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궁여지책 >
그 이후로도 그날 우리는 둘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김좌근은 일단 이판사판으로 끌어들였으나 애초에 개혁에 의지가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니 앞으로의 개혁은 김좌근을 물주로 삼아 대원군을 내세워 밀어붙일 필요가 있었다. 물론 김좌근도 그리 순순히 당해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일단 대강의 틀은 그러했다.
그러자면 우선 먼저 나와 대원군 사이에 인식의 차이를 좁힐 필요가 있었다. 그걸 위한 밀담이었던 것이다.
"그럼 대감, 가장 먼저 우선 되어야 할 것은 무엇이라 생각십니까?"
"역시 재화의 확보가 무엇보다도 우선이지 않겠습니까? 은결도 은결이지만 그보다는 광업을 허하고 이를 독려하여야 할 것입니다. 특히 금과 은은 그 가치가 높으니, 마땅히 이를 징수하여야 할 것입니다."
"금맥이라면 제가 좋은 곳을 알고 있습니다. 운산, 대유동, 광양의 3곳입니다. 이 3곳의 금맥은 가히 조선팔도 제일이라고 합니다. 필시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 중앙에 바칠 만큼의 금만 헌상하고 나면 나머지는 민간에서 알아서 이익을 분배하도록 독려한다면, 개발에 필요할 나랏돈은 줄이고 개발 시기는 앞당길 수 있을 테니 일거양득입니다."
"아니, 언제 또 그렇게 금맥을 수배해두신 겁니까?"
"당연히 여기 도승지가 수고해주었지요. 허허허, 승정원에서 참으로 수고가 많습니다."
반쯤은 거짓말이었고, 반쯤은 진실이었다. 일단 승정원에 시켜서 제위 초기부터 그 3곳의 금맥을 은밀히 수색해두라고 지시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김좌근이나 이하응 등의 시선을 피하느라 원체 조심스럽게 거동할 필요가 있던 탓에 실상 개략적인 위치나마 확인된 것은 운산 한곳 뿐이었다. 그걸 알고 있었으니, 칭찬을 받는 민치상도 상당히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흥선군도 그런 민치상의 표정에서 어느 정도 헤아렸는지 반신반의하는 눈초리였으나, 굳이 더 파고들지는 않았다. 이미 시작해버린 일이었다. 지금은 되는가 안되는가가 아니라 일단 된다고 모든 것을 가정하고 되는대로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었다.
"우선 서원은 크게 그 숫자를 줄여 향림들의 힘을 꺾어두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이견 있으십니까?"
"이견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의 서원은 너무나도 그 병폐가 큽니다. 이번 기회에 한 번 크게 솎아내야겠지요. 그러나 만동묘만큼은 안됩니다. 그것을 건드리게 된다면 당장 대의를 잃게 됩니다. 그러니 철폐하는 대신 나라에서 제사를 주관하도록 하지요."
"좋습니다. 그 정도는 충분히 이해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상께서는 장차 전쟁에서 의병을 독려하실 거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서원을 철폐한다면 유생들의 참여도 크게 줄어들 터입니다만."
"그 부분은 반역향들을 모두 철회하고 지방향림들이 중앙조정에 진출할 기회를 크게 늘리는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참여가 시원치 않다면 어쩔 수 없겠지요. 앞선 변란들에서 그러했듯이, 공명첩을 대거 발행하는 수밖에요."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으나, 실제로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다름 아닌 상국인 청과의 전쟁이다. 전쟁에 필요한 만큼의 공명첩을 대거 발행한다면 그때야말로 이 조선 땅에 노비란 노비는 모두 자취를 감출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만큼 발행해도 충분하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결국, 임란이나 구한말 의병 활동을 주도한 의병장 대부분이 유생들이었듯이, 일개 상놈이 의병장이라고 나선다고 해봤자 어지간히 대단한 인품을 가지지 않은 이상 몰려들지 않을 테니까.
서원을 줄이는 대신 향림들의 조정 진출을 늘리겠다는 부분도 그렇다. 지금 인사권을 쥐고 있는 건 내가 아니었다. 세도가였고, 지금 흥선군 이하응이 어떻게든 종친과 대비의 힘을 끌어와 그걸 빼앗아 오려 용을 쓰던 와중이었다. 그렇다면 이건 결국 흥선군이 분발해서 인사권을 빼앗아 오거나, 아니면 세도가에게 고개를 박는 수밖에 없다는 의미였다.
