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리 외방전교회 >
파리 외방전교회.
한국사, 특히 천주교 교회사에서는 조선이 한창 천주교를 핍박할 적에 몰래 조선에 들어와 세례를 내리고 신도들과 함께 순교를 택하는 등 한국 천주교회의 기틀을 닦은 이들로 이름 높은 로마 카톨릭 휘하 무수한 선교회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들은 또한 프랑스가 식민통치를 시행한 무수한 피식민지배국들에게는 악몽 그 자체로 남아있다.
'조국 프랑스를 위하여 신앙의 이름 아래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데 누구보다 앞장서고 식민지인들의 독립운동을 배교행위로 규정지어서 교인들이 감히 프랑스의 지배에 거부할 생각을 못 하게 하여 프랑스의 말에는 언제나 고분고분 따르는 순한 양으로 만들려고 했지.'
이는 파리 코뮌의 잔재와 함께 옛 프랑스의 피식민지배국가들 중 유독 공산주의와 연이 깊은 국가들이 많은 까닭 중 하나이기도 하다. 기존의 토속신앙은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문명개화의 이름 아래 말살시키다시피 했고, 그들을 대신한 파리 외방전교회의 사제들은 조국 프랑스를 위하여 식민지인들의 독립운동을 철저하게 찍어 눌렀다.
우파 독립운동을 정신적으로 지탱해줄 종교 층이 이 모양이다 보니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종교에 회의를 가져 공산 진영으로 이반했고, 이러한 독립운동가들의 좌익화는 냉전기 공산주의의 총본산 소련에 의하여 적절히 이용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소련의 지원 아래 프랑스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신생 독립국들은 당연히 누구 보다 앞장서서 그들 국가의 카톨릭 신앙을 매국노들의 종교라고 매도하고 탄압했다.
'뭐, 자업자득이지. 사실 종교를 식민지배수단으로 이용한 건 프랑스만이 아니었지만, 그렇게 정착한 현지교회들이 부작용만 잔뜩 만든 건 프랑스가 가장 대표적이고.'
영국 성공회의 경우에는 식민통치기에는 프랑스 카톨릭 교회와 별반 다를 바 없었으나 식민지배기가 끝나고 냉전기에는 남아프리카의 악명높은 인종차별 정책 아파르트 헤이트를 끝내는 데 공헌했고, 스페인 예수회의 경우에는 중남미 독립전쟁의 최선봉으로서 사제들이 누구 보다 앞장서서 깃발을 휘두르면서 중남미 국가들의 식민지 독립군을 격려했다. 일제 시대에 일제의 만행을 알리는데 앞장선 캐나다 출신 장로회 선교사 석호필 교수도 대표적이다.
중세시대부터 독립적인 교회라기보다는 왕의 수족으로서 움직이던 프랑스 교회이다 보니, 대혁명 이후에는 공화국과 나폴레옹 제국의 국익을 위하여 움직이면서 식민통치에 악용된 것이다.
'그런 놈들이 흥선대원군이 친히 불러서 동맹을 맺자고 했는데 자기들은 일개 사제일 뿐이니 정치에 이용되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피식.
창덕궁 부용지 부용정에서 파리 외방전교회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와 마주한 나는, 새삼스럽게 실제 역사상에서 그가 흥선대원군 앞에서 했다는 말을 떠올리며 웃었다. 내가 실없이 웃자 베르뇌 주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나는 굳이 내가 왜 웃는지 설명해주지는 않았다.
뭐, 사실 그의 실제 인물상이야 나는 잘 모른다. 후일 일기가 공개되면서 인종차별주의자일뿐더러 국수주의자였으며 제국주의자였던 실상이 밝혀진 같은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뮈텔 주교와는 달리, 그는 아무튼 실제로 순교를 택하면서 후일 교황청에 의하여 성인 시성을 받기도 했으니 말이다. 일단 최소한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책임을 최후까지 진 점은 고평가받을만했다.
그러나 '그'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가 정치와는 인연이 없다, 라…. 훌륭한 농담이고 우스갯소리다. 그냥 러시아의 견제에 프랑스를 이용하려는 이하응의 심산과 이탈리아 통일전쟁, 멕시코 원정, 인도차이나 침공 등 연달아 팽창주의적 행보를 보이며 고립되어가던 와중이던 프랑스 제국의 국익과 불일치한 탓이겠지.
애초에 접근법이 틀렸다.
