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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고종대왕 일대기-18화 (18/530)

< 조선통신사 박규수(2) >

뜻하지 않은 약점을 발견한 나는 단번에 기분이 풀리는 걸 느끼면서 그에게 선선히 설명해주었다.

"아, 그건 어디까지나 허세요. 지금의 조선으로 요동을 정벌하는 것이 과연 가능이나 하겠소? 뭐, 그것도 언젠가는 하기는 해야겠지만 아직은 아니오. 이번 전쟁의 목표는 단지 청과 싸워 저들에게 자주권을 공인받아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는 것에 있지, 요동 정벌까지야 생각도 안 하고 있소."

"아니, 그럼 전장이 되는 건 우리 조선 땅이 아닙니까. 죄 없는 백성들이 다치고 고통받게 하실 작정입니까."

"우리가 요동을 친다고 해서 안 그렇겠소? 어차피 지금의 조선이 요동을 정벌하지 못한다는 건 부정할 여지가 없소. 기껏 애써서 요동을 빼앗아봐야 역공에 다시 밀려나는 것이 한계겠지. 결국, 조금이라도 승산을 높이려면 이 수밖에는 없소이다."

"제정신이 아니십니다. 이 나라의 국운을 판돈으로 삼아 도박을 벌이실 작정입니까? 도대체 얼마나 많은 민초들이 그 과정에서 죄없이 희생될지 생각은 해보셨습니까!"

박규수는 전에 없이 격앙한 모습이었다. 지금까지의 냉소적인 모습은 온데간데도 없었다. 아니, 아마도 이것이 그의 본성에 가까울 것이다. 젊은 시절 효명세자에게 충성을 맹세하고서 이 나라의 민초들을 위해서라도 조선의 실정을 뜯어고치려 했던 뜻있는 선비다.

아무리 나이를 먹으면서 현실에 좌절하고 세도가의 괴롭힘 속에서 삐뚤어졌어도, 그 근본까지 어떻게 바뀔 수는 없는 법이다. 결국, 그의 마음속에는 항상 민초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다. 이런 뜻있는 선비이기에, 그동안 세도가의 미움을 사고 한직을 전전했던 것이다.

"그럼 어쩌라는 거요? 지금은 난세요. 그대도 그건 이미 알고 있지 않소. 이렇게라도 바뀌지 않는다면 조선은 당장 전란은 피할 수 있어도 그저 늪에 가라앉듯이 느릿하게 침몰할 따름이오. 본인은 최선을 다하여 조선이 살아남을 길을 찾고 있는 것뿐이오."

그러나 나 또한 할 말이 있다. 인제 와서는 전쟁을 회피할 길도 사라지기도 했지만, 어차피 전쟁은 필요불가결했다. 전쟁이 아니라면 당장 평화는 얻을 수 있겠지만, 그 평화는 미래를 팔아서 산 평화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평화 따위 조금 더 시간이 걸리는 안락사일 뿐이다.

오랜 세도정치로 이미 조선은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 남아있는 것은 한때 조선이었던 껍데기와 그 위에서 기생하고 있는 세도가의 괴물들이다. 그들을 치워버리건, 끌어안건 간에 나라를 다시 세우고자 한다면 언제나 그에 상응하는 고통과 변화가 동반되어야만 했다. 후삼국 시대가 그러했고, 여말선초가 그러했다.

어차피 지금 움직이지 않는다면 확실하게 죽는다. 지금 움직인다면 당장 죽을지도 모르지만, 운이 좋다면 살아남을 수도 있다. 살아남기 위한 가능성을 거머쥐기 위하여 발버둥 치는 것이 대관절 무엇이 그렇게 죄악이란 말인가?

"어차피 가까운 시일 내에 양이들이 조선까지 올 거요. 필시 청이나 왜국에서 그러했듯이 군함과 병사들을 동반하고서 당장 통상하라고 윽박지르겠지. 그때 어떤 입장으로 수교하고 싶소? 저 북적들의 속국으로서? 아니면 저 북적들을 쓰러트리고 새롭게 떠오른 극동의 강국으로서?"

"그건-."

"지금의 시대에 필요한 자세는 쉼 없이 달리는 거요. 달리고, 달리다 그 끝에 힘이 다하여 죽는다고 해도 만일 서역의 강자 중 누군가가 보기에 조선이 쓸모가 있어 보였다면 얼마든지 이 나라는 다시 일어설 수 있소. 그럼 다시 또 달릴 수 있소. 저들에게 이용당할 뿐이라면 뭐 어떻단 말이오? 우리 또한 저들을 이용하지 못하리란 법은 없지 않소이까.

본인은 심장이 터져서 더는 달릴 수 없게 되어 죽음을 맞이하고 싶소. 그때 이 나라 조선이 어떤 자리에 있을지는 모르겠소. 그러나 한가지는 맹세하리다. 내가 묻힐 땅이 지금 이 자리는 아닐 것이오."

나는 거기까지 쉴 새 없이 말을 토하고서, 잠시 숨을 골랐다. 과연 어린아이의 몸이라 그런지 폐활량이 좋았다. 술과 담배에 찌든 전생이었다면 여기까지 말을 끝내기 전에 두세 번은 숨 쉬느라 도중에 끊어야 했을 것이다.

그제야 조금 이성이 돌아와, 나는 슬쩍 박규수의 눈치를 살폈다. 한눈에 봐도, 그는 동요하고 있었다. 초점은 끝도 없이 흔들렸고, 이마에는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혔다. 나의 처소에 처음 들어오던 적에 냉소적인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좋아, 됐다.'

