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9화 (9/530)

< 승정원을 얻다(1) >

「삼가 아뢰옵니다. 숭정 갑신년 이래로 천하에 임금다운 임금이 없고 세상이 오랑캐 천하가 된 지도 이백하고도 스무 년의 세월이 흘렀사옵니다. 하오나 저희 조선은 중화의 다스림을 보존하여 성현의 계통을 잇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조선의 지복이요 천하를 밝힐 등불이라고 할 수 있사옵니다.

(중략)…하여, 청컨대 교체(郊締)의 예를 행하고 태묘에는 구헌(九獻)과 팔일(八佾)의 의절을 행하소서. 그리고 영조 대왕 이하 오묘(五廟)에 휘호(徽號)를 소급해 올리소서.」

'흐흐흐, 기대했던 그대로의 반응이 나오는구나…. 뭐, 그렇지만 이건 너무 나갔지마는. 난 적어도 아직은 칭제건원까지 터뜨릴 심산은 없어.'

내가 보위에 오른 지 어언 3개월째.

논란은 가라앉지 않고 계속해서 커져만 가고 있었다. 더욱 정확히는, 시간이 흐르고 익숙해져 가면서 한양은 비교적 어느 정도 시들시들해졌지만, 소문이 본격적으로 지방까지 퍼지기 시작하면서 지방의 폭발적인 반응에 한양까지 다시 재점화되는 추세였다.

지방향림들의 여론은 남쪽으로 갈수록 호의적이고 폭발적이었고, 북쪽으로 갈수록 부정적이고 회의적이었다. 물론 호남과 영남 지방의 향림들이 조선의 보수를 대표하는 이들이라서 그런 것도 크겠지만,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전란에 휘말릴 가능성이 작고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전란에 휘말릴 가능성이 큰 것이 가장 클 터였다.

원래 직접 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클수록 평화를 원하고 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작을수록 전쟁을 외치는 법. 조선의 젖줄인 삼남 지방의 유림들이 호의적으로 나오고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고무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당분간은 숨을 죽이고 있어야겠지. 그도 그럴 게-.'

"영조 대왕 시절의 변란이 끝난 지도 어언 백 년 하고도 삼십 년의 시간이 흘렀소. 작금의 천하가 어지러워 온 나라에 인재가 부족하니, 이만 영남 땅의 유림에게도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겠소?"

"물론 그 말씀도 옳습니다만,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보입니다. 그리고 반역향을 거두고 지정하고 하는 일은 그리 간단히 논하여서는 아니 되는 법. 그들이 언제 또 변란을 일으킬지 모르는 일이 아닙니까?"

"어허, 영상께서 이렇게 사사건건 반대만 하시니 성상께서 어찌 나라를 이끌어가실지 그저 가슴이 답답하구려."

"소신이라고 한들 어찌 스스로 원하여 이러겠습니까? 모두 종묘사직을 위함이옵니다, 전하. 헤아려주소서."

나는 내 앞에서 논쟁이 한창인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영의정 김좌근을 떨떠름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대비가 건강을 핑계로 골치 아픈 사태에 한발 물러나게 되면서 대비를 대신하여 흥선대원군이 조금 더 일찍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다.

그 두 사람의 시선은 참으로도 절묘했다. 이하응은 나를 등지고서 영의정 김좌근을 똑바로 노려다 보고 있었고, 김좌근은 그런 이하응을 무시하고서 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허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사실상 왕이나 다름없이 행동하고 있는 이하응과 어디까지나 왕은 이명복이며 이하응은 귀찮은 참견자일 뿐이라는 김좌근의 태도가 절묘하게 정면대립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조정은 이미 완전히 둘로 갈렸다. 일이 꼬일 대로 꼬이면서 뒤로 물러난 조대비를 대신해 전면에 나선 이하응 밑에 집결한 개혁파와 김좌근을 필두로 한 세도가들의 수구파. 나로서는 상당히 떨떠름한 상황이었다. 애초의 예상은 찬성파는 구심점 없이 흐지부지하고 세도가를 위시한 반대파가 집결하여 사실상 나와 나머지 전체가 대립하는 구도였는데, 찬반양론으로 갈리면서 찬성파와 반대파에게도 이목이 나뉘게 되었다.

현재로서는 1승 1무. 대원군이 먼저 비변사 폐지와 의정부, 삼군부의 부활로 기습을 가하고 뒤이은 환곡제 폐지와 사창제 시행에서 세도가와 직간접적인 인물들이 사수로 추대되면서 서로 주고받은 형국이었다.

'평생에 걸쳐 자신이 아니면 아들이라도 왕으로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온 흥선군 이하응의 집념은 얕잡아보고 있었다.'