자연히 흥선군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결국, 나는 일을 터뜨리고 앞으로의 방향성을 제시했을 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그, 의병의 관리방침에 대하여 들을 수 있겠습니까?"
"별로 대단할 것도 없습니다. 한 사람당 100명 이상의 의병을 가져서는 안 될 것이며, 또 한 집안에서 5명 이상의 의병장이 나와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한, 이들 의병장에게는 초관(哨官)의 벼슬을 내려야 할 것이고, 각지의 군수들로 하여금 이들이 신고한 의병의 숫자가 정확한가를 감시하도록 해야 하며, 주기마다 한데 모여 훈련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유사시에는 모두 지방군의 지휘체계 아래에 두도록 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내가 말한 것은 일종의 봉건적인 형태의 예비군이었다. 어차피 중앙의 행정력이 반쯤 붕괴하여 중앙에서 병력을 긁어모은다고 해봤자 병사들이 모일 리도 없으니, 아예 작정하고 지방의 유생들이 자체적으로 사병들을 육성토록 하여 일정 주기마다 모여서 훈련하도록 하고 또 유사시에 그렇게 주기마다 규칙적으로 합을 맞춰온 병사들을 이용하여 전투에 투입하자는 것이었다.
물론 나로서도 별로 내키지는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현재 조선의 군사력이 워낙에 엉망으로 무너진지라, 이제 와서 중앙을 중심으로 재건하고자 한다면 족히 10년의 세월은 필요할 것이며 또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완전히 재건된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럼 결국 방법은 중앙은 중앙대로 지방은 지방대로 알아서 군사력을 재편하게 시키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걸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봉건제다. 근대화를 꾀하는 입장에서는 역설적이었지만, 현재로서는 그게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이었다.
그나마 진짜 봉건제처럼 각지의 지주들에게 통치권을 부여하고, 영지에서 마음껏 사병을 육성하도록 하는 지경까지는 내몰리지 않았다는 것을 위로로 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면 변란의 위험이 커집니다만."
흥선군은 눈살을 찌푸리며 내게 되물었다. 확실히,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여차하면 폭군을 몰아내자! 라면서 지방의 유림들이 의병이라는 이름의 사병들을 이끌고 나타나서는 한양성까지 쳐들어올지도 모를 일이다. 오군영이 사실상 세도가의 재화축적수단으로 전락한 오늘날 그렇게 되면 이렇다 할 저항도 못 하고 한양이 함락될 가능성은 지극히 컸다.
안 그래도 명의 복수를 갚자! 면서 전쟁을 종용하고 있는 와중이다. 청과 일전을 각오하기보다는 차라리 중앙을 척지는 한이 있더라도 왕을 몰아내고 청에게 굴복하는 길이 더 많은 목숨을 살릴 수 있으리라 여기고 반란을 일으킨다면 여기에 호응할 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나를 믿는 것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흥선군이나 민치상을 믿는 것도 아니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제까지야 그럴 위험도 컸습니다만, 오늘부터는 이제 그 김좌근이도 본인과 한 묶음입니다. 여차하면 차라리 어린 저는 살려두고서 김좌근이만 죽일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그자가 제 목을 자르러 오는 놈들을 가만히 보고만 있겠습니까?"
나는 자신 있게 답했다. 오군영이 사실상 세도가의 사병 집단화한 지금이기에 오히려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김좌근은 나를 죽인다고 해도 제 혼자서 살 수는 없다. 본인이 먼저 이야기를 꺼낸 일이고, 나는 거기에 승낙한 것뿐이기 때문이다. 내부적 사정을 모르고 본다면 김좌근이 나를 충동질 시켰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지방의 반군이 한양까지 들이친다면 일단 김좌근이부터 목이 잘릴 것이다. 청군이 한양까지 들이친다고 해도 일단 김좌근이부터 목이 잘릴 것이다. 나는 아직 어리니, 그들 또한 내가 스스로 주명의 복수를 갚는다는 발상을 해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권신 김좌근이 노망이 나서 이번 기회에 큰 군공을 세우고 새 왕조를 세우려고 든다는 해석이 더 일반적이고 상식적이다. 그럼 당연히 그들은 김좌근을 필두로 안동 김씨 종친을 멸하려 들것이다.
