해산시키려 들어도, 괜찮다며 그대로 두라고 하였다.

저 멀리 대비와 문무백관들이 기다리고 있을 창덕궁 돈화문이 보였다.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