나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고작 오늘의 대화만으로 그가 내게 충성을 맹세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적어도 확실하게 인상을 남기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는 적어도 내가 개화에 있어서 그와 뜻을 같이하고 있음은 명백히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제 보니, 하옥대감께서 애를 먹으실 만도 하십니다. 참으로 야심만만하시군요."

잠시 숨을 고르고 마음을 진정한 박규수는 대뜸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비아냥이라기보다는 혀를 내두르는 듯한 기척이었다.

"그러니 말하지 않았소. 내 자가 걸주고 군호가 연산이라오. 아니, 광해였던가?"

나는 그래서 태연하게 답했다. 나라고 그걸 몰랐을까. 비꼬는 것이 아닌 한, 아니 이 점에 있어서만큼은 비꼬는 것이라도 관대하게 넘어가 줄 수 있었다. 내가 그 소리를 한두 번 들었어야 화가 나지 않겠는가?

박규수는 정말로 별 미친놈을 다 보겠다는 듯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고는 허, 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경멸의 눈초리는 아니었다. 어딘가 후련했고, 존경마저 서려 있었다.

"그럼 이듬해 봄이 고비가 되겠군요."

박규수는 나지막이 말했다. 그때는 모내기 철이었다. 보통은 군대를 동원하기 어렵겠지만, 지금 청의 주력군은 의용군들이었고 사병들이었다. 농토가 없어서 떠도는 유랑민들의 비중이 상당할 테니, 모내기 철에 상관없이 침공하여 조선의 빈틈을 노릴 가능성이 컸다.

"그렇소. 그것이 이번 가을 동안 왜국에 통신사로 다녀오셔야 하는 이유라오."

나 또한 그의 뜻에 동의했다. 사실, 이런 부분에서는 평안감찰사로서 국경의 사정에 능통할 그가 더 전문가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봤자 역사지식을 토대로 개략적인 방향성을 잡는 게 고작이지, 실무처리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일임하는 편이 좋았다.

"왜국에 원군을 청하러 다녀오는 것입니까?"

"일단 대외적으로는 그렇게 이야기되겠지만, 다르오. 어차피 왜국은 내전이 한창이니 원군을 기대하기는 어렵소. 대신 서역의 공사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조선이 서역과의 통상에 뜻이 있음을 알게 하시오. 영길리, 불란서, 미리견 순으로 가 좋소. 굳이 왜국을 통할 필요가 없으니, 가까운 시일 내에 그들과는 과인이 몸소 이야기해볼 작정이오."

내가 서역 국가들의 이름을 입에 담자, 단번에 박규수에게 기합이 들어갔다. 내가 단지 말만으로 서역 국가들과의 통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기초적인 수준의 지식 정도는 파악하고 있다는걸 알게 된 것이다. 일찌감치 그들과의 통상을 주장했던 박규수로서는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잠깐 말을 멈추고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가, 마저 말을 이었다.

"어차피 1:1로 정면대결하고자 한다면 지금의 조선으로서는 필패요. 크건 작건 서역인들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는 없소. 다만, 그렇다고 통상을 조건으로 조선의 이권을 내줄 생각일랑 없소. 청은 대국이고, 중원은 아직 넓고도 넓소. 우리가 전쟁에서 이기고 청에게서 이권을 빼앗아 다시 서역인들에게 넘겨주면 그만인 일 아니오? 일단 그렇게 알고서 이야기를 진행해보시오."

"하명하신대로 하겠습니다. 결코, 실망하게 해드리지 않겠습니다. 기필코 성사시켜 보겠습니다. 성사시키지 못할 것 같다면 차라리 두 번 다시 조선 땅으로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됐소. 그리고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라는 말이오? 그대 말고 이 조선 땅에 지금 과인이 한 말을 반이나 이해하는 작자들이 있을 것 같소? 실패해도 좋으니 살아서만 돌아오시오. 그대의 재주는 두고두고 쓸 일이 아주 많을 테니."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박규수는 이마를 방바닥에 내려찍으면서 절을 올렸다. 쩍, 하는 소리가 울렸다. 어찌나 소리가 컸던지, 순간 두개골이 쪼개진 건 아닌가 싶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박규수를 일으켜 세우지 않았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기대한 바대로의 말이 나왔다.

"이 박 아무개가 눈이 어두워 미처 전하의 크나큰 뜻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죽여주소서!"

"허허허, 왜 그러시오. 이만 일어나시오. 사람이 태어나서 실수 할 수도 있는 거지, 안 그렇소? 그저 앞으로 이 사람에게 큰 힘이 되어주시오. 양아버지 익종 대왕께 부끄럽지 않은 왕이 되리다."

"꺼흑, 꺼흐흐흐흑…. 꺼헉, 꺼억꺼억꺼억…!"

내가 죽은 효명세자-익종의 이야기까지 꺼내자, 박규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이마를 박고서 꺼이꺼이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세도가에게 미움받아 한직을 전전하며 모든 걸 포기하고서 정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가, 마침내 뜻을 펼칠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리고 그 기회를 준 것은 젊은 시절 목숨을 다 바칠 각오로 섬기던 효명세자의 양아들이었다.

그가 느낄 감동과 전율이 얼마나 클지는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흐흐흐, 그래. 넌 이제 내 거야…!'

그러나 상상할 생각도 없었다.

아직 갈 길이 멀었고, 할 일도 많았다. 그러니 내 머릿속에는 그를 어떻게 이용할까에 대한 궁리밖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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