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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고종대왕 일대기-15화 (15/530)

< 기호지세(1) >

약 한 달 하고도 보름 후, 북경에 공주를 내려달라 청하러 간 사신단이 돌아왔다. 그들이 전한 대청국의 정식 입장은 이러했다.

"이, 이 같잖은 조선 놈들이 제 주제도 모르고 어찌 감히 이런 망발을…! 그래, 좋다! 네까짓 것들이 감히 우리 다이칭구룬을 능멸해? 그 김가 놈이라는 노괴가 노망이 난 모양이로구나! 좋다. 내 너희 도읍을 잿더미로 만들고 너희 백성들을 노예로 잡아갈 것이며 이씨 왕과 문무백관 놈들의 구족을 멸해주겠다!"

현 다이칭구룬의 실세인 서태후의 일갈이었다고 한다. 내가 가능한 한 토씨 하나 틀리지 말고 그대로 전하라고 명한 탓에, 이 서태후의 노호성은 주체만 조금 달라져서 그대로 어전 회의장에 울려 퍼졌다. 당연히, 김좌근과 그를 추종하는 세도가의 낯빛이 단번에 잿빛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역시나, 청나라에서는 이 일련의 사태의 주범을 김좌근이라 짐작하고 있던 것이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누명이었다. 지난 1달하고도 보름여 간 김좌근이 어떻게든 청의 비위를 덜 거스르면서 청이 타협점을 받아들이게 하려고 노력해왔는지를 생각해보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사신단은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심복들로 채워놨고, 나라에서 따로 준비한 예물과는 또 별개로 자신의 사비를 털어서 북경의 관료들에게 뇌물도 먹여가면서 이 사태가 혼담으로 마무리 될 수 있도록 애를 썼던 것이다.

당장 사신단의 필두부터가 장차 세도가를 이끌어갈 김병학과 김병국으로 편성된 것만으로 김좌근과 안동 김씨에서 이번 사절단에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있었는지야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렇게 노력한 모든 것은 이제 헛수고가 되어버렸다. 김좌근과 세도가의 힘을 있는 대로 끌어다 썼음에도 불구하고 북경의 조정은 최후의 타협을 거부했다. 그럼 이제 전쟁뿐이었다. 처음 시작한 것은 나였지만, 여기까지 일이 커진 건 저들의 자업자득이었다.

"내 듣기로 현 북경에는 섭정이 둘 있다고 하였다. 그것이 서태후의 답이라면, 동태후의 답은 어떠했는가?"

나는 지난 몇 달간 벌써 수십 년은 늙어서 호호 할아버지가 되어버린 김좌근과 그 일당들을 힐끗 쳐다보고서, 다시 김병학과 그 동생 김병국을 필두로 한 사신단에게 물었다. 안색이 좋지 않기로는 사신단 쪽이 더 했다. 하기야 그들로서는 당장 북경에서 그 서태후의 흉흉한 살기를 온몸으로 견뎌야 했을 테니, 작금의 사태가 더 끔찍하게만 느껴질 것이다.

동생 김병국은 청에서 받은 충격이 너무 큰 나머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결국, 입을 연 것은 그 형 김병학 쪽이었다.

"그것이, 직접 듣지는 못하였습니다. 워낙에 태후의 기세가 흉흉했던지라…. 다만, 풍문으로 듣기에 아주 부정적이지는 않다고 들었습니다.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적어도 아예 여지를 두지 않을 정도는 아니라고…."

"흐음, 그것이 사실이라면 다행이지만. 그 풍문은 어디에서 들은 것인가? 동태후의 심복에게서 직접 들은 정보인 것인가?"

"그건, 궁인들이 사사로이 하는 말을 엿들었던 것뿐인지라. …송구하옵니다, 전하."

김병학도 더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어지간히도 자금성에서 푸대접을 받은 모양이었다. 사실상 잠깐 서태후만 만난 다음 감금되다시피 있다가 내쫓긴 거 아닐까. 뭐, 사실 지금까지의 정세로만 보면 목이 잘려서 소금에 절여져 오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일부러 쯧, 하고 소리를 내 혀를 찼다. 이번 국혼 건은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는 했지만, 실제 진행은 세도가에서 그들의 총력을 기울여 어떻게든 성사시키려 했으므로, 이쯤에서 한 번쯤 그들의 실패를 상기시켜둘 필요가 있었다. 일단 본의 아니게 운명공동체가 되어버렸다고 하나, 저들의 세력은 꾸준히 깎아둘 필요가 있었다.

자연히 세도가 진영의 얼굴도 하나같이 딱딱해지고 암울해졌다. 그들 또한 뭐라 변명할 여지가 없는 실패 속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는 점점 더 사그라들게 될 것이라는 걸 직감했을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더는 시간이 없습니다. 전하, 지금은 전시나 다름없습니다. 더는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용단을 내려주소서."