제 목이 줄줄이 날아가게 생겼는데 아무리 그 세도가라고 해도 계속 이래저래 놀고만 있을까. 아닐 것이다. 후일의 민씨 일가와 달리 적어도 능력 하나만큼은 출중한 그들이다. 지금이라도 오군영을 혹독하게 훈련하고, 무기를 새로이 보급하고 병사들을 확충하며 군관들의 질을 개선하려 들것이 틀림없었다.
그제야 이하응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에서야 아직 허풍선이일 뿐인 나야 믿을 수 없겠지만, 김좌근의 능력 하나만큼은 믿어볼 만했다. 제 목숨 줄이 달린 만큼 그 노괴도 사력을 다할 것이다. 그럼 세도가의 위세 덕분이라도, 당장 한양방비는 충분했다.
"아 참, 그리고 가까운 시일 내에 일본에 조선통신사를 파견할 작정입니다. 도승지, 승정원에서 미리 일본국에 갈 사신단을 추려보도록 하십시오."
"원군을 청하려 하는 것입니까?"
나의 돌발선언에 민치상은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되물었다. 하기야, 그 또한 차마 직급이 되지 않아 우리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기는 했으나 지금의 대화에서 느끼는 것이 있었을 것이고 어두컴컴한 앞날에 대한 불안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통신사 이야기를 꺼냈으니, 당연히 원군을 청하려 가는 것으로 생각할 만도 했다.
그러나 나는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의 왜국에게 그만한 힘은 없을 것이오. 듣자니, 최근 왜국에서는 권신 덕천경희(徳川慶喜)라는 자를 따르는 자와 일왕 효명(孝明)을 따르는 충신들이 각기 군세를 일으켜 한창 패권을 다투고 있다고 들었소. 그들은 지금 한창 다투기에 바쁠 테니, 우리 조선국에 원군을 파병하기에는 어려울 것이외다."
"아니 전하, 그런 소식들은 어디에서 전해 들으셨습니까?"
"허허허, 제가 한량처럼 보여도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고 듣는 귀가 있으니 다 이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납득하기 어렵다는 듯한 대원군의 표정에, 나는 말 없이 내 머리를 검지로 툭툭 두드려 보였다. 나로서는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미래의 지식을 이야기하는 것이었지만, 대원군은 모욕적인 의미라고 해석한듯했다. 대원군의 표정이 단번에 일그러졌으나, 그는 이를 악물고 제 화를 눌렀다.
나 또한 뜻하지 않게 대원군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는 건 알았으나, 어차피 내가 어떻게 그 정보를 얻게 되었는지 말로서 풀어 설명하여 그가 납득하게 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던지라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전하, 통신사는 어쩐 일로…?"
"그야 물론 그들과의 교역을 늘리기 위해서지요. 당장 청과 대립하게 된다면 조공부터 끊어지지 않겠소? 그걸 보충하자면 왜국과 교역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뿐이오. 그리고 만일 대립이 길어진다면 왜국에게 원군을 청할 수도 있겠지. 그렇지 않소?"
반쯤은 진심이었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게 주목적은 아니었다. 지금 조선통신사를 보내게 된다면 필시 외국의 공사들과도 접촉을 가지게 될 것이고, 나는 그들에게 조선이 통상을 원한다는 암시를 전하도록 주문할 작정이었다. 그럼 자연히 외국의 공사들도 조선에 시선을 돌리게 될 테고, 조선이 최근 청과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는 거도 알게 될 것이다.
당연히 이는 본국에도 전달될 것이고, 그럼 청에게서 어떻게든 더 많은 이권을 뜯어내려 눈이 돌아가 있는 서구열강들은 조선의 독립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청을 공격하여 또 다른 이권을 뜯어내려 들 수도 있다. 또 그것이 아니더라도, 조선이 통상에 적극적이라는걸 알게 되면 저들도 아주 조선과 청의 전쟁을 외면하려 들지는 않을 터였다. 청은 여전히 서구열강들과의 통상에 부정적이니, 육지로 연결된 조선을 경유하여 대륙에 직접 진출할 수도 있는 것이다.
민치상은 납득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흥선군의 눈초리는 싸늘했다. 그것만이 아닐 것이라는 합리적 의심이었다.
나는 답하지 않고 그저 어깨를 으쓱거렸을 뿐이다.
