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통신사 박규수(1) >
박규수(朴珪壽).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명문 거족 반남 박씨의 피를 받은 북학파의 후예였다. 어릴 때부터 천재성을 보여 나이 많은 유학 선배들과 친구처럼 지냈고,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지동설에 대하여 정확히 알고 있어서 16살 때 태양과 지구, 달에 관한 시를 읊기도 했다. 후일 그와 그의 선조들이 청나라를 통하여 들여온 서양서적들은 조선 개화파들의 태동에 지대한 공헌을 하며 개화기 조선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효명세자의 총애를 받아 그를 도와 조선을 바꾸려 했으나 효명세자가 요절하고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한직을 전전하게 되었으며, 이후 다시 헌종이 아버지 효명세자의 총애를 받은 그를 중용하려 했으나 효명세자의 최측근인 그를 세도 가문들이 가만 놓아줄 리가 없었다. 결국, 또다시 한직을 전전하다 헌종마저 죽고 나자, 박규수는 현실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만다.
이 당시 그는
"개국 초기부터 글깨나 읽는다는 선비들이 관직에 나서지 않고 안분지족을 즐기며 산에 묻혀 산 것은 청렴결백해서가 아니라, 다만 권력에 눌려 뜻을 펼칠 수 없으니 산속으로 도망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자기만족의 발로일 뿐이니, 본받을 바가 못 된다."
라고, 개국 초기부터 이어져 온 조선의 근본적 모순에 대하여 꿰뚫는 일침을 날리기도 했다.
'딱 맞네.'
그런 그의 인생사와 행적, 사상이 내 취향에 더 없이 들어맞았음은 굳이 말할 것도 없다. 흥선대원군은 일단 운명공동체이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갈라설 운명이고, 김좌근은 적대적 공생 관계였지 처음부터 아군이었던 적이 없다. 민치상은 일단 나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기는 하지만 그건 어머니 민씨 부인의 연줄 덕분이지 나의 인간적 매력에 매료된 것은 아니며, 하물며 나와 뜻을 함께하는 것도 아니다.
앞으로 무슨 일을 시작하건, 일을 꾸미고자 한다면 단순한 수족이 아니라 나와 뜻을 함께하는 이념적 동반자가 있어야 했다. 박규수는 그런 의미에서 최적의 인물이었다. 비록 한직을 전전하기는 했어도 짬밥도 꽤 배불리 먹었고, 집안도 권세가 있는 건 아니었어도 명가의 축에 속했으며, 무엇보다도 북학파의 후예로서 서양 학문에도 익숙했고 사고방식도 깨어있는 축에 속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김좌근이 많은 이들 중에서 굳이 박규수를 콕 집어서 1차 책임자로 천거한 건 괜한 이유가 아니었던 셈이다. 변화가 시작된다면 그로부터 시작될 것이라고 김좌근도 직감하고 있었던 거겠지. 뭐, 결국 엉뚱한 곳을 살피다가 제 발밑을 살피지 못한 셈이 되어버렸지만.
"어서 오시오. 허허허, 이거 바쁜 사람을 이렇게 불러도 괜찮은지 모르겠소. 자, 어서 자리에 앉으십시오. 경과 하고 싶었던 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처소에 박규수가 들어오는 순간부터, 일부러 친근한 척을 하면서 그에게 살갑게 대했다.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면 이 자리에서 개 흉내를 내면서 데굴데굴 멍멍까지 해줄 각오도 있었다.
내가 친해지고 싶은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다. 그깟 체면 같은 걸 고민하면서 제대로 된 아부가 가능할 것 같은가? 일단 인간의 존엄성을 접어두고 난 다음에야 진정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참된 아부가 나오는 법이었다.
"한가지 말씀해주십시오. 이 일은 누가 시작한 일입니까. 진정으로 주상께서 스스로 생각하신 일입니까?"
그러나 박규수는 시종일관 떨떠름한 얼굴로 있다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대뜸 내게 질문을 던졌다. 세상에 찌들고 찌들어서 냉소적이다 못해 표독스럽게 변한 모양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박규수의 눈초리는 의심이 8할에 냉소가 2할이었다. 하옥대감 그 양반이 또 뭔가 사단을 쳤구만. 그렇게 말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나로서는 실로 떨떠름해지는 반응이었다. 아무래도 어지간히도 얕보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이런 꼬맹이가 김좌근에게 한 방 먹였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우선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글쎄, 어떨 것 같소? 원하신다면 대감께서 직접 맞혀보시는 건 어떻소. 단서가 될 만한 건 얼마든지 제공해드리리다."
"하옥대감께서 꾸미신 일이겠지요. 설마하니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전하께서 이만한 일을 꾸몄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만."
"흠, 유감스럽지만 틀렸소. 이 일은 과인이 스스로 생각하여 꾸민 일이라오. 뭐, 다소 당초의 예정보다 크게 엇나가기는 했지만 말이오."
"…그 말씀이 사실이라면 참으로 조선의 지복입니다만."
하옥대감은 김좌근을 뜻했다. 나는 굳이 꾸밀 것도 없이 선선히 내가 시작한 일이라고 밝혔다. 박규수가 믿어줄지 믿어주지 않을지야 그의 자유이겠지만, 그래도 우선은 한 번쯤 밝혀둘 필요가 있었다. 그의 신뢰를 위해서건, 아니면 참여 의지를 끌어내기 위해서건 말이다.
