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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고종대왕 일대기-10화 (10/530)

< 승정원을 얻다(2) >

'그런데 뭐, 어차피 라면 세도가와 연줄은 만들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아.'

실 역사에서 고종이 대원군을 몰아내기 어려워 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대원군이 그가 왕처럼 군림하면 스스로 권위를 창출한 탓도 있지만, 자신의 반대세력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는 바람에 고종이 고립무원이 된 탓도 컸었다. 그 때문에 민씨 외척들을 끌어들여서 자신의 친위세력들을 처음부터 쌓아 올려야 했고, 그래서 친정이 늦어졌다.

서원철폐라든가 호포제 실시 같은 정책까지 막을 작정은 없었다. 아무튼, 내가 장차 독재정치를 펼치기 위해서라도 대원군이 한번 싹 쓸어줄 필요는 있었다. 그러나 아예 반대세력들이 다 쓸려나가서야, 여차하면 대원군을 쳐내고 내가 정면에 나서기가 힘들어진다.

어느 정도 완급조절이 필요했다. 왕비 간택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는 대원군과 그의 친위세력들에 좋은 경고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럼 오늘은 이만 마무리 짓도록 하겠소. 모두 조심히들 들어가 보시오."

내가 상념에 잠겨있을 무렵, 어느새 어전회의는 마무리 지어지고 있었다. 대비가 가장 먼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서둘러 자리를 떠났고, 뒤이어 김좌근이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꾸벅하고 인사를 올리고 그를 따라온 백관들과 함께 떠났다. 마지막으로 대원군이 나를 살피는 눈초리로 한참을 노려다 보더니, 뭐라 인사도 없이 매정하게 몸을 돌려 떠나버렸다.

마지막으로 남게 된 것은 도승지 민치상을 비롯한 승정원 인물들이었다. 내가 앞서서 회의가 끝난 뒤 긴히 할 말이 있다고 한 탓이었다.

"그래, 어디 생각은 해보셨소?"

나는 대뜸 그렇게 포문을 열었다. 어차피 설명은 필요 없을 터였다. 도승지 민치상과는 일찍이 그가 먼저 나를 찾아와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었다. 지금 내가 그들을 따로 남으라고 한 까닭은 그날의 이야기를 마무리 짓기 위함이었고, 그들 또한 그걸 모르지는 않을 터.

"어디까지가 진심이시고 어디까지가 시험하시는 말씀입니까."

가장 먼저 입을 열은 건 우승지 윤치성이었다. 우승지는 현대로 따지면 외교 수석에 해당하는 업무를 맡았으니만큼, 나의 계획에서 가장 호되게 구르게 될 인물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외교 수석에 해당하는 우승지와 안보수석에 해당하는 좌부승지만큼은 내 사람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허허, 이 나라의 임금된 자로서 어찌 거짓을 입에 담겠소? 과인이 그대들을 시험하리라 여기었다면, 참으로 섭섭하기 그지없소이다."

나는 그래서 조금의 내숭도 없이 솔직하게 답했다. 모두가 진심이라고 말이다. 주명의 복수를 하겠다는 것도, 지금이 난세라는 것도, 필요하다면 서역 오랑캐들을 끌어들이고 그들의 제도나 문물을 도입할 생각이 있다는 것도. 그 모든 것이 전부다.

우승지 윤치성은 그 즉시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가, 이내 붉어졌다. 그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화를 내는 것 같지는 않았다. 도리어, 전율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만약 내 뜻대로 일이 풀린다면 자신이 얼마나 큰 중임을 맡게 될지를 실감한 것이다.

"진정 뜻을 거두어주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도승지 민치상이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그는 여전히 불안해하고 있는 듯했다. 하기야 왕이라는 작자가 대놓고 나라를 판돈으로 도박을 벌이려 들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매일 같이 섶에서 누워 자고 쓸개를 걸어두고서 핥는다면 과인을 믿어주시겠소?"

나는 와신상담의 고사를 들어 나의 각오를 풀어 설명했다. 월왕 구천이 일찍이 그러했듯이, 주명의 원수를 갚기 전까지는 결코 멈출 수 없다는 선언이었다. 물론 나로서는 주명의 복수 같은 건 덤일 뿐이었다지만, 조선의 사대부들인 저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이만한 대의명분이 없었다.

민치상은 그러자 낮게 숨을 몰아 내쉬며 한숨을 내 쉬었다. 왕인 내 앞에서 무례를 범하는 격이었으나, 나는 굳이 그걸 지적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나 또한 그날의 내가 그러했듯이 팔을 괸 채로 삐딱하게 앉아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피차 이제 와서 예의범절을 논하기에는 이미 서로의 무례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아직은 이 나라 조선에게 그만한 힘은 없습니다."

