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13화 (13/530)

<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

"저, 전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소신으로서는 도통…."

"하나 참으로 천군만마를 얻은듯하구려. 설마하니 영상께서 몸소 과인의 대업을 지지해주실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하였소. 역시 노쇠하였을지언정 패기는 여전하시구려. 이거 본인도 배포가 크기로는 자신이 있었거늘, 역시나 영상께는 안되는 모양이외다, 허허허!"

'오냐,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다. 어디 너 죽고 나 죽어보자 이 개자식아.'

나는 일부러 호탕하게 웃으며 김좌근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 이제 와서 동요한 티를 내봤자 자폭이다. 일을 한번 터뜨려버린 이상 뒷수습할 생각 따위는 집어던지고 최대한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상황은 나쁘지 않다. 가장 큰 방해요소라고 생각되었던 세도가의 수장 안동 김씨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전면에 나서면서 요동 정벌에 의욕을 보여준 것이다. 물론 속내는 정반대지만, 여기까지 오면 실제 속내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저놈은 지금 이 순간 나랑 운명공동체로 묶여버린 것이다.

'말을 먼저 꺼낸 건 너다. 이제 와서 나를 죽인다고 한들 청나라 놈들이 너와 너의 족속들을 용서해줄 성싶더냐.'

"내 이 일은 영상께 일임하리다. 도승지, 승정원에서 영상께 큰 힘을 보태주시오. 이 나라 조선의 천년대계가 달린 대업이오. 일을 진행하는 데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어야 할 것이며 또한 인재를 가리는 일에서는 오로지 그자의 능력만을 봐야 할 것이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전하."

도승지 민치상은 질린듯한 얼굴을 하면서도 내게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내 밑에서 지내오면서 대강 나의 성정을 파악했을 테니, 내가 이번에 폭발해버린 일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였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내 안에서 도승지에 대한 평가를 한층 더 상향시켰다.

한편 김좌근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다 못해 하루아침에 족히 10년은 늙어버린 모습이었다. 졸지에 반청전쟁의 책임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틀림없이 전쟁에서 패한다면 청나라에서 가장 먼저 나와 김좌근부터 죽여 도성에 매달아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제 와서 내빼는 것도 불가능하다.

김좌근이 먼저 말을 꺼낸 일이고, 나는 그의 충언을 받아들여 그것을 실제로 실행하자고 했을 뿐이다. 이제 와서 도망치겠다고? 이날의 어전회의를 분명히 전해 들을 청나라에서 과연 그를 용서해줄까?

"내 영상만 믿고 있겠습니다. 모두 영상께 힘을 보태어주십시오. 요동부윤이야말로 삼봉과 태조 대왕 시절부터 이어져 온 우리 대조선국의 오랜 소원이 아니겠습니까? 부끄럽게도 과인이 뜻이 부족하여 말만으로 끝났을지도 모르는 일을 누구보다 용맹하게 앞장서 실현해주신 건 다름 아닌 영상이십니다. 영상이야말로 과인의 대들보요."

"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허허허, 그렇게 쑥스러워하지 마시오. 그래, 내 약속해드리리다. 기필코 더 늦기 전에 영상께서 대조선국이 주명의 원수를 갚고 천하에 우뚝 서는 장대한 모습을 보여드리겠소. 그러니, 영상께서도 과인이 영상을 믿듯이 과인을 믿어주시길 바랄 뿐이라오."

거기까지 말하고서 나는 싱긋하고 웃었다. 내 나름대로는 가능한 한 상쾌한 미소를 떠올릴 작정이었지만, 실제로는 그리 멋진 미소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 증거로써, 내 미소를 받은 김좌근은 냉정함을 되찾지 못하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면서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그의 곁에 서 있던 세도 가문의 추종자들도 지금에 와서는 차마 김좌근을 감싸거나 대화에 끼어들 생각도 못 하고 필사적으로 나와 김좌근 사이에서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김좌근은 대열에서 이탈하여 두, 세 걸음은 더 앞으로 툭 튀어나와 도드라진 모양새였다. 고립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 김좌근의 정치생명은 사실상 반청전쟁에 걸린 격이 되었다. 실패한다면 확실하게 청에게 붙잡혀 죽을 것이고, 성공한다면…글쎄. 상당한 영광을 누리기는 하겠지만 그걸 다 누리기도 전에 늙어 죽을 것이다. 아예 잘못했다고 못하겠다고 하고 꿇는다면 세도가의 우두머리의 지위마저 잃게 될 판국이다. 권력에 살고 권력에 죽는 그가 스스로 권력을 손에서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아예 나한테 머리를 박고서 말이 헛나왔다고 빌면 물릴 수도 있겠지만, 어쩔 테냐?'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김좌근을 내려다 봤고, 김좌근은 아랫입술을 깨물고서 고개를 더욱 숙였다. 역시나 김좌근으로서도 차마 못 하겠다는 말만큼은 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저자는 하루를 덜 살고 죽더라도 죽는 날까지 권력을 손에 쥘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인간이었다.

