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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고종대왕 일대기-12화 (12/530)

< 일을 터뜨리다(2) >

폭탄선언이었다. 기껏 지원군이 등장했다고 반색한 조대비의 얼굴이 실시간으로 굳어가는 걸 보지 않고서도 느낄 수 있는 지경이었다. 비단 조대비만이 아니라도, 사실상 어전회의에 얼굴을 들이민 이들 중 동요하지 않은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 대원군조차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얼굴이 단번에 일그러질 지경이었다.

"태조 대왕 시절의 오랜 비원을 이룰 천재일우의 기회입니다. 이를 놓치면 죽어서 어찌 주명의 복수를 다 하지 못하고 세상을 등지신 선왕 전하들을 뵌단 말입니까. 청컨대 10만의 장정을 뽑아 정병으로 훈련하고 북방 변경의 성들을 보수하여 만전을 기하소서. 또한, 압록강 너머로 현감들을 파견하여 그 너머에 백성들을 위문하시고, 더 나아가 장차 요동부윤을 설치하여 삼봉의 뜻을 이루소서."

"ㄱ, 그대 감히 어, 어찌 그런 망발을…"

"소신은 노쇠하여 그 대업을 잇기에는 부족함이 크나이다. 하오니 전하, 평안감찰사 박규수를 이 대업에 천거하오니, 엎드려 청컨대 소신의 뜻을 받아 삼봉과 태조 대왕 시절의 대업을 이루소서."

거기까지 말하고서는, 김좌근은 나를 향하여 고개를 숙였다. 명백하게 내 뒤에 대비를 향하여서가 아니었다. 나를 향하여 똑바로 하고 있는 말이었다.

그제야 나는 그가 무슨 심산인지 눈치챘다. 어전회의에 참가한 다른 이들 또한 눈치챘다. 이것이 무슨 짓인지 말이다.

'여기까지 판을 깔아줬는데 도망칠 거냐 이건가.'

이건 한마디로 현실론이었다. 네가 진정으로 명나라의 복수를 갚고자 한다면 적어도 이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느냐는 조롱이기도 했다. 물론, 그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서 하는 말이었다. 단순히 청나라에게 폭언을 날리는 것과 청나라가 이미 한차례 양보했는데도 불과하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군비증강까지 나서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이다.

이쯤 되면 진짜로 작정하고 한번 전쟁이라도 해보자는 도발이다. 제아무리 청나라가 지금 혼란스럽다고, 여기까지 노골적인 도발을 당하고서도 꼼짝도 하지 않을 리는 없었다. 설령 태평천국의 난 진압을 미루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천명에 정면으로 도전한 조선부터 결딴내려고 들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 청나라도 두 번 다시 일어서기 힘들겠지만, 조선은 아마 거의 확실하게 망한다. 그걸 알고 있으니 대놓고 김좌근이도 판을 깔아주고서 어디 진짜로 해볼 테면 해보든가 하고 도발하고 있는 거다. 평안감찰사 박규수처럼 대놓고 친 대원군파 인물을 천거해준 것부터가 그 증거다.

여기까지 판을 깔아주면 오히려 받을 수 없어 난처해질 걸 아니까, 현실론을 들이밀면서 좌초시키려 드는 것이다.

"영상의 말은 천부당만부당하오. 하나, 아직 조선은 미약하여 감히 그들과 정면대결할 바는 못되오. 지금은 우선 엎드려 힘을 기를 때이외다."

"어허, 대감까지 왜 그러시오. 주명의 복수를 하자고 앞장선 것은 대감이 아니셨소? 그때는 선비의 도리를 다하자고 하시고서는 이제 와서 물러나시다니,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지금 당장 주명의 복수를 다 하자는 것이 아니지 않소. 주명이 멸한 지도 이백여 년의 세월이 흘렀소. 그까짓 10년 정도도 참지 못하겠소?"

"외람되지만 나는 이미 나이도 이순이 넘어 칠순이 가까워, 10년 후라면 미처 보지 못할 것이오. 어찌 생전에 이 모든 대업을 목도하고 싶은 주명에 대한 도리와 이 나라 조선에 대한 소신의 충정을 헤아려주지 못하는 것이오? 참으로 섭섭하구려."

"아니, 내 말은 그 말이…."

뒤늦게 대원군이 나섰지만, 역시나 밀리고 있었다.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그도 주전론을 외치긴 했어도 진짜로 전쟁을 바라서 이야기를 시작한 건 아니었다. 이렇게 위기감을 조장시키고 난 다음, 그걸 빌미로 개혁을 밀어붙이려고 했을 뿐. 어차피 주명의 복수 따위 처음부터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김좌근이 대놓고 판을 깔아주니까 되려 밀리는 것이다. 개혁은 해야겠는데, 그렇다고 김좌근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자니 진짜로 전쟁이 터질 판국이고, 그럼 여차하면 망국이다. 그건 대원군이 바라는 일도 아니다.

"그러하옵니다, 전하. 지금이 적기옵니다. 청컨대 정병 10만을 육성하고 변경의 성들을 보수하여 변란에 대비하고 삼봉의 비원이던 요동 정벌에 착수하여야만 합니다!"

