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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고종대왕 일대기-16화 (16/530)

< 기호지세(2) >

그리고 태평천국이 정확히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모르지만, 최후의 불꽃을 태우고 있다는 정보도 얻었다. 조선에서 청의 천명에 의문을 품었다는 소문이 지금쯤 청에서도 퍼지면서 태평천국에서 다시금 힘을 얻게 된 모양이었다. 그 증거로서, 만일 태후의 말대로 정말로 남경을 탈환하고 반군이 모두 진압되었다면 그전에 가장 먼저 태평천국의 교주 홍수전이 자결했다는 부연설명이 붙어야 했다.

그러나 태후는 그런 부연설명 없이 남경이 함락되었다고만 했다. 그것은 남경함락이 사실이 아니거나, 설령 사실이더라도 교주인 홍수전이 희망을 잃고서 모든 걸 포기할 정도로 교세가 줄어든 상황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그건 즉 청나라에서도 조선과 다투면서도 꾸준히 일정 수준 이상의 병력은 강남땅에 남겨둬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것만이라도 충분했다. 그 정도면 일단 당장 멸국의 위기만큼은 회피한 셈이다.

"어려운 시간이오. 개국 이래 태조 대왕과 인조대왕 시절 이래로 이토록 중원과 척을 졌던 시기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오. 하나, 그때와 지금은 다르오. 태조 대왕 시절에는 주명이 건국 이래 그 세력을 떨치고 있었고, 인조대왕 시절에는 북적들이 그 세력을 떨치고 있었소. 그러나, 오늘날 중원은 그 기가 크게 쇠하고 있으나 우리 조선은 그대들과 같은 뜻있는 충신들로 가득하니, 이 어찌 조선의 지복이 아니라 할 수 있겠소?

천명은 우리 조선과 함께 하고 있소이다.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 있겠소? 자, 모두 힘을 합쳐 이 어려운 시간을 이겨냅시다. 필시 후손들은 지금의 시대를 영광의 시대라 부를 것입니다!"

""주상전하 천세! 대조선국 천세! 천세!""

내가 일장연설을 쏟아내고, 나머지 문무백관들이 천세를 외치는 것으로서 그날의 어전회의는 마무리되었다.

그 이후로는 거칠 것이 없었다. 병을 얻어 앓아누운 대비를 대신하여 정식으로 섭정공으로 봉해진 흥선대원군은 전시임을 들어 가차 없이 당초 그가 계획했던 개혁안들을 밀어붙였다. 서원을 대거 철폐하여 우선적인 세수를 확보하였고, 또 그렇게 얻은 세수로 온 나라의 광산개발을 독려하였다. 그뿐이랴. 군포를 거둘 때 사람이 아니라 집마다 거두도록 하는 호포제를 실시하였으며, 은결을 색출하여 전정을 개혁했다.

여기까지 이 모든 일을 벌이는 데에는 불과 1개월도 걸리지 않았다. 당연히 불만 어린 목소리도 어마어마했지만, 이미 김좌근부터가 고개를 조아리고 묵묵히 협력하는 마당에 그들이라고 뚜렷한 수가 없었다. 다만 의병의 보유와 훈련을 허락한 마당에 그들이 다른 마음을 품으면 무슨 일이 터질지 알 수 없었던지라, 안동 김씨의 협력을 얻어 각지에 암행어사들이 파견되었다.

여기에 내가 마찬가지로 안동 김씨의 협력을 받아 왕명으로 반역향들을 철회하고 과거를 열어 영남과 함경도, 평안도의 선비들을 대거 조정에 출사시키고, 종친들이 4대에 걸쳐 벼슬에 출사할 수 없었던 것을 2대로 줄이면서 그들을 끌어안자 일단 당장 세력균형은 맞춰졌다. 일단 무엇보다도 함경도와 평안도의 경우 이번에 전쟁이 터진다면 가장 먼저 휩쓸릴 확률이 높았으니, 이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였다.

'여차하면 작위를 흩뿌리는 한이 있더라도 평안도와 함경도, 황해도의 민심만큼은 얻어둬야 한다. 물론 가장 좋은 건 공개적으로 상행을 격려해주는 것이겠지만, 아직 공개적으로 상행을 격려하기에는 유림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테니 일단 접어두고….'

한편 나의 이러한 행보에 섭정공 흥선군은 어느 날 처소에 찾아와서는 나에게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제가 그들을 탐내던 것은 어찌 먼저 아시고 품에 안으셨습니까?"

라고 비아냥거렸다. 자신은 부족한 행정력과 예산 속에서도 어떻게든 개혁을 최단기간 내에 끝내기 위하여 아등바등하고 있는데, 자신이 온갖 오욕을 덮어쓰는 동안 나는 착한 척이나 하고 있으니 영 아니꼽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다만 빙긋하고 웃으며,

"제 아비의 마음도 읽지 못한다면 아들 된 자로서 그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이란 말입니까? 그리고 나라를 바꾸고자 한다면 누군가는 소외된 이들을 끌어들여 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아버지께서 편히 일을 꾸미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제 나름의 배려이니, 엎드려 청컨대 부디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라고 답하였다. 말로는 모두 이하응의 개혁을 돕기 위함이라고 했지만, 속뜻은 너는 전면에 나서느라 욕을 바가지로 먹을 테지만 나는 뒤에서 물러나 사람 좋은 흉내 내면서 칭송받아야겠다-라는 것이었다. 당연히 이하응이라고 그 속뜻을 헤아리지 못할 리가 없었던 만큼, 이하응의 얼굴도 일그러졌다.

