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을 터뜨리다(1) >
「오호통재라. 짐이 그동안 격조하여 미처 동방에 마음을 쓰지 못하여 조선의 만백성들이 불안해하고 있다고 들었도다. 군주된 도리로서 신하가 안심할 수 없도록 하였으니 이 모든 것이 짐이 부덕한 탓이다. 하나, 짐이 맹세하던데 서역 오랑캐들은 두 번 다시 감히 중원을 넘보지 못하리라. (중략…)
오랑캐들은 감히 변경을 침범하지 못하며, 변경을 사수하는 짐의 장수들은 용맹한 만인지적의 장사들이고 백만에 달하는 충용무쌍한 병졸들은 감히 오랑캐들의 비루하고 치졸한 도적 떼들과 비교할 바가 못 되느니라. 이는 대청국을 오랜 세월 섬겨온 그대들 조선 또한 알고 있을 바, 이만 말을 줄이도록 하겠노라.
서역 오랑캐들을 가까이하지 말지어다. 저들은 재화에 눈이 먼 금수와도 같은 탐욕의 망자들이며 그 천성이 비루하고 비열하기 그지없는 도적 떼들과 같으니, 오랑캐들을 멀리하고 항상 그들에게 경계를 늦추지 말지어다.」
북경으로 떠났던 사신단이 천자의 친서와 함께 돌아온 것은 그해 초여름이었다. 물론 천자의 친서라고 해봤자 말이 좋아서 친서지 현재 섭정역으로서 서로 다투고 있을 동태후와 서태후 둘 중 한 사람이 내린 친서일 터였다. 나는 높은 확률로 그중에서도 서태후일 거라고 판단했다. 동태후는 서태후보다 황실 내 서열은 높아도 권력욕이 없고 인품이 온화하여 이런 친서를 내릴 리가 없었다.
친서에 담긴 내용은 크게 3가지였다. 하나는 바빠 그동안 신경을 못 써줘서 번국에게 이런 소리까지 나오게 하다니 참으로 유감이라는 내용, 두 번째는 청은 여전히 부강하며 천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은 근거 없는 낭설에 불과하니 꿈 깨라는 경고, 마지막은 서역 오랑캐들은 믿을 놈들이 못되니까 멀리하라는 충고.
종합하자면 『지금까지 했던 말은 못들은 걸로 해줄 테니 서양 오랑캐들과 괜히 짝짜꿍할 꿈일랑 꾸지도 말고 알아서 기어라-』라는 내용이었다. 놀라울 것도 없는 반응이기도 했다. 오히려 이 정도의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편이 더 의심스러웠다. 진지하게 조선을 칠 병사들이라도 육성하고 있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니까.
'오히려 의외인 것은 이런 친서의 내용과는 별개로 또 순순히 나를 조선의 왕으로서 책봉시켜줬다는 것이다.'
상국에게 책봉을 받는가 받지 않는가의 차이는 매우 컸다. 그것 하나만으로 왕의 권위 또한 천차만별이었다. 괜히 반정을 일으킨 왕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상국에게 무릎 꿇고서 싹싹 비는 것이 아니었다. 여차하면 상국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 부덕한 왕이라는 명분으로 또 다른 반정에 내쫓길 수도 있던 것이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까지 된 경우는 드물지마는.
그러니까 상국은 번국의 왕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거슬리는 행동을 하면 일부러 책봉을 시켜주지 않고 시간을 질질 끌기도 한다. 우리가 먼저 너희 나라를 침공하여 쑥대밭을 만들기 전에, 알아서 너희들 선에서 정리하라-뭐 그런 신호였다. 하지만 이번에 청은 일부러 시간을 질질 끄는 대신 내가 보위에 오른 지 반년만이라는 비교적 이른 시일 안에 나를 조선의 왕으로 인정했다.
'청의 상황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나쁜 건가, 아니면 태평천국이 진압되고 난 다음에 두고 보자는 건가.'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었다. 청의 내부 상황은 조선 못지않게 불안정하다. 일단 외부적으로는 서구 열강들이 호시탐탐 청의 이권을 침탈하려 들고 있는 형국이고, 내부적으로는 태평천국이라는 대규모 종교성향 농민반란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이를 조율한 천자는 이제 고작 초등학생 저학년 수준의 나이에 섭정조차 서태후와 동태후로 나뉘어 다투고 있는 형국이었다.
이런 와중에 제1 번국인 조선의 왕이 대놓고 천명이 다했다는 소리를 했으니, 청 내부에서도 무언가 동요가 있지 않다면 그편이 더 이상하다. 조선에게 최대한 유리한 상황을 예상해본다면, 세가 기울고 있던 태평천국에 다시금 힘이 실리면서 청이 곤욕을 치르게 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가까스로 탈환할 기회를 얻은 남경에서 다시 밀려났다거나 하는 전개도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꼭 그렇게 조선에게 가장 유리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청이 지금의 상황에서 조선과 충돌을 피하고자 하는 건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만약 조선과 전쟁을 하게 된다면 지금의 쇠락한 조선이 상대라도 여차하면 요동까지 전장이 될 각오를 해야 했다. 아직 태평천국을 완전히 진압하지 못한 현 상황에서 청이 조선을 상대로 선공을 걸 수도 없으니 말이다.