김좌근이가 더는 말을 하지 않고 회의도 이대로 끝날 기미를 보이자, 당연히 다급해진 것은 세도가의 추종자들이었다. 내가 같이 죽자고 이판사판으로 나온 덕분에, 김좌근과 엮였다가는 이대로는 가문 전체가 패가망신할 판국이 된 것이다.

"전하, 뜻을 거두어주소서. 상국이 얼마나 강대한지는 온 조선 천지에 모르는 사람이 없사옵니다. 또한, 상국에 칼을 겨누고자 함은 곧 역천이니, 이는 천명을 거스르는 일이며 순리가 아니옵니다. 엎드려 청컨대 거두어주소서!"

"어허, 그거 이상하구려. 그대는 조금 전 영상과 함께 10만의 정병을 육성하여야 한다고 하지 않았소? 그런데 이제 와서 말을 바꾸는 것은 어찌 된 일이오? 영상을 능멸하는 것이오, 아니면 과인을 능멸하는 것이오?"

"그, 그것은…."

하지만 그들도 빠져나오기에는 너무 늦었다. 조금 전 신나게 대원군 파벌들을 쪼아대느라 신나게 입을 놀리던 놈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 전부 다 내가 자폭해버리면서 다 같이 줄줄이 코가 꿰인 격이 되어버렸다. 내가 그때 끝내 못 이기겠다고 수그렸다면 나와 대원군 합쳐서 깡그리 입만 살은 놈들이라고 깎아내릴 수 있었겠지만, 내가 배를 째 버리면서 저들은 자신들이 내뱉은 말을 지켜야 하게 되어버렸다.

이미 터뜨린 이상 뒤로 물릴 생각 따위는 없었다. 여차하면 나도 죽겠지만, 죽는다면 너희들까지 다 같이 죽자. 그럴 작정이었다.

"여봐라, 게 누구 있는가? 붓과 먹을 가져오도록 하거라. 이와 같은 경사스러운 날에 뜻있는 조선의 용감무쌍한 대장부들의 이름 석 자를 기록해두지 않으면 후세에 얼마나 큰 웃음거리가 되겠느냐. 자, 모두 이리 가까이 오도록 하시오. 이 대업이 후일 성공한다면 내 그대들 모두를 공신으로 봉하리다."

난 거기에 한발 더 나아가 그들 전부에게 붓과 먹을 내밀어 이름 전부를 기록하게 했다. 저들이 정신을 차리고 반격에 나서기 전에 깡그리 한 묶음으로 지옥 밑바닥으로 떨어져 줄 작정이었다. 일을 터뜨린 건 터뜨린 거고, 뒷수습은 나중에라도 생각하면 된다. 아예 일을 밑도 끝도 없이 키워야 오히려 뒷말이 없는 법이었다.

의외라면 의외인 것은, 김좌근은 내가 명부를 내밀자 순순히 가장 먼저 앞으로 나와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혼이 쏙 빠져서 정신이라도 나간 건가 싶었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명부에 이름을 적고 나를 똑바로 올려다보는 그 눈빛은 흉흉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어디 두고 보자는 눈빛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반드시 성공해주겠다는 독기인지도 몰랐다.

그 뒤로는 민치상과 승정원의 승지들이 나와 이름을 적었고, 그러자 그때까지 눈치만 보고 있던 대신들도 하나둘씩 나와서 명부에 이름을 적었다. 마지막으로 이름을 적은 것은 대원군이었다. 참으로 할 말이 많은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에게 어전회의가 끝나고서 내 처소에 오라고 손짓했다.

"오늘날과 같은 난세에 그대들과 같은 충신들을 얻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구려. 과인은 참으로 복이 많은 왕이오. 그 어떤 군왕이 오늘의 과인과 같았겠소? 내 오늘 일은 절대 잊지 않겠소. 일이 잘 풀린다면 모두 그대들의 공이라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더는 논할 말도 없다는 듯이 나는 속전속결로 그날의 어전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당연히 대신들은 무언가 석연찮은 듯이 내 쪽을 계속 힐끗거렸지만,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처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밤, 낯익은 두 사람이 내 처소로 찾아왔다. 흥선군 이하응과 도승지 민치상이었다.

