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승지 민치상(2) >
그리고 견적이 나오고, 평판이 돌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나의 곁으로 모여드는 이들도 생긴다. 장대한 뜻을 품은 이들이건, 나를 이용하려는 이들이건 간에.
그러나.
"망상이 지나치십니다."
도승지는 그렇게 단언하였다. 나의 야심은 한낱 망상이라고 말이다. 나는 불편해하지 않고서 그의 말에 귀 기울여 들었다. 나 또한 이이제이로 청을 몰아낸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것은 반쯤은 허세라는 걸 자각하고 있었으니까.
"저하께서는 아직 나이가 어리셔서 그런 치기 어린 말씀이 가능하신 겁니다. 그날 영상의 말씀은 다소 지나치시기는 하나, 그것이 이 나라 조선의 현황입니다. 종묘와 사직을 지키고, 민초들을 지키는데에도 버거운 지금의 조선에게 이이제이라니요. 이이제이도 오랑캐들이 함부로 집어삼키지 못할 힘을 가진 다음에야 가능한 법이 아닙니까?"
"계속하시오."
"그리고 서역 오랑캐들에 대하여서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고 계십니다. 비록 한때나마 그들이 북경을 차지하였었고, 얼마 전에는 연해주까지 내려와 행패를 부리는 것 또한 사실이나 그들의 힘이 지금의 천하를 송두리째 흔들 만큼 강력하다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강대한지조차 정확히 알지 못하시면서 어찌 그런 모험을 입에 담으신단 말씀입니까. 청컨대, 물려주소서."
도승지는 거기까지 말하고서, 이마를 조아렸다. 나는 그에게 잠시 대답을 주지 않고서, 여전히 팔을 괸 채로 삐딱하게 앉아서 그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조금 전 한 충언에 대하여 내 나름대로 평가할 시간이 필요했다.
'뭐, 일단 이 시대 조선인의 관점에서 보면 굉장히 정확한 평가군.'
먼저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조선은 1차 아편전쟁 당시 청에게서 정확한 정보를 듣지 못하고 서역 오랑캐들이 청에게 격퇴당했다고 생각했고, 2차 아편전쟁 때 북경이 점령되었을 때에도 오랑캐들이 변란을 일으켜 천자가 잠시 파천한 정도로 여겼다. 그나마 러시아 정도나 비교적 먼 옛날부터 존재를 알아왔기에 대강이나마 북적 오랑캐라고 여기고 경계했지, 영국이 어디에 붙어있는지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조차 잘 알지 못하던 것이 우물 안 개구리 조선의 실정이었다.
조선의 내정에 대한 평가도 그러했다. 그날 영의정 김좌근이 설명한 조선의 실정은 분명 현 조정의 관료들에게는 불편한 일이었겠지만, 민치상은 비교적 시원스럽게 그것이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김좌근의 권위를 함부로 부정할 수도 없었기에 인정해버렸을 수도 있었지만, 조선의 참담한 실정을 인정한 것은 조정의 관료들인 그들 자신의 실패를 인정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무례를 각오하고서라도 일부러 나를 찾아와 이 말을 전했다는 것은 그럭저럭 고평가해줄 만하다. 한낮 노름으로 도승지 자리를 따낸 것은 아니라는 건가.'
나는 마음속으로 도승지 민치상에 대한 평가를 조금이나마 상향 조정했다. 도덕적으로 대단한 위인은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직업의식 하나는 투철한 양반이었다. 뭐, 그냥 그날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그만큼 위험했기에 답지 않은 행동에 나섰는지 몰랐지만.
아무튼 단순히 위기의식을 느끼는 것과 실제로 행동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서, 그에게 말했다.
"그럼 언제까지 애신각라가 쇠하기만을 기다려야 한단 말이오?"
움찔.
여전히 이마를 조아리고 있는 민치상이 동요한 것이 보였다. 애신각라. 그것은 현 대청국 황실의 가문 명이었다. 중원의 천자를 박씨 김씨 부르듯이 가벼이 부른 것이다.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말을 이어갈 뿐.
"종묘와 사직을 지키는 것도, 민초들을 보살피는 것도 좋소. 그러나, 주명은 어버이의 나라라고 하지 않았소이까? 제 아비의 복수조차 하지 않으면서 뭐가 경전이고 뭐가 선비란 말이오.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지나도 늦지 않았다고 하였소. 이제 이백하고도 스무 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슬슬 때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하지 않소?"
"저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중원의 천명을 얻은 이들이 보통 천명을 이어받으면 백 년간은 번성하였고 그 이후로는 쇠퇴하기 시작하여 보통 이백 년을 전후로 하여 나라가 망하거나 중원이 분열되었소. 주기가 왔단 말이오. 주기가.
천자가 오랑캐들의 변란에 파천하고 변방이기는 하나 영토를 뚝 떼어내 오랑캐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어찌 그 난세가 아니란 말이오? 북경조차 지키지 못하는 천자가 어찌 천하를 오랑캐들로부터 수호하는 천자란 말이오?