나는 선선히 나의 실책을 인정했다. 이하응을 너무 얕잡아보고 나 혼자만 저 멀리 내달리려다가, 뜻하지 않게 이하응이 일찍부터 전면에 나서는 단초를 제공해주고 말았다. 그렇지만 몹시 나쁜 결과만은 아니었다. 결국, 그의 정치적 기반도 내가 처음 퍼뜨린 주장에 근거하는 만큼, 그와 나는 일종의 정치적 운명공동체가 된 것이다.

평범하게 즉위했다면 성년이 되기까지는 일방적으로 끌려다니기만 했을걸 생각해볼 때, 이만하면 소기의 성과는 거둔 셈이었다.

나는 힐끗 내 뒤에서 이 모든 언쟁을 듣고 있을 대비에게 시선을 돌렸다.

대비는 내가 처음 입궁할 때와 비교하여 벌써 10년은 나이를 먹은 듯 한없이 피곤해 보였다. 그러나 아직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니라는 듯, 그 눈빛만큼은 흉흉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 또한 대원군과 같은 의견이오. 그러나, 반역향을 거두는 일은 그리 가벼이 논할 수 없는 사안인 것 또한 사실이외다. 이 일은 후일 성상께서 장성하시고 난 다음에 논하도록 합시다."

'그나저나 이건 이것대로 고역이구만. 내가 왕인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뒤에서 웬 할마시가 쫑알쫑알하는 걸 듣고 있을 뿐이라니.'

결국, 모든걸 결정한 것은 대비였다. 아직은 그녀의 수렴청정 시기이니 나로서는 어차피 할 수 있는 일도 없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숨을 죽이고서 내 친위세력을 구축할 때이지 일을 더 키울 때가 아니었다. 지금 이대로 기세를 타고 일을 벌이려고 한다면, 친위세력조차 없이 제 잘난 줄 알고 날뛰는 어린놈 취급을 벗어나지 못할 터.

지금은 입궁할 때의 패기는 잠시 접어두고서 성실하게 공부하고 왕가의 어른들에게 예의를 다하면서 내가 단지 입만 산 멍청이가 아님을 보여줄 때였다. 그러자면 이 또한 참는 수밖에 없었다.

"하오나 마마, 그리하면 늦사옵니다. 여유를 가지기에는 사정이 여의치 않사옵니다. 시시각각을 다투는 일이오니, 용단을 내려주소서."

"듣기 싫소. 본녀는 이미 마음을 정했소이다. 이번 일은 더는 논하지 마시오."

'얼씨구, 잘들 논다.'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더니 대원군이 세게 나왔다. 그의 권력은 결국 대비의 것을 빌린 것이 거늘, 제 주인마저 물어뜯으려 들고 있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공포감과 위기감을 조장하여 주도권을 가지려 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 꾸미고 있는 일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행보였다.

한편 대비는 그런 이하응의 행보에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지금만 해도 조금 더 온화한 말로 이하응을 돌려보냈다면 이하응이 괜히 마음만 앞서 대비에게 실례를 범했다는 인상을 줄 수 있었겠지만, 딱딱하고 과격한 말을 돌려주면서 이하응의 충언을 대비가 듣지도 않고 신경질적으로 내쳤다는 인상을 만들어버렸다.

그러면 자연히 대비에게 실망하는 이들이 생기고, 대비 또한 개혁에 동참하지 않을까 기대하던 세력들이 본격적으로 이하응에게 옮겨가게 된다. 지금이야 이하응과 개혁파가 소수세력이지만, 그들이 현 왕인 나와 뜻을 함께하고 있음은 천하가 모두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현 왕인 내가 살아있는 한, 그리고 무럭무럭 자라나는 한 이들의 세력은 점점 커질 수밖에는 없다.

'물론 그게 꼭 좋은 일은 아니지.'

나는 힐끗 김좌근 쪽을 바라봤다. 나와 시선을 마주친 김좌근은 그 즉시 사람 좋은 미소를 만면에 띄우고는, 슬쩍 고개를 숙여 목례를 올렸다. 그의 실체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참으로 떨떠름한 기분이었다.

대비와 이하응의 연계에 균열이 갔다는 것은 곧 세도가의 반격이 임박했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그들이라고 해서 마냥 당하고 있지마는 않을 터였다. 틈을 보인다면, 틀림없이 그 빈틈을 파고들고 온다. 그런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건, 아마 매우 높은 확률로 왕비 간택일 터.'

보위하기도 전부터 폭탄 발언이 터지고 청나라에서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내면서 다른 사안들이 앞서는 바람에 나날이 뒤로 미뤄지고만 있는 왕비 간택이었다. 본래 역사에서라면 세도가의 득세를 막기 위하여 세도가 못지않게 가문의 격은 높아도 실권은 없던 민씨 일가의 고아 민자영을 들여오지만, 이미 역사가 바뀐 지금까지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틀림없이 대비와 대원군의 갈등을 더욱더 부채질해서 어떻게든 세도가의 왕비 간택에 꽂아 넣으려 들 터. 다만 애초에 왕비 간택은 대비를 비롯한 왕가 종친들의 소관이었으니 나로서는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수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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