"도대체 정신이 있으신 겁니까, 없으신 겁니까!"

쾅.

있는 힘껏 내려친 주먹과 울려 퍼지는 노호성. 그나마 이보다 더한 말이 나오지 않은 것은 최후의 발악이었을까. 예상했던 대로 이하응은 머리끝까지 화가 난 듯했다. 뭐, 내가 반대 입장이더라면 그보다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겠지만.

"아니,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이만 물리시지요. 상국과의 대결은 지금의 조선에게는 불가하옵니다. 지금이라도 없었던 일로 하고서 물리시지요!"

"물리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모두 명부에 이름을 적지 않았습니까? 명부에 이름을 적고서 살기를 바라시다니 염라도 비웃을 것입니다."

"내 한 몸 살자고 이러는 게 아닙니다. 성상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것은 이 나라 조선 8도의 민초들의 생사가 걸린 일이오! 그리 간단히 입에 담아도 괜찮은 일이 아니란 말이오!"

"민초라! 묻건대, 이 나라 조선이 언제부터 민초들의 삶을 그리 근심했습니까?"

피차 아버지에 대한 존중이나 아들에 대한 존중 따위 없었다. 어차피 지금 이 자리에 모인 것부터가 부자지간으로서 만난 것이 아니다. 그나마 서로 존대해주고 있는 것만으로 최소한의 격식만큼은 차리고 있지만, 그것뿐.

나랏일을 논하는 자리였다. 그리고 족보상 나의 아버지는 흥선군이 아니라 익종이다. 무례를 범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래도 필요 이상으로 어려워할 이유도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나는 이 나라의 왕이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생각해두신 방도는 있으십니까?"

"설마, 진심으로 양이들이 조선을 도울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들이 무엇을 믿고 조선을 돕는단 말입니까? 그리고 양이들의 힘은 얼마나 되는 겁니까? 무엇하나 확실한 것이 없지 않습니까!"

내 성정을 알고서 일찌감치 포기한 채로 방도를 묻는 건 민치상이었고, 도중에 말을 끊고서는 내게 비아냥거리듯 추궁하는 건 이하응이였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답했다.

"최소한 잠시나마 북경을 점거할 정도의 힘은 있다는걸 알고 있소. 그리고, 앞으로의 대책은 우선 영상께 여쭈어야 하는 일이 아니오? 영상께서 시작하신 일일진대 말이오."

풀어 말하자면, 나 또한 마땅히 뾰족한 방도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아니,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이들 앞에서 입에 담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당장에 내가 기름 부음을 받고 온갖 이권을 약속해준다고 하면 입이 귀까지 찢어져서 달려들 놈들이야 많다. 그러나 그걸 저들 앞에서 말할 수는 없으니까 문제인 것이다.

나의 대답에 이하응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이래서야 아무 생각 없이 무책임하게 나라를 망국의 길로 끌고 가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나는 일부러 이하응에게서 시선을 돌리고서, 민치상에게 물었다.

"현실적으로, 지금 전란이 벌어진다면 얼마나 되는 병사들을 동원할 수 있겠소?"

"영상께서 어디까지 힘을 써주시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1만이나마 모인다면 다행일 것입니다. 그나마도 제대로 된 훈련을 받고 장부 그대로의 병장기로 무장한 병사들은 그보다도 적을 것입니다. 상국에서 얼마나 되는 병력을 동원할지는 알 수 없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최저 10배의 양적 격차가 있으리라고…."

"흐음, 그럼 지방의 뜻있는 선비들에게 의병을 모집할 수 있도록 한다면 어떻겠소?"

"…진심으로 하시는 소리십니까?"

민치상은 설마 하는 듯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나를 모두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필요하다면."이라고 답했다. 필시 엄청난 위험부담을 감수해야겠지만, 당장 병사들만 얻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위험부담도 감수해줄 심산이었다.

민치상은 크게 한숨을 내쉬고서는, 내게 답했다.

