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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고종대왕 일대기-6화 (6/530)

< 도승지 민치상(1) >

뭐,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기는 했다. 지금은 굳이 말하자면 인턴이고, 나는 궁에서 어디까지나 혈통으로 낙하산 격으로 들어온 신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여러모로 업무에 익숙해지고 짬밥이 쌓일 때까지 죽어라 구를 것이라 예감은 하고 있었고, 피곤하리라는 것도 예감은 했다.

그러나.

"우라질 것들 같으니라고. 해도 해도 정도가 있는 거지 아직 약관도 안된 어린아이에게 뭐 이렇게 이래라저래라 시키는 게 많아?"

내가 입궁하고서, 나흘의 시간이 흘러 임금의 관례가 있었던 음력 12월 12일.

가까스로 임금의 관례를 끝마치고서 방으로 돌아온 다음 가장 먼저 입 밖으로 튀어나온 것은 그런 불평이었다.

머리로는 조선의 왕이라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잘 알고 있었다. 작정하고서 성실히 왕 노릇 하려고 하면 어느 왕이 힘들지 않겠냐마는, 조선의 왕은 그중에서도 더했다. 수탉이 울기가 무섭게 일어나 밥 먹고 왕실의 높으신 분들 문안 인사드리러 가고, 온종일 공부하거나 나랏일을 돌보고, 어디를 가건 서기들이 스토커처럼 쫄래쫄래 따라다녔다. 도중에 여흥이라고는 밥 먹고 신하들과 말싸움 하는 것뿐이다. 괜히 세종대왕이 그렇게 고기에 환장했던 것이 아닌 것이다.

궁에는 화장실이 따로 없고 언제나 궁인들이 따라다니며 요강을 준비해줬고, 그날 왕의 대소변을 전문적으로 맛보는 이들마저 있었다. 그나마 여흥이라고 할 왕비와의 시간조차 옆에서 궁인들이 쫓아다녔고, 왕이 왕비와 제대로 교합하는지 지켜보면서 옆에서 계속 참견질하는 인간마저 있었다.

한번 상상해보라. 오밤중에 노트북 앞에 앉아서 느긋하게 외장 하드를 끼우고서 비밀 폴더들과 함께 행복의 시간을 보내려고 했더니, 옆에서 어느 놈이 "아, 그건 좀 너무 문란하지 않습니까?" "오늘은 간호사는 어떠십니까, 전하?" "맨손은 화상의 위험이 있을 수 있사옵니다. 젤을 애용하도록 하소서 전하."라고 지껄이고 있는 것이다. 벌떡벌떡 서던 것도 절로 죽을 판이다.

하다못해 군대에서도 맥심 들고 화장실 가면 어지간히 더러운 놈 만나지 않는 한 적당히 모른척해 준다. 이쯤 되면 왕은 사생활이 없다시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게 왕인지 죄수인지 구분이 안 될 지경이다.

"그나마 아직 정식으로 보위에 오른 것도 아니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대신 일찌감치 그런 생활에 익숙해지라는 듯 이것저것 가르치는 궁중 예법들도 하나둘이 아니었고, 내가 어디를 가든 사관들이 따라붙고 대소변을 가리는 시간조차 궁인들이 득시글득시글 하는 건 변함이 없었다. 환장할 지경이었다. 도대체 선대왕들은 뭔 수로 이 모든 수모를 견디고서 보위에 올랐던 것일까.

아니, 어차피 태조 이성계나 태종 이방원까지라면 몰라도 그 이후로는 모두 궁에서 태어나 궁에서 자라고 보위에 올랐으니 자신들의 삶이 팍팍하다는 인식조차 없었는지도 모른다. 정변을 일으켜 왕을 내쫓고서 보위에 오른 이들은 애초에 그 생활까지 포함해서 왕위를 원하여 정변을 일으킨 것이었으니 어느 정도 각오가 되어있었을 테고, 또 그것이 그대로 관습이 되고 관례가 되어있었으니 이상하다는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세조나 연산군 같은 인간들은 그런 관례나 관습 따위 무시하고서 제 하고 싶은 대로 하다가 한 놈은 천수를 누리고 한 놈은 쫓겨나서 죽었으니 논외고, 그나마 이 생활에 문제점을 느꼈을 사람은 내 선대인 철종일까.

나야 머리로나마 이런 생활이 닥쳐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 농가의 자손으로 태어나 죽을 팔자였던 철종 이변이 살아생전 얼마나 크나큰 혼란에 시달려야만 했을지 새삼스럽게나마 짐작이 갔다.

"음?"

똑똑.

밖에서 누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내관이 낸 소리였을 것이다. 설마 이 시간에 궁전에서 내관들과 초병들의 감시를 뚫고서 나의 처소까지 찾아올 이는 없을 테니 말이다.

내가 "밖에 게 누구 있느냐?"라고 묻자 곧 밖에서 "도승지 민치상이 저하를 급히 뵙고자 청하였나이다. 어이하시겠습니까?"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목소리로 들어보건대, 내가 처음 입궁하던 날 조대비가 나에게 붙여주었던 허내관의 목소리가 맞았다.

아직 궁에 들어온 지 나흘밖에 되지 않았으니 그가 나에게 딱히 원망이나 하는 것이 있을 리도 없고, 그렇다면 그 또한 자신의 맡은바 소명을 다하기 위하여 굳이 내게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때문에 조금은 의아했다.