"평안감찰사 박규수는 힘이 장사이고 육도와 삼략을 섭렵한 인재 중 인재이옵니다. 마땅히 평안감찰사 박규수를 중용하여 이 대업을 맡겨봄직 하옵니다!"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전하!"""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점차 다른 이들도 하나둘씩 분위기를 읽기 시작했다. 친 대원군 세력들은 하나둘씩 입을 다물고 뒤로 물러나고, 조금 전까지 우물쭈물하던 세도가 진영이 앞장서서 주전론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대원군이 말은 번드르르하게 해도 실제로는 전쟁을 바라지는 않는다는 것이 확실해지면서, 본격적인 역공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슬쩍 시선을 돌려 김좌근을 보았고, 또 대원군을 보았다. 김좌근은 언제나처럼 사람 좋은 인자한 미소를 만면에 띄우고 있었고, 대원군은 아랫입술을 깨물고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누가 우위에 있고, 누가 열세에 있는지 더없이 명백해 보였다.

'어쩐다….'

나는 그들을 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비는 지금의 상황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 대신들의 시선도 일제히 나에게 집중되고 있다. 하나같이 의기양양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들이다. 여기까지 판을 깔아줬는데 못하겠냐며 윽박지르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나로서도 달리 해답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받아들이면 확실하게 파멸이다. 일단 청나라도 태평천국을 마저 정리하든 아니면 전선을 뒤로 물리든 후방을 정리해야 조선을 손볼 수 있을 테니 최소로 잡아도 3년간의 세월은 벌 수 있겠지만, 내가 시간을 번다는 건 청나라도 시간을 번다는 거다. 당연히 시간을 끌면 조선이 강해지는 만큼 청나라도 강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역습을 하자니 조선의 꼴이 말이 아니다. 국방은 진작에 허물어졌고, 현재 남아있는 건 그냥 세도가들의 카르텔 사병집단 수준이다. 임진왜란 직전에는 차라리 북방군이나마 건재했지, 이제는 북방에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북방군조차 온전하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북방군이 날아갔다고 삼남도나 중앙군이 건재한 것도 아니다. 그냥 총체적 난국 상황이다.

'어차피 청도 상태가 말이 아니라서 1차 파병한 병력만 막아내고 나면 더는 내부적으로 여력이 없어서 병력보충도 못 하고 자멸하기는 할 텐데…'

"그렇지 않다면, 어떻습니까. 주상께서 손수 친정하시는 건 어떠신지요? 주상께서 몸소 나서셔서 병사들을 위무한다면 우군의 사기도 대폭 오르겠지요. 그리고 선왕 전하들께서도 이를 자랑스러워 마지않으실 것입니다. 전하, 용단을 내려주소서."

울컥.

그때, 마침내 김좌근의 칼끝이 나에게까지 겨눠졌다. 내가 표정이 별로 좋지 않다는 걸 헤아리고서, 마무리 작업으로 나까지 찔러 들어간 것이다. 내가 단순히 입만 산 애새끼가 아니라 때로는 숙이고 때로는 앞장서는, 어느 정도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라는 걸 헤아리고서는 나까지 침묵시키고서 당분간 개혁의 개자도 입도 벙긋 못하게 만들 작정인 것이다.

당연히 왕에게 할 말이 아니었다. 왕을 우습게 아는 세도가의 우두머리인 김좌근이나 가능한 폭언이었다. 대놓고 나까지 끌고 들어가자 대원군까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고, 대비는 대경실색하여 "말을 삼가도록 하시오, 영상!"하면서 꾸중을 주었다. 그만큼 지금의 조선에서도 차마 생각하기 어려운 폭언 중 폭언이었던 것이다.

순간 머리에 피가 확 쏠렸다. 턱에 힘이 절로 들어가 으드득 소리가 들렸다. 양손에도 피가 몰려, 일부러 의식하여 힘을 주고 어좌의 팔걸이 부분을 있는 힘껏 움켜쥐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김좌근의 얼굴에 주먹이라도 쳐 날렸을 터였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서 김좌근은 웃었다. 승리를 직감한 모양이었다.

머릿속에서 무언가 툭-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린듯했다.

"송구하옵니다. 소신이 마음이 급하여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사죄 드립니ㄷ―."

"좋소. 기꺼이 받아들이리다."

"…예?"

순간, 김좌근이 의아한 듯이 눈을 깜빡거렸다. 눈을 깜빡거리고, 이내 얼굴색이 새하얗게 질리고 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나는 그를 향해 비릿하게 미소지어 보였다.

"친정이라고 하였소? 그거 좋구려. 옛 태조 대왕께서도 한 필의 말에 몸을 맡기고서 드넓은 만주벌판을 달리셨거늘, 과인이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소? 당장 말을 수배해두록 하시오. 오늘부터 당장 승마부터 연습하리다."

상황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해져 있던 대신들도 여기까지 말하자 하나둘씩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대비는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혼절해버렸고, 김좌근은 너무 놀란 나머지 그대로 제자리에 주저앉아 엉덩방아를 찧었다.

나는 슬쩍 시선을 돌려 대원군 이하응을 바라보았다. 마치 귀신을 본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우라질, 또 그놈의 화를 못 참고 일을 터뜨렸군.'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는 것은 나의 오랜 잘못된 버릇이다.

아무래도, 모든 일정을 조금 더 빠르게 앞당길 필요가 생긴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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