"그렇다면 10만은 능히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 폐단은 제 입으로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일단 훈련이 고루 진행되기 어렵고, 지휘권 문제로 관아와 다투기 쉬우며 전후에 순순히 해산되지 않고 사병화되거나 최악의 경우 난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전쟁을 위해서라지만 이는 상책이라고는 말해드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시도해봄 직하지 않소. 기억해두시오. 이번 전쟁의 목적은 요동을 정벌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청의 그늘에서 벗어나 두 발로 디디고 서는 일이오. 고향을 지키는 일이라면 저들도 기꺼이 협력하지 않겠소?"

"허, 이제는 사병이라. 기어이 정신이 나가셨구려, 주상. 진정으로 이 나라 조선을 망하게 할 작정이오? 전주 이씨 종친의 대가 끊기는 꼴을 그렇게도 보고 싶으시오?"

대원군은 기가 찬다는 듯이 비아냥거렸다. 나 또한 굳이 대원군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나 또한 지금의 내가 얼마나 무모한 짓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각은 있었으니까.

그러나 시대가 시대였다. 조만간 일본에서는 무진전쟁이 끝나고 신정부가 수립되어 메이지유신이 시작될 것이고, 그러고 나면 일본은 그들의 표현 따나 욱일승천하게 된다. 그들보다 국토도 작고 인구도 더 적은 조선이 청의 눈치를 봐가면서 서구열강들과 연줄을 대고 근대화에 착수하기에는, 시간도 부족했고 상황도 좋지 못했다.

그럼 결국 전쟁뿐이다. 청의 눈치를 보지 않고서 근대화를 진행하는 유일한 길은 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서 청을 시야에서 치워버리는 일뿐이었다. 굳이 완승을 할 필요도 없다. 여차하면 무승부나 판정패만이라도 좋다. 요동정벌 운운 따위 허세다. 지금은 일단 국토를 끝까지 사수하고 최소한의 자주권을 인정받는 것만으로 족하다.

정 힘이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열강들의 힘을 빌리면 된다. 그 경우 자주권이 흔들리겠지만, 그래도 근대화는 가능하다. 이 시대에 인구가 1500만에 달하는 나라는 그리 많지 않다. 이 시기 일본의 인구가 3천만이 조금 넘는 수준이고 베트남은 500만 언저리였으며 프랑스도 본국 인구만 따지자면 일본과 엇비슷. 영국은 본국만 따지면 그보다 적어서 2천만 대다.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일단 확실하게 인구는 크게 불어나게 되고, 총력전의 시대의 인구는 곧 국력이다. 일단 열강들에게 굽히게 되더라도, 내가 하는 것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일본이 그러했듯이 열강들의 속국 처지에서 벗어나 우뚝 설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이 나라 조선의 종묘와 사직을 위함이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소. 양전 사업을 시행하여 은결도 잡아내야 할 테고 호포제도 시행해야 할 테고 불필요한 서원들은 크게 줄이고 토지를 개혁하여 자영농을 육성하며 조선팔도 곳곳까지 뻗는 길을 닦아 상업을 장려하고 공업을 중흥시키며 온 나라의 장정들을 가려 뽑아 부국강병을 이뤄야 합니다.

아직 갈 길이 멀지 않습니까, 아버지.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습니다. 앞으로 영상이 빈틈을 보여줄 날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뒤는 돌아보지 말고 단번에 몰아붙여 버립시다."

"이럴 때만 아버지라고 부르는 거요? 허, 참. 그리고 내 일찍이 그리 부르지 말라고 했을 터인데."

이하응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그에 답하지 않고서 살짝 고개를 숙여 목례했다. 이하응은 한참이고 내 정수리를 내려다보다가, 쯧하고 혀를 찼다.

그리고 말하기를,

"좋소. 빌어먹을, 그래 따지고 보면 애초에 일을 여기까지 밀어붙인 김좌근 그 작자가 모든 일의 원흉이지. 여차하면 모든 건 그 작자에게 떠넘겨도 될 거요. 이런 핏덩이가 이 대업을 꾸몄다고 그 누가 믿겠소? 이루지 못한다면 죽으면 그만인 일이지. …해보겠습니다. 힘을 실어주소서."

"참으로 잘 생각했소. 그대가 함께해주니 그야말로 천군만마를 얻은듯하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하응의 양손을 꼭 하고 쥐었고, 이하응은 그대로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우리 두 부자는 웃고 있었지만, 서로 직감하고 있었다.

'일이 불리하게 풀린다면 기꺼이 잘라내고 모든 걸 덮어씌운다.'

아버지가 아들을, 아들이 아버지를 여차하면 내치려고 들고 있었다.

참으로 난세다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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