아니, 그 이전에 어찌 그 애신각라 야인 오랑캐 따위가 천자란 말인가!"
나는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일부러 고함을 질렀다. 손에 쥐고 있던 찻잔마저 상위에 내리쳐 깨트렸고, 곧 찻잔에 베인 주먹에서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민치상은 여전히 자리에 엎드린 채로 부르르 떨고 있었다. 전율일까, 분노일까, 두려움일까. 아니면 셋 다일까.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틀림없이 밖에서 이 대화를 엿듣고 있는 귀들이 있을 터. 지금은 우선 나의 말을 끝마쳐야 할 때였다.
"본인이 왕이 된다면 이 나라 조선을 부강하게 만들어 보이겠소. 서역 오랑캐들의 힘을 빌리건 오랑캐들의 제도를 본받건 간에, 무엇을 해서라도 기필코 강대히 만들어 이 난세를 헤쳐나갈 힘을 얻고 말리다.
그리하여, 이 나라 조선이 주명의 천명을 이어받아 장차 천하를 다스리건 중원을 야인 오랑캐들의 손아귀에서 해방하건 이루어내고 말겠소! 내 맹세코 그리하리다! 모험이라고, 위험하다고 말하지 마시오. 지금은 난세외다. 천명이 흔들리고 오랑캐들이 천하를 노리는 난세요.
난세에 못 할 것이 대관절 무엇이겠소!"
"하, 하오나 저하…!"
"하오나-무엇이오? 내게 민초의 삶이 피폐해졌다고 말한 건 도승지 그대와 영상이 아니었소이까? 그래, 설령 천명이 흔들린다는 것이 본인의 잘못된 식견이라고 할지라도. 민초의 삶이 피폐해졌는데 어찌 난세가 아니라 할 수 있겠소? 그대는 순조 대왕 시절의 변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오?"
순조 시절의 변란. 두말할 것 없이 홍경래의 난이었다. 거기까지 이야기하자, 도승지도 더 대꾸하지 못하고 입이 닫혔다. 나의 재촉에 자리에서 일어선 도승지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지금의 시대를 난세라 규정짓고, 더 나아가 작금의 흉흉한 민심과 불과 반백 년 전에 벌어진 조선 개국 이래 최대 규모의 농민반란까지 거론하는 차기 소년 왕의 모습에서 그 또한 무언가 느낀 것이 있었던 것이겠지. 긍정이든, 부정이든 말이다.
나는 더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구려. 이만 들어가 보시오."하고 축객령을 내렸다.
터덜터덜 힘없이 떠나는 도승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내심 독백했다.
'내일이면 등극하는 의식을 거행할 터이고, 그때부터는 이제 정식으로서 왕이 된다. 그리고, 아버지 흥선대원군도 정식으로 작위를 받게 되겠지.'
앞으로 3년간 내가 15살이 될 때까지는 조대비의 수렴청정 기간이니 흥선대원군도 크게 중요한 국정사안을 논하는 회의 외에는 궁까지 일부러 오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조대비와 막후에서 만나 모든 일을 조율하며 최종결정은 대비가 하는 식으로 모든 국사가 진행될 터.
그러나 그동안 잠자코 공부만 하고 숨만 쉴 생각이라고는 추호도 없었다. 지금부터 미리미리 궁 내에서 나의 존재감을 각인시켜두지 않으면 나중에 15살이 되고서도 흥선대원군에 눌려 지내느라 숨만 쉬게 될 것이다. 그건 곤란했다. 적어도 내가 15살이 되는 3년 후인 1866년까지는 협력하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더라도 확실하게 주도권을 거머쥐어야 했다.
입궁 때의 대화와 이번 일로 도승지는 나의 뜻을 분명히 알았을 것이고, 그럼 어떤 식으로 건 승정원이나 궁에서도 반응이 나올 것이다. 거기에 주목해야 했다. 반발이 거세다면 나도 지금 당장 그럴 작정은 없다고 숙여줘야 할 테고, 미적지근하다면 조금 더 강경하게 나가도 될 것이다. 단순히 우려할 뿐이라면 어느 정도는 다독여줘야 할 테고, 만에 하나 천에 하나 호의적이라면-.
'그때는 올라타 주어야겠지. 황제가 되고자 하는 야망은 없다만, 반청감정은 그간 쌓인 게 많은 조선에게 있어서 이용될 소지가 아주아주 많아. 여차하면 반청감정으로 서역 오랑캐들에 대한 경계를 찍어누르고서 일단 청나라부터 어떻게든 하고 본다는 분위기를 만들어 밀어붙인다.'
입꼬리가 늘어졌다. 보나 마나 거울로 보면 비열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입가에 띄우고 있겠지. 그러나 상관없었다.
지금은 난세였다. 평화기의 폭군은, 난세의 명군이 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