그럼 강남과 만주가 전쟁터가 된다는 건데, 이쯤 되면 청이 한물갔다고 판단한 몽골이나 티베트, 위구르나 화북의 한족들까지도 어떤 식으로 건 반응을 보일 것이다. 청으로서는 악몽인 셈이다.
'물론 그 경우 조선도 나라 꼴이 엉망진창이 되어 폭삭 망해버릴 테니, 잘 풀려봤자 공멸이지만.'
"보시오. 황송하옵게도 북경의 황상께서도 우리 조선에서 실언한 바에 관하여서는 더는 논하지 않도록 하시지 않으셨소이까. 이제는 그만 번국의 도리로서 정중히 사죄의 말을 올려 상국에서도 안심하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소?"
"아니, 그대는 도대체 어느 나라의 선비요! 그런 망언을 입에 담다니 조선의 선비 된 자로서 부끄러운 줄 아시오! 마마, 이는 애신각라 오랑캐들의 허세에 불과하옵니다. 저희 조선을 겁박 주려고 하려 할 뿐, 결국 모두 말뿐이 아니옵니까. 지금이야말로 주명의 복수를 할 때입니다. 용단을 내려주소서!"
"감히 대비마마를 겁박 주는 거요? 그리고 용단이라니! 상국과 전쟁이라도 해보겠다는 거요? 당신 미쳤소? 이 나라 조선 땅을 금군의 군홧발 아래 짓밟히도록 만들 작정이외까!"
"어전이오. 모두 정숙하도록 하시오!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게요!"
나는 거기까지 생각하고서 상념에서 빠져 나왔다. 난장판이었다. 세도가와 그들과 뜻을 함께하는 이들은 입을 모아 청에서도 양보해주었으니 이제 그만 수그리자고 하고 있었고, 대원군을 필두로 한 개혁파는 청의 일보 후퇴에 크게 고무돼서는 이때가 기회라는 듯이 앞장서서 날뛰고 있었다.
그 둘을 조율해줘야 할 대비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어떻게든 양자 간 대결을 진정시키려 하고 있었으나, 역부족이었다. 나이가 나이다 보니 기력이 달렸던 것이다. 이럴 때 큰소리를 쳐줘야 할 젊은이들은 대부분 대원군의 진영에 속해있었다. 당연히 숫자는 대단치 않아도 가장 요란스러운 건 그들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조용히 있는 건 일전에 내게 충성을 바친 승정원, 그리고 김좌근인가?'
최근 나는 승정원에게 이런저런 일감들을 몰아주면서 꾸준한 접촉을 하고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궁 내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키워주기 위함이다. 왕권과 직결된 의정부와 삼사가 부활하기는 했지만, 그쪽은 대원군의 수족에 더욱 가까웠다. 스스로 왕이나 다를 바 없이 전권을 휘두르려 하는 대원군이니, 의정부와 삼사가 자신의 편이 되어주는 것 또한 당연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언젠가는 대원군마저 쳐내야 하는 나로서는 그들에게 의지할 수는 없다.
그러자면 승정원뿐이다. 어차피 장차 독재 권력을 휘두를 작정인 나로서는 내 직할의 비서기관의 힘이 세지는 건 반겨야 할 일이기도 했다. 나는 그들을 시켜 은밀히 민씨 종친의 연줄을 이용해 서역인들과 접선 경로를 만들어보라고 명했다. 아직 이렇다 할 소식은 없지만 말이다.
어차피 내가 15살이 되어 수렴청정 기간이 끝나려면 아직도 2년하고도 반년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아직은 여유를 가지고 인내해 줄 수 있었다.
'승정원이 침묵하고 있는 건 말할 것도 없이 내가 그렇게 하라고 명해서다. 그렇지만 김좌근은….'
나는 슬쩍 김좌근을 바라봤다. 김좌근 또한 아무 말 없이 인자한 미소를 띠며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구렁이 같은 미소가 어딘가 꺼림칙해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뭘 노리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잘 보니 그의 위치부터가 절묘했다. 이제 그만 청과 화해하자는 의견을 내놓는 세도가 진영의 이들과는 그리 티가나지 않을 정도만 한 발짝 물러서서, 그들과는 시선도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그들과 자신이 뜻을 함께하지 않는다는 티를 일부러 내려고 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러다가 돌연 한 걸음 더 내디디고서는 포문을 열었다.
"마마, 소신이 한마디 올리겠습니다."
"좋소, 계속해보시오."
"주명은 어버이의 나라입니다. 비록 이백하고도 스무 년의 세월이 지났다고 하나 여전히 그 하해와도 같은 은혜는 이 조선 땅에 은은한 향수를 남기고 있습니다. 어찌 복수를 갚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천명이 흔들리고 있으니, 이는 곧 하늘에서 내려주신 천재일우의 기회입니다. 어찌 어버이의 복수를 하지 않고서 선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