"먼저, 저처럼 비루하고 보잘것없는 승려를 위하여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신 걸 감사드립니다."
"허허, 겸손이 과하십니다. 주교님께서 비루하고 보잘것없으시다면 이 조선 팔도에 그 어떤 사제가 참되었다고 할 수 있는단 말입니까?"
이야기의 포문을 먼저 열기 시작한 것은 베르뇌 주교였다. 조선에 입국한 지도 거의 10여 년이 다 되어가다 보니, 그의 조선말은 부드럽기 그지없었으며 조선의 사정에도 꽤 능통한 듯했다. 무엇보다, 자신을 스스로 승려라고 지칭한 점이 그러했다. 이 무렵의 천주교도들은 불교도들보다 못한 취급은 받고 있었으니, 차라리 사제니 신부니 주교니 하는 교회용어보다는 그편이 경계를 덜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주교니 사제니 하는 교회용어로 의식해서 그를 불렀다. 천주교에 대하여 어느 정도는 지식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자연히 베르뇌 주교의 표정도 변했다. 이쪽이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필사적으로 탐색하려는 모양새였다.
"저는 이 나라 조선 땅의 천주교도들이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그가 뭐라 판단을 내리기 전 먼저 선공을 날렸다. 사실 이건 진심이기도 했다. 신앙의 자유라던가 기독교 신앙이라던 가에 매료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앞으로의 근대화에 있어서 이들의 조력은 필요불가결했기 때문이다. 수구파를 견제하기 위해서건, 내 친위세력을 육성하기 위해서건 말이다.
베르뇌 주교는 한순간 기뻐했다가, 다시 표정이 어두워졌다. 내가 필연적으로 이를 위한 조건으로써 무언가를 요구하리라 직감한 것이겠지.
"…전하께서는 저희 천주쟁이들에게 관심이 지극하신 듯합니다."
"제 어머니께서 바로 천주쟁이이십니다. 제 어미에게 관심이 없다면 그게 어찌 참된 아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대답에 베르뇌 주교는 표정이 환해졌다. 그 반면, 한 걸음 뒤에서 우리 두 사람의 대화를 주워듣고 있던 허내관의 표정은 묘해졌다. 입으로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표정이 마치
'네가 네 애비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내 뻔히 알고 있거늘 그게 뭔 되도 않는 거짓부렁이냐?'
라고 되묻는 듯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것일 수도 있었지만. 나는 한번 허내관을 흘겨봤고, 내 시선을 의식한 허내관은 그 즉시 허리를 굽혀 표정을 숨겼다. 그제야 나는 시선을 거두었다.
"그럼 전하께서는 혹시 세례를 받기 위하여 저를 이 자리에 부르신 겁니까?"
어머니 민씨 부인의 이야기를 하니까 단번에 기분이 들뜬 모양이었다. 베르뇌 주교는 만일 이 대화를 엿듣는 이들이 있다면 곧장 불호령을 내릴 망발을 입에 담고 있었다. 소년 왕이라지만 일단 엄연한 이 나라의 왕인 내가 그를 사사로이 불러서 내 어머니께서 천주교도라오-라며 떠들고 있었으니 들뜨는 것도 이해는 했지만.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치고는 꽤 정치적 식견이 뒤떨어지는데. 순교를 통해 프랑스의 침공을 정당화하는 인계철선 역할인가?'
나는 마음속으로 그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방법들 몇 가지를 폐기처분하고서, 차분하게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유감스럽지만, 그건 아닙니다. 이 나라는 엄연히 유자들의 나라이고, 왕인 저는 곧 이 나라 제일의 유자여야만 합니다. 제 이름으로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 드릴 수는 있어도, 제가 직접 세례를 받기는 어렵습니다."
"그렇습니까…."
나의 대답에 베르뇌 주교는 얼핏 실망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크게 마음에 두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잠시 어두워졌던 그의 표정은 금방 다시 본래대로 돌아왔다.
보아하니 그는 외방전교회에서는 비교적 참된 신앙인인 듯 보였고, 그런 만큼 정치적 식견은 다소 떨어졌어도 카톨릭 신앙에 대한 신앙심과 도덕심만큼은 굳건했다. 그러니 일단 당장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은 것만으로 만족한 것이다.
"그럼 이제 제가 무엇을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요것 봐라?'