"도승지?"

고개가 절로 갸웃거렸다. 도승지 민치상이라. 확실히 내가 입궁하던 날 김좌근과 함께 나를 데리러 왔던 이가 아니던가? 그날은 처음부터 시종일관 김좌근에게만 포커스를 두었고, 그 이후로는 우선 임금의 관례를 올려 정식으로 차기 왕으로서 계승권을 받느라 바빠서 궁인들에게만 둘러싸여 대신들과 만날 시간이 적었다. 때문에, 그와의 접점은 그날 처음 만난 것을 제하자면 없다시피 했다.

다만, 그의 지위를 생각해보면 접점은 확실했다. 나는 이듬해 차기 왕으로서 보위에 오를 왕위계승권자였고, 그는 그런 왕을 보위할 비서기관인 승정원의 도승지-그러니까 요컨대 비서실장이었다.

그런 점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그가 나를 찾아와도 달리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는 비서실장이고 나는 차기 왕이니, 어쩌면 선대 철종의 이야기를 해주면서 장차 왕이 되면 이렇게 이렇게 하는 것이 좋으실 것 같고 이런 점은 삼가는 것이 좋겠습니다-라며 충언을 바치려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직감적으로 그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필시 그날의 못다 한 말을 끝마치기 위함이겠지.'

"좋다. 들라 하여라. 그리고, 뜨듯-한 녹차라도 가져오너라. 내 목이 칼칼하여 잠을 이루기 어렵구나."

나의 대답에, 허내관은 별말 없이 "네이-."하고서 답했다. 그리고 곧 방문 너머로 느껴지던 인기척이 사라지고, 새로운 인기척이 나타났다. 그가 도승지 민치상이겠지.

나는 제자리에 삐딱하게 팔을 괴고 앉은 채로 그를 맞이하였다. 어느새인가 녹차 한 상을 준비해온 허내관 뒤로 보이는 그의 모습은 밤의 어둠이 깊게 드리운 상태에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오랜만이구려, 도승지. 입궁하던 날 뵙고서 나흘만이 아니오?"

허내관이 차려온 녹차를 마시며, 나는 그에게 어서 자리에 앉으라 권하였다. 녹차 한 상을 마련해준 허내관은 그대로 또다시 어딘가로 사라져버렸으나, 나는 그가 시야에는 들어오지 않아도 눈에 보이지 않는 가까운 곳 근처에 있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민치상은 처음에는 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았으나, 내가 방석을 내주고 차를 한잔 따라서 대접하자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초등에 비친 그의 얼굴은 역시나 긴장으로 굳어져 있었다. 지난 25년여간 관직 생활을 해온 베테랑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간 평안 무탈하셨사옵니까, 저하."

"물론이오. 도승지 그대는 어떠했소? 본인은 관례에 오를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는데 말이오. 그래, 오늘은 어쩐 일이오? 앞으로 보위에 오르면 도승지에게 의지할 일이 아주 많아질 것 같소. 그때는 염치불구하고 잘 부탁드리외다."

나는 민치상이 자리에 앉자마자 그가 입을 열 시간을 주지 않고 말을 퍼부어댔다. 어떻게든 깊은 인상을 남기기 위함이었다. 악인상이건 호인상이건 좌우지간 인상이 남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었다.

이렇게 드물게도 도승지의 요청으로 독대하게 되었다면, 이 기회를 최대한 살려 도승지가 나를 단순한 소년 왕이 아닌 수다쟁이건 다정하건 경박하건 간에 어떠한 인상을 느끼도록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도승지는 처음부터 나의 이러한 잡담에 어울려줄 생각이 없었던 듯했다. 그는 무례하게도 나의 질문과 청에 답하지도 않고서는, 대뜸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였다.

"그날 하신 말씀, 그 말의 무게를 알고 계십니까.“

"물론이오."

나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답했다. 이편이 그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겨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미 대강의 미래계획이 머릿속에 선 상태였던 나로서는 굳이 지금의 질문에 당황할 이유도 대답을 피할 이유도 없었다.

오히려 당황한 것은 도승지 민치상 쪽이었다. 그는 나의 대답에 단번에 흡, 하고 숨을 삼켰다. 동공은 떨렸고,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 동요가 이 나라의 명운이 달린 사안을 가벼이 이야기하는 어린 왕의 경박함에 대한 분노 탓인지, 아니면 대망을 가슴 속에 품은 어린 왕에 대한 전율 탓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궁금해할 이유도 없었다. 어차피 지금의 문답으로 대강 견적이 나올 테니까.

"…젊은 사관들 사이에서 벌써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익성군 저하께서 대단한 야심을 품고 계시다고 말입니다."

도승지는 굳이 그 대단한 야심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나라가 망하는 와중에도 조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언제나 귀 기울여 듣던 청나라이다. 지금은 나와 도승지의 독대라고 하나, 궁궐에는 언제나 듣는 귀가 있는 법. 지금의 대화가 청나라까지 들리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나는 반색하여 "그러한가?"라고 되물었다. 벌써 사관들에게 나의 소문이 퍼진다는 것은 좋은 징조였다. 그건 곧 궁내에서 내가 대강 어떠한 인물인지에 대한 견적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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