그러자 박규수의 표정도 다소 묘해졌다. 물론 내 말을 신뢰해서라기보다는, 이 꼬맹이는 자기가 꼭두각시 취급당하는지도 모르고 있구나-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지간히도 못 미더운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는 평생에 걸쳐 세도가에게 시달려왔으니 조정의 주도권을 잡았다고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꼬맹이가 못 미더울 만도 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시선으로 쳐다봐지니 기분이 좋을 리는 없었지만.
"그래, 그대는 청이나 외세의 사정에 꽤 귀가 밝다고 들었소만. 어떻소? 우리 조선이 선공하는 대신 저들이 성공한다면 언제쯤이 될 것 같소이까?"
"불과 보름 전에 청에 다녀온 사절단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들에게 모두 들으셨을 텐데, 그에 대해서는 왜 여쭈시는지요?"
"아, 그들 말이오? 뭐, 별로 시답지 않았소. 기껏해야 청도 내부사정이 엉망이고 강남의 반란이 아직 모두 진압되지 않아 당장 침공은 없을 것 같다 정도일까. 본인은 그런 정보가 아니라 저들이 당장 언제쯤 준비가 끝날지에 대하여 듣고 싶은 것이오. 평안감찰사로서 이것저것 주워들은 게 있을 것 아니오. 어떻소?"
나는 대충 손을 휘휘 내저으며 사절단의 성과에 대하여 평가절하했다. 물론 그들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한 것이겠지만, 아무튼 그들이 청의 정확한 침공주기를 예측하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자금성에 감금된 채로 그만한 정보를 수집한 소기의 성과는 고평가해도, 저평가해야 할 부분은 확실하게 까줘야 했다. 당장 청이 언제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마당에 무슨 계획을 짜라는 건가?
그러자 박규수는 눈살을 찌푸리고 잠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서야 말문을 열었다.
"저들이 어떤 각오로 침공하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직접 침공하는 대신 단지 국경약탈과 무력시위만이라면 이번 겨울에라도 가능하겠습니다만, 아마 그러지는 않을 겁니다. 아니, 못하겠지요."
"흠, 어째서 그렇소?"
"그야, 알고 계시겠지만 청 또한 이미 국경 방비가 무너진 까닭입니다. 무력시위를 하자면 굳건한 모습을 보여줘야 할 텐데 군기가 문란하다는 사실이야 저들도 알고 있을 테고, 국경약탈을 하자니 말을 탈 줄 아는 병사들도 이제는 얼마 되지 않고 또 기병들을 통제하기도 어렵습니다. 저들도 기병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독단적으로 깊이 진입했다가 섬멸당하는 것만은 피하고 싶겠지요."
박규수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과연 그러했다. 올겨울에 당장 군대를 일으킬 수도 있겠지만, 그 경우에는 상군과 회군 모두 아직은 강남 평정에 붙들려있으니 팔기군이나 녹영군 같은 중앙군을 부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엉망인지는 이미 태평천국의 난을 통하여 증명된 지 오래였다.
청의 조정 또한 그 사실은 알고 있으니, 웬만하면 녹영군이나 팔기군만으로 침공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조선이 쇠락하였어도 청 또한 쇠락한 건 피차일반이었다. 조선의 선공이 아니라 청의 선공으로 전쟁이 시작된다면,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청이 패퇴하거나 그것이 아니라도 큰 피해를 입는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그 경우 피해를 입은 주체가 팔기군과 녹영군 뿐이라면 중앙의 군사력이 단번에 반감하는 꼴이 된다. 그럼 태평천국의 난으로 세를 축적한 지방의 군벌들이 자기가 천자가 되겠답시고 단번에 북경까지 들이칠 것이다.
그럼 자연히, 지방의 군벌들에게서 어느 정도씩은 군사를 차출하여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는 수밖에 없다.
"그럼 저들도 가벼이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란 이야기구려. 이거 상당한 대군이 침공해올지도 모르겠소이다."
"실제로 그럴 것입니다. 여기서부터는 단순 제 추측이고, 부정확합니다만. 아마 적으면 20만에서 많으면 40만 정도가 되겠지요. 그 이상이 되기에는 청 또한 국운이 쇠하였고, 그 이하가 되기에는 그런데도 여전히 청은 우리 조선보다는 강성합니다. 듣자 하니 영상께서 10만 대군을 양성하시겠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걸로는 턱도 없을 것입니다."
"뭐,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소? 그나마 저들이 먼저 쳐들어올 것을 전제한 덕분에 그나마 승패를 논할 수라도 있는 것이 아니외까. 만일 우리 조선이 먼저 저들을 친다고 생각해보면-어휴, 생각만 해도 끔찍하오."
"…요동을 정벌하시려는 게 아니었습니까?"
박규수는 처음 듣는다는 듯이 눈을 껌뻑거렸다. 그제야 나는 아, 하고 이마를 쳤다. 그가 세도가의 미움을 사서 중앙정치와 떨어져 지내는 탓에, 중앙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하여는 귀가 어두울 것이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