그렇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역시나 프랑스 제국주의 침략의 최선봉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라고 해야 하나. 적어도 내가 맨입으로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주지는 않을 것이라는 계산은 선 것이다. 단순 인계철선 역할은 아닌듯했다.
'하기야 이 정도 머리는 있으니까 베트남에서 2년간 감방 생활하고서도 멀쩡히 살아나와서 선교사 생활했던 거겠지.'
뭐, 아무튼 이 정도면 아직 귀여운 수준이었다. 적어도 일단 프랑스의 국익보다는 신앙을 우선시하고 있는 듯하니 말이다. 만일 그가 신앙보다 프랑스의 국익을 우선시하는 인물이었다면 지금쯤 나에게 프랑스가 얼마나 위대한 나라이며 얼마나 강대하고 도덕적인 나라인지에 대한 일장 연설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속아 프랑스군을 끌어들이면 황사영 백서 사건의 현실화다. 조선이 프랑스에게 속국화되고 그 대신 한국의 천주교들은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아 해피엔딩-이다.
'그것만은 안되지. 안되고 말고.'
"조선이 오늘날 청과 갈등을 빚고 있다는 사실은 주교께서도 익히 아실 것이오. 과인은 이에 관하여 귀국 불란서의 외교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소. 부디 조선과 불란서를 잇는 징검다리가 되어주시오."
나의 대답에 베르뇌 주교의 낯빛도 어두워졌다. 이 일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걸 직감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지만, 그것이 단지 이야기로 끝날 리는 없었다. 그도 그것을 알고 있으니 주저할 수밖에는 없던 것이다.
"이야기…라고 하심은, 어떤 이야기를 의미하십니까?"
"뭐라도 좋소. 사실 마음 같아서는 우리 조선과 동맹을 맺어달라고 부탁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오만, 꼭 그것이 아니라도 좋소. 지금은 우선 우리 조선의 의지를 귀국을 통하여 서역 각국에 전하는 정도면 충분하오. 우리는 서역과 통상하고 있지 않으나, 청은 서역과 통상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전쟁이 일어난다면 서역의 열강들도 청의 입장만을 듣게 되지 않겠소? 과인은 세계에 조선의 정당함을 인정받고 싶소이다."
'그래야 자칫 잘못해서 전쟁에서 지더라도 열강들이 개입해서 청에게 이제 그만 조선에서 물러나라고 윽박지를 테니까.'
나의 부연설명을 듣고서야, 베르뇌 주교의 얼굴빛도 한결 환해졌다. 그로서는 의도치 않게 정치에 이용될까 고민하던 차였는데, 나의 설명이 그의 마음속 짐을 어느 정도 덜어준 모양이었다.
사실 나로서는 이 이상을 요구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이상의 이야기는 그보다 한층 더 위와 교섭할 때로 미뤄야 했다. 지금 무슨 말을 하건 눈앞에 선교사에게 직접적인 교섭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저들도 아무튼 현재 조선과 청의 정세에 대하여는 듣고 있을 테니 조선에서 먼저 그들을 찾는다면 무슨 용무로 찾을지에 대해서야 어림짐작할 것이다. 그럼 나머지 이야기는 그때로 미뤄도 괜찮을 터였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기꺼이 전하를 돕겠습니다. 신도들을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하여 협력하겠습니다."
"주교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그야말로 천군만마를 얻은 듯하오. 허허허, 부탁드리오. 이 나라 조선이 당당히 국제사회 앞에 서기 위해서라도 주교의 협력이 필요불가결하오."
'됐다!'
나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베르뇌 주교의 손을 꼬옥 잡았다. 아직 열다섯도 안된 어린 몸으로 나이가 쉰이 다 되어가는 아저씨의 손에 매달려 있자니 영락없는 할아버지와 손자였다. 한눈에 봐도 그는 전형적인 코카서스 계열 백인이고 나는 몽골로이드 계열 황인이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나의 이러한 행동에 베르뇌 주교는 마음속 깊이 감동한 듯,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렇게까지 말씀해주시니 더더욱 더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신뢰에 보답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는 그 뒤로도 몇 번이고 내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내관의 배웅에 따라 궁을 떠나면서도, 그는 나와의 만남이 못내 아쉬웠던 듯 몇 번이고 흘긋흘긋하며 내 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억지로 웃고 있던 나는,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난 다음에야 볼에서 힘을 빼고 평상시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하도 평소답지 않게 웃는 시늉을 하고 있었더니, 볼이 다 시큰거렸다.