그러나 이하응은 그렇다고 내게 대들지도 못했다. 이미 청나라와의 사이는 틀어졌고, 그걸 빌미로 삼아 반대세력의 목소리를 찍어누르면서 막무가내로 개혁을 밀어붙이고 있는 판국이니 미쳐 날뛰는 호랑이 등에 탄 형국이었다. 지금은 우선 세세한 오류나 마음에 안 드는 건 미뤄두고서, 당장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에 전념할 때였다.

그렇기에 이하응은 다만

"참으로 성군은 못 되시는 분이십니다."

라고만 쏘아붙였다. 나 또한 별다른 반발 없이

"알고 있습니다. 걸주와 쏙 빼닮았지요?"

라고 능글거렸다. 이하응은 답하지 않고서 별 미친놈을 다 보겠다는 눈빛으로 한번 나를 흘겨보고서는 방에서 물러났다.

한편 이하응이 호랑이 등에 탄 기세로 개혁을 밀어붙이고 있을 무렵, 김좌근은 김좌근대로 반청 여론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그가 처음 이야기를 꺼낸 일이고, 청에서도 그를 원흉으로 지목한 이상 그와 그의 일가족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단 청과의 전쟁에서 이기거나 최소 졌지만 잘 싸웠다 수준의 성과는 필요했던 것이다.

「본래 여진이라고 하는 족속은 말갈족을 조상으로 둔 족속들로, 옛 고구려와 발해에서는 삼한의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배우고 말 위에서 활 쏘는 법을 배우며 가르침을 청하던 덜떨어진 족속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덜떨어진 족속들이 발해가 망하고 만주에 군왕다운 군왕이 사라지니 제 잘난 줄 알고 힘만을 뽐내며 중원을 능멸하고 인조대왕 적의 두 차례의 호란으로 어버이와 같은 삼한의 백성들을 겁박하니, 이 어찌 가증스럽지 아니할 수 있을까?

(중략…) 하여 우리 대조선국은 옛 대고려와 주명의 천명을 이어받은 해동성국이요, 동방의 소중화일지니. 마땅히 떨쳐 일어나 저 은혜도 모르는 가증스러운 북적들을 마땅히 훈계하고 공맹의 이치로서 통치하여야 할 것이다.」

"허, 영상께서 이리 뜻이 깊으신 줄은 미처 몰랐구려. 참으로 영상께는 못 당하겠소, 허허허!"

"과찬이시옵니다, 전하."

가장 대표적인 것이 위의 격문이었다. 미리 말해두지만, 이건 내가 쓰라고 해서 쓴 글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김좌근이가 그의 안동 김씨 종친들을 불러모아 써 내려간 격문이었던 것이다. 반청여론을 한층 격화시키고 지방유림들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하여, 일부러 소중화 사상과 전근대적인 형태의 민족주의를 꽉꽉 눌러서 쓴 기색이 역력한 글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새삼스럽게 세도 가문들의 혜안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아니었더라도 나 또한 이런 내용의 격문을 반포할 작정이었지만, 아직 실권도 미미한 소년 왕과 이 나라의 실질 통치세력인 세도가는 그 위세나 권위에서 하늘과 땅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내가 반포한 격문이 뜻있는 선비들에게 감동을 줄 뿐이라면, 그들이 반포한 격문은 단순한 격문이 아니라 그들을 따르는 유생들에게 여기로 모이라는 소집령을 내리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당연히 이에 따라 반청의 뜻을 불태우며 칼을 갈 이들의 숫자나 질에서도 내가 반포했을 때와는 차이가 클 수밖에는 없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곤란해지는 것 아니오? 영상께서 물러나실 길이 없어지는 것이 아닌지요?"

"허허허, 다 알고 계시는 분이 이 노신을 놀리십니까. 이미 물러날 길이라고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힘이 닿는 데까지 해보는 수밖에요.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는 말도 있잖습니까?"

김좌근은 나의 말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태연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 눈빛까지 태연하지는 못했다. 나를 빤히 노려다 보는 그 눈빛에는 서슬 퍼런 살기가 서려 있었다. 아직도 내가 그때 김좌근의 허장성세를 받아들여 일을 여기까지 꼬이게 만든 것에 대하여 원망을 품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가 그렇게 노려보건 말건 기분 좋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적의를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그에게 내가 한 방 먹였다는 사실도 분명해지는 것이다. 어찌 통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이 글은 한문으로 되어 어린 백성들이 뜻을 알기는 어렵겠구려. 내 특별히 언문으로 다시 고쳐 쓸 테니, 이 또한 옆에 걸어두도록 하시오. 지금은 제아무리 비천한 이의 힘이라도 조금이나마 더 보태야 하지 않겠소?"

"하명하신대로 하겠사옵니다, 전하."

나의 말에, 김좌근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내키지는 않는 기색이었다. 백성들까지 끌어들이게 된다면, 필시 후일 백성들도 무언가를 요구할 것이라는 걸 직감한 것이다. 그런데도 불평하지 않은 건 지금의 상황이 그만큼 긴박하다는 인식 또한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김좌근 또한 내가 친히 언문으로 적은 격문을 가지고서 처소를 떠나고, 마지막으로 평안감찰사 박규수가 나의 처소에 들어왔다.

오늘의 주인공이 등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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