"그럼 어떤 이들을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까?"
'김홍집이 좋기는 한데, 아직 조정에 출사하지 못한 일개 생원일 거란 말이지….'
아쉬웠으나, 아쉬운 건 아쉬운 거고 지금은 현실을 찾을 때였다. 나는 입맛을 쩝쩝 다시다가, 마침 오늘 낮 김좌근이가 손수 추천한 인물을 떠올렸다.
평안감찰사 박규수. 조선 개화파의 대부이자 얼굴이라고 할법한 인물이었다.
"평안감찰사 박규수가 좋소. 아, 그리고 역관 중 오경석, 자는 원거라고 하는 인물이 있을 것이오. 그자도 데려가도록 하시오. 이 두 사람을 제외하고서는 뜻하는 대로 채워도 좋소. 그러나 가능하다면 집안에 천주교도가 있는 이들을 위주로 천거하는 것이 좋겠소. 또 어전회의에서는 청과 싸우는 중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함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좋겠구려. 나머지는 뜻대로 하시오."
"하명하신대로 하겠나이다, 전하."
앞서 김좌근이가 먼저 박규수를 천거한 만큼, 민치상은 굳이 나에게 어째서 박규수를 천거하느냐 되묻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좌근 또한 스스로 천거한 인물이니 조선통신사에 쓴다고 해도 큰 불평은 할 수 없을 터였다. 겉으로는 육도와 삼략을 섭렵한 인재라고 소개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 정도야 본인이 가장 잘 알 테고.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서 이하응에게 시선을 돌렸다. 복잡미묘한 얼굴이었다. 내가 단순한 허풍선이인지, 아니면 진짜로 뭔가 신기가 있는 것인지 감이 안 잡히는 모양이었다.
나는 화두를 돌릴 작정으로 때마침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참, 그러고 보니 왕비 간택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직도 말이 없습니까?"
"일이 나날이 커져만 가는데 그럴 틈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도대체 어느 정신 나간 놈이 이 판국에 귀한 자식을 순순히 내놓으려는지요. 여차하면 주상과 함께 목이 잘릴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흐음, 그럼 청에게 공주를 달라 청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입니까?"
이하응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야 그럴 것이다. 조금 전까지는 청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죽을 둥 살 뚱하고 있더니, 인제 와서는 또 청의 사위가 되겠단다. 미쳤다고 의심받아도 할 말이 없다.
"물론,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입니다. 대감, 제가 어떻게 보이십니까?"
그러나 나는 진심이었다. 여기에서 한 번쯤은 저들이 물러날 양보의 여지를 남겨둬야 후일 진짜로 전쟁이 터지건 화친을 하건 명분이 선다. 만약 저들이 받는다면 청의 위세를 빌려 근대화를 밀어붙이고서 청이 휘청이기 시작할 때 애신각라의 핏줄을 명분 삼아 만주지배권을 주장할 작정이었고, 거부한다면 거부한 대로 이쪽에서 제시한 최후의 타협점을 저쪽에서 거절한 셈이니 결국 전쟁에 들어선다 하더라도 훨씬 때깔이 산다.
어느 쪽이건 나로서는 크게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미 시작한 일이다. 일을 터뜨리려면 가능한 한 화려하고 화끈하게 저지르는 편이 좋았다. 상식선이나 도덕 따위 일단 의식 저편에 처박아 두고서, 어떻게 움직여야 저들이 더 황당해할지만 궁리한다.
내 특기 중 특기였다.
"주상께서는 걸주대왕들을 뵈는듯하오."
이하응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푹 한숨을 내쉬었다. 내게 면전에다가 대고서 넌 걸주같은 폭군이라고 일갈한 것이다.
나는 그저 웃으면서
"제가 누구에게서 배워왔겠습니까?"
라고만 답했다.
이튿날 어전회의부터는 대비가 출석하지 않았다. 나와 김좌근의 대화를 듣고서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어젯밤 병을 얻어 몸져누웠다는 모양이었다.
'천운이 따르는구나.'
나는 내심 쾌재를 부르면서, 대비의 병시중을 드는 한편으로 승정원을 통해 지금부터 필요할 것들을 차근차근 준비해나가게 시켰다.
일 처리는 엉망진창에, 당장이라도 숨이 멎을 듯 꺽 꺽 거리고 있었지만, 아무튼 조선은 이 혼란의 시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