그러나 성과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아무튼, 이걸로 첫걸음은 내디딘 셈이었다.
"그래서, 어땠소. 엿들을 만 하셨소?"
나는 일부러 크게 소리 질렀다. 딱히 미행의 기척이라거나 그런 걸 눈치채는 재주는 없었어도, 최소한 지금 내가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려고 한다고 한들 진짜로 혼자만의 시간이 될 리가 없다는 사실 정도는 자각하고 있었다. 필시 누군가는 미행이 붙어있을 게 뻔했다.
역시나, 조금 기다리니 나무 뒤에서 젊은 판서가 걸어 나왔다. 안동 김씨의 일원이면서도 흥선군과도 친한 이조판서 김병국이었다.
"…어찌 아셨습니까?"
"본인이 알긴 뭘 알겠소? 그저 누군가 한 사람은 엿듣고 있었겠으니-하고서 한번 큰소리 쳐본 것 뿐이오. 뭐, 순순히 나오시는 걸 보니 일부러 큰소리친 보람은 있었구려."
내가 뻔뻔스럽게 대꾸하니, 김병국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가 그러건 말건, 그가 누구의 명령으로 나를 따라왔을지를 고민했다. 이하응이었을까? 아니면 김좌근이었을까?
대답은 둘 다 아니었다. 그들이 이런 일에 사람을 붙인다면 궁인이나 좀 더 직책이 낮은 이들을 부렸을 것이다. 이조판서가 직접 행차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급이 맞지를 않는다. 그럼 결국 그가 굳이 숨으면서까지 나와 주교의 이야기를 엿들은 건, 그 스스로 자발적으로 한 행동이라는 소리 밖에는 되지 않았다.
어쩌면 우연일 테고 말이다.
"그래서, 이제 어찌할 거요?"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소신으로서는 도통 모르겠습니다."
"뭘 그렇게 돌려 말하시오? 그야 뻔하지 않소. 과인을 멈춰 세우려 들 거요, 아니면 과인을 도울 거요? 그것만 답하시오."
진심이었다. 그가 안동 김씨이건 말건 그건 내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방해가 되면 쳐내고, 내 뜻에 거스르면 쳐낸다. 그것이 내 신조였고 내 행동방침이었다. 반대로 그가 나와 뜻을 함께하려 한다면, 얼마든지 끌어 안아줄 생각도 있었다.
김병국은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모양새였다. 저래서야 어떤 대답이 나오건 믿기 어려웠다.
"…만일 소신이 전하를 마지막까지 보필해드리고 싶다고 말한다면 어떻습니까?"
"거짓말이구려. 들키고 싶지 않다면 좀 더 생각하는 시간을 줄이고 즉각 즉각 대답하는 버릇을 길러보도록 하시오."
"흠, 과연 전하이십니다. 탁월한 통찰력이시군요."
김병국은 웃었다. 어딘가 시원섭섭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최근 들어서는 나는 한 번도 지어본 적 없는 표정이기도 했다. 나는 그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처소에 돌아가건, 인정전에 돌아가건 둘 중 하나는 할 작정이었다.
"믿고 쓸만한 사람을 모으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만, 틀렸습니까?"
"적어도 그대는 아닌 것 같구려. 과인은 앞에서 감정을 속이려 드는 능구렁이들은 딱 질색이오."
"흠, 그렇습니까. 하옥대감을 놀라게 하실 정도의 분이라면 저도 신명을 바쳐볼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대관절 그대가 하고 싶은 말이 뭐요?"
나는 반쯤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연기가 아니라, 실제로 슬슬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차였다. 나는 이런 부류의 인종이 가장 싫었다. 직설적으로 바로바로 속내를 밝히지 않고, 계속해서 제 편할 대로 말을 돌리는 인종.
꼭 이런 부류의 인종들이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내 흉을 보다가 결국에는 그동안의 일은 유감이었다며 내 뒤통수를 쳤다. 나는 또다시 그런 꼴을 당하기는 싫었다.
그러자 김병국은 돌연 표정을 바꾸고서는 사뭇 진지한 표정을 하고서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말했다.
"소신의 미천한 식견으로 보아 하건대 전하께서는 가까운 시일 내에 아라사와도 통상하시려는 듯 보였습니다. 바라건대, 소신에게 아라사와의 협상을 일임해주소서."
아라사. 러시아를 부르는 말이었다.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