그러자 앞으로 툭 튀어나와 대뜸 나에게 용단을 내려달라고 윽박지른 것은 대원군 이하응이였다. 그 또한 세도가의 실패와 그로 인한 정치적 영향력 감소를 꿰뚫어 본 것이다. 이번 기회에 세도가에서 정신을 차리기 전에 그대로 몰아붙일 작정이 틀림없었다.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별로 기대도 하지 않고 있기는 했지만, 청에서 국혼 제의를 거절해버리면서 이제는 정말로 뒤로 물러날 길이 사라져버렸다. 전시나 다름없다는 표현도 조금도 과하지 않았다. 비록 정식 선전포고는 아직이었으나, 전근대 동아시아의 전쟁은 반드시 선전포고와 함께 시작되는 것이 아니었다. 유목제국을 상대로는 더더욱 그러했다.

현대로 치자면 계엄령이 떨어지고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어 통금령과 소집령부터 떨어질 상황인 것이다.

"좋습니다. 내 이 일은 대감께 일임하겠습니다. 영상, 대감께 힘을 실어주십시오. 종묘와 사직이 달린 일입니다. 내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주상 전하 천세! 대조선국 천세! 천세!"

나는 살짝 고개를 숙여 김좌근에게 이하응을 위하여 힘을 보태 달라고 부탁했다. 이하응이 김좌근에게 힘을 보태는 것이 아니라, 김좌근이 이제 이하응에게 힘을 보태야 하는 지경이 된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주도권이 역전된 것이었다. 그러나 김좌근이 거기에 대하여 지적할 틈도 없었다. 그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이하응이 먼저 천세 삼창하며 입을 틀어막아 버렸던 것이다.

김좌근의 흉흉한 시선이 그대로 이하응에게 쏟아졌지만, 이하응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천세를 계속했다. 아직 김좌근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기도 전에 이미 기정사실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내가 먼저 이야기하고 세도가에서 총력을 기울여 진행한 국혼 사업이 무산된 이상, 어차피 김좌근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김좌근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푹 숙이고,

"…하명하신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라며 분을 꾹 눌러 참는 티가 역력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리고 그것이면 족했다. 나와 이하응은 짧은 찰나 눈을 마주하고, 서로를 향하여 비릿한 미소를 띄웠다. 따지고 보면 이명복의 아버지일지언정 내 아버지도 아닐 텐데, 우리 두 사람은 이상할 정도로 서로 닮아있었다.

"그래, 북적들의 군세는 어떠했소? 그들이 군세를 일으킨다면 언제가 될 것 같소이까? 보고 느낀 대로 말씀해주시오."

나는 이번에는 김병국을 바라보면서 질문을 던졌다. 이미 상국 같은 존칭은 물론이요, 청국이라는 중립적 호칭도 버리고 북적-그러니까 북쪽 오랑캐라는 멸칭으로 지칭하고 있었다. 다른 대신들 또한 그걸 눈치채고서 얼굴이 굳어졌지만, 아무도 그것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이미 엎어진 물이었고, 최후의 타협점이었던 국혼까지 청나라에서 먼저 거부해버렸다. 더는 물러날 길이 없는 이상,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전을 각오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적어도 승부가 나기 전까지는 적국인 청나라를 존중해줄 이유도, 그들을 위하여 마음을 써줄 여유도 없는 것이다.

"풍문대로, 만주의 팔기군은 이미 완전히 기강이 무너진 듯 보였습니다. 자랑하던 기병조차 이제는 몇 안 되고, 사열 중에도 걸어 다니는 병사들이 종종 눈에 띌 지경이었습니다. 다만, 북경의 조정과는 별개로 강남땅에서 분연히 떨쳐 일어났다는 상군이나 회군의 실체는 미처 보지 못한지라…."

"그러한가. 그럼 강남땅의 사교반군은 어떻다고 하오? 설마, 벌써 진압되었다던가?"

"일단 북적의 태후는 이미 남경을 탈환하여 반군도 모두 진압되고 잔당 정도만 남아있을 뿐이라 설명하였지만, 제가 궁 내에 소문을 듣자 하니 아직 논공행상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언제쯤 논공행상이 시작될지조차 감감무소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정확한 전황은 알기 어렵지만, 적어도 태후가 말하는 것처럼 잔당 수준만 남아있는 정도는 아닌듯합니다."

"좋소. 그 정도면 충분하오. 정말로 수고가 많았소이다. 뒷일은 대감과 영상을 믿도록 합시다."

김병국은 말끝을 흐렸다. 나는 사실상 자금성에 갇혀있는 와중에도 그만큼의 정보를 수집한 김병국에 대한 평가를 상향 조정했다. 과연 세도세력들이 탐욕스럽고 도덕적으로는 파탄했어도, 능력 하나만큼은 믿고 써줄 만했다. 나야 실제 역사를 알고 있으니 이 정보를 이미 알고 있지만, 그는 발품을 팔고 사람을 부려서 필사적으로 모아온 정보일 터였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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