"그럼 이제부터라도 힘을 쌓아 올리면 그만이겠구려. 옛 진나라가 그러했으며 제나라가 그러했듯이 국방을 든든히 하고 상업을 장려하며 공업을 중흥시키고

온 나라의 인재들을 가려 뽑으면서 나라의 법도를 다시 세우고, 설령 오랑캐라고 할지라도 그 재주가 쓸모가 있다면 마땅히 중임을 맡겨야 하오. 그것이 난세를 살아가는 법이 아니외까?"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전하. 그러자면 반발이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난세에는 난세의 법도가 있는 법이오. 그들이 나라를 어지럽게 한다면, 잘라내는 수밖에 없소이다."

나는 옛 춘추시대의 패자 제나라와 전국시대의 패자 진나라의 예를 들었다. 그 시절의 중원은 유럽이 그렇듯이 크고 작은 나라들이 아귀다툼하던 난세였다. 그래서 훗날 중원이 하나로 일통되고 천하가 안정된 뒤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무수한 실험적인 제도들과 발명품들이 도입되고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는 실패하며 시행착오를 반복했었다.

한반도에서는 삼국시대가 그러했고, 일본에서는 센고쿠 시대가 그러했다. 전란은 나라를 피폐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평화기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무수한 실험적이고 혁신적인 제도들을 만들어낸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난세에는 난세의 법도가 있는 법이라고 항변할 생각이었다. 이미 전례가 있는 일인데, 또다시 난세가 도래했다면 선조들의 지혜를 보고 배워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미 앞으로의 역사 진행에 대하여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당연히 시행착오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민치상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무언가 결의한 듯 앞에 나와 절을 올렸다.

"여흥부대부인께 말씀은 전해 들었습니다. 전하의 뜻이 정녕 그러하시다면 소신, 분골쇄신의 각오로 전하의 대업을 돕겠나이다."

"""주상전하 천세! 대조선국 천세!"""

도승지 민치상이 앞서 절을 올리자, 그의 곁에서 뻘쭘하게 눈치를 보던 다른 승지들도 하나둘씩 나에게 절을 올렸다. 그들의 우두머리이자 얼굴격인 행 도승지가 충성을 맹세하는데, 그들이라고 가만히 멀뚱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한편, 나는 그런 그들을 냉소적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흥부대부인…아아, 이명복의 친모인가. 역시나 민씨 종친에서 뭔가 이야기가 오가고 있기는 했구만. 그렇다면 이건 민씨 종친들도 승정원의 위세를 빌어 전면에 나서보겠다고 움직이기 시작한 건데….'

나로서는 일단 당장은 좋은 일이었다. 이렇다 할 친위세력 하나 없던 내 신세에, 어머니의 힘을 빌렸다고는 하나 비서기관인 승정원의 충성맹세를 받아낸 것이다. 이것만으로 운신의 폭이 대폭 넓어진다.

그러나 나는 저들을 있는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당장 저들 중 대다수는 민씨 종친과 연이 닿아있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세도가, 아니더라도 조대비나 흥선군과 연이 닿아있을 터.

'당연히 그들 또한 오늘 승정원이 이렇게 움직임을 보였다는 걸 눈치채겠지.'

흥선군, 세도가, 대비. 모두가 승정원을 내세운 민씨 종친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을 터. 다만, 그들 또한 큰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을 것이다. 애초에 민씨는 그 나름대로 권위는 있어도 권세는 없고, 그들이라고 승정원을 온전히 통제하고 있는 건 아니다.

기껏 해봐야 궁이 소란스러우니 별의별 잡것들이 다 나선다는 반응이 고작이겠지. 그편이 딱 좋았다.

'나를 이용하겠다고? 배짱도 좋군. 뭐, 좋다. 마침 수족이 필요하던 참이니. 친위군도 육성해야 할 테고, 사업도 시작해야 할 테고, 비밀경찰도 준비해둬야 할 테고, 좌우지간 할 일들은 많다. 으흐흐, 어디 똥구멍으로 우유를 쪽쪽 빨아 먹게 해주마.'

"그만. 그대들의 뜻은 알았소. 이만 일어나시오. 내 오늘 일은 절대 잊지 않으리다."

인자한 미소를 만면 가득히 띄우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엎드려 절을 하는 승지들의 등을 두드렸다.

불길한 예감을 느낀 것일까.

그들의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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